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거프틸은 한때 낙농장을 소유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낙농장은 일리노이주 앰개시 타운에서 2마일쯤 떨어져 있었다. 그 일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토미는 낙농장이 홀랑 불타버린 그날 밤 느꼈던 두려움에 휩싸인 채 한밤중에잠을 깨곤 했다. 집도 깡그리 불탔다. 바람이 헛간에서 멀지 않은 그의 집으로 불똥을 날려보냈다.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1는 늘 자신의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가 착유기 전원이꺼졌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화재가 시작된 곳이 바로 거기였기 때문이다. 불길은 일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번져 그곳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거실에 있던 황동거울틀만 빼고 모든것을 잃었는데, 그는 다음날 잿더미 속에서 그것을 찾아냈고, 발 - P9

견한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구호품을 보내주었다. 그가 정신을 수습하고, 자신이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모을 때까지 그의 아이들은 꽤 오랫동안 반 친구들의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그는 그 땅을 이웃 농부에게 팔았지만 큰돈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와 그의 아내인 키 작고 예쁜 셜리는 옷을 새로 샀고, 그는 집도 샀다. 셜리는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기운을 잃지 않고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버텨냈다. 그들은 쇠락한 타운인 앰개시에 집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농장이 칼라일과 앰개시 두 타운을 나누는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이전에는 칼라일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앰개시 소재의 학교에 다녀야 했다.  - P10

거대한 불길이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이어 소들이 죽어가며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을 들으면서 그는 느낀 것이 있었다. 여러 가지를 느꼈으나, 하느님의 현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없는 그것을 명백하게 느낀 것은 집의 지붕이 폭삭 주저앉아 바로 아래쪽, 아이들 사진과 그의 부모 사진이 있는 침실과 거실로 무너져내릴 때,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볼 때였다. 그 순간 그는 천사들이 왜 늘 날개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의, 심지어 소리도 아닌 것의감각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하느님이, 얼굴은 없으나 하느님인 그분이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무언으로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괜찮다, 토미, 라고 그가 알아들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곧 토미는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후로도 줄곧 괜찮았다.  - P13

그럼에도 오늘 같은 봄날 아침에 흙내음을 맡으면 소들의 냄새가, 그것들의 축축한 콧구멍이, 그것들의 따뜻한 배가 그리고 그의 헛간-두 개였다-이 생각났고, 그러면 그는 마음이 자신을 찾아오는 장면 장면들로 자연스럽게 흘러다니도록 내버려두었다. 어쩌면 방금 바턴 씨네 집 쪽을 지났기 때문에 그 가난하고 슬픈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이따금 토미의 농장에서 일했던그 남자 켄 바턴이 그리고 대학에 가면서 집을 떠나 결국 뉴욕시티에 정착한 루시 그는 그 아이를 더 자주 생각했다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루시 바턴. - P14

한번은 그들이 타운 여자들한 무리를 데리고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는데, 형 말로는 어떤 여자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어떤 여자들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듯 턱에 힘을 주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그 이미지가늘 토미의 마음에 남아 있긴 했지만, 왜 하필 지금 떠올랐는지그는 궁금했다. 그는 차창을 끝까지 내렸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그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 자신이 선과 악의 이 혼란스러운 다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이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 P22

토미는 운전하면서 문득 루시가 중학생일 때 앉곤 하던 책상 근처에 자신이 1쿼터를 놓아두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애는 늘 헤일리 선생의교실을 이용했다. 그 선생은 일 년 동안 사회를 가르치다가 군에 입대했는데 아마 루시에게 잘해주었는지, 나중에 그 교실이과학실이 된 뒤에도 루시는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그래서 토미는 어느 날 루시가 즐겨 앉는 책상 근처에 1쿼터를 놓아두었다.
학교에 자동판매기가 막 들어온 시점이었고 1쿼터면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사 먹을 수 있어서, 루시가 볼 수 있는 자리에 1쿼터를 놓아둔 것이었다. 그날 밤 루시가 집으로 돌아간 뒤 토미가교실로 가보니 1쿼터가 놓아둔 그 자리에 정확히 그대로 있었다. - P35

잠시 뒤 토미는 백미러를 흘끗 쳐다보았고, 피트 바턴이 간판을 망치로 때려부수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을 때려부수는 방식에 담긴 무언가ㅡ힘ㅡ때문에 토미는 운전하면서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지켜보니 그 아이ㅡ그 어른ㅡ는 간판을 내려치고 또 내려칠 때마다 점점 더 강한 힘을 싣는 것 같았다. 차가 살짝 내리막길을 지나며 그 모습이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을때, 토미는 이렇게 생각했다. 가만있어봐. 그리고 차가 다시 오르막을 오를 때 백미러를 보니, 거기 분노에 차 맹렬하게 간판을때려부수는 그 아이ㅡ어른이ㅡ다시 보였다. 그 남자가 간판을 두들기며 표출하는 분노가 토미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웠다. 토미는 자신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온하게 느껴졌는데, 그 행동에서 엿보이는 걱정이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날 헛간 뒤에서 하고 있던 행동만큼이나 은밀한 느낌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토미는 차를 몰면서 깨달았다. 오ㅡ문제는 어머니였어. 어머니가 문제였어. 그녀가 정말로 위험한인물이었던 거야. - P36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미는 타이어 바람이 빠져버린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금까지―평생―지탱해오던 내부의 공기가 이제 완전히 빠져나간 것처럼. 그는 운전을 하면서 공포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화재가 일어난 그날 밤 하느님이 그를 찾아왔다는 것을. 왜말했을까? 어머니의 간판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때려부수던 불쌍한 아이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아이에게 그것을 말했다는 사실이 왜 문제가 되는가? 토미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토미는 자신에게 끼워져 있던 플러그를 쓰로 뽑아버린 기분이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한 그것을 말함으로써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를 작은 사람으로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에게 정말로 공포를 일으킨 것은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믿으세요? 피트 바턴은 그렇게 말했다.
토미는 더이상 자신이 자신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 P43

패티는 마치 자신의 머리가 잘려나가 몸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그 느낌은 계속되었다. 그녀와 언니들은아버지가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욕설을 내뱉고 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예전에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울지도 않았고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고 돌처럼무표정한 얼굴을 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 되었고, 가정-그전에는 그들 모두 호수 위의 보트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앉아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은 사라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뭔가로 변해버렸다. 타운 사람들의 쑥덕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 P73

루시 바턴의 회고록에서 루시는 사람들은 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느낄 방법을 찾는다고 썼는데, 패티는 그것이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밤 달은 거의 패티 뒤를 따라오다시피 했고, 그녀는 백미러를 쳐다보며 달에게 윙크했다. 그녀의 마음에 언니 린다가 떠올랐다. 린다는 패티가 어떻게 청소년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패티는 운전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린다는 결코 모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배스천 말고는어느 누구도 결코 모를 것이었다. 시비가 죽은 뒤 패티는 심리치료사를 찾아갔다. 그 여자에게 다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 P79

하지만감청색 블레이저를 입은 그 여자는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부모의 이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패티에게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았죠, 패티가 말했다. 패티는 이 심리치료사와의 상담을 어떻게그만둘지 방법을 궁리하다가 결국 비용을 더 감당할 수 없다고거짓말을 했다.
진입로로 접어들던 패티는 나갈 때 켜두었던 불빛을 보았고,
그 순간 루시 바턴의 책이 패티를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다. 책이 그녀를 이해한 것이었다. 입안에 노란 캔디의 달콤한맛이 남아 있었다. 루시 바턴에게는 자신만의 수치심이 있었다.
오, 세상에, 그녀는 정말로 자신만의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다. - P79

"너는 열다섯 살이야. 나는 어른이고 잘못한 사람은 나여야 해."
패티는 소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놀랐고, 소녀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냥 피곤해서요." 라일라가 말했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요."
패티가 일어서서 상담실 문을 닫았다. "얘야." 그녀가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얘야. 내가 너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너를 대학에 보내줄 수 있다고. 돈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아까 말했듯이 네 등급은 훌륭해. 나는 네 등급을 보고깜짝 놀랐고, 네 성적은 정말로 뛰어나. 나는 너만큼 등급이 좋지 않았어. 그런데도 내가 대학에 간 건 우리 부모님이 나를 대 - P82

학에 보내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네가 대학에 가게 해줄 수 있고, 그러면 너는 가는 거야."
소녀가 패티의 책상에 올려놓은 자기 팔에 머리를 내려놓았다.
소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잠시 뒤 소녀가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누군가가 저한테 잘해주면…………오 이런, 그러면 마음이 미칠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아." 패티가 말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소녀가 다시 울었고, 계속 소리를내어 훌쩍였다. "오 이런 "소녀가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패티가 화장지를 건넸다. "괜찮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다괜찮아질 거야." - P83

그날 오후 패티가 우체국 계단을 올라가는데 환한 햇살이 그위로 쏟아져내렸다. 우체국 안에 찰리 매콜리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패티." 그가 말하고 고개를 까딱했다.
"찰리 매콜리" 패티가 말했다. "요즘 어딜 가나 만나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살아내는 중이죠." 그는 문으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 P83

나중에, 앞으로 다가올 세월 동안 패티는 그들이 계단에 앉아있던 것과, 그것이 시간의 바깥에서 일어난 듯 느껴졌던 것을 되돌아볼 것이었다. 길 건너 철물점이 있었고, 더 멀리로는 오후햇살을 받아 건물 측면이 환히 빛나는 파란 집이 있었다. 패티의마음에 키 큰 하얀 풍차들이 떠올랐다. 그 길고 가는 팔들은 일제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이따금 풍차 두 개의 팔이 동시에돌며 하늘을 배경으로 같은 위치에 놓일 때를 빼고는 결코 똑같이 돌지 않았다.
마침내 찰리가 말했다. "요즘 잘 지내는 거죠, 패티?"
그녀가 말했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그 속으로 영원히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그만큼깊었다. - P84

잠시 뒤 찰리가 말했다. "중서부 출신이로군요. 괜찮다고 하는걸 보면요. 하지만 늘 괜찮지는 않을 텐데요."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울대 바로 위에는 면도하는 것을 잊은 듯 흰 수염 몇 가닥이 남아 있었다.
"물론 뭐가 괜찮지 않은지 내게 말할 필요는 없어요." 그가 이제 앞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도 물어볼 생각이 전혀 없고요.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건 가끔은 "그가 그녀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녀는 그의 눈동자가 옅은 푸른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끔은 그렇게 괜찮지는 않다는 거예요. 절대로 그렇지 않죠. 늘 괜찮은 건 아니에요."
오, 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고,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없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사실을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P85

린다 피터슨-코넬은 이번 한 주 동안 그들의 집에 묵기로 한여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오, 이 여자가 되겠군. 여자의 이름은이본 터틀로, 사진 페스티벌에 참가한 또다른 여자인 캐런-루시토스의 소개로 그들의 집에 오게 되었다. 캐런-루시는 린다가이본을 맞이할 때 이본 옆에 말없이 서 있었다. 이본은 키가 매우 컸고 약간 굽슬굽슬한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왔는데, 십년전에는 상당히 예뻤을 것 같았다. 지금은 눈 밑에 주름살이 생겨 파란 눈빛이 주는 강렬함이 약해졌고, 분명 마흔을 넘겼을 나이치고 화장이 너무 진했다. 린다는 쉰다섯 살이었다. 이본의 샌들은 높은 코르크 웨지 굽이어서 그녀의 키를 더욱 커 보이게 했다. 린다는 그 구두를 보고 이본이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 - P89

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눈치챘다. 늘 구두가 단서였다.
린다와 제이 피터슨-코넬의 집 정원에는 알렉산더 콜더의 조각상 두 점이 있었는데, 두 작품 다 크고 눈부시게 푸른 수영장한편에 있었다. 집안 거실 벽에는 피카소 그림 두 점과 에드워드호퍼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손님들이 사용하는 구역으로 이어지는 경사진 복도 끝에는 필립 거스턴의 초기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 P90

