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허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가 있다.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을 수상했다.


허연을 읽을 때 우리는 마치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머나먼이국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말을 나누는 연인을 만나듯,
경계에서 새어 나오는 삶의 내밀함을 캐내게 된다. 달력의날짜와는 다른 시간을 지금에 새기고 싶어지고, 서 있는곳과는 다른 공기의 밀도를 입고 싶어진다. 그것은 시인이종래의 공화국의 소속이 아니기 때문. 오지 않은 자멸에대해 먼저 생각하고, 남겨질 잔해에 대해 앞서 생각하는,
자신만의 공화국의 시원(始原)이기 때문이다.


구름은 신비스러운 사상이다
구름의 이름을 지은 사람
자신보다 구름이 주목받기를 원한 사람
구름을 가져다 이야기를 만든 그 사람 생각을 해봤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무한할 수 있었고
학습되지 않았으므로 소멸하지 않았던 말
그 말을 꺼내고 싶었다

시인의 말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2016년 겨울
허연

아나키스트 트럭 1


슬픈 사람들이 트럭을 탄다. 트럭은 정체에 걸릴때마다 힘겹게 멈췄다. 정체가 풀리면 트럭은 부식된 하체 어디선가 슬픔을 흘리며 느리게 움직였다.


트럭에 올라탄 사람들이 두 손으로 신을 그려보지만 이내 슬픔이 신을 덮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겐 이상하게 어깨가 없다.


찌그러지고 때 묻은 트럭은 세월을 등에 업고 생의 마지막 질주를 했다. 낙오한 사람들은 어느새 세월의 등에 올라타 있었고.


도시는 어두웠고 트럭은 주저앉았다.


낙오자들은 뿔뿔이 골판지 같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주저앉은 트럭은 도시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밤이 왔다. 이미 어두웠지만 트럭은 어두워지지않았다. 안녕, 트럭.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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