이 여자들이 딱히 아름답다고 할 수는없었지만, 이 진지에 다른 소대의 남자 병사들이 접근하는 것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 오른쪽으로 5백 미터 거리에는 통일사회당 진지가 있었다. 알쿠비에레로 향하는 도로가 휘어지는 지점이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도로의 주인이 바뀌었다. 밤이면 우리의 보급 물자를 싣고 알쿠비에레로부터 구불거리며다가오는 화물 트럭의 불빛이 보였다. 사라고사로부터 오는 파시스트 화물 트럭의 불빛도 동시에 보였다. 남서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사라고사도 보였다. 불을 켠 배의 현창들처럼 불빛들이 가는 띠를 이루고 있었다. 정부군은 1936년 8월부터 그 거리에서 사라고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 P55

우리는 스페인 병사 한 명(윌리엄스의 처남 라몬이었다)을 포함하여 서른 명 정도였다. 우리 외에 스페인 기관총 사수도 여남은 명 있었다. 언제나 끼어들기 마련인 짜증 나는 사람 한두명을 제외하면 —— 모두가 알다시피 전쟁에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꾀기 마련이니까 영국인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예외적일 만큼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마 보브 스마일리였을 것이다. 그는 광부들의 유명한 지도자의 손자였는데, 나중에 발렌시아에서 덧없이 참혹하게 죽고 말았다.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영국 병사들과 스페인병사들이 늘 잘 지낸 것을 보면, 스페인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 누구나 영어 표현 두 가지씩은 알고 있었다. 하나는 「오케이, 베이비였고 또 하나는 바르셀로나의 창녀들이 영국인 선원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아마 그말을 이 글에 올린다 해도 식자공이 인쇄해 주지 않을 것이다. - P55

날씨는 대체로 맑았지만 추웠다. 한낮에는 가끔 해가 환하게빛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추웠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부리처럼생긴 야생 크로커스의 녹색 열매가 보이기도 했고, 붓꽃이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분명 봄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게 왔다. 밤은 평소보다 추웠다. 새벽에 경계 근무를 끝내면, 취사실에서 불을 때고 남은 것을 긁어모아 발갛고 뜨거운 깜부기불 앞에 서 있곤 했다. 군화에는 좋지 않았지만 발을 녹일 수 있어좋았다. 때로는 봉우리들 사이로 동트는 것을 보기 위해, 이른시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산을 싫어한다. 좋은 위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산들조차 싫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 뒤편 봉우리들 뒤로 동이 트면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들이 검처럼 어둠을 가르고, 이어빛이 밝아지면서 가없이 펼쳐진 구름 바다가 붉게 물들 때, 그광경은 설사 밤을 꼬박 새고 난 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앞으로 세 시간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우울해질 때라도, 한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짧은전쟁 기간 동안에,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출을 보았다. 바라건대는,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 동안 보아야 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 것이면 좋겠다. - P57

전선에 투입되고 나서 처음 서너 달 동안에는 잠 한숨 못 자고 24시간을 버틴 적이 여남은 번을 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푹 자본 밤도 여남은 번을넘지는 않았다. 일주일에 총 스무 시간 내지 서른 시간을 자면지극히 정상이었다. 이로 인한 결과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머리가 매우 멍해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 되레 어려워지긴했지만 몸은 건강했고 늘 배가 고팠다. 맙소사,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모든 음식이 맛있게 느껴졌다.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모든 사람이 보기도 싫어했던, 그 어딜 가나 빠지지 않던 강낭콩조차도. 얼마 안 되는 물은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노새나 심하게 부려먹는 작은 당나귀에 실어 왔다. 왠지 모르지만아라곤 농부들은 노새한테는 잘해 주었지만 당나귀는 구박을했다. 당나귀가 움직이지 않으려 하면 불알을 걷어차기 일쑤였다. 초 보급은 중단되었다. 성냥도 줄어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연유깡통, 탄약클립, 걸레조각으로 올리브유 램프를 만드는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행여 올리브 기름이라도 생기게 되면, 램프 기름으로 사용했다. 램프의 불꽃은 깜빡거리며 연기를 내뿜었다. 밝기는 촛불의 4분의 1쯤 되는것 같았다. 옆에 있는 소총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 P58