연중 이맘때에는 집집마다 포치에 제라늄과 페튜니아가 심긴 큰 화분들이 가득했다. 타운에는 키 큰 오크나무와 검은호두나무가 심겨 있었고, 쥐엄나무와 초크체리 가지들은 출렁출렁 늘어져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없으면 나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은 물푸레나무의 잎들이 살랑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꽤오래전 파산해 결국 문을 닫아야 했던 사립 고등학교 교실-그일부-이 아직 사진 페스티벌 강의실로 쓰였다. 그 건물로 가려면 무성한 덤불과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타운의 집들은 지나는 길에 흘끗 쳐다볼 수 있을 뿐이었다. 거의동화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타운 자체가 그랬다. 이본 터틀이캐런-루시 토스에게 그렇게 말하자 캐런-루시는 자기도 그렇게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환영회가 열리고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 P93

그것은 그녀의 부모와 형제들이 견뎌야 하는 절망과 공포를 더욱 가중시켰다.
이 년 동안 타운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그 기간 동안 린다 피터슨-코넬은 가슴속 깊은 곳에 어두운 혼돈의 원판 같은 것을 지닌 채 살아갔고, 남편이 신문기사를 읽고텔레비전으로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면서 종종 진땀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몸이왜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지, 마음이 왜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지못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종결되었을 때, 마침내, 마침내 종결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그런 식으로 느꼈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가끔 기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었던 신체 증상이 다시 나타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기억날 때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어리석은 여자야. 나는 불평할 게 아무것도 없어, 정말로, 그렇겐 못하지, 오맙소사. - P99

린다는 일어서서 거실로 들어가 카우치 한쪽 끝에 앉았다. 그녀는 영혼이 얼마간 육체에서 빠져나온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다시 어려져 이른 여름 어느 저녁, 학교의 여자 친구들과 길을걸으면서 옥수수밭을, 또 옥수수밭을 지나고 이어 콩밭을 지나는 느낌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새생명의 연초록빛으로 가득했고, 해가 넘어가면서 온 하늘이 찬란한 축하의 색깔을 입었다. 맨팔에 닿던 공기도 떠올랐고, 그 모든 자유, 그 모든순수함, 그 웃음도...… - P117

"오, 차일드, 당연히 그렇겠네요.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시선을 린다에게로 돌렸지만 초점은 여전히 먼 곳에 닿아 있는 듯 보였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입장은 아니네요. 내가 유리로만들어진 집에 돌을 던졌어요." 미안해요."


그것은 거의 언제나 놀라운 일이다. 예전에는 영원히 닫힌 장소로 보이던 곳으로 들어가도록 허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고그것이 놀라서 멍해 있던 린다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린다는 그날 콘칩 봉지들 위로 햇살이 쏟아지는 편의점 안에 서서 그 같은동정의 말-캐런-루시는 자신의 남편이 어떤 마음 상태였는지몰랐던 반면, 린다는 남편의 마음 상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을 들으면서 그 일의 결말이 결 - P124

국 어떻게 될지 감지했다. 이본 터틀과 캐런-루시는 이 타운에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재판은 열리지 않을 것이며, 카메라에 대한 언급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린다가 남편과 함께 밤에뉴스를 보거나 전원을 산책하거나 레스토랑에 앉아 담소를 나눌때, 그는 자신이 궁지에서 벗어난 것이 아마도 혹은 부분적으로아내의 신중함 덕분이라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그뒤로 더이상 다른 여자는 없을 것이기에, 게스트룸은 아마 누구도 들어가지 않고 벽에 캐런-루시의 금 간 접시 사진이 걸려 있는 햇볕 잘 드는 서재가 될 것이기에, 린다는 자유의 상태에서 남편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 P125

의 상태에서린다는 그날 그 사건의 본질을 느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그 여자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린다는 그녀의 손을 잡고싶어졌다. 심지어갑작스럽고 놀랍고 다급하게-그녀의 뺨을어루만지고 싶어졌다. 캐런-루시가, 자신이 줄곧 중요하고 사랑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알고 뒤통수를 맞은 듯 괴로워하던 그 프리티 나이슬리 걸인 것처럼.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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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풀이 길가 콘크리트의 틈을 뚫고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제한속도 75MPH*라고 되어 있는 표지판 옆을 지나갔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오렌지빛이감도는 붉은색의 잎이 달린 나무 꼭대기가 보였고, 더 달리자 나뭇잎은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줄지어 선 모든 나무들 사이 작은 선홍색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길가의 풀은 색깔이 좀바래 있었다. 풍부한 녹색이 빠지니 완연한 8월의 풍경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자 키 큰 나무들이 서 있었다. - P138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달리면서 나는 어떤 익숙한 감각을 의식했는데, 그 감각은 전날 밤 공항이 너무 초현실적이라는 거의공항 같지 않다는 느낌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의식한 것은 이것이었다.
내가 겁을 먹었다는 것.
나무들은 점점 땅딸해졌고, 몸통이 굵은 소나무들이 줄지어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왼쪽으로 비쩍 마른 자작나무 들판이나타났다. 그걸 제외하면 탁 트인 넓은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표지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차들도, 지나가는 한두 대 말고는 없었다. - P139

나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뉴욕은 내가 오래 살아온 곳이고, 익숙한 곳이다. 내 아파트, 내 친구들, 경비원,
정류장마다 한숨을 토하는 도시 버스들, 내 딸들…… 그 모든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은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무서웠다.
나는 그게 몹시 무서웠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는데, 겁이 난다고말할 만큼 내가 그를 충분히 잘 아는 건 아니라고 문득 느꼈기때문이다. - P140

이들은 나와 같은 족속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어느 집단에 소속감을 가져본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순간 여기 메인주 시골에 있었고,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은 그 집들, 우리가 지나쳐 간 몇 채의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이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다-이해였다. 그건 이상한 감정이지만 진짜였고, 잠시 나는 이렇게 느꼈다. 내가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겠다고. 그리고 심지어, 그 몇 채의 집에실제로 살고 있고 집 앞에 트럭을 세워놓은 그 사람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사랑한다고. 거의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 P149

나는 잔해만 남은 콘크리트를 보았고, 녹색 잎이 콘크리트를뒤덮으며 자라고 있었다. 그 자리에 햇빛이 비쳐 녹색 잎이 반짝거리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덜컹했고, 나는 랠프가말하는 모든 것이 내가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 이미 예상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떤 단어가 그의 입을 통해나오기 직전에 그게 어떤 단어일지 내가 알았다는 뜻이다. 중요한 말은 아니었고, 그저 그곳이 어떻게 지어졌고 단열재로는 무엇을 사용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다만 내 머릿속에서 랠프가얘기하는 내용을 정확히 미리 말해준 것은 어떤 여인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데자뷰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데자뷰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고, 아주 기이한 순간이었다. 혹은 일련의 순간들. - P158

내가 자란 곳에서도 사방에 하늘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하늘에는 해가 찬란했지만, 또한 군데군데 퀼트처럼 아주 낮게 구름이 드리워 있었고, 해는 구름 안을들락거리며 녹색 목초지에 환한 빛을 쏟아냈다. 그리고 우리는드넓은 해바라기 들판을 지나갔다. 우리는 또한 토양에 영양분을 주려고 간작으로 클로버를 심은 들판도 지나갔는데, 내 어린시절 경험으로는 봄이 되면 그것을 갈아엎을 터였다. 거의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그 풍경을 보고 작은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그날 아침의 고립감이 이런 감정으로 변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행복을 느꼈다.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나는 어린아이인 내가 트럭을 모는 아버지 옆에 타고가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 P163

나중에 내가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윌리엄은 울었지만결코 내게 그런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루시." 나는 기다렸지만, 그가 "제발 떠나지 마, 왜냐하면 당신은 루시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듣지 못했다.
윌리엄을 떠난 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 적이 한 번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할까? 그러자 그가말했다. 당신이 우리 결혼에 뭔가 다른 요소를 가져올 수 없다면.
내가 가진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결혼에새롭게 가져올 다른 요소를 전혀 생각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 P167

권위에 대해.
나는 작문을 가르칠 때 그 일을 오래 했다-권위에 대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헬름 게르하르트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생각했다. 오, 권위가 느껴지는데, 나는 캐서린이 왜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 보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168

그리고 나는ㅡ천천히ㅡ이것을 깨달았다.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ㅡ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우리가 숲속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느껴질 때조차 나는 늘 그의 - P168

존재 안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한 사람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뒤에도, 심지어 우리가 ‘힘든 일‘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나는 월리엄에 대해 여전히 그렇게 느꼈다. 그와 결혼하고 처음에, 그리고 (앞서 말했듯) 우리에게 곧바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빙빙 돌며 헤엄치다가 이 바위에 부딪힌 물고기처럼 느껴져." - P169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문득 윌리엄과 함께 살던 시절에 결혼이라는 것이 내게 종종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생생히 떠올랐다. 방안 가득 익숙함이 짙어지고, 상대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로 목구멍이 거의 꽉 막혀 실제로 콧구멍까지 밀고 올라온 것같은 느낌상대의 생각이 내뿜는 냄새, 입 밖으로 나온 한마디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자의식,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면서 약간 씰룩이는 모습.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살짝 기울어지는 턱,
상대 말고는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런 걸 느끼고 살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친밀함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것이 되었다. - P177

캐서린은 밤에 내 딸들을 돌봐줄 사람을 고용했다. 내기억에 한 번의 예외ㅡ우리가 그녀의 병에 대해 알게 됐을 때,캐서린이 병에 대해 알리려고 뉴욕에 왔을 때, 그녀는 몸을 떨고있었고, 그렇게 떠는 모습을 보니 우리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를 ㅡ제외하면 그녀는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고,대부분의 시간 동안ㅡ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ㅡ우리는 어떤면에서, 그냥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곧 죽으리란 걸 내가 정말로 믿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캐서린도 정말로 그걸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치료를 받았고, 우리는 그것도 충실히 해나갔다.
치료가 끝나고 한 시간 뒤면 후유증이 나타나리란 걸 알아서, 우리는 치료가 끝나면 같이 식당으로 가서 머핀을 먹었는데, 캐서린이 머핀을 먹고 커피를 마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 P180

그리고 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윌리엄이 내가 집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딸들을 가사도우미에게 맡기고 다시 나왔던게 기억난다. 내 기억에 그는 별말 없이 다정하게, 정말로 다정하게 나를 대했다.
윌리엄은 집안에 들어와서 어머니의 방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누구도 면회는 안 돼." 그리고 나는 윌리엄이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의 부고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여인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윌리엄은 부고를 쓰고 있었고, 왠지 모르지만 그후로 내내나는 윌리엄의 그런 행동을존경했다.
앞서 말한 권위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 P184

나는 내 어둑한 호텔방 의자에 돌처럼 가만히 앉아 그 일을 생각했다. 크리시가 그만큼 아팠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면에서는 그게 내 잘못이었음을 처음으로 이해했던-마음속에서 조금도 축소하지 않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이다―것 같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나였으니까. - P188

내가 아무리 마음속 깊이 그렇다고 느껴도 나는 투명인간이아니다. - P189

신기하게도, 그날 그 순간 뭔가가 분명해졌다ㅡ그리고 메인주의 어두워지는 호텔방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또 한번 분명해졌다.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가 그 한순간에 분명해졌다. 나는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다시는 잊지않았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또 그렇게 하고 말았다. 그가 내게 리처드백스터에 대해, 그의 연구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 말을 곧장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의 지적이 절대적으로 옳 - P191

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방에 앉아 있었고, 가슴속에 아주 생생한 고통이-육체적인 통증을 느꼈다는 말이다-작은 파도가자꾸만 출렁이는 것처럼 존재했다. 날이 완전히 컴컴해졌을 때나는 천장등을 켜고 방으로 치즈버거를 갖다달라고 주문했다. - P192

윌리엄은 고단해 보였고,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반사적으로 콧수염을 쓸어내리고 일어서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나를 떠나기로 선택했다고?" 윌리엄이 나를 돌아보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이라고, 루시? 사람이 살면서 정말로뭔가를 선택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될까? 말해봐. 당신이 정말 가족을 떠나기로 선택했어? 아니,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당신은.…… 당신은 그냥 떠났어. 그래야만 해서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런 불륜을 저지르기로 선택한 건가?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P194

