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짐을 챙기던 중 벽장 안에서 세 개의 물건을 발견했다. 이브라힘의 이야기가 담긴 녹음기와 녹음의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한 노트, 티베트 사자의 서 영역본이었다.
그것들을 벽장 안에 두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브라힘은 청록색 눈을 가진 아랍인 청년이다. 그를 만난 기간은 고작 보름에 불과했지만 그는 나에게 한없이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듣기만 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녹음했다. 녹음은이브라힘 몰래 이루어졌다. 이야기하는 데 방해요소로 작용할지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이브라힘의 이야기는 전생의 기억에 관한 것으로, 대단히충격적인 내용이었다.  - P7

예루살렘의 성스러움은 본래 유대인의 것이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시였고, 시온이었으며, 하느님의 동산이었다.
이 거룩한 도시에서 파괴와 멸망과 재건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파괴와 멸망의 폐허 속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유대인의 상상은 황홀하게 피어올랐다. 그들은 세계의 종말과 구원이 예루살렘 언덕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벽 곁에 묻히는 것은 신의 자리 밑에 잠드는 것이었다. - P17

예루살렘은 무슬림에게도 성스러운 도시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날개가 달린 말을 타고 내려온 곳이예루살렘 모리야 산의 석회암 언덕이었다. 그 커다란 회백색 바위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이다. 무함마드는 회백색 바위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천국으로 올라가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무슬림에게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는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유일신이 지상으로내려보낸 예언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조상이자, 최초의무슬림이라고 무함마드가 주장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 P17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서 발아한 쌍생아였다. 하지만 유대교는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부정당한 그리스도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독자적인 종교로 발전했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다. 제국의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주님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에게 참혹한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를 무함마드보다 낮은 예언자로 간주하는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남이 네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은 너도 남에게 하지 마라.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누가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기도하라..... 예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리스도교의 분노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뺨을 때리지 않고는 제국이 될 수 없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는, 남을 핍박하지 않고는 제국이 될 수 없다. 인류의 모순은 여기에 있다. 이 모순 속에서 예루살렘은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 P18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평안했다. 가족의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보다. 고통에 울부짖는 부상자들보다. 그들의 고통을 피투성이 손과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느끼는의사들보다 죽은 그가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원은 부상자들의 비명으로 아우성인데, 좁고 어두운 복도는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묘실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등을 벽에 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동안 누적된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내가 시체가 되어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고통이 가슴을 날카롭게 그었다. 전쟁을쫓아다닌 지가 십 년이 넘었는데도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의감각은 늘 생경했다. - P24

2003년 4월 9일 미 지상군이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사담 후세인의 이십사 년 독재체제가 마침내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후세인의 동상들을 무너뜨리고, 후세인의 궁전과 은행, 정부 건물을 습격했다. 습격은 약탈로 이어졌다.
공공건물과 일반 주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물관과 도서관이불타거나 파괴되었다.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들과 문헌들이 훼손되고 약탈당했다.
미군은 그들의 약탈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약탈의 현장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미군들을 보고 있노라면 약탈행위를 바그다드 점령에 대한 환영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생각마저 들었다. - P34

나는 병원 창틀에 놓인 모래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이상스러운한 인간을 생각했다. 죽지 않는 인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형상은 영원을 견디지 못한다. 신이 영원한 것은 형상이 없기때문이다. 인간이 영원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육체라는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형상은 우주의 한 파편이다. 우주의 한 파편일 뿐인 인간에게 불멸은 헛된 꿈이다. 그런데 이브라힘은 말했다. 자신은 죽지 않는 존재라고. 죽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죽음에 에워싸인 전쟁의 도시에서. - P35

시아파 민병대가 알 킨디 병원을 접수한 것은 병원이 막 이사를시작할 때였다. 이라크 인구 2,400만 명 가운데 60퍼센트 이상을차지하는 다수 세력임에도 후세인 체제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시아파는,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공공건물에 민병대를 파견하고 부서장을 임명하는 등 새로운 정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시아파에게 병원은 중요한 공공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장검과 라이플총으로 무장하고 병동을 돌아다니는 민병대의 모습은 어느새낯익은 풍경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후세인도 싫지만 미군도 싫다고 했다.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형태가 바뀌었을 뿐.
"지난번 전쟁 때도 미국은 엄청난 폭탄을 퍼부었소."
민병대 대장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랬다. 1991년 1월 17일에 시작되어 2월 28일 작전이 종료된 그 전쟁에서 미국은 이라크에 88,5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폭탄의 일곱 배를 웃도는 양으로, 전폭기의 출격 횟수는 11만 회였다. 그중에서 정밀탄을 사용한 것은 7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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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감동은 ‘피해‘ 개념의 전복성에 있다. 이 영화를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거리가 생긴다. 그것이 마츠코의 선물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크게 손해 보지만 않는다면,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느 정도의 이타성은 이기성이기도 하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선의(이 영화에서는 ‘사랑‘)가 사기와 갈취, 저질 구설 따위로 돌아온다면? 이런 배신이 반복된다면? 이때부터 우리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우울과 분노에 빠진다. 기분장애 상태에 이르기 쉽다. 사람들마다 대처 방식이 다를 것이다. 우울과 은둔, 심각한 경우 자살. 다시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마음을 닫는다. 어설픈 복수로 더 망가지기도 한다. 비일비재한 일이다. - P131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마츠코는 세상에 당한 것이 아니다. 세상과 싸웠다. 자기 방식이 옳음을 믿었다. 진정한 강인함이다. 완벽히 구조화된 가해와 피해의 양극 시대. 가해자/집단의 피해 의식이 판치는 시대에 정작 피해자인 그녀는 의연하다. 피해 의식만 가득한 사람은 마츠코처럼 타인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쁜 세상‘이라는 구조. 이 구조와 개인의 관계에서 개인의 대응은 다양하다. 저항할 수도 있고, 틈새를 찾아 협상할 수도 있다. 사실 제일 ‘편한 방법은 은둔인데, 은둔도 어느정도 자원이 있어야 가능하다. - P132

어려운 일이지만 조금 힘을 내서 우리 자신을 지켜내는바람직한 방식을 찾았으면 한다. 결국 자신의 역량을 믿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는 그 다음이다. 피해도 억울한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쁜 사람은 타인의 자존감, 의욕, 믿음을 도둑질한다. 마츠코가 내 앞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 그녀의 보호를 받는 관객들이 행복한 이유다. - P133

입시제도, 경쟁은 한국 교육의 대표적 적폐다. 전 국민을망가뜨리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높은 성적을 모든 학생들에게강요하고 거짓 실력으로 위계를 만들고, 이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성취하려는 학생에게 공부는 필요한 과정이다. 어느 분야든 ‘성공‘하려면,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 P137

엄청나게 욕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플레처 선생의 교육법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나주인공 같은 유형은 그런 선생을 원한다. 제발 나를 훈련시켜주세요, 뭐든 따르겠나이다, 나를 ‘때려주세요‘, 예술가가 되게도와주세요, 선생님의 방법을 알려주시면 뭐든 따르겠습니다,
무엇이든 감수하겠습니다, 버릴 수 있습니다, 분재(盆栽)처럼제 몸을 비트는 고통을 얼마든지 원합니다. 출세에 미쳤다고?
천만에 이런 종류의 인간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지, 돈이나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뿐이거나 무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돈이나명예 수준의 동력으로는 이 과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 P138

