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서 꽃을 가지고 나와 이웃에게 부탁했던 게 기억나. ㅡ나 없는 동안 이 꽃에 물 좀 주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하지만 내가 돌아온 건 4년 후였지.… 집에 남은 소녀들은 우리를 부러워했고 여인들은 눈물을 흘렸어. 그런데 나랑 같이 전선으로 가는 한 아이만 멀뚱멀뚱 태연한 거야. 남들은다 슬피 우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 아이도 나중에는 안 되겠는지 자기눈에 물을 찍어 바르더군. 손수건으로 그것도 몇 번씩, 다들 우는데 혼자 안 울고 있으려니 어색했던 거지. 그때 우리가 전쟁이 뭔지나 알았겠어?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지금도 악몽을 꾸다 잠을 깨곤 해. 여전히 전쟁터에 있는 끔찍한 꿈‥…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날아올라 점점고도를 높인다 싶었는데 ...... 곧장 아래로 곤두박질치지...... 비록 꿈이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는 게 그대로 느껴져.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잠에서 깨. 아, 잠들어 있는 동안, 꿈을 꾸는 동안 얼마나 무섭고끔찍한지. 늙은이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젊은이는 죽음에 코웃음 치지. 젊은이들은 자기가 영원히 살 줄 아니까! 나도 그땐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았으니까……."
안나 세묘노브나 두브로비나-체쿠노바, 근위대 대위, 전투기 조종사 - P125
전쟁 내내 생각했어. 내가 지금 집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옆에 우리 고운 엄마 옆에 엄마는 정말 아름다웠지. 나는 못했을 거야…… 나 스스로는 절대. 전쟁터에 나서는 일 따위는...… 하지만...... 나는 우리 도시가 독일군 수중에 떨어졌고, 내가 유대인이라는사실을 알게 됐지. 전쟁이 나기 전에는 모두 사이좋게 잘 지냈어. 러시아인, 타타르인, 독일인, 유대인...... 모두 똑같이 나는 한 번도 ‘유대놈‘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어. 아빠, 엄마의 사랑 속에책만 보며 살았으니까. 우리는 나병 환자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어디를가나 쫓겨났어. 다들 우리를 두려워했지. 심지어 지인들조차 우리를 모른 체했어. 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고, 이웃들은 우리에게 물건은 전부두고 가라. 가져가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했어. 전쟁 전까지 그렇게 사이좋게 지낸 이웃들인데, 발로냐 아저씨, 아냐 아줌마.…… 엄마는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 우리가 게토‘로 쫓겨나기 며칠 전일이었지. 도시 곳곳에 포고문이 나붙었어. ‘유대인은 인도로 걸어다니는 것, 미용실에서 머리하는 것, 상점에서 물건 사는 것. 등을 전면금한다.‘ - P129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번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 체르노바는 당연히 아이를 기다렸지..... 삶을 사랑했고 또 살고 싶어했어. 당연히 두려워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길을 갔어..... 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는 무릎을 꿇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은 거부했어. 적에게 굴종하는 삶 따위는…… 어쩌면 그때 우린 눈이 멀었던 건지도 몰라. 그리고 그때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동시에 순수했어. 우리는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당신은 그걸 꼭 알아야 해......"