이제 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면 당신도 비열한 말을하겠다고 선택한 게 아닌 거네, 윌리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나도 그건 알아!" 그리고 덧붙였다. "내 머릿속은 정말로 비열해서, 당신은 내가 얼마나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믿지 못할걸."
윌리엄이 한 손을 들고 말했다. "루시, 누구든 머릿속은 다 비열해. 맙소사."
"그래?" 내가 물었다.
그러자 윌리엄이 어정쩡하게 웃었는데, 그렇지만 기분좋은 웃음이었다. "그래, 루시, 다들 머릿속은 비열해. 혼자 하는 생각말이야. 그런 건 흔히 비열한 생각이야. 당신은 아는 줄 알았는데, 작가잖아. 오 맙소사, 루시." - P196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다. 내가투명인간이라고 느끼지만, 나는 엄마다.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하곤 했다. 이렇게 말했다. "어디 먼 데로 차를 몰고 가서 나무를 찾아 목을 매달거다." 나는 어머니가 진짜로 그렇게 할까봐 잔뜩 겁을 먹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없을 거다." 나는 매일 겁에 질려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매일 그대로 있었다. 그뒤로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 학교에 남기시작했는데, 매일 수업이 끝난 후 학교에 남았고 그렇게 하기 시작한 건 따뜻하게 있고 싶어서였고-우리집은 너무 추웠고, 나는 추운 게 늘 싫었다-거기 남아 숙제를 할 수 있는 게 안심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따금 어머니에 대해, 할 거면 해버려요!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자살할 거면 해버려요! 이런 뜻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정말로 그렇게 하면 그 작은 타운에서이미 이상할 대로 이상한 우리가 더욱 이상해 보일까봐 걱정이되었다. - P205

"그만하자." 내가 말했다. "중요하지 않아." 그 일은 더이상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할때 내 안에서 물이 찰랑이는 듯한 작은 감각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그가 조앤하고 결혼해서 살 때도 그랬고,
에스텔하고 결혼해서 살 때도 그랬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니었던 거네? 그러니까 나 때문이 아니었던 거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전날 밤 선택에 대해서 말한 것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그런 면에 대해 아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것이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모른다. - P208

그러자 로이스가 슬픈, 거의 닫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녀가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로이스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나는 이제 젊지 않아요. 당신과 이야기하는 건 충분히 즐거웠지만, 그를 만나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 내가 말했다. 내가 떠나려는 동작을 하자 그녀가일어섰고, 그래서 나는 우리 대화가 끝난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현관까지 나를 배웅해주었고, 문을 당겨 열었다. 문은자주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열릴 때 좀 뻑뻑했다. 그리고 나는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그 문을 통과해 들어와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을 캐서린을 상상했다. - P235

나는 로이스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 아주 살짝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책을 읽었을 때 회고록말이에요-나는 거기 감자 농부, 내 아버지가 나온 걸 보고 깜짝놀랐어요! 그리고 계속 생각했죠. 내 이야기도 나오겠지, 그 농부의 아내가 아기인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도 나올거야. 하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첫 남편을 떠난 건 알았지만 남기고 온 다른 존재에 대해선몰랐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음, 이제는 알겠어요.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그리고 그거 - P235

알아요? 바보 같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어요. 캐서린을 향해 다시 분노가 일었죠. 그리고 당신에게도 화가났어요- 내가 그 책에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오, 로이스." 나는 묘한 비현실감을 느꼈고, 머리가 제대로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를 먹어야 할 때처럼. 다만 그보다 더 심하게.
"음." 그녀가 작게 웃었다. "이걸로 책을 쓴다면, 나도 등장하고 싶어요."
"오, 그럼요, 물론이죠." 내가 말했다.
그러자 로이스는 다시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를 좋게 그려준다는 조건으로요."
돌아보는데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순간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피곤한 표정을 보면서 우리 대화가그녀에게 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고, 나는 미안했다. - P236

로이스의 말처럼 여기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기차역으로 들어갔고 다른 차는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도 누구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거기 앉아 캐서린이 눈 내리는 11월 저녁에 기차역을 향해 반쯤 뛰고 반쯤 걸었을 그 길을 바라보았다. 기차역은 작고 물막이 판자로 지은 것이었다. 기차역이라기보단 정거장이었다.
오, 나는 젊은 날의 캐서린이 바람 부는 11월의 어두운 거리를반쯤 뛰고 반쯤 걷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는데, 부츠도 신지않고 땅에는 그저 그녀의 신발과 눈뿐, 들키지 않으려고 진짜 코트도 걸치지 않은 채 짙은 색 옷을 입고, 스카프로 머리를 꼭대기까지 덮어 가리고서, 반쯤 뛰고 반쯤 걸어 기차역에 도착해 기다리는 모습을, 아주 겁먹은, 아주 많이 겁먹은ㅡ어쩌면 아버지손에 오랫동안 학대를 당해서 늘 겁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P240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간 알고 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다.
입학처의 그 남자는 내가 자기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걸, 타이거라는 단어를 듣고 무언가 다른 단어로 그를 불러줄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그 컵 홀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지않았지만 슬프진 않았고, 무엇보다 애초에 그가 나를 좋아했던게 늘 신기했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내 요점은 이것이다! 윌리엄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어떤 점과 내가 윌리엄에 대해 알고있는 어떤 점이 우리를 결혼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 - P243

 "그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 어떻게 그걸 해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독특한 사람이야, 루시, 당신은 특별한 영혼이야. 그날 막사에 갔을 때 당신이 두 개의 우주인지 어딘지 사이를 오갔다고 했던 거, 나는 믿어, 루시, 당신은 특별한 영혼이니까.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있었던 적이 없어." 잠시 뒤그가 덧붙였다. "당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루시"
윌리엄은 다시 차를 몰고 도로로 나갔다.
나는 그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그 옛날 내시 선생님의 차에 탔을 때도 이런 행복감이 단번에 나를 휘감았었다는 생각이들었다. "오 필리."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 P249

나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ㅡ그리고 그 남자가 어떤 기분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모른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투명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게어떤 기분인지 알기 때문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겉모습을 보고는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만 달랐다. 하지만 나는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에대해.

공항 창가에서 나는 아주 넓은 주차장을 돌고 있는 윌리엄을보았다. 그는 내 시야에서 거의 벗어날 만큼 한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걸었다. 나는 계속 지켜보았고그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자꾸 내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오 윌리엄! - P254

내가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던가.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남편에게 나를 위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오, 그건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때까지 모른다는 것. - P257

나는 로이스 부바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건강해 보였다는생각을 했다. 앞서 말했듯, 그녀가 편안한 방식으로 자기 세계안에 있는 것 같았다는 뜻이다. 그녀의 집에는 가족사진이 많았고, 그곳은 원래 그녀의 어머니 집이었다. 나는 그녀가 어머니가자란 집에서 살고 할머니의 장미 관목을 돌본다는 사실에 속으로 조용히 놀랐다. 하지만 그게 왜 나를 놀라게 하는 걸까? 그건그녀가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집에 대한 느낌은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사랑했다고, 로이스는 계속 말했다. 물론 그 어머니란매릴린 스미스, 그녀의 아버지와 결혼한 그 여인을 말한 것이다. - P272

하지만 로이스 부바가 생의 첫해를 방치된 채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캐서린은 분명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를 안고 보듬어주었을 것이고, 처음 열이 났을 때 걱정했을 것이고, 그녀가아기 침대에서 처음으로 몸을 일으켜 일어선 것을 보고 속으로조용히 전율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이계속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불한 대가를 알고, 그게 오빠와 언니가 지불한 대가에는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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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남편 윌리엄에 대해 몇 가지 말하고 싶다.


윌리엄은 최근에 몹시 슬픈 일을 몇 차례 겪었고ㅡ많은 사람이그런 일을 겪었다-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래야 한다고 거의 강박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일흔한 살이다.
두번째 남편 데이비드는 작년에 죽었는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과정에서 나는 윌리엄에 대해서도 슬픔을 느꼈다. 슬픔이란 정말로-오, 그건 정말로 고독한 일이다. 그것이 슬픔이 무서운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슬픔은 당신이 유리로 된 아주 높은 건물의 긴 외벽을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당신을 보는 사람이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 P9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사람은 윌리엄이다.

*

그의 이름은 윌리엄 게르하르트, 당시 유행과는 맞지 않았지만, 나는 그와 결혼하면서 내 이름에 그의 성을 붙였다. 그때 내대학교 룸메이트는 말했다. "루시, 그의 성을 쓰겠다고? 난 네가페미니스트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더이상 내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당시 나는 내가 나인 것에 지쳐 있었고, 이미 내 인생 전체를 나로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에 바쳤던 터라ㅡ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그의 성을 따랐고 십일 년 동안 루시 게르하르트가 되었지만, 한 번도 그 이름이 내게 맞는다고 느낀 적이없었다.  - P10

그래서 윌리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운전면허증에 다시 내 원래 이름을 넣으려고 차량관리국을 찾아갔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절차가 훨씬 번거로워서, 다시 법원에 가서 무슨서류를 준비해 와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 오그리고 나는 다시 루시 바턴이 되었다.
우리는 결혼해서 거의 이십 년을 같이 살았고, 그런 뒤에 내가그를 떠났고, 우리에겐 딸이 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랜 세 - P10

월 친하게 지내왔다ㅡ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건 정확히 모르겠다. 이혼에 대해서라면 끔찍한 이야기가 많지만, 헤어짐 자체를 제외하면 우리 이혼은 그렇지 않았다. 이따금 나는 헤어짐의 고통과 그것이 내 딸들에게 일으킨 고통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 여기 살아 있으며, 윌리엄도 그렇다.


나는 소설가라서 이 이야기를 거의 소설처럼 써야 하지만, 이건 진실이다ㅡ내가 써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실이다. 그리고 나는 말하고 싶다ㅡ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윌리엄에 대해 뭔가를 이야기한다면, 그가 내게 말해줬거나 내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 P11

나는 윌리엄이 아인슈타인처럼 생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않지만, 그 젊은 여자가 말하는 게 뭔지는 알 것 같다. 윌리엄의콧수염은 회색이 섞인 흰색으로 풍성하지만 잘 손질되어 있고,머리칼도 숱이 많고 흰색이다. 커트를 했는데, 일부 머리칼은 삐죽삐죽 뻗쳤다. 그는 키가 크고 옷을 아주 잘 입는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인슈타인은 묘하게 광적인 인상을 풍기지만 윌리엄은 그렇지 않다. 윌리엄의 얼굴에는 보통 유쾌한 표정이 고집스럽고 폐쇄적으로 떠올라 있지만, 아주 드물게 한 번씩은 고개를뒤로 젖히고 진짜로 껄껄 웃는다. 나는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의 눈은 갈색이고 한결같이 크다.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은 뒤에도 큰 눈을 유지하지는 않지만, 윌리엄은 그렇다. - P12

한 가지 더. 이것은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떠나는 느낌과 관련이 있어서, 자신이 거의 세상을 떠나고 있다고 느꼈지만, 그는 어떤 사후 세계도 믿지 않았기에, 어떤 밤에는 그로 인해 내면에 일종의 공포가 차올랐다. 이런 때는 대체로 계속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었지만, 가끔은 일어나 거실로 가서 창가의커다란 적갈색 의자에 앉아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을 때까지책ㅡ그는 전기를 좋아했다—을 읽었다. - P20

그 시기에 윌리엄은 자신의 실험실로 출근해서 연구를 했다.
그는 기생충학자였고, 뉴욕대학교에서 오랫동안 미생물학을 가르쳤다. 학교에서는 그가 계속 연구실을 쓸 수 있게 해주었고,조교도 한 명 붙여주었다. 수업은 더이상 하지 않는다. 학생들을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그는 자신이 그 일을 아쉬워하지않는다는 사실에 놀랐고ㅡ최근에 내게 해준 이야기다ㅡ생각해보니 자신은 학생들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는데, 가르치기를 그만둔 뒤에야 자신이 정말로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왜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가? 그건 내가 결코 몰랐기때문일 테고, 윌리엄 역시 전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매일 아침 열시에 학교로 가서 오후 네시까지 근무하면서, 논문을 쓰거나 연구를 하거나 실험실에서 일하는 조교를 지도했다. 이따금ㅡ일 년에 두 번이었을 것이다ㅡ학술 대회에 참가했고, 같은 분야의 다른 과학자들 앞에서 논문을발표했다. - P24