어둠 속에서 총알들이 우리 주위를 날아가며땅ㅡ핑ㅡ땅 하는 소리를 냈다. 포탄 몇 개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 근처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대부분은 터지지도 않았는데, 이 전쟁에서는 보통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후방의 봉우리에서 또 한 정의 기관총이 불을뿜는 순간, 나는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사실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올라온 기관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가 완전히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기관총은 금세 망가졌다. 그형편없는 총알 때문에 늘 그 모양이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 탄약 꽂을대는 찾을 수도 없었다. 그냥 가만히서서 총알을 맞는 것 외에는 달리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스페인기관총 사수들은 숨는 것을 경멸했다. 사실 그들은 일부러 몸을노출했다. 나도 그렇게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찮은 일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총탄 사례를 받았다고 할만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무지하게겁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총알이 빗발칠 때는 늘 똑같은느낌이었던 것 같다. 총알에 맞는 것 자체가 무섭다기보다는,
디에 맞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총알이 도대체 어디에 박힐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몸 전체가어불쾌할 정도로 예민해진다. - P62

처음에 나는 전쟁의 정치적 측면은 무시했다. 그러나 이 무렵이 되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혹시 정당 정치의 소름끼치는 측면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이 부분은 건너뛰기 바란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정치적인 부분은 별도의 장으로 다루려 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전쟁을순전히 군사적인 각도에서만 쓴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전쟁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전쟁이었다. 어쨌든 정부 방어선 뒤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당 내부의 투쟁을 파악하지 못하면 첫해 동안에 이 전쟁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 P66

그러나 정당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포세로 산에서 병사들이 우리 왼쪽 진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쪽은 사회주의자들이야(통일사회당이라는 의미였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 아니야?」나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정당에 속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내 태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왜 다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치적인 짓거리를 그만두고전쟁이나 잘하지 못하는 거야?」물론 이것은 올바른「반파시스트」적 태도였다. 또한 영국 신문들이 주도면밀하게 퍼뜨리는 태도이기도 했다. 그런 태도를 퍼뜨리는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이투쟁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특히 카탈로니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막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또 유지하지도 않았다. 암만 내키지 않아도 모두가 조만간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했다. 아무리 정당과그들의 모순되는 「노선」에 관심이 없다 해도, 자신의 운명이 그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의용병으로서 프랑코와 싸웠다. 그러나 병사들은두 개의 정치적 이론을 놓고 벌어지는 거대한 투쟁의 볼모이기도 했다.  - P67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프랑코의 실질적인 적은 인민전선 정부라기보다는 노동조합들이었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시의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응대했다. 이어 공공 무기고에 가서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투쟁 끝에 얻어냈다. 만일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다소간 독립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프랑코는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일에는 확실한 답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는 있다. 인민전선 정부는 반란을미리 막으려는 노력을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았다. 반란은 오래전부터 예측되어 오던 것이었다. 막상 문제가 터지자 정부는주저하는 유약한 태도를 보였다. 수상이 하루에 두 번 바뀌었을정도이다. 게다가 눈앞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노동자의 무장을 한참 머뭇거리다가 강력한 대중적 요구에못 이겨 마지못해 허용했다. 결국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나누어주게 되었다.  - P69

실제로는 모든 곳의 교회가 약탈당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스페인 교회가 자본주의적인 돈벌이의 일부라는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여섯 달을 있으면서 내가 본 교회들 가운데 파괴되지 않은 것은 딱 두 개였다.
그리고 1937년 7월까지는 교회가 다시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는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 있는 개신교 교회 한두 개만예외였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혁명의 시작에 불과했지 혁명의 완성은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그럴 힘이 있었음에도――카탈로니아에서는 분명히 그랬고, 아마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정부를 전복하거나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프랑코가대문을 망치로 두드리고 중간 계급의 일부 계층들이 그들 편에있는 상황에서는 물론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일반적인 자본주의 공화국으로갈 수도 있는 과도기 상태였다. 대부분의 땅은 농민이 가졌다.
프랑코가 승리하지 않는 한 농민들이 그 땅을 그대로 가지게 될가능성이 높았다. 큰 공장들은 모두 집산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런 상태를 유지할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재도입될지는 어떤 그룹이 통제하느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될 문제였다.  - P73