베라 세르게예브나 로마놉스카야, 빨치산 간호병 - P133
"1942년이었는데.… 작전 수행중에 전선을 지나 어떤 공동묘지 근처에 머물게 됐어. 독일군이 우리랑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있었지. 물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캄캄한 밤이 되자 독일군이 계속 조명탄을 터뜨렸어. 낙하산들도 보이고, 조명탄들이 한참을 타면서 아주 멀리까지 그 일대를 환하게 비췄지. 소대장이 나를 묘지 끝으로 데려가더니 로켓탄이 발사되는 곳을 보여주더군. 독일군이 출몰할만한 장소라며 관목덤불이 있는 곳도 보여주고, 나는 망자라고 해서 무서워하거나 그러지 않아. 어릴 때부터 공동묘지도 안 무서웠거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때 나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어. 보초도 처음 서는거였고..…. 딱 두 시간 보초를 섰는데, 그 두 시간 만에 머리가 하얗게 세버렸지......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머리가 백발이 돼 있더라고, 보초를 서면서 그 덤불을 지켜보는데 덤불이 스륵스륵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거야. 거기서 꼭 독일군이 걸어오는 것만 같고…… 뒤이어 또 누군가 나타나고...... 무슨 괴물들도 나오고…… 그 두 시간 동안 나는혼자였어..... 세버렸지.. ...... - P151
처음 전투에 나갔는데, 장교들이 자꾸 나를 흉벽 쪽으로 떠다미는 거야. 앞이 잘 안 보여서 고개를 내밀었지. 앞에 뭐가 있나 궁금했거든. 어떤 호기심이 발동한 거지, 어린아이 같은..... 그렇게나 철이 없었을까! 지휘관이 소리쳤어. ‘세묘노바 병사! 세묘노바 병사, 정신 나갔나! 염병할...... 뒈지려고 그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이제 막 전선에 온 사람을 어떻게 죽인다는 거지?‘ 그때는 몰랐어. 죽음은 사람 가려가며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죽음은 아무리 애원해도, 설득해도 피할 수 없다는 걸...... 낡은 트럭을 타고 의용군이 도착했어. 모두 노인들과 어린 남자애들이었어. 소총도 없이 수류탄 두 개씩만 들려서 그 사람들을 전투에 내보냈지. 소총은 전투중에 각자 알아서 구해야 했어. 전투가 끝났지만 붕대를 감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다 죽었거든......‘
니나 알렉세예브나 세묘노바 사병, 통신병 - P155
우리는 비행을 나갈 때 목표물을 찾아서 명중시키고 돌아온다‘ 딱 이 생각만 하면 됐어. 죽은 사람은 보지않아도 됐지. 그래서 우리는 시신을 볼 때의 공포가 뭔지 몰랐어......" (A. 본다레바, 근위대 중위, 선임비행사) 빨치산이었던 여인은 지금도 전쟁 하면 모닥불 냄새부터 떠올린다. "뭐든 모닥불에서 했어. 빵도 굽고 음식도 끓이고, 재가 남으면 그 위에 가죽외투며 겨울군화도 올려놓고 말리고, 밤엔 모닥불 옆에서 추위도 피하고……" (E. 비소츠카야) 하지만 한없이 내 생각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다. 기차 여승무원이 차를 내온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에 쿠페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며 생기가 돈다. 간이식탁에 전통술 ‘마스콥스카야가 오르고 집에서 만든 안줏거리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가슴으로 나누는 우리의 대화가 시작된다. 가족의 숨은 사연부터 정치, 사랑과증오, 지도자들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는 길과 대화의 사람들이라는걸...... - P163
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삶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놓은 비축물이나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퇴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우리는 정말 어떤 사람들일까. 무엇으로,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을까? 고통을 이겨낸 사람은 어떤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 그걸 알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다…… - P170
예를 들어, 만약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가족이나 지인, 이웃들(특히 남자들) 중 누군가, 제3의 인물이 동석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덜 진실해지고 덜 솔직해진다. 이미 대중을 의식한 대화가 돼버린다. 관객을 위한 대화, 당사자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얻어낼길은 요원해진다. 강력한 자기방어에 부딪친다. 자기통제, 끊임없이 이야기가 다듬어진다. 일종의 패턴까지 생겨난다. 듣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차분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신중하게 해야 할 말만 골라 한다는 것.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어두운 면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한다. 나는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공훈들만 가득한황야에 도도하고, 결코 속을 내보이지 않는 것들만 잔뜩 모여 있는 곳에, 니나 야코블레브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 P188