그러자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고, 나는 베카를 끌어안았다. 크리시가 다가왔고, 딸들은ㅡ내 생각에ㅡ거의 늘 그렇듯 서로를 다정하게 대했다. 두 아이는 항상ㅡ내가보기엔ㅡ거의 부자연스러울 만큼 가깝게 지냈다. 그애들은브루클린에서 서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산다. 나는 그애들의 남편들과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크리시의 남편은 금융계에서 일하는데, 윌리엄과 내게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야이지만, 그건 단지 윌리엄은 과학자고 나는 작가라 우리가 그쪽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영민한 사람이라는 건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베카의 남편은 시인인데,
오 맙소사 가여운 사람, 내 생각에 그는 자기중심적이다. 그 순간윌리엄이 다가왔고, 우리는 누군가가 그를 부르기 전까지 한동안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를 뜨기 전에 그가 허리를숙이고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루시. 당신이 와줘서 좋았어." - P36

유쾌한 거리감과 온화한 표정을 지닌 그는, 가슴속에 묵직한두려움 덩어리를 지닌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실상은 그보다 더 나빴다. 그의 고양된 유쾌함 이면에는 청소년이나 할 법한 불평불만이 깔려 있었고, 영혼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번뜩였다.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탓하는ㅡ그는 나를 탓했고, 나는 종종 그것을 느꼈다―퉁퉁한 소년같았다. 우리의 현재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뭔가로 나를 비난했고, 나를 "여보"라고 부르면서 커피를 내려ㅡ당시에 그는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았음에도 매일 아침 나를 위해 한 잔을 만들었다ㅡ내 앞에 순교자처럼 내려놓으면서도 나를 비난했다.
그 바보 같은 커피는 그만 됐어, 나는 이따금 외치고 싶었다.
내 커피는 내가 만들어 마실 테니. 하지만 나는 윌리엄이 내민커피를 받고 그의 손을 만지면서 "고마워, 여보" 하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루를 시작했다. - P37

불빛을 보고 대학 입학 첫날에 나를 태워다준 진로 상담 교사,내시 선생님을 떠올렸다ㅡ오 나는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날 선생님은 나를 태우고 달리다가 갑자기 고속도로에서 차를돌려 쇼핑몰로 들어가더니 내 팔을 톡톡 치며 "내려, 내리자" 하고 말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쇼핑몰로 들어갔고, 그녀는 한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십 년 뒤에갚으면 돼, 루시, 알겠지?" 그러고는 내게 옷을 몇 벌 사주었다.
긴소매 티셔츠를 색깔별로 여러 벌 사주고 스커트 두 벌, 블라우스 두 벌을 사주었는데, 그중 한 벌은 예쁜 페전트블라우스였다.
하지만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것은 선생님이 사준 옷이었고,그것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 P40

내가 그때까지 본것 중 가장 예쁜 작은 속옷 뭉치. 그리고 선생님은 내 몸에 맞는청바지도 사주었다. 그리고 여행용 가방도 사주었다! 베이지색바탕에 붉은색 테두리가 둘린 것이었는데, 차로 돌아갔을 때 그녀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여기 안에 전부 담자." 그러더니 차 트렁크 안에 가방을 넣고 연 다음, 옷의 가격표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나는 난생처음 보는 아주 작은 가위 -나중에 그게 손톱 손질용 가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로 잘라냈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 가방 안에 내 물건을 전부 담았다. 그녀가 그렇게 해준 것이다. 내시 선생님이 선생님은 그로부터 십 - P40

년이 안 돼 돌아가셨다. 자동차 사고가 죽음의 원인이었고, 그래서 나는 은혜를 갚을 기회를 잃었으며, 그뒤로 한 번도 그녀를잊은 적이 없다. (캐서린과 함께 쇼핑하러 갈 때마다 나는 내시선생님과의 그날을 생각했다.) 그날 우리가 대학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시 선생님에게 농담처럼 "선생님이 제 엄마인 것처럼 해도 돼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말했다. "그럼, 그래도 되지, 루시!" 내가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그녀가 나와 함께 기숙사로 들어갔을 때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었으니, 사람들은 선생님이 내 엄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늘-오, 늘! - 나는 늘 그 여인을 사랑할 것이다. - P41

우리는 캐서린을 사랑했다. 오, 우리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우리 결혼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캐서린은 활기가 넘쳤다. 얼굴은 종종 빛으로 가득했다. 내 대학 친구는 그녀를 처음 만난 뒤 내게 말했다. "캐서린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빨리 호감을 느꼈던 사람이야."
나는 그녀의 집이 놀랄 만큼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집은 매사추세츠주 뉴턴의, 나무가 줄지어 심긴 거리에 있었고 근처에는다른 집들도 있었다. 내가 그곳에 처음 갔을 때 햇빛이 부엌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하얀 식탁이 놓인 커다란 부엌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깨끗했다.  - P53

조리대는 하얀색이고, 큰 아프리카제비꽃 한송이가 개수대 위쪽 창가 선반에 놓여 있었다.
개수대 위에 아치형으로 돌출된 수도꼭지는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나는 천국에 들어온줄알았다. 캐서린의 집 전체가 깨끗했다. 거실의 나무 바닥은 광채가 흐르는 벌꿀색이었고, 침실에 달린 흰색 커튼은 풀을 먹인 듯했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걸 잊을수가 없었다. - P53

그러니 캐서린은 가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러 갔을때 나는 그 집의 우아한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녀가 사회 계급에서 제법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나는 미국에서의 계급이라는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완전히 이해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밑바닥 출신이고, 그렇게 태어나면그 사실은 절대 당신을 진정으로 떠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내가 정말로 그것을, 내 출신을, 가난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는뜻이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 같다. - P54

예전에 한번은 캐서린이ㅡ윌리엄과 내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때였다ㅡ내게 우리 가족에 대해 물어보았고, 나는 입을 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내가 "말을 못하겠어요" 하고 말하자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귤색 카우치의 내 옆자리에 앉아 두 팔로 나를 안으며 말했다. "오루시." 캐서린은내 팔과 등을 어루만지며 계속 그 말만 했고, 내 얼굴을 자기 목에 갖다댔다. "오 루시." 그날 캐서린은 내게 말했다. "나도 우울해질 때가 있어." 그래서 나는 놀랐다. 내가 아는 누구도, 어떤 어른도 그런 말을 해준적이 없었고 게다가 그녀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캐서린은 나를 다시 안아주었다. 나는 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그런 다정함이 있었다.
- P59

"나는 크리시의 눈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베카의 눈물에대해서도내가 아이였을 때 부모님은 오빠나 언니나 내가 울면 무조건몹시 화를 냈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우리가 울지 않을 때도자주 화를 냈고, 우리 중 하나가 울면 두 분 다 우리에게 거의 미친 사람처럼 화를 냈다. 전에도 이 이야기를 썼지만 여기서 다시언급하는 건 몇 년 전 내가 아는 한 여자가 해준 이야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수녀가 자기에게 ‘눈물을 흘리는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베카도 가진 재능이다. 심지어 크리시도 필요할 때는 그 재능을 보인다. 내게 운다는 건 대체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하려는 말은, 나도 울지만 울면서아주 많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그걸 잘 받아주었다.
내가 정말로 서럽게 울면, 데이비드라면 겁을 먹었겠지만 윌리엄은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비드와 살 때는 한 번도 첫 결혼에서처럼 그렇게 울지는 않았다. 아이처럼 서럽게 흐느끼지는않았다.  - P64

그해에 윌리엄이 내게 책을 읽어주던 게 기억난다. 어린이용책이었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었고, 그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책이었다 스스로 자기 삶을 개척한 소년에 대한 내용이었다. 매일 밤 우리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그가 몇 페이지씩 읽어주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다른 무엇보다 윌리엄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불을 끄고내 몸에 손을 뻗지 않으면-대부분의 밤에 손을 뻗었다-공포와 상실감을 느꼈다. 나는 그 정도로 그를 원했다. - P72

우리는 윌리엄의 어머니가 회원인 어느 컨트리클럽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의 대학 친구 몇 명과 그의 어머니의 친구들이참석한 아주 작은 결혼식이었고, 결혼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쯤전에 클럽 위층 어느 방에서 드레스를 입던 중에ㅡ내 부모님과언니 오빠는 참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한 뒤로 내게 무언가를 보내지도 편지를 쓰지도 않았다ㅡ나는좀 야릇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명하기 아주 까다로운데,
이 모든 상황이 완전히 현실 같지는 않다는 그런 느낌과 비슷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윌리엄 옆에 서서 치안판사를 앞에 두고결혼 서약을 할 때는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윌리엄은 내가결혼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주려는 듯 큰 사랑과 다정함 - P72

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사라지지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뒤돌아섰을 때 나는 그의 어머니가 몹시 기뻐하며 손뼉을 치는 것을 보았고, 아마ㅡ확실하지는 않지만ㅡ그 순간 내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줄곧 어머니를 보고 싶어했을 수도 있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방금 묘사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혼식이 끝나고 열린 조촐한 피로연에서도 내가 정말로 거기 존재한다는 느낌은 들지않았다. 내가 그 자리로부터 제거된 것처럼, 모든 것이 조금 멀리 있는 듯 느껴졌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호텔에서는 평소처럼 남편에게 나를 자유롭게 맡길 수 없었다.
그 느낌이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었다. - P73

진실은 이것이다. 그 느낌은 영영 사라지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와의 결혼생활 내내 나는 그것을 느꼈고밀물과 썰물처럼 오갔다―그 느낌은 정말 끔찍했다. 윌리엄에게,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내 옆에 종종 머물러 있는 은밀하고 조용한 공포였고, 밤에그와 함께 침대에 있을 때도 나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윌리엄이 그걸 알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그는 당연히 알았고, 결혼하기 전 그가 내게 손을 뻗지 않은 밤에 느꼈던 - P73

절망감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결혼해서 살 때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수치스럽고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윌리엄이 행복을 덜 느끼게 되고 작은 일에서 마음의 문을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내 눈앞에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은 덮어둔 채 우리의 삶을 살았다. - P74

어린 시절 나는 언니든 오빠는 거짓말을 하면, 심지어 하지 않았더라도 부모님이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입안을 비누로 씻어야 했다. 그것이 그 집에서 우리에게 일어난최악의 일은 아니었고, 그래서 지금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한다. 우리는 작은 거실의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고, 거짓말을한 사람이 누구건 간에 예를 들어 언니 비키가 거짓말을 했다고 치면-나머지 두 아이, 오빠와 나 중 하나는 언니의 팔을 잡아 누르고 나머지 하나는 언니의 다리를 잡아 눌러야 했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접시 닦는 행주를 가져다가, 욕실로가서 그것에 비누를 묻힌 다음 비키가 혀를 내밀면 입안에 행주를 쑤셔넣은 뒤 구역질을 할 때까지 계속 문질렀다.
나이를 먹고 생각하니, 부모님이 이 행위에 나머지 아이들을개입시킨 것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아주 잘 쓴 것 같다. 그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그랬듯, 그게 우리를 갈라놓았다. - P81

이걸 한번 이해하려고 해보라.
대형 코르크판이 있고 그 판에 지금껏 살아온 모든 사람의 핀이 꽂혀 있다면, 거기 내 편은 없을 거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낀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아주어렵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하려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자랄 때 우리집에는 욕실 세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던 아주 작은거울 말고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일수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적인 수준에서 나를 투명인간으로 느낀다는 말 외에는. - P82

그러고도 조앤에 대해서는 그뒤로 석 달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조앤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내가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에 대해 들을 때도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이미 했었다. 하지만 이 조앤이라는 여자는 수도 없이 우리집에 찾아왔고, 어느 여름 내가 아파서 병원에입원했을 때 내 딸들을 병실로 데려오기도 했으며, 예전부터 남편의 친구이자 내 친구였다.


