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은 슬픔을 희망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를 막무가내로 진창에 떠밀었을 적에도, 그는 누굴탓하기보다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강함으로 몰지각한 ‘맹금류‘와 거침없이 맞서 싸워냈다. 여전히 그는 왜곡에 대항해역사와 민중 앞에 놓인 ‘덫‘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있다.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화인(火印)」)라고말하는 도종환 시인은 시와 몸을 따로 두는 사람이 아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몰염치에 맞서 떳떳하고 용기 있는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우리에게 이렇듯 서정의 깊이와격과 감동을 더한 시집을 들고 왔으니, 시집 갈피에서 전나무와 삼나무 냄새가 난다. 감자 잎과 도요새가 몸을 펴는소리 들린다. 사과 익어가는 내가 손에 묻고, 오르간 음이귀에 닿아 젖는다. 마른 가슴에 들어온 눈물이 격렬한 희망‘ 되어 온몸으로 퍼진다. ˝어디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받을 수 있으랴˝ (「해장국」). 시인이 말아 내미는 한그릇 국밥은 뜨겁고도 든든하다. 사무치는 위로가 있는 매혹적인시집이다.


박성우 시인




내소사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능가산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몇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희망의 이유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하늘 꼭대기에서 거기까지
햇살의 화살 한개를 쏘고 있는
태양의 따스한 손길에 있다
국경을 넘어와 땅속 깊이 감춰진 벽을 뚫어버리는
가공할 폭탄의 힘에 한 시대의 가능성을 걸지 말라
밤의 거리에서 평화를 구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촛불과
그 불을 받쳐든 어린 두 손에 희망이 있다
이웃나라를 손쉽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만년을 녹지 않는 히말라야 숫눈처럼
빛나는 순백의 영혼

오체투지로 낮아지고 가난해져서
다시 일어서는 정신에
영원한 미래의 날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잔인하게 쓰러뜨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승리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식탁과 살찐 육신은
우리가 죽이고 짓밟은 것들의 묘지를 이루고 있나니
오래오래 주류로 살아온 이들이 잘 차려놓은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고 손가락질하는 소수가
소박하고 정결하게 차린 두레반에 미래가 있다
어미 잃은 어린 짐승을 감싸안으며 눈물겨워하는
모성과 연민과 자비 아니면 희망 아니다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도 그대는 일주문 밖이다
속도와 경쟁과 승리의 갈망에 휘둘리지 말고그만 내려서라
댓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
낙화 이후의 긴긴 날을 걸어가는
꽃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면

그대가 달려가는 속도의 끝은 반드시 벼랑이다
증오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경전 같은 말들이 있음을 가르치되
시인의 음성으로 하라
나약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은 목소리로
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라
거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 오래도록 희망이다 

나머지 날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고
겨울에는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아침기도가 끝나면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고못다 읽은 책을 읽으면 좋겠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음의 물결에서 벗어나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도 말이 통하면 좋겠네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
낮에는 씨감자를 심거나 남새밭을 일구고 
남은 시간에 코스모스 모종과 구근을 심겠네


고요에서 한계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단풍 드는 잎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나무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울타리 밑에 구절초 피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은 길이면 좋겠네
추녀 밑에서 울리는 먼 풍경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짐을 조금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밤에는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으면 좋겠네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묻지 않으며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나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벽난로의 연기가 굴뚝으로 사라지는 밤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 뜬 별을 오래 바라보겠네

어느 저녁


끓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일어서기 전에 듣고 싶어하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오늘 처음 붓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그이의 발소리를 붙잡지도 못하였습니다
밤에도 검은등뻐꾸기는 울고
북두칠성 일곱 별은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몸을 틀며 별자리를 조금씩 옮기고
아까시꽃이 향기의 긴 꼬리를 그으며
별자리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불빛 하나 고개를 넘어가다 잠깐 눈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지고 난 뒤 사방은 더 어두워졌고
호랑지빠귀가 한숨을 길게 쉬는 듯한 울음을 내뱉는 걸
숲은 다 듣고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들국화