문제는 그런 ‘위플래시(채찍질)‘들의 인간성이다. 그들의인간성이 평균 정도만 되어도 괜찮을 텐데, 아주 바닥이면 사고가 난다. 예술이고 나발이고 모두가 불행해진다. 훌륭한 학생이 그들로 인해 자살하고 많은 학생들이 미래를 포기한다.
이 영화의 선생은 미친 건지 비열한 건지 꼬인 건지, 하여간최악이다. 그는 인간이라는 징그러운 생물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 방식으로 학생의 등에 칼을 꽂는 유형이다. - P139

인생은 아름답다. 주인공은 선생이 그를짓밟은 지 5분 만에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자기 길을 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년, 20년, 평생 걸리는 그 시간을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상처 극복에 걸리는 시간에 대해 완전히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타인을 부러워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몹시 부러웠다. 그와 달리 나는 오랜 시간 상처받고 주저앉았다.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추구하면 된다. 엄마나 선생의 인정은 나의 행복보다 중요하지 않다. <위플래쉬> 역시 ‘나의 영화‘. 2만 9천 원을 주고 포스터를 사서 나의 노동 공간에 걸어두었다(책상이 있는 마루), 포스터 면적에 비해 작은 크기의 드럼 주자가 자신에게 몰두해 있다. - P141

집착과 질투가 없는 사랑은 ‘수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절실하지 않은 사랑일뿐이다. 사랑은 나의 감정이 타인의 가슴으로 옮겨 가는 것인데, 어찌 마음을 비울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비운다면 아마 마음이 없어지는 거겠지. 혁명적 동지애,
모성이나 부성, 조국애…… 같은 사랑도 사실은 집착과 질투덩어리다. 스물셋의 기형도처럼 (그도 늙었다면 달랐을 것이다.)타인의 사랑을 구질구질한 집착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자신감은, 성숙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취약한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 P144

질투만큼 자발적인 고통도 없다. 질투가 어리석다는 것을몰라서 질투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질투에 대한 잠언이나 충고처럼 비현실적인 것도 없다. 나 역시 <질투는 나의 힘〉의 원상(박해일 분)과 비슷한 상태로 오랫동안 고통을 찾아다녔다. 나중에는 지쳐서 질투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평온한 마음조차,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뒤로는 부대끼고 바닥에 패대기쳐진 것 같은 비참한 감정이나를 찾아오면, ‘그래, 너 왔구나‘ 하며 인사하고 받아들이게되었다. 질투에 시달리는 나를 포기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내가 더는 나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무릎 꿇고 빌수밖에 없다. 어차피 나는 ‘연적‘ 만큼 매력적일 수 없었다. 매력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므로, 내 매력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 P145

문제는 언어 없음이 아니라 세상은 언제나 잘 굴러가고있다고 스스로 안심시키는 심리, ‘고상한 삶을 추구하는 데있다. 쿠르드 출신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거북이도 난다>는전쟁의 고통에 대해 말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 ‘쿨‘하고픈 관객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상처‘를준다. 이라크, 터키,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나라 없이 살아가는 쿠르드인은 약 4천만 명, 4천만 명이다!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이다. 이들은 이라크에서 학살당하고, 미국에 배반당하고, 터키에서 억압당하는 신세다. 1988년 후세인은 생화학 무기로 쿠르드인 5천 명을 몰살했다. 당시 인종 청소로 희생된쿠르드인은 18만 명이 넘었으며, 80만명의 난민이 생겼다. - P158

‘침묵당함‘은 또 다른 폭력이다. 상처를 숨기는 대신, 거북이도 난다>에서처럼 고통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 자기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간헐적‘ 폭력이라면, 전쟁과 평화의 분리는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폭력이다. 영화는 피 흘리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절박하게 일상적 폭력을 평화라고 믿는, 침묵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영화다. 참혹함과 아름다움은 양립할 수 있다. - P160

예술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예술가는 이 강의 존재를 일깨운다. 이러한사고에서 ‘순수‘니 ‘참여‘니 하는 말은 아예 논외다. 이렇게 걸작은 기존 담론의 전선(戰線)을 이동시킨다.
주인공은 세상을 아는 듯 ‘비관적이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배를." 나는 이 대사처럼 상상력을 정확하게 정의한 경우를알지 못한다. 상상력은 상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상상력은 다른 생각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위치를 바꿀 때 새롭게 생성되는 다른 정치적 입장, 공간을 의미한다.  - P165

스스로 강이 될 것인가, 배를 탈 것인가………. 어떻게 살것인가. 누가 자기 몸을 강으로 삼겠는가. 스스로 강이 되기를선택한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강이 된 경우와 배를 탄 경우를 구별이나 할 수 있겠는가.
소설을 읽고 나는 이미 탈진했기 때문에, 공연은 예방 주사를 맞고 본 셈이다. 처음 봤을 때는 원작의 발상에 놀랐고(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두 번째 봤을 때는 20년이지난 박지일의 모습이 내내 남았다. 당연히 첫 번째 공연과 같은 몸이 아니었다. 이 작품의 등장 인물은 세 명인데, 작품의주인공인 연극배우 역에 무게가 쏠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극의주제와 대사의 내용도 만만치 않다. 모든 대사에 몸의 기운을다 동원해야 한다. - P166

당대의 위대한 텍스트 <송환>을 비전향 장기수와 김동원 감독에 대한 존경과 감동, 분노와 질투의 이중 감정 없이 평면적으로 읽을 수 있는 페미니스트는 드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 여성‘의 위치에서만 가능하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남성의 역사에서, 역사의국외자이자, 지배 남성과 피지배 남성 모두에게 억압당한 피해자이며, 동시에 그들과 같은 한국인이고 싶은 여성의 관점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다른 방식으로 읽으려는 시도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갈등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 P169

이 시대에 개인들은 누구나 외롭다. 국가와 사회와 가정모두 개인을 보호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에서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기대하지만, 그런 남성은 극히 드물다.
지금 남한 남성들 중 어느 누가 그토록 열심히 여성을 보호하는가, 어느 누가 그토록 애국자인가, 어느 누가 그토록 가족에게 헌신하는가…………. 남한 남성은 신자유주의 채찍질에 시달리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여성들과 동등한‘ 취업 경쟁)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이를
‘여혐‘으로 표출하고 있다. 게다가 젠더 의식, 인권 의식, 평화주의 개념은 ‘꽝‘이다. - P185

 우리 스스로탈식민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우리의 미래를 저당 잡힐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시선과 평가의 강박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다. 언어는 인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의 총체적 체계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사회는 외부의 이익에 휘둘리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민중의 것이 된다. - P192

식민지 시절 남성이 지금 남성보다 낫다. 어쩌면 나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근대의 시작이었고, 지금은 근대가 유동하는 알 수 없는 시대다. 근대에는 남자가 주인공이었다면, 지금은 부자가 주인공이다. 비행사나 야구는 근대의알레고리다. 당시 우리의 고통은 그것을 일본으로부터 배워야한다는 데 있었다. 그것을 습득하는 순간 ‘친일‘의 자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대 = 친일파‘. - P193

<YMCA야구단>과 <청연>. 김주혁과 장진영이 생각나는시간이다. 배우의 죽음은 특별한 슬픔이다. <소름>은 자신이없고 장진영의 <반칙왕>과 김주혁의 <프라하의 연인>을 다시보고 싶다. - P194