카탈로니아에서는 한동안, 노동조합들의 대표단이 다수를 이루는 반파시스트 방어 위원회"가 헤네랄리테를 대신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중앙정부는 개편될 때마다 우익 쪽으로 움직여갔다. 처음에는통일노동자당이 헤네랄리테에서 쫓겨났다. 여섯 달 뒤에는 카발례로가 물러나고, 우익 사회주의자 네그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직후 전국노동자연맹이 정부에서 쫓겨났다. 그 다음에는 노동자총연합이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전국노동자연맹이 헤네랄리테에서 쫓겨났다. 전쟁과 혁명 발발 1년 뒤, 결국중앙정부에는 우익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우익으로의 전환은 1936년 10월, 11월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은 정부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권력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공산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멕시코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도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친절을 보여주지 않았다. 멕시코야 물론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없었다. - P74

정부는 러시아정부가 직접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모든 나라의 공산당은 러시아의 정책을 이행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통일노동자당에 반대했고 나중에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카발례로의 사회주의일파에 반대했으며, 혁명적 정책 전반에 대해서 반대했던 주동자가 공산당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련이 개입한 이상 공산당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었다. 우선 공산주의자들의 위신이 크게 올라갔다. 그것은 무기 공급에 대해 러시아에감사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고, 특히 <국제 여단>의 도착 이후 공산당이 전쟁에서 승리할 능력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 P75

그러나 의용군을 노동조합의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면서 좀더 능률적으로 재조직하는 방법도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용군 해체의 주목적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의용군의 민주적 분위기 때문에 혁명적 사상들이 양성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시행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간의 평등 보수 원칙을 쉴새없이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 결과 전체적인 〈부르주아화〉, 즉 혁명 초기 몇 달 간 이루어졌던 평등 정신의 고의적 파괴가 일어났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바람에 몇 달 간격으로 스페인을 다시 찾은사람들은 같은 나라에 온 것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스페인은 잠깐이지만 언뜻 노동자 국가로 보였다. 그러나 노동자국가는 눈앞에서 평범한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바뀌어 갔다. 이제 그곳에는 부자와 빈자라는 일반적인 구분이 존재했다. 1937년가을이 되면 <사회주의자> 네그린이 대중 연설에서 <우리는 사적 소유를 존중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 P77

스페인의다른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형식적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관점과 우익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은 어디에서나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통일사회당은 U.G.T. (Unión General deTrqbqjqdores, 노동자총연합), 즉 사회주의 노동조합들의 정치적기관이다. 스페인 전역에 걸쳐 이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이제 약백오십만에 이른다. 여기에는 많은 계층의 육체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이후 중간 계급으로부터 유입된사람들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혁명> 초기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노동자총연합(U.G.T.)이나 전국노동자연맹(C.N.T.)에 가입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원들은양 조직에 이중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서 전국노동자연맹이 단연 노동 계급을 대표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통일사회당은 일부의 노동자와 일부의 프티부르주아지 상점 주인, 공무원, 부유한 농민로 이루어진정당이었다.  - P81

스페인 사람들 모두가그렇듯이 무정부주의연합의 모든 구성원들도 어느 정도 무정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반드시 순수한 의미에서의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쟁 초기 이후 그들은일반적인 사회주의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상황 때문에 중앙 집권적 행정부에 참여했고, 심지어 모든 원칙을 어기고 정부에 들어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통일노동자당과 마찬가지로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노동자들의 통제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는 통일동자당의 구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통일노동자당보다는 덜 교조적이었다.  - P84

그러나 혁명 정당들이 상황을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초기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는 해묵은 반목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인 통일노동자당은 무정부주의에 회의적이었다.
반면 순수한 무정부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통일노동자당의〈트로츠키주의>가 공산주의자들의 <스탈린주의>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 때문에 두 정당은 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5월에 통일노동자당이 바르셀로나에서 시가전에 뛰어들어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것도 전국노동자연맹을 지지해야 한다는 본능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나중에 통일노동자당이 탄압을 당했을 때, 대담하게도 그들을 옹호하여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들뿐이었다.
따라서 대략적인 세력 배치는 이렇다. 한쪽에서는 전국노동자연맹-무정부주의자연합,통일노동자당, 사회주의자들 일부가 노동자들의 통제를 지지한다. 다른 쪽에서는 우익 사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이 중앙 집권적 정부와 정규군을 지지한다. - P85