들국화 꽃잎에 가을 햇볕이 앉아 있다
얇고 여린 피부에서 윤이 난다
내게 들국화는 들국화 이상이다
이 세상 모든 꽃이 저마다 빛나는 얼굴을 지녔고
하나의 성기와 몇개의 꽃술을 갖고 있지만
나는 들국화만 그걸 갖고 있는 것 같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꽃이 아니에요라고
들국화는 말하지만 나는
들국화에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다
꽃이파리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꽃잎의 표정을 과장하여 해석하는 걸 보면서느티나무는 내가 들국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망을 들국화라 부르는 거라고 말한다그러나 들국화를 보면 마음이 끌리고
연한 빛깔 위에 내린 햇살 곁에 나란히 있고 싶고
작고 투명한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다
내 팔에 기댄 채 들국화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의 몸에서 번져오는 맑은 기운이 내 몸의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구석구석 따스하게 번져나가고

내 영혼의 물줄기가 그에게 흘러가
그의 뿌리를 적실 때도 있다
오늘도 들국화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고들국화 곁에서도 문득 들국화가 궁금해진다특별할 것 없는 들국화의 소박한 나날과
꽃잎의 흔들리는 머리칼과
짙은 녹색의 이파리와 이파리 밑에 감춰진 그늘과
가을까지 오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짐승들과상처와 빗줄기까지 사랑한다는 걸
들국화가 믿어주길 바란다
사랑이 왜 편애일 수밖에 없는지 알기에
가을 햇볕도 들국화 꽃잎 위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리라

들국화 2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정경
할슈타트에서


아름다운 정경은 사람을 선하게 한다
풍경의 전신을 대하는 순간
짧은 탄성이 저절로 새어나오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니다
탄성이 물무늬처럼 미소로 바뀌어 번져나가고
마음은 천천히 선한 빛깔로 물들게 된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예쁜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도 그렇다
사막에 별들이 하얗게 떴을 때도 그러하다
설산 기슭 순백의 눈을 볼 때도 그러하다
마음을 선하게 하는 초저녁 성당의
성가야말로 좋은 노래다
천천히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오래된 영화가 좋은 영화다
할슈타트 호수에 저녁빛이 내리고 있다
그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그러하다

사과꽃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피었습니다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피었습니다
하얀사과꽃 속에 숨은 분홍은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살면서 가졌던 꿈은
그리 큰 게 아니었지요
사과꽃같이 피어만 있어도 좋은
꿈이었지요
그 꿈을 못 이루고 갈 것만 같은
늦은 봄
간절하였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지고 있습니다

저녁노을


눈이 그쳤는데 그는 이제 아프지 않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내 아팠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동안
내 안에 저녁노을처럼 번지는 통증을 그는 알까 
그리움 때문에 아프다는 걸
그리움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그리움은 혼자 남아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눈은 내리다 그쳤는데
눈발처럼 쏟아지던 그리움은
허공을 헤매다 내 곁에 내린다 아프다

업연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멈추자 멈추어야 한다 하면서
오늘도 다리를 건넜다
잘 드는 칼로 끊어버린 날도 많았다
달맞이꽃도 밤별도 알고 있으리라
바보같이 천치같이를 되풀이하며
회초리로 나를 때리며 새운 밤도 많았다
오늘도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오늘도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면서

노란 잎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난중일기


새벽에 안개비 뿌리다가 늦게 개었다
잘 죽을 일을 생각하자
치유불능인 걸 알면서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하루하루는 치욕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박해받는 날들이 너무 길다
오늘도 열순의 활을 쏘고
찬술을 마시고
저녁엔 여진이와 잤다고
붓 들어 거짓 없이 쓰자
살아 있는 동안은 전선을 떠날 수 없는데
우린 늘 중과부적
이길 수 있다고 과신하지 말고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물살치는 두려움의 복판으로 배를 저어나가자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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