일본에는 세 개의 한국이 있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재일교포(자이니치)의 ‘조선‘. 이 세 집단은 근대 일본의 성립 조건 중하나였다. 다시 말해, 일본은 이 세 집단을 착취하고 분열시키면서 나라를 세웠다.
최근에는 재일교포들이 이름을 바꾸고 일본인과의 결혼도 흔해서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일본의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이들은 최하층민으로서 일본의 타자성을 대표한다. - P195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대로 "여성이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모두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출산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사실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이미50년 전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만들어진다."라고 명료하게 설명한 바 있다. - P215

기록 경기라고 하면 대개 스피드를 겨루는 육상, 수영, 스피드스케이팅을 떠올린다. 이 경기들은 인간의 눈으로는 구별할수 없는 세계인 0.001초 단위를 다룬다. 이 경기들에서는 기록 갱신(更新)만이 최고의 가치다. 나는 스포츠를 잘 모르지만, 내 생각에 가장 기록적인-기록 경기다운-종목은 야구다. 또한 야구는 가장 인간적인 혹은 ‘문명에 가까운‘ 운동이다. 다른 종목도 그렇겠지만, 야구만큼 복잡하고 미묘하며 섬세한 협업은 없을 것이다. - P227

인간의 몸은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선수들의 몸은훈련되어 있지만 동시에 유동적이다. 몸은 우주의 기운과 습관(기록)과 운명의 복잡한 교차로다. 이 영화는 확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통계는 그 결과이고예측의 근거일 뿐 결정적이지 않다.
아, 이 영화에서 배울 점이 또 하나 있다. 선수를 해고하는 방식이다. 상대를 존중하면서, 정확한 자료를 건네주고 건조하게 공식적으로 간단히 말한다. 모욕하거나 언론 플레이를하지 않는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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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혼자인 상태는 다르다. 혼자라고 해서 꼭 외로운 것은 아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는 외롭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스스로 충만한 시간은 외롭지 않다. 인간이 외로울 때는 상대방(사회)과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외부를 지향하는 경우이다. 외로움을 잘못 해결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은 우리가 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운지를 설명해주었다.
외로움은 나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즉 자기 자신과 맺는관계에 관한 질문이다.  - P9

그래서 객석에서 나 혼자 본 영화가 생각보다 꽤 있다. 와타나베 켄이 주연한 〈내일의 기억〉,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타임 투 리브〉, 이 책에 꼭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한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카티아 룬드감독의 걸작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이 그런 경우다. 이영화는 마지막 상영일, 마지막 회차에 보았다. 늦을까 봐 광화문 ‘씨네큐브‘까지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홀로 극장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가 방점이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한다‘. 그렇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천만 영화는 사라질 것이다(물론 배급 시스템이 문제지만). 내가 원하는 사회는 각자의 해석이 가시화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이어지는 사회다. - P13

이때부터 영화는 정말로 책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영화 ‘보기‘가 아니라 영화 ‘읽기‘라고 표현하는데, 이미지나 음악에 무지한 내게 영화는 원래부터 읽기였다.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은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로‘ 생산될 수 없는지식을 제공했다. 내 경험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 나는 고급도서관을 통째로 가진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이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혼자있고 싶다.  - P19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은 독후감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더 어렵고 더 즐겁다. 이 책을 쓰는 시간이 행복해서
‘쓰기를 아껴 가며‘, 하루에 20장 ~ 30장씩만 썼다. 이 책은 ‘영화 오타쿠‘의 타인에게 말 걸기이다. 나의 감상문이므로 나를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드러냈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는 행위는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후회도 없다. 한 가지 확실하게 배운 점은, (모르지 않았지만) 내가 글을 못 쓴다는 사실이다. - P20

보는 영화마다 내 인생의 영화가 된다. 모든 영화에 내 사연이 있다. 나는 특히 동일시의 여왕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나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생을 산다. 전미선의 열연이 인상적이었던 〈연애〉(2005년)는 여성으로서 ‘끔찍한‘ 영화였지만, 그녀는 바로 나였다. 외로운 여성을 이용하는 남자들…………. 조용한 남자, <콰이어트 맨>(2007년)은 직장에서 총기 난사를 꿈꾸며 늘 혼자 도시락을 먹는 외톨이 밥 맥코넬(크리스찬 슬레이터분)의 이야기인데, 이 역시 평소 나의 모습이다.
하여간, 나는 영화를 보는 ‘지‘가 없다. 나는 장률이나미하엘 하네케, 고레에다 히로카즈, 마를레인 고리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두치펑의 영화를 거의다 본, 그리고 여러 번본, 이들의 광팬이다. 이들의 영화 세계는 매우 다르다. 한마디로, 나의 영화 취향과 이데올로기는 ‘문란‘하기 짝이 없다. - P21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아니라 가족 담론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부(富)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 과장이아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도 가족과 연결되어있다. ("남자 며느리가 웬 말이냐!") - P27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관계다.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다. 사랑은 모호한 개념이고, 계산할 수없는 노동이며, 돌변하는 퍼포먼스다. 지금 <하얀 궁전(whitePalace)>을 본다면, 거의 판타지다. 계급이 다르면 사는 동네도 다른 세상인데, 사랑은 무슨. - P35

<인 더 컷〉은 이 공식을 뒤집는다. 이 영화에서는 욕망으로 고통받으며 사랑에 빠질까 봐 고뇌하는 사람이 여성이고매력적이나 치명적인 유혹자는 남성이다. 여성이 유혹자가 아니라 유혹당하는 사람으로 재현되며, ‘여성‘도 갈등, 사유, 선택, 책임 같은 인간의 행위를 하는 살아 움직이는, 변화하는존재가 된다. 행위자로서 여성, 역사적 주체로서 여성, 그리고여성의 성적인 욕망은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 여성이 원하는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경계와 만나고, 결국 정치적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라고말로이가 불평하자, 프래니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게될까 봐 두려워."라고 말한다. - P50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정의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무기력과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대개의남성들에게 여성은 ‘검은 대륙‘이다. ‘검은 대륙‘에 접근하지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성들이 짜증스럽고 히스테리컬하게 말한다. "도대체 요점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 P50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조증()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개 사랑의 황홀감은 몇 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인생의매 순간을 혁신하며 ‘나날이 새롭게(日) 사는 사람은매우 드물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단없는 상호 발전을 통해 관계의 질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뒤시간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권태와 제도를 통한 감정의 구속만이 남을 뿐이다. - P68

사랑은 유기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부패한다. 문제는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변치 않아야 하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디 아워스>는 이 오래된 질문을 성찰적인 남성(감독 혹은 게이인 리처드)의 시선으로 새롭게 던진다.
클라리사는 30년 전 연애의 판타지에 평생 동안 매달린다. 레즈비언 파트너가 있는데도, 아니, 심지어 파트너의 격려와 위로, 노동까지 동원하여 리처드를 돌본다. 이에 대한 리처드의답변은, "이제 나를 그만 주체로 만들고 네가 주체가 되어라."
라고 말하며, 사랑의 대상이 되어줌으로써 ‘그녀를 위해 살았던 생을 마감한다. 그녀 눈앞에서 실행한 그의 자살은 그녀에대한 복수이다. - P69

몇 년 전 나는, 오랫동안 몰두해 온 어떤 관계의 상실을인정해야만 했다.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끊어질 것 같았고 매일 밤 흐르는 눈물로 귀에 물이 찼다. 그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어." 이 말이 나를 살렸다. 지금의 나는,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현재 나의 감정, 고통, 기쁨,
슬픔, 지식, 업적………… 이 모든 것들은 곧 과거의 것이 된다. 그리고 과거는 돌아오지도 않고 반복되지도 않는다. "어제를 잊자." - P70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에는 상(常)의 상태가 없다는 것, 즉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한,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한,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삶은 곧 움직임(movement)이고, 움직임은 변화하는 순간(moment)들의 분절적인 연속이다. 고로 영원한 사랑도 안전한 삶도 없다. - P70