내 안에서 튤립 줄기가 툭 꺾였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튤립은 꺾인 채로 내 안에 남았고, 결코 다시 자라지 않았다.


나는 그후로 좀더 진실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P98

데이비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이야기를읽는 당신도 이 사실은 알아야 할 것 같아 말하려 한다.
윌리엄 말고는 내게 집이 없었다고 말할 때 그건 사실이다. 데이비드는 이 얘기는 이미 했지만 하시드파 유대인이었고,
시카고 근교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하지만 그는 열아홉살 때 그공동체를 떠났고 추방된 채 살았으며, 거의 사십 년 뒤 누이가연락해올 때까지 가족과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당신이 알아야할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그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둘다 자라면서 바깥세상의 문화를 접하지못했다. 우리 둘 다 자랄 때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다.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모호하게만 알다가 나중에 스스로 깨우쳤다. 우리가 성장한 시기에 유행한 노래를 알았던 적도 없었고ㅡ들어 - P100

본 적이 없었으므로ㅡ더 자랄 때까지는 영화를 본 적도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쓰이는 관용구를 알았던 적도 없었다. 그렇게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란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집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ㅡ둘 다 그렇게 느꼈다ㅡ스스로가 뉴욕시티의 전화선 위에 내려앉은 새들 같다고 느꼈다.
이 남자에 대해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데이비드는 키가 작았고, 어린 시절 사고로 한쪽 골반이 반대쪽보다 더 올라가 있어서 심하게 절뚝거렸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는ㅡ키가 크지 않았기에ㅡ약간 과체중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가 윌리엄과는 ㅡ거의ㅡ이보다 더 다를 수는 없다 싶을 만큼 딴판으로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과결혼했을 때 내게 일어난 반응이 데이비드와는 전혀 일어나지않았다. 내가 하려는 말은 데이비드의 몸이 늘 내게 엄청난 위로가 되어주었다는 말이다. 맙소사, 그 남자는 내게 위로의 존재였다. - P101

내 어머니와 관련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글은 이미 썼고, 어머니에 대해서라면 정말로뭐든 더는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읽으려면 몇 가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몇 가지란 이것이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폭력 이외의 방식으로 접촉한 기억은 전혀 없다. 어머니가 사랑한다. 루시, 하고 말한 것을 들은 기억도 없다.  - P105

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캐서린은 내게 뭘 갖고 싶은지물었다. 나는 서점 상품권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서점으로 가서책을 몇 권 산다고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내 생일에 그녀는 나를 바깥 차고로 데려가 골프채가 들어 있는가방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생일 축하한다." 그녀가 두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네 골프 세트야." - P109

그때 이후로 나는 내 일 때문에 세상을 돌아다녔고ㅡ책이 출간되자 외국 출판사들이 나를 초대했고 세상 곳곳에서 페스티벌이열렸다 그러니까 그때 이후 아주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비행기일등석에 탔는데, 그 자리에 앉으면 칫솔과 치약과 안대가 들어있는 작은 키트를 준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숱하게 경험했다.
삶이란 얼마나 신기한가. - P117

우리 사회에는 이럴 때 엄마들이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의사누구? 엄마가 같이 갈까? 정확히 문제가 뭔데? 하고 말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 문화에선 그렇지 않다. 나는청교도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님 두분 다 청교도 집안 출신이며ㅡ그분들은 그걸 자랑스러워했다ㅡ우리는 서로 그런 식으로대화하지 않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에서는 대화 자체가많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질 때 나는 늘 그러듯 딸들에게 키스했고, 아이들과 헤어질 때는 매번 정말 마음이 아프다. 이번에는 심장이 약간더 많이 아팠다.
행운을 빌어요! 행운을 빌어요!" 아이들이 길 건너 계단을 내려가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게 소리쳤다. "연락 주세요.
소식 알려주세요! 안녕, 엄마! 안녕, 엄마!" - P119

나는 윌리엄과 라과디아공항에서 만났는데, 멀리서부터 그를알아보았고, 그의 카키 바지가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에마음이 조금 아팠다. 그는 로퍼를 신었고, 양말은 파란색으로진청도 아니고 연청도 아니었는데, 바지 밑단 아래로 몇 인치가드러나 보였다. 오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오윌리엄!
그는 몹시 지쳐 보였다. 눈 주위에 다크서클이 드리워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안녕, 버튼." 그러더니 내옆에 앉았다. 바퀴 달린작은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왔는데, 두 가지 색조의 짙은 갈색이었다. 내가 알기로 비싼 것이었다. 그는 나의 바퀴 달린 강렬한보라색 가방을 쳐다보았고, 이어 말했다. "정말로 이런 걸?"
"오 그만." 내가 말했다. "이건 결코 잃어버릴 일이 없어."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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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내 침대 발치에 앉은 지 사흘째가 되던 날, 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가지않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간이침대를 가져다주겠다는 간호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고, 나는 엄마가 곧 떠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종종 그러듯 나는 미리부터 그 순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미리부터 두려움을 느낀 첫번째 사건은 어린 시절 치과에 갔던 일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치과 치료를 거의 받지 못했고, 우리의 치아는 유전적으로
‘충치가 잘 생기는 이‘로 여겨져, 당연하게도 치과에 가는 것은두려움 가득한 일이 되었다. 치과의사는 무료로 치료해주었지만 시간이나 태도 면에서 다 인색했고 우리라는 존재자체를 싫 - P89

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치과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부터 내내 걱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내가 치과에 자주 간 건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을 두배로 겪는 건 시간 낭비라는 것.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오로지, 마음은 원해도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 P90

나는 애써 울음을 참느라 한동안 간호사실 쪽에 있는 의자에앉아 있어야 했다. 치통이 옆에서 나를 감싸안아주었고, 그렇게해준 그녀를 나는 지금도 사랑한다. 가끔 나는 테네시 윌리엄스가 블랑시 뒤부아의 이런 대사를 썼다는 사실에 슬퍼진다. "나는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의 친절을 통해 여러 번 구원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그것도 범퍼스티커처럼 진부해진다. 나는 그 사실이 슬프다. 아름답고 진실한 표현도 너무 자주 쓰면 범퍼스티커처럼 피상적으로 들린다는 사실이. - P98

나는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라는 것을. 마음, 영혼, 혹은 몸이 아닌 뭔가에 우리가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이건 그것은 지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것이야말로 대체로, 일반적으로ㅡ자연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내생각에 잘은 모르지만 그 또한 지쳐가고 있었다. - P100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에는 많은 계단과 함께 큼직하게 자리잡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고, 그 1층에는 조각공원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는데, 나는 이곳에 설치된 이 특별한 조각상을 남편과 함께,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면서는 아이들과 함께 숱하게지나쳤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아이들에게 뭘 먹지만 생각했고, 볼거리가 이렇게 많은 이런 성격의 미술관에서 다른 사람은뭘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조각상을 본 것은 한창 이런 필요와 걱정에 빠져 지내던 동안이었다. 그러니 내가 걸음을 멈추고 그 조각상을 쳐다보며 오, 하는 소리를 내뱉은 것은 최근-지난 몇 년 동안-그조각상에 찬란한 빛의 조명이 쏟아졌을 때였다. - P102

그 조각상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한 남자 주변에 그의아이들이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절박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이들은 그의 발치에서 그를 붙잡고 애원하는 것 같았고, 그는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양옆으로 잡아당기며 고뇌의 표정을 지은 채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아이들은 그만 쳐다보고있었다. 드디어 이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오, 하고 속으로 외쳤다.
설명을 읽으니, 그는 감옥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아이들은아버지에게 자기들을 먹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버지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은 그에게ㅡ오, 행복하게, 행복하게 자기들을 먹으라고 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도 알고 있겠구나, 하고.
그 조각가 말이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각상이 표현한 것을 글로 쓴 그 시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103

불쌍한 인간.
그 말은 나중에야, 안내원이 그 조각상이 위층에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내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았을 때에야 떠올랐다. 불쌍한 인간.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작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불쌍한 인간-그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돌았다ㅡ우린 모두 불쌍한 인간이다. - P104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방법을 찾아내는지가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P111

우리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날씨는 따뜻했고 창문은 열려 있었다. 세라 페인은 거의 시작하자마자 바로 지치는 것 같았다. 피로한 기색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공기가 충분히 차갑지 않아 모양이 망가진 흰색 점토처럼 허물어져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때문에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졌고, 세 시간이 다 끝나갈 즈음에는 더욱 심해져 하얀 점토 얼굴은 거의 파르르 떨리는 듯 보였다. 그 강의가 그녀의 진을 완전히 빼놓은것 같았다는 게, 내가 하려는 이야기다. 그녀의 얼굴이 피로로유린되었다. 날마다 그녀는 조금 반짝거리는 얼굴로 수업을 시작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피로가 그녀를 엄습했다.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피곤한 기색이 그토록 역력히 드러난 얼굴은본 적이 없는 것 같다. - P121

그리고 그런 순간이 내가 또 한번 그때는 왜 엄마한테 말하지못했지? 하고 생각하게 이걸 기록하면서 되는 순간이다. 엄마. 내가 배워야 할 단어는 우리가 집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거지 같은 차고에서 다 배웠어요. 왜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걸까? 그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그게 내가 평생 해왔던방식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가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한채 스스로 망신거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생각에, 많은 순간에 그런 사람이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도 나 스스로 망신거리가되었음이 희미하게 인식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어린 시절의 그느낌이 되살아난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이 세상에 대한 앎을 구성하는 엄청나게 큰 조각들이 빠져 있는 느낌.
하지만 어쨌거나ㅡ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주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내게 그렇게 해준다고 느낄 때에도 그렇게 한다. 그러니 그날 엄마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일어나 앉아, 엄마, 정말 기억 안 나요? 하고 말하지 않았을까? - P129

고양이 때문에 깜짝 놀란 세라 페인에게 비열한 말을한 그 여자 같은 몰인정한 사람들 말고. 그들의 대답은 사려 깊고, 거의 항상 똑같았다. 당신의 어머니가 어떤 기억을 가지고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나는 이런 전문가들이 좋다. 그들은예의를 아는 사람들이고, 나도 이제는 진실한 말을 들으면 그렇다는 것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도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 P130

세라 페인이 우리에게 평가 없이 빈 종이와 마주하라고 말했던 그날, 그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단순한 생각같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것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그날 밤 방금 서술한 내용보다 이 부분이 더 잘 기억난다-어둠속에서 아빠가 오빠 옆에 누워 오빠를 아기 안듯 안아주었다고,
오빠를 무릎에 올리고 가만가만 흔들어주었다고 나는 말하려 한 - P138

다. 나는 어느 눈물이 누구의 것이고 어느 중얼거림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 P139

세라 페인이 말했다. 자신의 글에 약점이 보이면 독자가 알아내기 전에 정면으로 맞서서 결연히 고쳐야 해요. 자신의 권위가서는 게 그 지점이에요. 가르친다는 행위에서 오는 피로가 얼굴에 가득 내려앉았던 그 강의시간 중 하나에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을 거라는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 P157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내 침대가 세워진 곳에서 복도 건너편 병실이바라보였는데, 조금 열린 문에 그 끔찍한 노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의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고, 내 느낌에 그는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죽어간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고, 그렇게 죽어가는 건 끔찍한 죽음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죽는 게 두려웠지만, 나는 그가 걸린 병에 걸리지 않았고, 그 사실은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그 병에 걸린 환자였다면 병원에서 나를 그렇게 오래 복도에 방치해두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남자의 시선에서 내게 뭔가를 간절히 부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서 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려했지만 내가 힐끔 쳐다볼 때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얼굴의 검은 눈동자를 생각한다. 내 기억에는 그 눈동자가 절망의 눈빛으로 뭔가 - P162

를 간청하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내게도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곁을 지킨 순간들이 있었고-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나는 육신의 최후의 빛이 꺼져갈 때 눈동자가 불붙듯 타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그 남자가 그날 내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 거야. 나는 그가 죽음이, 엄마가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P163