그녀는 나를 위한 하나의 전쟁을 들려주었다. "딸이라 생각하고 이야기할게. 어린애나 다름없는우리가 겪어야 했던 그 모진 세월을 당신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이야." 그리고 청중을 위한 또하나의 전쟁을 그녀는 준비해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전쟁을 신문에서 떠드는 영웅들과 공훈이 주인공인 전쟁.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훈육용의 전쟁. 평범하고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 불신에,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바꿔치기하려는 이 욕망에 나는 매번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온기를 차디찬 광채와 맞바꾸려는 욕망에. 나는 우리가 부엌에서 함께 차를 끓여 마시던 그 기억을 지울 수가없다. 우리가 함께 눈물 흘렸던 그 기억을 - P188
‘용맹한 병사‘ 메달을 받고 포상으로 며칠간 집에 다녀오게 된 거야. 나타시카가 집에서 돌아오자 서로 나타시카 냄새를 맡겠다고 난리가 났지. 정말 돌아가며 줄을 서서 맡았다니까. 다들 나타시카한테서 집냄새가 난다며 좋아했어. 그렇게 다들 집을 그리워했지…… 편지봉투 하나만 봐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 편지에 적힌 아빠 글씨만 봐도 좋고..... 잠깐 쉴 틈이 나면 우린 수를 놓았어. 하다못해 머릿수건이라도붙들고 수를 놓았지. 한번은 발싸개를 지급받았는데, 글쎄 그걸 코바늘로 떠서 스카프로 만들었다니까. 뭔가 여자다운 일을 하고 싶었어. 우린늘 여자들만의 일에 목이 말랐지. 정말 사무치도록 여자다운 일이 하고싶었어. 그래서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바늘을 손에 쥐고 뭐든 만들었어. 잠깐이라도 좋으니 본래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바느질을하면 당연히 깔깔대고 웃고 떠들면서 행복해했지. 하지만 전쟁 전과 같을 수는 없었어. 뭐랄까, 그땐 특별한 상황이었다고 할까.... - P196
녹음기는 사람의 말을 녹음하고 어조도 그대로 담아낸다. 짧은 침묵, 울음소리, 망연자실해하는 소리까지도 나는 이야기란 게 원래 시간이지나 글로 옮겨질 때보다 말로 뱉어질 때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말할 때 그 사람의 눈빛과 팔의 움직임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 대화하는 동안 드러나는 그들의 삶, 즉 그들본래의 삶과 그들 각자의 삶을, 그들의 ‘텍스트들‘을 녹음하지 못하는게 안타깝다. - ‘우리집엔 두 개의 전쟁이 산다… 정확한 말이오…… 사울 겐리호비치가 대화에 끼어든다. - 전쟁을 회상하다보니 집사람에겐 집사람만의 전쟁이, 나에겐 나만의 전쟁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 집사람이 당신에게 들려준 고향 - P196
집 이야기나 줄을 서서 집에 갔다 온 동료의 냄새를 맡았다고 한 이야기는 나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소. 하지만 기억은 안 나요……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버려서…… 그때만 해도 그런 건 사소한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실없는 소리이기도 했지. 해군모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집사람이 깜박한 모양이오. 여보, 어떻게 그걸 잊어버린 거야? -잊은 게 아니에요. 그게, 그 일은 그러니까, 무엇보다…… 그 일은 떠올리기가 언제나 두려워. 떠올릴 때마다…… 동이 터올 무렵 우리는발동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어. 한꺼번에 수십 척이 나갔지..... 좀 있으니까 전투가 시작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기다렸어.……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렸지...… 전투는 몇 시간씩 계속되며 끝날 줄을 몰랐어. 그러다 드디어 전투가 우리 근처까지 왔구나 싶은 순간, 갑자기 쥐죽은듯 조용해지더라고. 그래서 날이 어둑해지자 바닷가로 나가봤지. 모르스코이운하를 따라 해군모자들이 둥둥 떠내려오더군. 열을 지어 줄줄이 크고새빨간 피얼룩들과 모자들이 한데 엉겨 물결 속에서 일렁이는데……나뭇조각 같은 것들도 떠내려오고…… 그건 우리 병사들이 네바 강 어딘가에 버려졌다는 의미였지.. - P197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우리 보병 중에도 소녀병사들이 있었어요. 우리 중에 소녀병사가 한 명이라도 끼여 있으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소. 당장 사기가 올라갔으니까.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절대! 실은 이런 이야기도우리 집사람한테서 슬쩍한 거지만. 전장에서 여자 웃음소리를 듣는 게, 여자 목소릴 듣는 게 얼마나 좋은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걸. 전쟁터에도 사랑이 있었느냐고요? 당연히 있었소! 전쟁터에서 우리가 만난 여인들은 정말 멋진 신붓감들이었소 성실하고 신실한 전우들이었고, 전쟁터에서 결혼한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고 가장 행복한 부부라오. 집사람하고 나도 전선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지. 포탄과 죽음의 한가운데서 말이오. - P198