여성들 간에는 차이가 있다. 여성들은 다 다르다. 그러나나는 메릴 스트립이 많은 여성들에게 인생의 롤모델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을 더 보태리. 지적인 이미지가 강한배우지만 그가 젊은 날 출연했던 〈디어 헌터>(1978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년), <소피의 선택>(1982년)을 보면 메릴 스트립은 ‘미모의 배우‘다.
메릴 스트립은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 연극에 출연했지만 나는 주로 그녀의 ‘로맨스‘ 영화들을 좋아한다. 물론, 간단한 로맨스는 별로 없다. 로버트 드 니로와 <폴링 인 러브〉, 로버트 레드포드와 <아웃 오브 아프리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매디슨 카운티의 다리>……특히 <폴링 인 러브>의 기차 장면,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모차르트…… 사실 나 같은 ‘오타쿠에게 영화는 이런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계 걱정 없이 혼자, 혼자 본 영화를 혼자 생각하면서 가슴 뛰다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완벽한 인생이다. - P74

"영화 평론가 김혜리 씨"다. 염치없지만 그녀의 언어를 빌리는 것이 낫겠다. "음악성은 이 배우의 특기가 아니라 연기의연장이다. 영화 속 메릴 스트립의 노래와 율동은 언제나 퍼포먼스라기보다 액팅에 가깝다. 즉, 노래 한 곡을 남부럽지 않게흡족하게 공연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대사나 표정 연기와같은 맥락에서 노래의 매너와 감정을 통해 인물의 퍼스낼리티를 표현한다는 의미다. 가무에 능한 많은 배우 가운데에서도메릴 스트립에게 유독 돋보이는 이 속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예전 인터뷰에서 스트립이 밝힌 음악을 듣는 방식이 힌트가될 법하다. 어린 시절부터 메릴 스트립은 노래 자체보다 가수의 들숨과 날숨, 거기 실린 감정에 귀 기울이는 습성이 있었다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음악 너머 노래하는 인간의 상태가 주된 관심사라는 의미다."(<씨네21> 1070호) 그녀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된 장면이 〈The winner takes it all> 5분이다.  - P76

 그리움으로 인생을 견뎌 온주인공이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별거 중인 그가 운영하는 식당은 문 닫기 직전이다. 시간은 없고 상대의 마음도확신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먼 곳에서 온 주인공은 오늘밤 어디로 갈까, 어디서 잘까, 온 길을 되돌아갈까. 내 심장은두근거렸다. 식당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간격은 50cm쯤 될 것이다. 어색한 대화와 긴장………… 상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가 상처가 되고 불안하다. 영화는 두 사람이 손을잡으며 웅크린 듯 포옹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그렇게 부자연스런 자세도 처음 본다. - P96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하고 아까운 유형과 파트너와의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없다. 나는 내내 애달프고 쓰라리고 슬펐는데, 내 친구들은 마이애미의 해변처럼 행복하고 밝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 P97

나는 말세를 억지로 지속시키려는, 매사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끝난 세상의 지옥도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을 대신해, 세상이 끝난 이후의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교실의 아이들은 서로를 이지메하고, 여학생을 골라 윤간한 후 ‘원조교제‘ 시장에내보낸다. 주인공의 단짝은 ‘악마‘가 되어 학교를 지배하고현실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주인공은 온라인 공간에서 위안을찾는다. - P103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이자 타자이다. 물론 이것은 곡예다. 주체가 되는 방식은, 여성이지만 남성의 규범을 따르는 ‘주변부 남성‘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 되기는 전략적선택일 수도 있고 낙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폭력과 성매매라는 제도에 강제당함으로써 성적 타자로 만들어진 상태에서는, ‘반(反)여성‘이 되어야 한다. 남자들이 원하지 않는 여자가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삭발, 즉 자원으로서 외모를 버리는 것이다. - P106

나만의 영화 분류 방식이 있다. 별다른 원칙은 아니고 그냥 주관적 느낌이다. 쓸쓸한 영화, 치열한 영화, 감독이 궁금한 영화, 깊은 영화, 처절한 영화, 기가 막힌 영화, 깨달음을 주는영화, 저우언라이 같은 영화, 트럼프 같은 영화・・・・・・ 이런 자의적인 구분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유형이 있다. 바로 주인공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영화다. 이때 등장인물은 현실이 된다. 인생의 동반자로 나는 그/그녀와 함께 산다.
<타인의 삶>의 주제는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어느 진보신문‘에서, 이 영화의 주제를 "자유의 소중함, 도청과 국가 권력의 문제"라고 쓴 기사를 읽고 한국 사회답다고 생각했다. - P108

사랑이나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엔 적대했으나 지금은 선망하게된 타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타인을 위해희생하는 일은 경험하기 힘든 인간성이다. 한마디로 질투하는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이작품은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나는 타인을 위해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 P110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혐인증인 나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비즐러의 도움으로 생존하게 된 예술가(제바스티안 코흐분, <블랙북>에서도 멋있었다)는 비즐러를 위해 책을 쓴다. 비즐러는 서점에 전시된 자기 이야기를 펼쳐보고, 카메라는 멀리서 서점을 잡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점 이름은 ‘KarlMarx‘.
비즐러 역의 배우 울리히 뮈어 (Ulrich Mühe, 1953~2007)는이 영화로 유럽 여러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그는 다음 해 암으로 사망했다. - P112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억울한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에는 원인이 너무 많아서 원인이없다. 고통에는 위계도 수량도 총량도 없다. 회복할 수 없는고통을 겪고 있다면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년)이다. 이창동 감독은 1988년에 이 소설을 "광주 항쟁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반드시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은 다소 다르다.  - P113

자녀가 유괴되어 살해당한 어머니의 고통과 대비되는 가해자의 마음의 평화. 이 이야기에서 이창동 감독이 ‘80년 광주‘를 연상한 것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 즉피해자 비난, 낙인, 고립을 상징적으로 그렸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다.
더구나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토록 원했던 ‘하느님의 구원‘을받은 데다, 피해자를 걱정하고 가르치려 한다. - P115

문제는 이것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이 영화처럼 ‘송강호‘도 없으며, 마지막 미용실 장면에서 만난 가해자 소녀와도 함께 살아가야한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 P118

‘악‘의 의미는 간단하다. 어린 시절, 힘이 센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몸집이 작은 아이를 왕따시킨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가방을 들게 한다. 키가 작은 아이는 자기 몸집의 몇 배가되는 여러 개의 가방을 질질 끌면서 그들의 뒤를 따른다. 자기짐을 권력(젠더, 계급, 인종…)을 이용해 희생자의 어깨 위에강제로 얹어 놓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여섯 살소녀‘에게 그 짐은 돌 갑옷과 쇠뭉치를 어깨에 걸친 듯, 몸이휘청일 정도로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와주마."라니? - P122

76분짜리 영화의 힘은 대단했다. 나는 지금도 이 영화에기대어 산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내가 당했을 때) 가해자를 찾아가는 일, 대화를 시도할것인지 고민한다.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의미가 있을까, 효과가 있을까. 밤마다 상황을 그려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잠만못 잤을 뿐이다. 불면 때문에 무기력한 하루가 반복된다. 변호사와 같이 갈까. 기가 센 친구와같이갈까. 권투 같은 운동을배운 후 담력을 키운 다음에 찾아갈까. 자객을 보낼까.
나는 생각만 거듭하다가 결국 두 가지 이유로 포기하는데, 하나는 실제로 귀찮고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무서워서다. 어차피 그/그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발뺌하며 내 이야기를 부인할 것이 뻔하다.  - P123