그는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는 게 참 좋아 보인다는 그 비슷한 말을 했고, 이유는 몰랐지만 나는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팅 소리를 내며 튕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어느 누구도 시간이 더 지나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남편이 그날 말고도 나를 보러 왔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내가 기억하는 건 그날이라 내가 쓰는 것도 그날에 대해서다. 이건 내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우리를 지나쳤던 숱한지와풀밭과 신선한 공기와 눅눅한 공기. 나는 그런 순간들을 쥐고 있을 수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 보라고 펼쳐 보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할 수 있다. 엄마가 옳았다. 내 결혼에 문제가 생겼다. 내 딸들이 각각 열아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떠났고, 우리는 둘 다 재혼했다. 우리가 결혼해서 같이 살 때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한다. - P171

어쩌나, 제러미 얘길 들었군요. 그녀는 그것이 남자들에게 일어나는 아주 나쁘고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도요, 하고 덧붙였다. 그녀는 내가 우는 동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본 그 남자에 대해 자주ㅡ정말로 자주ㅡ생각한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그날, 내가 누운 침대가 그 남자의 병실 밖 복도에 세워져 있던 그날, 문에 노란 스티커가 붙은 병실에 누워 있던 그 남자. 그가 애원하듯, 절망의 눈빛으로, 갈망하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던 것을. 내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면서. 그 남자가 제러미였을 수도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생각했다. 찾아볼 거라고. 공식 기록 어딘가에 틀림없이 남아 있을거라고, 그가 죽은 날짜와 죽은 장소가. 하지만 정말로 찾아본적은 없었다. - P178

세라 페인이 신의 마음처럼 활짝 열린 마음으로 빈 종이와 마주하는 것에 대해 말한 건 아마 그다음날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내 첫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어느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내가 만나본 의사 중에서 가장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종이에 그때 그 수강생이 뉴햄프셔 출신의 재니 탬플턴이라는 사람에 대해 말했던 것을 썼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썼다. 내 결혼생활에서 알게 된 것을 썼다. 내가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썼다. 그녀는 그걸 전부 읽은뒤 말했다. 고마워요, 루시. 괜찮을 거예요. - P187

내 책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나는 갑자기 돌아다닐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말했다. 얼마나 굉장한 일이에요-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진 거잖아요! 나는 전국방송 아침 뉴스에도 나왔다.
내 홍보 담당자가 말했다.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해요. 당신은 출근하려고 옷을 차려입어야 하는 여자들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사람이니 그 프로그램에 나가면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해요. 나는 그 홍보 담당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게는 권위가 있었다. 그 뉴스는 뉴욕에서 촬영했고, 나는 사람들이 내가그럴 거라고 예상했던 것만큼 겁을 먹지 않았다. 두려움이란 건참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옷깃에 마이크를 달고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란 택시가 보였고,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지금 뉴욕에 있어, 나는 뉴욕을 사랑해, 여긴 내 집이야. 하지만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가야 했는데, 그때는 거의 항상 겁을 먹었다. 호텔방은 외로운 장소다. 오, 제길, 거긴 외로운 장소다. - P195

남편과 헤어지고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나는 72번가를 걸어 이스트 강까지 산책을 하러 다녔다. 그 길을 따라가면 이스트 강이 바로 나오는데, 나는 거기서 그 강을 바라보며 오래전에 우리가 함께 구경하러 간 야구 경기를 떠올렸고, 내 결혼생활의 다른기억들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종류의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런 행복한 기억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양키스 경기에 대한 기억은 그렇지 않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전남편과 뉴욕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부푼다. 나는 지금도 양키스의 팬이지만, 내가 야구장에 다시 갈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삶이었다. - P203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내가 늘 글을 쓰고 있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며오빠나 언니,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아 안 간 것이기도 했다.) 시간은 늘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 - P204

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는 그날 병원에서 내가 오빠나 언니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지금 네 인생을 봐. 너는 묵묵히 네 길을 가서………… 원하는걸 이뤘잖아." 그 말은 아마 내가 이미 냉혹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말은 아마 진심이었겠지만, 엄마가 진짜 무슨 뜻으로한 말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P205

아무도 너희를 돌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않는다. 해서도 안 된다. 내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당시에는 남편만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아이들을 떠난 것이기도 했고, 집을 떠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내 것이 되었다. 혹은 남편이 아닌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되었다. 나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사람이었고, 움직였다. - P211

그 시절에 내 딸들이 느꼈을 분노란! 잊으려고 애쓰는 순간도있지만,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결코 잊지 못할그것이 무엇인지가 걱정된다. - P212

그 시절에 마음이 더 여린 딸 베카가 내게 말했다. "엄마, 엄마가 소설을 쓸 때는 그 내용을 다시 쓸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와이십 년을 살았다면, 그리고 그것도 소설이라면, 그 소설은 다른사람과 절대 다시 쓸 수 없어요!"
그애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그토록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애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베카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네 말이 맞아." - P213

또 가끔 생각하는 건, 내가 세라 페인을 옷가게에서 만났을 때그녀가 자기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녀가 아직 뉴욕에 사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뒤로 그녀는 새 책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몹시지쳐가던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는 하나뿐이라던 그녀의 말을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 그녀의 이야기가무엇이었는지 혹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쓴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다는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 P215

나는 요즘 혼자 집에 있을 때,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조용히소리 내어 말해본다. "엄마!" 그게 뭔지 나는 모른다 내가 내엄마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날 두번째 비행기가 두번째 빌딩을 들이받는 것을 본 베카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지. 내 생각엔 둘 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라의 이야기이자 내 대학 룸메이트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마. 엄마!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 P216

얼마 전에 크리시가 내 지금의 남편에 대해 말했다. "아저씨가좋아요, 엄마. 하지만 아저씨가 잠을 자다 죽고 새엄마도 죽어서엄마와 아빠가 다시 합치면 좋겠어요." 나는 아이의 정수리에 키스한 뒤 생각했다. 내가 내 아이에게 이런 짓을 했구나.
내가 내 아이들이 느끼는 상처를 아느냐고? 나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 P217

요즘 나는 가을에 우리의 작은 집을 둘러싼 농장에서 해가 지던 장면을 이따금 떠올린다. 어디를 봐도 지평선이 보여, 내가한 바퀴 빙 돌면 지평선도 한 바퀴 원을 그렸다. 해는 등뒤에서지고,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그 아름다운 변신을 멈출 수 없다는듯 은은한 분홍빛을 자아내다 슬며시 푸른 기운을 띤다. 이윽고지는 해에 가장 가까운 땅이 한 줄 오렌지색 선을 그리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어두워지다 거의 컴컴해진다. 하지만 돌아서면 땅은 여전히 부드러운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내며 몇 그루 나무와,
흙을 갈아엎고 간작 식물을 심은 고요한 들판을 보여주고, 하늘 - P218

은 머뭇거리다, 머뭇거리다 마침내 완전히 어두워진다. 그런 순간에는 영혼도 조용히 지켜볼 것만 같다.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 P219

기억의 자리들, 공백의 자리들

옮긴이의 말


기억은 자유의지를 가졌다. 순서를 바꾸고 덧칠을 한다. 가끔견딜 수 없는 것은 망각 속으로 보내버린다. 일부러인 듯 흐릿하게 만들어버려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의 상황을 놓고도 나와 당신의 기억은 다르다. 완성하지 않고 결론 내지 않아 영원히미완의 미결의 상태로 남겨버린다.
기억은 고집스럽다. 사건 자체는 희미해져도, 그 사건들이 남긴 감정은 고집스럽다. 예컨대 어머니가 실제로 내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는지 해주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나를 줄곧 붙들고 있는 감정은 ‘어머니가 한 번도 키스해주지 않은 것‘에서 비롯한그 결핍의 감정이다.
기억은 성장한다. 기억은 시간의 세례를 거친 나의 눈으로 시 - P223

간의 변화를 겪은 당사자들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그때 그런 것은 아, 그래서 그랬겠구나. 하지만 그 성장은 거의 혼자 크는 성장이라, ‘그랬겠다는 것은 나의 관점이지 우리의, 혹은 그들의 관점은 아니다.
그래서 기억은 매혹적이면서도 참 이기적이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그러저러한 이유로 ‘기억‘이라는 단어에 천착하는 편이고 ‘기억‘에 바탕을 둔 문학작품이나 영화들에 늘 끌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번역을 맡으면서 더 마음이 갔던 것도 이 소설이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 P224

첫 문장부터 이 이야기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은 것임을 선언한다. 이어지는 닷새 동안 어머니와 딸의 대화는 그 기억에서도 더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하긴 우리의 현재는 찰나의 순간에 과거가 되어버리니 우리의삶은 기억 안에 기억, 그 기억 안에 또다른 기억, 그 또다른 기억안에 또다른 기억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기억, 그런불확실한 과거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짓기 어려운 우리의 시간 안에 도사린 채 우리를 끊임없이 흔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 다섯번째 소설은 전작들과는 달 - P224

리 일인칭 시점의 글이다. 문학작품들을 읽다보면 어떤 작가들은 삼인칭으로 출발한 뒤에야 일인칭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는것 같고, 어떤 작가들(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은 일인칭으로 출발한 뒤에야 삼인칭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삼인칭 시점에서 출발한 작가다.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 작품을 쓸 때 자기 마음을 "너는 지금일인칭으로 쓰고 있어. 그것도 작가로 만들어서"라고 표현했다.
‘기억‘을 가장 섬세하고 유려하게 다루는 방법, 기억에 의한 우리의 흔들림을 가장 잘 담아내는 방법은 어쩌면 일인칭 시점, 그리고 작가가 주인공일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 P225

그 기억의 파편들을 모으면 뭐가 될까.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크다‘는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기억의 합이 기억 그자체보다 얼마나 더 큰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삶이 되고, 한세대, 여러 세대의 삶이 되고, 한 사회의 역사가 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수증기를 모은 듯 마르지 않았으면서 흠뻑 젖지도 않은, 감정이 부각되지 않아 더더욱 아련한 느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짧은 분량의 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 전체는 그 기억들뿐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이 개입되는 공백의 자리들을 포함하여, 그리고그 각각을 잇는 선들을 아울러서 참으로 큰 것이 된다. 덧붙이면 - P225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내는 선들이 굉장히 섬세해서 언뜻 개인적인 이야기로 읽히기 쉽지만, 그 섬세한 선들에는 역사와 변화하는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의 관계들이 무수히 잇닿아있어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보게 되는 풍경 역시 무한히 넓어진다.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낸 선들 중 그 출발점이자 가장 자세히 들춰지는 관계는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같다. 하지만 그야말로 출발점이지 전체는 아니다. 루시 바턴의 선은 아버지에게도,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지만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조금은 더 가까워진 오빠와 언니에게도 닿아 있다.  - P226

그렇게 한 가족의 이야기가 된다. 입원한 딸에게 안부를 전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자신의 불안함을 끊임없이 가족들에게 풀어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독자들이 그 마지막 임종의 순간까지 지켜보게 되는 아버지의 비중이 지면상으로는 그리 크지 않지만 더없이 무겁다. 어려서나 나이들어서나 결코 가깝다 말할 수 없는언니와 오빠의 무게 또한 마찬가지로 무겁다. 루시 바턴은 그들의 존재, 그들과 함께 보낸 과거의 시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다섯 식구가 정말로 건강하지 않은 가족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우리의 뿌리가 서로의 가슴을 얼마나 끈질기게 칭칭 감고 있는지 알 - P226

게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가족들을 좋아하지도않았잖아.‘ 그뒤로 나는 더더욱 두려워졌다."
한편 작가로 성공한 루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뉴욕을 사랑해, 여긴 내 집이야. 하지만 나는 다른 도시들에도 가야 했는데, 그때는 거의 항상 겁을 먹었다. 호텔방은 외로운 장소다. 오,
제길, 거긴 외로운 장소다." 그러니 가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절대적으로 부담스러운 것이다. 절대적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지만, 절대적으로 그리운 것이다. 루시 바턴은 책과 숙제를통해 이뤄낸 성과들을 통해) 떠날 수 있었기에 떠났지만, 떠남은달아남이 되기도 버려짐이 되기도 한다. - P227