당시에 내가 왜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통일노동자당의 관점보다 더 좋아했는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분명한 실질적 정책이 있었다. 겨우 몇 달 앞만을 내다보는 상식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분명 더 나은 정책이었다. 확실히통일노동자당의 일상적인 정책, 선전 등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훨씬 더 많은 대중이 그들을따랐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종결지은 것은 우리와 무정부주의자들이 가만히 서 있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에 발맞추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또한이것이 당시의 일반적 느낌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얻고 또 그 당원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그들이 혁명가들에반대하여 중간 계급에게 호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 P86

어쨌든 이것이 그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트로츠키주의자,파시스트, 반역자, 살인자, 겁쟁이, 간첩 등등이었다. 솔직히 기분 나쁜 일이다. 특히 그런 일을 자행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들것에 실려 전선을 내려오며 모포사이로 눈부신 듯 바깥을 내다보는 하얀 얼굴의 열다섯 살짜리스페인 소년을 보면서, 이 소년이 위장한 파시스트임을 증명하는 팸플릿을 쓰고 있는 런던이나 파리의 말쑥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 P88

기자들이 보여준 모습으로만 본다면, 이 전쟁은 다른 모든전쟁들과 마찬가지로 말잔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기자들은 보통 가장 지독한 욕설은 적을 위해 아껴두기 마련인데, 이번 전쟁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노동자당이 서로에 대해 파시스트들보다 더 심하게 비난하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당간 불화는 짜증 나고 역겹기까지 했지만, 내눈에는 사소한 집안 싸움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뭔가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둘 사이에 정말로 양립할 수 없는 정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의 진전에 강력히 저항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이 혁명을 후퇴시킬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 P90

장군과 사병, 농민과의용군은 여전히 평등한 자격으로 만났다.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받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를〈당신>이나 〈동지〉라고 불렀다. 고용주 계급도 없었고, 하인 계급도없었고, 거지도 없었고, 창녀도 없었고, 변호사도 없었고, 사제도 없었고, 아침도 없었고, 모자에 손을 대는 인사도 없었다. 나는 평등의 공기를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기가 스페인 전역에 퍼져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순진했다. 대체로 우연때문에 나는 내가 스페인 노동 계급의 가장 혁명적인 일파 속에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적인 교육을 많이 받은 동지들이 나에게 순수하게 군사적인 태도로만 전쟁을 바라볼 수 없다거나, 선택은 혁명과 파시즘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냥웃어 넘기곤 했다. 대체적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에는 혁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통일노동자당의 관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은 <전진 아니면 후퇴뿐이다〉로 요약되었다. 후에 통일노동자당이 옳다고, 어쨌든 공산주의자들보다는옳다고 판단한 것은 전적으로 이론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 P91

먼저 <민주주의는 사기다>라고 말한 다음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전술이 아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엄청난 위세를 등에 업고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민주적 스페인>이 아닌 <혁명적 스페인〉의 이름으로 호소했다면 아마 큰 호응을 얻어낼 수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혁명적 정책으로 프랑코의후방을 공격하는 것이 어려운――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일이었다. 1937년 여름, 프랑코는 정부와 비슷한 규모의군대로 정부보다 더 많은 인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식민지의 주민들까지 헤아리면 훨씬 더 많은 숫자였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후방에 적대적인 주민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의 통신 시설을지키고 파업을 진압하는 등의 일을 해야만 전방의 군대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프랑코의 후방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 운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프랑코의 영토 내에 있는 인민, 적어도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이 프랑코를 좋아했다거나 그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가계속 우익 쪽으로 움직여가면서 정부의 우월성은 점점 빛을 잃었다. - P94

프랑코는 악명 높은독재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무어인들은 실제로 인민전선 정부보다 프랑코를 더 좋아했다! 명백한 사실은 모로코에서는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전쟁에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어인들에게 인민전선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기 위한 우선적인 조치는 바로 모로코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프랑스와 영국을 회유하려는 헛된 희망 때문에 전쟁에서 가장좋은 전략적 기회를 날려보내고 말았다.  - P95

공산주의 정책의 전체적 경향은 이 전쟁을 평범하고 비혁명적인 전쟁으로 축소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전쟁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극도로 불리했다. 그런 종류의 전쟁은 기계적 수단, 즉 궁극적으로무제한의 무기 공급에 의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주된 무기 지원국인 소련은 이탈리아나 독일과비교해 볼 때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내건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라는 구호가 언뜻 보기보다 덜 환상적이었는지도모른다.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반혁명 정책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내 나름의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내 판단이 옳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이시 내 판단이 틀리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민전선 정부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바란다.
그러나 물론 어떻게 될지 아직 말할 수는 없다. 정부가 다시 좌경화할 수도 있다.  - P95