약자에게 대화는 어려운 일이고, 강자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가해자가 대화를 먼저 요구할 때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이고, 피해자가 대화를 청할 때는 "나한테 왜 그랬나요?"라고 묻기 위해서이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면을 다루지만, 피해자는 무너지지 않고 가해자의 멱살을 잡는다.
피해자에게 도움까지 주겠다는 가해자의 팽창된 자아는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찌질하고 비겁하면서도 동시에 배려와 시혜의 주체가 되려는 이들.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는 타인이 지치기를 바란다. 증인살해. 군 위안부 문제가 그렇고, 세월호가 그렇다. 약자의 투쟁에 시간 끌기로 대처하는 것이다. 끔찍한 정상성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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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삶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나도 그랬다. 가부장제는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  - P102

장애인,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 ‘문제‘, 심지어 저출산도 무관심할지언정 사소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여성‘이 맞고 강간당하고 죽으니까 ‘사소한 것이다. 사소하지 않다는 말에는이미 사소하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사소하지 않다는 것이 곧 중대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예 ‘사소‘라는 말의 궤도를 벗어나야 한다. - P104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 공간을 위해 노력한수많은 여성들을 존경한다.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살아남은 이들의 궤적이고, 우리가 살아갈 방향이다. - P107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살아 있는 전설 샬럿 번치는 아내 폭력이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역설적으로 "여자가 가정에서 구타당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내 폭력처럼 가사 노동과 육아를 여성의 일로 간주하는 사고가 거의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다. 문제는 가정 폭력과 가사 노동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너무나 낮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집밖의변화 속도와 집 안의 변화 속도의 차이‘가 이만큼 큰 사회 문제가또 있을까? - P107

20세기에 출간된 책 중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만큼 찬사와 논쟁의 대상이된 텍스트도 드물 것이다.
특히 <여성성의 신화》는 이론 자체에서 여전히 내파와 여진.
확장과 변태(變態)를 거듭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의 특징을 잘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원한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알고 있는 근대의 거의 모든 지식체계가 자유주의의 자장場)에서 자유롭지않기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과 사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 P115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문제는 미국 남성이나 한국 남성이나별 차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 반갑다면 반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 한국 사회에서 저자와 같은 여성 지식인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으로 근대 철학에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온 영장류 생물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1970년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동물 행동을 기술하는 과학자의 언어는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장으로 당시 학계에서 추방되었다. 자연과학의 언어는 그 사회의 정치, 사회문화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중립적인 학문은 없다는 주장이생물학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해러웨이는 세계적인석학이지만, 자연과학자들의 중립적, 보편적 주체라는 자기 환상은 여전하다. - P123

겸손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도 아니다.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도 페미니즘 책읽기와 쓰기를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쾌락 때문이다. 정의감, 타인을 돕는다, 세상을 바꾼다………….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이는 우연일 것이다.
어쨌든 단언하건대 여성주의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도 ‘여성스러운‘ 행복감(joy)이 아니라 ‘남성적인 쾌감(pleasure)이다. 지적인 쾌락, 깨닫는 쾌락(열반‘!), 분노와 분열과 고통이주는 쾌락, ‘나쁜 사람‘을 골탕 먹이는 쾌락, ‘대세‘에않고 비웃으며 무시할 수 있는 힘의 느낌….  - P136

 나는 "페미니즘은 무능력한 여자들의 투정"이라고 생각하는 ‘명예 남성‘으로 살다가 졸업했다. 그런데 완전히 우연한 제기로 졸업하자마자 곧장 여성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전혀 관심이 없던 분야에서 새로운 20대가 시작되었다. 거기서 만난 가정 폭력, 성폭력 현실은 나를 완전히 ‘전향시켰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것은 서른 살에 여성학과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였고 그뒤로 20여년이 흘렀다. 여성 단체에상근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20여 년 넘게 이 분야에서 지낸 셈이다. 그런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말하는(275쪽) 의미에서도 아니고, 타인의 시선 때문에 숨기려는 것도 아니다. 나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는 거의 중독에 가까우며 매일 이 문제와 사투를 벌이며 분열 속에 살고 있다. - P146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인류가 만들어낸 그 어떤 지식보다 수월(越)하다. 정치적, 이론적, 학문적으로 다른 어떤 언설보다 세련되고 앞서 있으며 상상력조차 뛰어넘는 참신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던지는 사상 체계다. 지식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면, 또 지식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지식이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면 최소한 페미니즘을 따라올 지식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페미니즘은 지난 모든 언어에 대한 의문과 개입에서 시작됐으며, - P146

캐럴 길리건과 주디스 버틀러는 자주 오해받는 페미니스트사상가들인데, 이들의 사상을 이렇게 쉽고 분별력 있게 ‘정리한‘ 저자의 지적 역량과 글쓰기 능력이 놀랍다. 길리건은 여성성의 재평가보다는 돌봄 노동의 언어화와 여성적 윤리가 공적영역의 규범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단순한 모성찬양이 아니다. 길리건은 자신의 논의가 남성다움, 여성다움운운하는 젠더 문제가 아니라고("This is not gender issue.") 책서두에 못 박았는데도 그녀를 향한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비판 - P148

버틀러가 주장한 것은 여성 범주의 정치학과 그 구성, 효과에관한 것이다. 여성 운동이 반드시 같은 여성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인데, 이 논의 역시 지금까지도 오해에서자유롭지 못하다. 《젠더 트러블》의 부제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보‘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우리의 개념은 원본 없는 복사본에 불과하지만(395쪽, 주디스 버틀러 재인용) 여성이라는 범주의수행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401쪽).
또한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다루고 있는 뤼스 이리가레이, 엘렌 식수, 자크 라캉의 이론은 구조주의나 영미 페미니즘에 익숙한 한국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는 내용이다. 우리에게어려운, 아니 익숙지 않은 일부 페미니즘 이론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뛰어난 능력은 기본적으로 지적 감수성에 기인한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관찰력이 남다른 ‘예술가‘
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점이 이 책의 실질적인 유용성 중 하나다. - P149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은 ‘그들의‘ 교과서임에 분명하고, 저자 또한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세상에는 현장(local)에 따라 수많은 페미니즘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학이나 물리학에 한 가지 입장만 있겠는가? 그런데 왜유독 페미니즘만 ‘한 가지‘로 인식되는가? 이는 마치 ‘유색 인종대 백색 인종‘의 패러다임과 비슷하다. 주체는 개별성으로 인식되지만 타자는 집단으로 지칭된다.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지만같은 페미니즘이라도 포르노, 성매매, 가족, 출산, 모성 등에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며, 1970년대 미국의 포르노 금지 법안제정 운동 때 전투는 남녀가 아니라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벌어졌고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다. 나는평소 숱한 사람이 사상가들을 언급할 때 마르크스, 프로이트,
푸코, 루소.... 그리고 페미니스트 식으로 나열하는 데 분노한다. 남성들은 ‘개인‘으로 호명되는데, 어째서 페미니즘은 한 덩어리로 간주되는가? 이는 마르크스 한 사람과 모든 여성이라는식의 발상이다. 물론 이러한 경계의 정치학은 페미니즘 내부에도 있다.  - P150