우린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한 관계라오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일들도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전쟁은 길었고, 전쟁터엔 사람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좋은 일들, 순수했던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해요. 전쟁터에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됐소…… 확실히! 내가 전쟁터에서 훨씬 괜찮은 인간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오. 그런 고초를 겪었는데 당연하지 않겠소. 수많은 고통을 봤고, 나 자신도 많은 고통을 겪었소. 그곳에선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 않은 건 금방 제거돼버리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든. 그곳에서 그걸 깨닫게 됐소..… 하지만 전쟁도 우리에게 앙갚음을 했소…… 우린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만…… 전쟁이 우리를 쫓아와 우리와 나란히 가고 있어요∙∙∙∙ - P198
그건 전쟁터에 나가 싸운 엄마들이 자기들이 살았던 전선의 방식으로 딸들을 키웠기 때문이오, 아빠들도 마찬가지고 전선의 윤리로 말이오. 전쟁터에서 사람은, 당신한테 이미 말했듯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단박에 드러났소. 그곳에선 감출 수가 없거든. 우리 딸들은 세상엔 다른 방식의 삶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소. 부모들이 딸들에게 이 세상의 감춰진 추악한 이면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결국 우리 딸들은 사기꾼 같은작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돼 결혼했고, 그 사기꾼들은 우리 딸들을 잘도속여넘겼소 속이기가 식은죽 먹기였을 테니 말이오. 우리 전우들의 아이들이 참 많이도 그런 일을 당했소. 우리 딸도 그랬고..... ㅡ우린 자식들에게, 왜 그랬는지,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아마자식들이 걱정되고 안쓰러워서였겠지.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옳았을까? - P199
다 같이 둘러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옛 시절을 회상했지......그러다 우리 소녀병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는…… 나는 거의 울부짖듯 소리쳤어. ‘존경하는 사령관님, 한번 말씀해보세요. 우리 소녀병사들은 지금 거의 혼자 살아요. 결혼들을 못했죠. 다들 콤무날카에 산다고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누구라도 있나요? 보호해준 사람은요? 전쟁이 끝나고 당신네 남자들은 다 어디로 숨어버린 거죠? 배신자들!‘ 한마디로 내가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쳐버렸지 뭐…… 사령관 어른은 당신이 지금 앉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 ‘어디 말해보게‘ 사령관 어른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어. ‘누가 자네를 화나게 한 거야. 그놈 이름을 대기만 해!‘ 그리고 용서를 구했어. ‘발랴, 자네에게 할말이 없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야.‘ 우리는 동정이 필요한 게 아나.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우니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역사를 고쳐쓰라고 해. 스탈린을 넣든지 빼든지 알아서 쓰라고. 하지만 이것만은 분 - P224
명히 남겠지.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고통도 우리가겪은 그 아픔들도. 그건 잡동사니 쓰레기도 아니고 타다 남은 재도 아니야. 그건 바로 우리네 삶이지." 그리고 더이상 말이 없다…… 헤어지기 전에 피로그가 담긴 봉투를 내 손에 쥐여준다. "이건 시베리아 피로그야. 특별하지. 이 피로그는 돈 주고도 못 사…….." 그리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긴 명단도 건넨다.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이제 알겠다. 그들이 결국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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