이런 양가적인 상태. 그런 상태가 만들어내는 양가의 감정들.
떠나 있지만 떠나 있지 않은 상태(루시는 가족을 머리 위에 떠있는 구조물로 느꼈다. 속마음을 솔직히 말할 수도 말하지 않을수도 없는 상태("엄마, 내가 단편 두 편을 발표했어요‘에 이어지는 모녀의 대화). 내 욕구를, 내 감정을 드러낼 수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입원한 엄마에게서 이제 그만 돌아가달라는부탁을 받았을 때 보인 루시의 반응). 물어보지 않아 서운해하면서도 물어보지 않은 것을 친절하게 느끼는 상태(이건 때로 나조정말 그렇지 않은가. 개방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밖에 없는상태(모든 자기 노출의 글 이면에는 이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 P227

심지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런지 저런지 잘 모르는 상태("엄마!"는 나의 외침이었을까 딸의 외침이었을까. 이런 마음의 상태들은 없어지지 않고 우리의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런 기억의방문을 받을 때 우리는, 이를테면 옷가게에 들어가 옷을 입어보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붙인다.
한편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에 대한 어떤 평가 혹은 판단을 내리는 것, 그것도 결국은 미완의 것, 미결의 과제라고 볼수 있다. 영원한 미완, 미결의 기억들. 제러미에 대해 우리는 루시의 세 가지 기억을 바탕으로 추리할 수 있을 뿐이며, 루시와어머니는 그런 잡지를 읽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고,  - P228

세라 페인(아마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우리가누군가를 평가한다면, 더욱이 그것이 누군가를 얕잡아보는 평가라면, 단편적인 것들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 될것인가. 이 소설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것에 대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외국의 서평들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들을 ‘사회적 계급‘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글이 더러 있다.
기억이 미완의 것이고, 우리가 늘 양가적인 상태에 있고, 우리 - P228

삶이 늘 흔들린다 하더라도 내가 발 디딜 자리는 있다. "하지만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바턴이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분명한 한가지일 것이다.
작가가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다‘라고 선언하는모습을 잠시 상상해본다(내 이름을 넣어 나도 한번 해보았는데,
생각만 했을 때와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그 울림의 파급력이 상당히 다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열여섯 살 때부터 문예지에 단편을 써 보내기 시작해 스물여섯 살에 첫 단편이 실렸고,
그 이후로 글쓰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하지만 1956년생인 그녀가 1998년에야 어렵사리 데뷔 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을 발표할수 있었으니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작품으로 자신을 단단히다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걸린 셈이다.  - P229

그녀도 루시 바턴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특히 소설책이 꽂혀 있는 서가 근처를 서성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여름에는 바깥에 나가 놀았지만 혼자 놀았던 적이 더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나도 글을 쓰겠다!" 작가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사람들을 돕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했어요. (…) 누군가의 시야를 잠시조금이라도 더 열어주려고 애쓰는 것. 물론 ‘그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생각할 때도 더러 있지만 이 일이 세상을 도우려는 다 - P229

른 노력보다 더 어리석은 것 같지는 않아요." 작가가 만들어내는등장인물들에는 어쨌거나 작가 자신의 조각들이 조금씩 스며들게 마련인 것 같다. 어쩌면 작가가 된 루시 바턴에게도, 루시 바턴에게 ‘냉혹하라‘는 조언을 해주는 작가 세라 페인에게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조각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루시의 이야기가 이러했다면, 루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기억으로 남았을까? 루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앰개시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루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실제로 그들은 어떻게그 시간들을 보냈을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음 책이 그에 관한 것이라고 하니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쉽게 마음에서떠나보내서는 안 될 것 같다. 기억처럼, 삶처럼, 모든 문학작품도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미완인지 모르겠다.

정연희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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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ELIZABETH STROUT


1956년 미국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메인 주와 뉴햄프셔주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베이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뒤 영국으로 건너가 일 년 동안 바에서 일하면서 글을 쓰고, 그후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끊임없이 소설을 썼지만 원고는 거절당하일쑤였다. 작가가 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 그녀는 시러큐스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잠시 법률회사에서 일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돌아와 글쓰기에 매진한다.
문학잡지 등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던 스트라우트는 1998년 첫 장편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을 발표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는다. 이 작품은 오렌지상, 펜/포크너 상 등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아트 세덴바움 상‘과 ‘시카고 트리뷴 하트랜드 상‘을 수상했다. 2008년 발표한 세번째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로 언론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2009년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이 작품은 HBO에서 미니시리즈로도 제작되었다. 이후 『버지스 형제』『내 이름은 루시 바턴』 『무엇이든가능하다』와 같은 소설을 꾸준히 발표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19년 『올리브 키터리지의 후속작인 『다시, 올리브』를 펴냈다.
주인공 올리브 키터리지의 말년을 절절하면서도 아름답고 우아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오프라 북클럽 추천 도서로 선정되었다.




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지만, 내가 구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뉴욕의 병원이었는데, 내 침대에서는밤이면 환한 불빛이 기하학적으로 밝혀지는 크라이슬러 빌딩의풍경이 바로 보였다. 낮에는 그 빌딩도 아름다움을 잃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서히 여느 건물과 다름없는 그저 덩치 큰 건물이 되어갔고, 도시의 모든 건물들은 멀찍이 떨어져 침묵을 지키는 듯 보였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었다. 창가에 서서 저 아래보도를 내려다보며 봄옷을 입은 젊은 여자들-내 또래-이점심시간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이 기억난다. 대화를나누는 그들의 머리가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블라우스가 산들바람에 잔물결을 이루는 것이 보였다. 나는 퇴원하면 보도를 걸 - P9

을 때 나도 그렇게 걷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는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여러 해 동안 정말로잊지 않았다ㅡ병실 창문에서 내려다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며 내가 그 보도를 걷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먼저 말해두지만,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이다. 내가 병원에 입원한 것은 맹장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틀 뒤 병원에서 음식을 주었지만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어떤 박테리아 때문에 그러는지려내지 못했고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못했다. 나는 한 튜브로는 수액을, 다른 하나로는 항생제를 맞았다. 튜브 두 개 모두 바퀴가 달달거리는 금속 링거대에 달려 있어 링거대를 밀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나는 대법에 지쳤다. - P10

나를 꼼짝 못하게 했던 그 문제는, 그게 뭐였든 간에 7월을 앞두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 상태는 매우 이상해서 말 그대로 열의 대기 상태ㅡ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에 남편과 어린 두 딸이 있었다. 나는 딸들이 몹시 그리웠고, 그애들을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러다가 병이 더 심해지는 건 아닌지 겁이날 정도였다. 그러자 내 담당 의사ㅡ나는 그에게 깊은 애착을 느꼈다. 그는 군턱이 진 유대인으로 어깨에는 아련한 슬픔이 감돌았다. 그가 간호사에게 말하는 걸 들어보니 조부모와 친척 아주 - P10

머니 셋이 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했고, 뉴욕에 아내와 장성한 네아이가 있었다가, 이 사랑스러운 남자가 나를 안쓰럽게 여겼-는지, 내 딸들 각각 다섯 살, 여섯 살이 앓고 있는 병이 없다면 나를 보러 올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친구가 아이들을 병실로 데려와주었는데, 그 조그만 얼굴과 머리카락이 어찌나 지저분하던지 나는 링거대를 밀며 아이들을 샤워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외쳤다. "엄마, 완전 말랐어요!" 아이들은 정말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내가수건으로 머리를 닦아주는 동안 나와 함께 침대 위에 앉아 있었고, 이어 그림을 그렸지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 P11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다 말고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엄마, 이거 좋아요? 엄마, 내가 동화 속 공주를 그렸는데, 이 드레스 좀 보세요!"
하고 말을 붙이는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거의 말이 없었는데, 특히 둘째가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둘째의어깨를 감싸안자 아이의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나오면서 아래턱이 파르르 떨렸다. 그 작은 꼬맹이가 용감해지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떠날 때 나는 아이들이 우리 가족의 친구, 내아이들을 데려와주었고 자기 자식은 없는 친구와 함께 걸어가는모습을 창밖으로 내다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은 집안일로 바쁘고 직장일로 바빠서 나 - P11

를 보러 올 시간을 잘 내지 못했다. 우리가 연애하던 시절에 그는 병원이 싫다고 말했었는데ㅡ그가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ㅡ나는 그제야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처음에 들어갔던 병실에는 죽음을 앞둔 노파가 있었다.
내 옆쪽 침대에 누워 있던 노파는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했다ㅡ죽는다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데도 간호사들이 신경쓰지 않아 나는 깜짝 놀랐다. 남편은 견딜 수 없어했고ㅡ 그 병실로 나를 찾아오는 걸 견딜 수 없어했다는 말이다ㅡ나를 1인실로 옮겼다. 우리가 가입한 건강보험으로는 이런 호사까지 보장받을 수 없어서, 모아둔 돈이 하루하루 빠져나갔다. 그 가엾은 노파가 질러대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된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때 내가 느낀외로움의 크기를 누군가가 알아차렸다면 나는 창피함을 느꼈을것이다. 간호사가 체온을 재러 올 때마다 나는 조금이라도 그녀를 더 붙잡아두려 했지만, 간호사란 워낙에 바쁜 사람들이어서 한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 P12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일리노이 주 앰개시라는 작은시골 마을에서도 별종이었다. 그곳의 집들은 허물어지기 직전인데다 페인트칠을 새로 한 집도 없고 덧창이나 정원도 없어 눈길을 줄 만한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집들이 한데모여 마을을 이루었지만, 우리집은 그런 집들과도 떨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환경을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비키 언니와 나는 우리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이 우리에게 "너희 식구들한테서는 냄새가나" 하고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코를 잡으며 달아났기 때문이다.
언니는 2학년 때-교실에서 아이들 앞에 서서-담임교사에게가난이 귀 뒤의 때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으며 비누를 살 수 없 - P18

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훈계를 들었다. 아빠는 농기계 수리 일을 했는데, 사장과의 불화로 종종 해고를 당했지만 다시 고용되곤 했다. 그건 아빠가 일을 잘했기 때문에 다시 필요해져서였을 것이다. 엄마는 바느질 일을 했다. 우리집에서 도로까지 이어진 긴 진입로와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페인트로 바느질과 수선,
이라고 쓴 손글씨 간판이 있었다. 아빠는 밤에 우리와 기도를 올릴 때 우리에게 충분한 양식을 주심에 감사를 드리게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종종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고, 당밀을 바른 빵으로 저녁을 때운 것도 여러 번이었다. 거짓말을 하거나 음식을낭비하면 늘 벌이 뒤따랐다. 이따금 예고 없이, 부모님이 충동적으로 사정없이 우리를 때리기도 했는데 때리는 사람은 대체로엄마였고, 대체로 아빠가 보는 데서였다―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푸르죽죽한 피부와 침울한 태도를 보고 그 사실을 눈치챈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고립되어 있었다. - P19

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적막한 느낌이 이를 데 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나무를 내 친구로 여겼다. 나무는 내 친구였다.
우리집은 아주 긴 흙길을 걸어가야 나왔고, 록 강에서 멀지 않았으며, 근처에는 바람으로부터 옥수수밭을 보호해주는 나무들이 있었다. 그러니 우리집 근처에 이웃이 있을리 없었다. 우리집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신문이나 잡지, 책도 없었다. 엄마는결혼한 첫해에 그 지역 도서관에서 근무했는데, 그걸 보면 책을좋아했던 게 분명했다―오빠가 나중에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엄마에게 규정이 바뀌어 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만 고용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엄마는 결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엄마는 더는 책을 읽지 않았다. 엄마가 다른 지역의 도서관에 가서 다시 책을 빌려온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 P20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아이들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부부에게 자식이 없는 이유를 묻는 것이 무례하다는 건 어떻게 배우는가? 테이블 세팅을 하는 법은? 알려주는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본인이 입을 벌리고 음식물을 씹는다는걸 어떻게 알겠는가? 집에 있는 거울이 부엌 개수대저위의 작은 거울 하나뿐인데, 혹은 어느 누구한테서도 예쁘다는 말을 들 - P20