내가 생각하는 지식으로서 페미니즘의 가장 큰 매력은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는 점이지만, 페미니즘의 정수는 스스로 내파와 파생을 거듭하는 지식이라는 데 있다. 이 변화는 멈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의 현실, 그리고 현실의 운동이 끊임없이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모든 진보적 사상이 그러하다. 지식은 현실의 필요에 의한것이지 유행을 타는 공부가 아니다. ‘한물가거나‘ ‘이제는 필요없는‘ 페미니스트는 있을지 몰라도 페미니즘 자체가 그럴 일은절대 없다. 이 과정이 진화다. 아직도 혁명과 개량, 진화와 일상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 P151

거듭 강조하건대 알선업자들이 다루는 것은 상품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강제냐 아니냐 혹은 협의의 강제성이냐 광의의 강제성이냐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문제는 강제성 여부라기보다는 전쟁에서의 철저한 성별 분업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제성 담론은 여성 인권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게 만드는 ‘맥거핀‘이다. 왜 남성의 성은 여성을 위해 강제든 자발이든 봉사하지 않는가? 왜 국가든 알선업자든 남성의 성을매매하는 제도는 만들지 않는가? 이 질문이 황당한가? 자발적
‘담요 부대‘든 납치든 여성의 성을 종군(從軍)의 상수(常數)로놓는 전제부터 문제시하는 논의를 시작하자. - P171

《대화》를 읽고 리영희를 한국 최초의 평화학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삶은 인생의 매 순간을 새롭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누구나 몰두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이것은 그가 뛰어난비판적 지식인인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치환의 시에 등장하는 ‘바람‘처럼 평생을 쉼 없이 뉘우치고 탄식하고 회의하고헤맸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는 정박의 흔적이 없다.
평화는 변화이다. 폭력의 반대말은 평화라기보다는 ‘대화‘인데, 여기서 대화는 비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관계의 격렬한(violent) 변화를 뜻한다. ‘주례사 비평‘을 피하기 위한 비판을위한 비판, 경의의 헌사 모두 대화 단절의 언어이며 텍스트를외롭게 만든다. - P175

인간은 무지하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어쩔 수 없이벌어지는 일은 없다. 이 책은 불가피하게 희생된 피해자에게 인도적 차원의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책이 아니다. 그 반대 입장에서 논쟁이 시작되어야 한다. 역사가 전진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이런 책의 존재는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는 위로를 준다.
알려졌다시피 베트남은 한중일과 더불어 세계 4대 한자 문화권국가이다. 중국과 베트남 관계는 국제정치학 교재에 모델로 등장하는 강대국 - 약소국 평화 지속 관계의 모범이다. 베트남의지혜가 낳은 결과다. 한미 관계는 비정상적 동맹의 모델로서 국제정치학의 ‘시조‘인 한스 모겐소가 쓴 책 《국가 간의 정치》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베트남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 - P189

팬데믹의 원인은 ‘돌봄 노동‘ (살림)을 비하하고 ‘자연 파괴‘ (죽임)를 추구해 온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팬데믹의 대안으로 돌봄 윤리에 관심을 보이지만, 이런 흐름은지금 여기의 ‘여성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팬데믹의 결과로 또다시 여성들이 강도 높은 보살핌 노동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내용은 그 자체로도 재평가해야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이 공적 영역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재 인류가 욕망하는 주된 가치인 물질적 풍요와 경쟁과 승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고,
많은 가치 중에 ‘돌봄‘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돌봄노동의 의미와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가 필요하고 돌봄노동에 대한 인식론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 P203

많이 ‘배울수록 좋은 것과 많이 알수록 좋은 것은 다르다.
인간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몰라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모르는 방법이 작동하는 기제는 이데올로기, 개인의 방어 심리,
정보 통제와 같은 통치 기술, 몰라도 되는 권력, 회피 등 여러가지가 있다. 지금 우리 앞의 진실은 이렇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2022년까지는 마스크를 써야 하며, 코로나19가 ‘해결‘된다해도 다른 전염병이 찾아오고 그 주기는 사스, 메르스, 코로나 - P204

팬데믹 시대에 국가의 역할, 개인의 자유, 경제 활동, 봉쇄와방역의 조건, 극도로 성별화되고 계급화된 ‘집‘의 의미, 정치 지도자나 자본가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진단,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청하려면 각자가 자기의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광범위하게 기록하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추상적인 논의로는 이 시대를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들이 나와야 한다. - P209

부르주아 여성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위 세 여성과 또 다른삶을 살았다. 제국주의 프랑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실존주의 페미니즘 이론을 정립했고, 《제2의 성》은 지금도 여성학입문서이다. 또한 그녀는 《제2의 성》 분량의 ‘연애 편지‘ (사르트르에게 쓴 것이 아니다)를 썼다.
나는 이들의 삶을 비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여성들의 삶을다르게 만들었던 20세기 역사. 서구의 근대성과 자본의 발달은식민 지배로 가능했고, 그 ‘덕분에‘ 스메들리나 보부아르는 우리의 선배들처럼 독립 운동이나 ‘건국‘에 참여하기를 요구받지도 않았고 친일이니 부역이니 하는 역사적 짐 없이 ‘개인적 삶을 살 수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여성은 빈부와 상관없이 자기 실현으로서 페미니즘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자기 실현이페미니즘의 본령은 아니다.) - P224

남성성이 자국 여성과의 관계, 가족 내에서 발현되기보다 남성들끼리의 경쟁 논리가 되고 자신의 ‘대의‘에 여성을 동원하는것. 이것을 패권적(헤게모니적) 남성성과는 대비되는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여성은 동등한 시민이 아니라 남성 사회의 ‘자원‘이 된다. 이 책은가부장제 사회의 근본 구조인 남성들 간의 투쟁에 동원되는 여성이 스스로 그 위치성을 거부하고 시민으로서 거듭나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아니라 한국 사회 남성성에 대한 질문으로 보아야 한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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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파성 자체가 가치이고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협한 책 읽기‘는 편협하지 않다.
 모든 책이 편협할 뿐 아니라편협(partiality)을 기점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는 매사에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고, 불호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마음이 잘 다스려지지는 않는다). 선호하는 책이 있고, 즐거움을 느끼는 데에도 나만의 방식이 있다. 즐겁지않다면 왜 읽겠는가. 다행히(?) 내가 사랑하는 책은 대부분 잘팔리는 책이 아니기에, 나 혼자 열광하더라도 독점 시장의 다양화에 그다지 기여하지는 못한다. 간혹 ‘사회정의 차원에서 좋은 책을 열 권 사서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내 식으로 바꾸면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p11 또 다른 창작, 서평


책과 시장나는 서평, 독후감, 추천사를 구별하지 않는다. 세 가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을 감추지 못한다. 텍스트와 관련한 나의 이런 글쓰기가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알았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사회의 협상의 연속이지만 그 긴장을 유지하는 상태가 글쓰기 자체보다 힘겨울 때가 있다. 내 생각을 숨기는 데(?) 지쳤을 때 나도 모르게 지나친 감격이나 솔직한 입장이 부실한 바느질 봉합처럼 터져버린다. 내가 추천사를 쓴 책의 저자에게 팬레터까지 따로 보내는 ‘오버‘가 그런 예중 하나다. - P10