그러나 1937년 2월에 나는 상황을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했다. 아라곤 전선에서의 교착 상태가 지겨웠다. 나는 주로 내가싸울 만큼 싸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모병포스터를 자주 생각했다. 그 포스터는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질책하듯이 묻고 있었다.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식량만 축냈습니다.> 나는 의용군에 입대하면서 파시스트 한 명은 죽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우리 각자가 하나씩 죽이면 파시스트들은 곧 소멸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나는 마드리드로 가고 싶었다. 군대 내의 모든 사람들이정치적 견해에 관계없이 마드리드로 가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려면 국제군으로 들어가야 했다. 통일노동자당은 이제 마드리드 주둔 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들도 이제그곳에 전처럼 많은 부대를 주둔시키지 않았다. - P96

하루하루, 특별히 밤마다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경계근무, 정찰 근무, 땅파기. 그리고 진창, 비, 잉잉거리는 바람, 가끔 내리는 눈. 밤에도 따뜻한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진 것은 4월에 접어들고도 한참을 지나서였다. 이곳 고지대의 3월은영국의 3월과 아주 비슷했다.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바람은 끈질겼다. 겨울 보리가 두 뼘 가량 올라왔고, 벚나무의 진홍색 봉오리들이 영글었다(이곳의 방어선은 버려진 과수원과 밭들을 관통했다). 도랑을 뒤져보면 제비꽃이나 블루벨 가운데서도 볼품없는 쪽에 속하는 야생 히야신스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방어선 바로 뒤로는 물거품이 보글거리는 상쾌한 녹색의 내가 흘렀다. 전선에 온 뒤로 처음 보는 투명한 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이를 악물고 물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여섯 주 만의 첫 목욕이었다. 대충 몸만 담그고 나온 꼴이었다.  - P98

이 무렵 우리 몸에는 이가 들끓었다. 여전히 추운 날씨였지만 이가 슬 만큼은 따뜻했다. 나는 몸에 기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벌레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만큼 지독한 벌레는 없었다. 가령 모기 같은 다른 곤충들도 사람을 괴롭히긴 하지만적어도 몸에 상주하진 않는다. 이는 작은 가재를 연상시키는데, 주로 바지 안에 산다. 옷가지를 모두 태우는 것 외에는 이를 없앨 방법이 없다. 이는 바지의 솔기에 반짝거리는 하얀 알을 낳는다. 마치 작은 쌀알갱이 같다. 이 알들이 부화하여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기 식구들을 불려나간다. 평화주의자들은이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확대하여 팸플릿에 실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영광이다! 전쟁에서는 모든 병사의 몸에 이가 들끓는다날씨만 어느 정도 따뜻하면.
베르덩, 워털루, 플로든, 센락, 테르모필레 등지에서 싸운 모든 병사들의 사타구니에는 이들이 기어다녔다. 우리는 알을 태우고 가능한 한 자주 목욕을 함으로써 그 지겨운 놈들의 수를어느 정도는 줄일 수 있었다. 이만 아니었다면 나는 얼음처럼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03

날씨가 푹해지자 농부들은봄갈이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스페인의 토지 개혁은 그 내용이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의 땅이 집산화된것인지, 아니면 농민이 자기들끼리 땅을 나누어 가진 것인지도분명히 알 수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집산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주들은 사라졌고, 농민들 밭을 경작했다. 농민들은 만족하는 것 같았다. 농민이 우리에게 친절했기때문에 나는 늘 놀라곤 하였다. 일부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전쟁 때문에 모든 물자가부족했고, 모든 사람이 우울하고 따분한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농민들은 아무리 좋은 시절이라도 군부대가 자기들 마을에 주둔하는 것을 싫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변함없이 친절하였다. 우리가 다른 무리한 짓을 하더라도, 과거의지주가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란이란 묘한 것이다. 우에스카까지의거리는 8킬로미터도 안 되었다. 그곳의 시장은 이 농민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모두들 그곳에 친척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평생 닭도 팔고 채소도 팔았다. 그런데 이제 여덟 달 동안이나 기관총과 뚫을 수 없는 철조망의 장벽이 그 사이에 가로놓여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따금씩 장벽을 잊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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