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 말을 듣기는커녕 가슴이 커지자 친엄마한테서 피더슨 씨네 헛간의 젖소 같아지기 시작한다는 말을 듣는데, 자기 모습이 정말로 어떤지 어떻게 알겠는가?
비키 언니는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언니와 나의 사이가 가까울 거라고 예상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 둘 다 친구가 없었고, 우리 둘 다 멸시를 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쳐다볼 때 그랬던 것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보았다. 지금은 내 인생도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 P21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1으로 가득차는 순간들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삶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 P21

듯 자신만만하게 보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은 아주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 P22

종조부가 돌아가시자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 살았다. 더운물과 수세식 변기를 쓸 수 있었지만, 겨울에는 여전히 지독하게 추웠다. 나는 추위라면 늘 질색했다.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할 때 그길을 결정하는 요소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그 요소를 찾아내거나 정확히 짚어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따금 나는 어째서 내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으려고 했는지를 생각해본다. 학교는 따뜻했고, 나는 그저 따뜻하게 있고 싶었다. 수위 아저씨는 늘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라디에이터가 쉭쉭거리는 교실로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나는 거기서 숙제를 했다. 종종 체육관에서 치어리더들이 연습하는 소리나 농구공 튕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을 테고, 음악실에서는 밴드부가. 연습을 하고 있었겠지만, 나는 따뜻하게 교실에 혼자 있었다.
숙제란하기만 하면 끝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숙제가 어떤 원리로 주어지는지도 그때 깨달았는데, 집에서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숙제를 마치면 나는 어쩔 수없이 교실에서 나와야 할 때까지ㅡ책을 읽었다. - P32

우리가 다닌 초등학교는 도서실을 갖추고 있을 만큼 크지는않았지만, 교실에 책이 좀 있어서 집으로 가져가 읽을 수 있었다.
3학년 때 어떤 책을 읽은 뒤로 나는 책이 쓰고 싶어졌다. 그 책은두 자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애들은 좋은 엄마를 두었고, 여름에는 다른 타운에 가서 지내는 행복한 아이들이었다. 처음 간그 타운에 틸리 - 틸리 ! - 라는 이름의 여자애가 살고 있었는데,
지저분하고 가난해서 이상해 보이고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자매는 틸리에게 잘해주지 않았지만, 그애들의 좋은 엄마가 잘해주라고 했다. 이것이 내가 그 책 『틸리』에서 기억하는 내용이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책을주었는데, 그중에는 어른들이 읽는 책도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읽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따뜻한 학교에서 숙제를 했고, 숙제를 마치면 책을 읽었다. 그 책들 덕에 몇 가지 얻 - P33

은 것이 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책이 내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하지만 그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남편과 만나면서도 그 얘기를 바로 털어놓지는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혼자 남몰래-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는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 P34

따뜻한 교실에서 보낸 시간 덕에, 그 시절의 독서 덕에, 숙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충실히 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은덕에 이런 것들 덕에 내 성적은 점점 완벽해졌다. 고등학교졸업반 때 진로 상담 선생님이 나를 상담실로 불러, 시카고 외곽의 어느 대학에서 모든 비용을 다 대주는 조건으로 입학을 제의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부모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별다른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성적이 완벽하지 않고 심지어 특별히좋지도 않았던 오빠와 언니가 속상해할까봐 그랬을 것이다. 오빠와 언니는 모두 대학에 가지 않았다.
찌는 듯 무더운 날에 나를 그 대학까지 차로 데려간 사람은 진로 상담 선생님이었다. 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보자마자 - P34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그곳이 좋았다. 학교는 어마어마하게 커보였고, 어디를 쳐다보건 건물이 있었다-내 눈에는 호수가 굉장히 커 보였다. 사람들이 강의실을 들락거리며 한가로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더럭 겁이 났지만, 흥분되는 심정에 비길수는 없었다. 금세 나는 사람들을 따라 하는 법을 습득했고,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부분만큼은 쉽지 않았다.
기억나는 일이 있다. 추수감사절이라 집에 돌아온 날 밤, 나는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학생활이 꿈일까봐 두려웠고, 눈을 뜨면다시 이 집에서 영원히 머물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안 돼. 그 생각을 한참 하다 나는 겨우 잠이 들었다. - P35

누구는 늘 원했던 아이를 포기할 마음을 먹고, 자신의 과거나 옷에 대한 발언도 참아보려 하는데, 그 순간 그런 작은 말 한마디에 영혼의 부피가 줄어들며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오그뒤로 나는 많은 남자와 여자와 친구가 되었지만 그들도 그비슷한 말을 했다. 늘 무심결에 진실을 드러내는 그런 한마디를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 단지 한 여자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우리가 그런 한마디를 듣고 그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운이좋다면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아주 이상했고 말할 때의 목소리는너무 컸던 것 같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평범한 유머에는 어색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나는 반어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고, 사람들은 그 사실에 어리둥절해했다.  - P38

아파트는 깨끗했고 가구가 많지 않았다. 자주색 아이리스 한 송이가 유리병에 꽂혀 하얀 벽 앞에 놓여 있었고, 벽은 예술작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그 예술작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짙은 색의 길쭉한 형체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추상에 가깝지만 완전히 추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구성들로,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현학적인 세계의 징후라는 것만 알 수있었다. 우리 가족이 자신의 공간에 있는 것을 제러미가 불편해한다는 게 감지되었다. 하지만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신사였고,
이것이 내가 그를 그토록 좋아했던 이유였다. - P50

"이런 말을 하면 정말 안 되는 줄은 알지만, 나는 저들이 거의 부러울 지경이에요. 저 두 사람은 서로를 가졌고, 진정한 공동체로결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다정함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겉은 풍족해 보여도 속은 외롭다는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일깨워주었다. 그날 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고그는 친절했다. "그러네요."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쉽게 이렇게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정신이에요? 저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를 에워싼 - P53

외로움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P54

에 뉴욕을 사랑했다. 나는 그녀 안의 슬픔도 보았던 것 같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아주 많이 웃었고,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빛났기 때문에, 그때는 그 슬픔을 보고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남자들이 보면 여전히 사랑에 빠질 법한 그런 여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 P57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책이 좋았다.
나는 진실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작가를 좋아한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 또다른 이유는, 그녀가 뉴햄프셔 주 작은 타운의 쇠락한 사과 과수원에서 자라 뉴햄프셔 주 시골 지역에 대한 글, 열심히 일하고 힘들게 살아가지만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조차 진정한 진실은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는늘 뭔가에서 멀찍이 비켜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그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59

그다음날 아침 병원에서 이제는 꽤 지난 일이 되었다 내가 엄마에게 엄마가 잠을 자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하자, 엄마는자기가 잠을 자지 않는다고 내가 걱정할 건 없다고, 평생 쪽잠을자는 버릇이 들어 그렇다고 말했다. 그 순간 또다시 엄마의 말이조금 쏟아지는 듯하더니 엄마 안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엄마는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내내 쪽잠을 잤었다는 이야기를.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런 버릇이 생겨." 엄마가말했다. "쪽잠은 언제든 앉은 채로 잘 수 있으니까."
나는 엄마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 P60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구체적으로 아는 것 말이다. 요즘은 조상에 대한 관심이 크지만, 그 관심은 이름과 장소와 사진과 법원기록을 의미한다. 하지만 삶의 날실과 씨실이 어떻게 엮여갔는지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우리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순간이 올 때 말이다. 청교도였던 우리 조상은, 내가 아는 다른문화와는 다르게, 대화를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 병원에서 엄마는 농장에 가서 지낸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 P61

트럭. 이따금 그 트럭이 깜짝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른다.
흙먼지로 줄무늬가 그려진 차창, 비스듬한 앞유리, 계기판에 낀땟자국, 디젤 냄새와 썩어가는 사과 냄새, 그리고 개들 냄새. 내가 트럭에 갇힌 게 몇 번이었는지 그 횟수는 나도 모른다. 처음이 언제였는지, 마지막이 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고, 마지막으로 갇혔을 때도 아마 다섯 살이 되지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하루종일 학교에 있었을 테니까. 내가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건 오빠와 언니는 학교에 갔고-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엄마 아빠 둘 다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면 별로 갇혔을 것이다. - P72

소리를 지르면서 차창 유리를 탕탕 두드렸던 것도 기억난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것 같지는 않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지켜보고, 추위가 살을 파고드는 걸 느끼던 그때 내게 들었던 감정은 그저 공포였다. 나는 언제나 소리를 지르고 또 질렀다. 숨쉬기가 힘들어질 때까지 울었다.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나는지쳐서 우는 아이들을, 가끔은 그저 심술이 나서 우는 아이들을본다. 전자도 진짜고, 후자도 진짜다. 하지만 이따금은 절박하기이를 데 없는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보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이 아이가 낼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소리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 P73

그런 순간에는 내 안에서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다. 탁 트인 내 유년의 들판에서-조건이 정확히 맞아떨어질때 -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중서부 출신들조차 옥수수 자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내게 말했지만, 그들이 잘못 안 것이다. 내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고, 그게 사실인 것은 나도 알지만, 내게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와 내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는 분리할 수 없는것이다. 나는 아이의 절박한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타고 있던 지하철 칸을 옮긴 적도 있다. - P73

내가 트럭 안에 갇혀 있었을 때 내 마음은 매우 이상한 곳으로 가곤 했다. 어떤 때는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또 어떤 때는괴물을 본 것 같았고, 또 한번은 언니를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나 자신을 달래면서 소리 내어 혼잣말을 했다. "괜찮아, 아가야. 곧 마음씨 고운 아줌마가 올 거야. 너는 정말로, 정말로 착한아이고, 그 아줌마는 엄마의 친척인데 혼자 사는 게 외로워 같이살 착하고 귀여운 여자애를 찾고 있어서, 너를 데려가 같이 살고싶어할 거야." 나는 이런 상상을 하곤 했고, 그 상상이 내게는 정말로 진짜처럼 느껴져 그 덕에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는춥지 않은 곳을, 깨끗한 시트와 깨끗한 수건을, 고장이 안 난 변기를, 볕이 잘 드는 부엌을 꿈꿨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천국에들어갔다. 슬슬 추워지고 해가 저물면 나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훌쩍거리던 울음이 점점 걷잡을 수 없어졌다.
러면 아빠가 나타나 잠긴 문을 열어주었고, 가끔은 나를 안아서데려갔다. "울 일이 뭐가 있어." 이따금 아빠가 말했다. 아빠의따스한 손이 내 머리 뒤쪽에 닿았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 P74

나는 말하고 싶었다오,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번은 그 안에 저하고 아주아주 긴 갈색 뱀하고 같이 있었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요? 나는 묻고 싶었지만 그 단어를 도저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차마 말할 수 없기에 내가 긴갈색의 그것과 함께 트럭 속에 갇힌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도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건 정말로 잽싸게 움직였다.
정말로 잽싸게. - P82

캐럴은친구들도 한편으로 만들려고 아이들을 쳐다보며 그 동작을 하고 있었다. 헤일리 선생님의 얼굴이 붉어졌고, 선생님이 이렇게 말한것이 기억난다. 너희가 다른 누구보다 더 잘났다는 생각은 절대하지 마라. 내 교실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금 몇 명의 얼굴에서 다른 누구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읽었는데, 내 교실에서는 절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캐럴 다를 흘끔 쳐다보았다. 내 기억에 그애는 잘못을 지적받아 속상한 듯했다.
나는 조용히, 완전히, 단박에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아직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나는여전히 이 남자를 사랑한다. - P84

헤일리 선생님은 그해 말에 떠났다. 내 기억으로는 입대를 했는데, 시절을 감안하면 틀림없이 베트남에 갔을 것이다. 나중에워싱턴 D.C.의 참전용사기념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내가 그에 관해 더 아는 건 없지만, 내 기억에 캐럴 다는 그뒤부터 그의 수업 시간에는 내게 못되게 굴지 않았다. 무슨말인가 하면, 우리 모두 그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를 존경했다. 이것은 열두 살짜리들의 학급에서 한 남자가 이루어내기에 절대 작은 업적이 아니다. 그는 이루어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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