나는 좋은 책, 알려진 책, 많이 팔리는 책에 서평이 몰리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서평 (크리틱)이 가장필요한 책은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 혹은 별 내용이 아닌데‘ 많이 팔려서 비판으로 판매량을 줄여야 하는 책이다. 물론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희망한다. 서평이 많이 쓰이고 비평서가 많이 출간되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전압이 높은 책, 나를 소생시키는 책을 좋아하지만 여기에 실린 책이 모두 나를 살린 책,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아니다. 어쩌다가 나와 인연이 닿은 책이다.  - P11

내게 글쓰기는 입장과 표현이 가장 중요하다. 장르가 곧 내용인 것은 분명하지만 입장 없는 글쓰기는 어느 장르나 불가능하다. 창작으로서 비평, 예술로서 비평을 지향하는 나는 서평과그 외 글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는 서평, 독후감에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P15

정성일이나 김현의 평론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읽은 텍스트 내용보다 그들의 생각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쓴 서평을 구매하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기대한다. 책을 읽든 안 읽 - P16

든 그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구입하는 게 아닐까. 서평 쓰기의첫 번째 훈련은 글의 서두에 한두 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집약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야 한다. 육화된 책의 내용을 몸속에서 뽑아내는‘ 작업이다. - P17

독후감과 문학 평론, 영화 평론, 음악 평론 등 모든 비평은다르지 않다. 학생이 쓰면 독후감이고, ‘전문가‘나 ‘어른‘이 쓰면 서평인가. 나는 학생들에게도 창작으로서 독후감 교육을 희망한다. 이것은 우리가 왜 서평을 읽는가와 중요한 관련이 있다. 서평에 드러난 줄거리로 독서를 대신할 것이 아니라면, 서평이라는 창작 장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비평 역시 창작이자 새로운 이야기여야 한다. ‘콘텐츠‘, ‘스토리텔링‘이 타령이된 세상이다. 소프트웨어,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아우성이 요란하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아닐까. 콘텐츠는 새로운 생각이며 스토리텔링 능력은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그것이 ‘우리의 무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 P17

모든 글쓴이들도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쉬운 글은 있을지몰라도 쉽게 쓰인 글은 없다. 글쓰기는 체력, 재능, 돈, 정치, 좌절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을 존중하고, 책을 쓰고만든 이들을 존경한다. (특히 내게 번역은 어려운 일이다. 번역은 우리말 능력을 시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글을 다루려면 자신의 윤리와 정치적 판단에 관한 여러 번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이 여성학자사라 러덕이 말한 "비판이 실천적인 개입" 인 이유다. - P18

 엄청난 지성과 노동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런 ‘무임금 노고를 하겠는가. 내게 그런 능력과 시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려지지 않는 책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비평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인문학 독립 연구자의 양성이 절실하다. (다른 사회 정책 분야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적은 돈‘으로할 수 있는 일이다.) - P19

혼신을 다했고 깊이 있지만 안 팔리는 책, 안 읽히는 글, 보상 없는 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권력자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인생사에 이만한 외로움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모두가 궁형(宮刑, 거세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썼던 사마천이 될 수도 없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 궁형은 빈곤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고통을 극복한 글이라면 얼마나
‘위대한 글이겠는가. 나는 평생을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돈도포기하고 오로지 언어에 영혼을 판 채 글쓰기에 인생을 건 이들을 몇몇 알고 있다. 그들이 사투한 책엔 별점 테러조차 없다.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런 글쓴이들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한다. - P21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강하고 대담한 악인이다. 이런이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어디에서나 잘 살고 있다. 선과악은 ‘사실‘이 아니라 강한 사람의 뻔뻔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잉그리드 버그먼처럼 폭력, 악, 비행을 분명히목격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피해자를 돕는 일에 조금 개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는 가해자를 두려워했고 나는 사법처리를 포함한 여러 방식의 문제 제기를 생각했으나 모든 이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이유는 상대방이 나의 ‘예민한 성격을 문제 삼아, 자신을 ‘불안증 환자‘ (나)의 피해자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상담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결국 사건은 당당한 자(가해자)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 P26

여전한 논쟁거리는 당사자가 자기의 정체성이나 질병에 대해쓸 때 우리를 괴롭히는 방법론이다. 특히 사회 자체가 지극히병리적이고 이중적이면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 체계는 없는한국이라면 말이다. 나는 "절대 상처를 드러내지 마라." (44쪽)는 말에 동의한다. 나에게도 드러내야만 하고, 드러내고 싶은문제가 있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적 능력 때문에) 내 시도는 여러번 실패했다. 낙인과 민폐, 자학만 얻었다.
사회의 ‘크기‘는 고통에 대한 태도와 그것을 품을 용량(capacity)으로 가늠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해 한글판 제목대로
"피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그릇에 온전히 담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불안하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 P28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통증은 무엇인가?‘ (331~337쪽)이다.
나는 통증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시도와 접근 방식이 전제하는 사유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줄임말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각기 다른 몸들이다. 통증은개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 통증의개념을 정의하는 것보다 이를 둘러싼 물리적 권력 관계, 권력과지식, 인식과 치유과정의 사회성, 정치학, 언어가 ‘통증학‘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 P32

시몬 드 보부아르나 도나 해러웨이 같은 여성주의자들은 백인 남성이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으로, 흑인은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간주해 왔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간‘
인 백인 남성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앞에서 언급한경찰관처럼 흑인과 여성의 몸을 구타하거나 살해할 수 있는 통제권을 지닐 수 있다.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다는 것.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문화적으로 합의된 사회에서 흑인의 몸은 백인의 것이다. 백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강간, 고문, 살인, 감금이든 모두 합법적‘이다. 압도적 폭력을 마음으로, 평화로,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36

문제는 몸이다. 다시 말해 피부색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물론 인간의 몸을 이루는 어떤 부분도인간의 범주와 관련이 없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생물학이 아니라 권력이다. 피부색은 좀처럼 희석되지 않는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는 흑인과 다르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몸이 부여한 정체성의 지도를 찢을 수 있다‘. 백인/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과 다른 이들의 몸은 계급, 퀴어링, 의료 규범으로
‘혼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흑인의 몸은 있는 그대로의 표식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부여한 영원한 화인(火印)이다. 쉽게 뜯어내고 그냥 버릴 수 있는 라벨이 아닌 것이다. - P38

몸은 사회적 (social/mindful body)이다. 몸은 기억이다. 있는그대로의 몸은 없다(영어 body는 그냥 ‘시체‘라는 뜻이다). 몸은언제나 해석이다. 같은 흑인이라도 힘과 스피드를 상징하는 운동 선수 우사인 볼트나 ‘흑진주‘로 불리는 뛰어난 미모의 여성들은 흑인이라기보다 뛰어나지만 특이한 인간의 범주로 다시구분된다. 이들의 예외성은 해석의 힘을 보여준다. 한편 책에도나오는 ‘one drop rule‘, 즉 선조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영화화되기도 한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의 작품 《휴먼 스테인》(2000년)은 흑인의 피가 인생의 얼룩이자 오점(스테인stain)의 상징임을보여준다. 검은색, 그것은 없애야 하지만 없앨 수 없는 것이다. - P39

몸, 즉 나자신을 향한 적대감, 분노, 좌절, 비참함, 세상을향한 원망, 기력 없음…………. 나는 이 글을 쓰기 이전에 우선 나(몸) 자신과 싸워야했다. 나에게 몸은 절실히 바꾸고 싶은 그무엇, 그러다 안 되면 버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필자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어떤 필자들은 부럽고, 어떤 필자는 존경스럽고, 또 어떤 필자에게는 공감했다. 자기 몸에 ‘대해‘ 쓰는 실천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쓰고 싶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쓸 수 없기도 하고, 결국 쓸 몸이 안 되기도 하고…… - P42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나다. 정신은 몸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생각은 곧 자아관이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자기 몸을 긍정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아만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모든 ‘비극‘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책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P47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란 혁명에준하는 발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몸에 대해 쓰기, 말하기, 듣기, 이런 책(《몸의 말들>을 읽고토론하는 커뮤니티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페미니즘이 낯설지않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여성은 남성 사회가 만든 몸 이미지에갇혀 있다. 남성의 존재성은 돈, 지식, 권력으로 평가되는 반면여성의 시민권은 외모에서 시작된다. 남성은 정치적, 역사적 존재이고 여성은 생물학석, 의학적 존재라는 인식, 가부장제의 전제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심화되어 여성은 완벽한 스펙에 더해 ‘예쁘고 날씬하고 풍만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삼은 몇몇 ‘슈퍼 걸‘들이 매스컴을 지배하고 있다. - P48

용서에 대한 나의 입장을 굳이 밝힌다면 나는 용서에 관심이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용서라는 말이 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을 의심한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용서, 화해, 대화라기보다는 부정의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다.
고통에는 육체적, 정치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위계이다. 모든 고통은 같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기 상처가 제일큰법이다. 나도 내 상처가 제일 크다.  - P52

나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반복하며 살고 있다.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 나는 ‘사회정의‘나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생각에서그들의 요구에 응한다. 오해받거나 배신을 당한다. 시간,
배신감, 상처, 자책감에-돈, 평판 등에서 ‘큰 손해를 본다.
분노로 시간을 낭비한다.
복수할 방법에 골몰한다. -→ 해결 방안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붕괴가 지속된다. 어쩔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복귀한다.
몸에 부상을 입은 채 잊는다. 잊게 된다. 잊힌다. - P52

내게 용서는 저절로 잊히는 것이지, 용서를 위해 고민하거나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내겐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고 참을 수 없는 부정의다.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관련된 사건을 잊는 것이다. 사건을 무시한다(ignore), 살기 위해 나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일을 잊는다. 물론 가해자에 대해서도생각하지 않고 다시는 접촉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가 일반 법칙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완벽주의 성향, 결벽증, 비사회성에 상응하는 능력은 없지만, 일중독과 자기 몰입 성향이 ‘용서‘ 따위를잊게 해주는 것 같다. - P53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1952년은 제2차 세계대전을치른 지 불과 7년째 되는 해였는데, 사람들은 만일 루이스 자신이 폴란드인이거나 유대인이라면 게슈타포를 용서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그보다 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은 용서할 수있겠습니까?" - P55

나는 이 책의 제목 ‘새벽 세시의 몸들‘이 특히 좋다. 실제로서도 비유로서도 적절하다. 나의 새벽 세시 역시 불면과 잡념의 시간, 하루 중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시간이다. 자살연구에 따르면 자살이 많이 발생하는 시간대는 새벽 세 시에서다섯 시 사이이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새벽 세 시는 고통과 통증의 감각이 가장 선명하게 자각되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부 의학에서는 장기가 가장 예민한 시간이라고도 한다. "몸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놀라움으로 지각하게 되는 모멘트가 있다. 몸이 아프게 될 때, 또는 나이가 들면서 ..… 겪게 되는 격렬한 ‘몸의 지각‘은 타협 불가능한 ‘자아 탐험‘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이로써 자기 이해나 시간 이해, 타자와의 관계나 - P62

가해자와 피해자는 유동적, 맥락적 개념이므로 가해의 절대성을 전제할 수 없는데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를 고문자와 피고문자의 구도로 고정해놓았다. 고문은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
‘영원한 관계‘의 장이기 때문이다. 고문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방식은 피해자의 고통을 그린 임철우의 단편 소설 <붉은 방>이잘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피해자를 지지하고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 동일시는 우리 자신이 가해자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유 방식이다. 피해자 포지션이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찬은 거꾸로 간다. - P74

나는 그 연배의 한국 문단에서 어떻게 이런 독특한 남성 작가가 나올 수 있는지, 역시 인간의 경험은 구조를 넘어선다는기쁜 진리를 확인한다. 정찬의 작품에는 한국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외세 콤플렉스, 성애 묘사(여성에 대한 타자화가 거의 없다. 자기 도취나 자의식도 없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읽으면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의 주제는 물론이고 문체와 행간의 밀도는 그의 노동을 짐작케 한다.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는 광주항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나중에는 주로 언어, 권력, 몸, 구원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생전에 정찬이 이청준, 복거일, 최인훈의 뒤를 이을 작가라고 주목했다. - P75

삶의 모든 고통은 권력에서 온다. 물론 제일의 권력은 육체적고통이다. 이 역시 사회적 차원의 문제지만 생로병사라는 다른차원의 법이 있으므로 차치하자. 우리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문제는 자원을 둘러싼 권력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 착취다.
인간이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포스트 휴먼‘들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진입했고, 지배 세력은가시권에서조차 사라졌다. 한국인들의 희망은 국제 자본을 걸러줄 국가다. 당대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역사상 민중은 언제나 선하지만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다. 유능하지만 욕심 없는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대개 선한 사람은 약하고, 강한 사람은악하다. 심지어 악함과 강함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 P79

우리는 <얼음의 집>의 주인공처럼 권력을 정확히 사용하는예술가를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어야한다. 정찬의 <얼음의 집>은 권력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고통의백신이다. 고통의 시대에 어찌 백신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P81

나는 예전에 세월호 사건을 두고 "잊지 말자."라는 말이 누구의 관점인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는 그 사고와 무관한 이들의 다짐이다. 유가족들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당사자가아닌 이에게는 망각이 필연이고, 당사자에겐 기억이 필연이다.
"잊지 말자." 대신 유가족의 시각에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 P84

말의 의미는 사전에 있지 않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관계에 있다. 고통의 모습은 고통의 위치, 연결 지점(location)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공감의 표현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모든 것을 의식(consciousness)하기가 쉽지 않다.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지나친 긴장도 부담스럽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들을 때 나를포함한 인간의 주된 반응은 통념과 달리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더 정확히는 의심과 비난이 더 많다. "정말?", "설마?", "농담하지 마."……… 이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 P85

고통받는 몸은 사회적 위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의미를자각하는 일은 곧 사회적 존재로서 투쟁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명이다. 사회, 정치, 역사다. 힘있는 사람의 고통의 목소리는 크고 이미 위대한 의미 체계가 정해져 있다. 미국인의 고통과 북한인, 이라크 난민의 고통은 같은 고통이 아니다. ‘남성‘
의 고통과 ‘여성‘의 고통은 원인도 구조도 양태도 깊이도 다르다. 20대 여성은 성차별의 사례로 성폭력과 강남역 살인 사건의공포를 이야기하고, 20대 남성은 초등학교 때 ‘우유당번‘을 예로 든다. - P88

유명해지기 위해 무슨 짓을 못하랴. 누가 그런 사람이냐고?
실명 비판을 하라고? 나는 그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그/그녀는 내가 비판하는 사람이 자신인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아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자아 개념은사회성이 없다.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규정하고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 물적 기반(예를 들어 SNS…………)이 민주주의든 과학 기술이든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심리학에서 가장 위험한 심리를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투사(남의탓으로 돌리는 폭력)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나르시시스트가 10퍼센트, 타인에게 폭력적인 사람들(갑질 행위자)이 90퍼센트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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