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ЕВИЧ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194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설가도, 시인도 아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 장르를 창시했다. 일명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 작가 자신은 ‘소설-코러스‘라고 부르는 장르이다. 다년간 수백 명의사람들을 인터뷰해 모은 이야기를 Q&A가 아니라 일반 논픽션의 형식으로 쓰지만, 마치 소설처럼 읽히는 강렬한 매력이있는 다큐멘터리 산문, 영혼이 느껴지는 산문으로 평가된다.
1983년, 그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집필을끝냈다. 이 책의 원고는 2년 동안 출판사에 있었으나 출간될수 없었다. 그는 영웅적인 소비에트 여성들에게 찬사를 돌리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고뇌에 주목한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받았다.
1985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드디어 벨라루스와 러시아에서 동시에 출간됐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200만부 이상이 팔렸다. 1992년, 신화화되고 영웅시되던 전쟁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의 책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민주적인 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노력으로 재판은 종결되었다.
지은 책으로 마지막 증인들 아연 소년 체르노빌의 목소리 세컨드 핸드타임」 등이 있다.
그의 책은 미국, 독일, 영국, 스웨덴, 프랑스, 중국, 베트남, 불가리아 등에서 3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전 세계에서 수백 편의 영화와 연극, 방송극을 위한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의 최고정치서적상, 국제 헤르더 상,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평화상, 전미 비평가협회상등 수많은 국제상을 수상했고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인류 역사에서 여자가 군대에 처음 등장한 건 언제인가?
- 이미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 군대에서 여자들이 싸웠다. 후일 그들은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의 원정에도 참가했다.
러시아 역사학자 니콜라이 카람진은 우리 선조들에 대해 이렇게썼다.
슬라브 여성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로 향하는 아버지와 남편을 따라나서곤 했다. 626년, 콘스탄티노플이 포위당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전사한 슬라브인들 사이에서 다수의 여성 시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그저 양육만 한 게 아니라 전사들로 키워낸 것이다."
- 근대에 들어선 어땠는가?
―1560년부터 1650년 사이에 영국에서 최초로 여자병사들이 복무한 병원이 생겼다.
-그렇다면 20세기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이미 제1차세계대전 때 왕립 공군

이 여자들을 받기 시작했고 왕립 보조군단과 여성 차량수송대도 조직되었다. 그 수가 10만 명에 이르렀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군병원과 위생열차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제2차세계대전중에 전 세계는 여성들의 능력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영국군 22만 5천 명, 미국군 45만~50만명, 독일군 50만명등, 여자들은 이미 세계 여러 나라의 군대에서 병종을 가리지 않고활약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군대에서는 백만 명가량의 여성들이 참전해 싸웠다. 그들은 가장 ‘남성적‘인 군대 보직을 포함해 남자들과 똑같은 임무를수행했다. 그 때문에 언어 문제가 발생할 정도였다. ‘전차병‘ ‘보병‘ ‘자동소총병‘ 같은 보직은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여자들이 맡아본 적이 없는 임무였기때문이다. 그곳, 전쟁터에서 비로소 여자를 가리키는 군대용어들이 생겨났다……
역사학자와의 대화 중에서

1978~1985년

나는 전쟁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는 누구나 전쟁 이야기를 즐겨 읽었지만, 나는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 동갑내기들 역시 모두 전쟁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승리의 아이들이었으니까. 승자의 아이들. 전쟁 하면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은 무엇일까? 그건 알아들을 수도 없는 무서운 말들 속에서 보낸, 우울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다. 사람들은 늘 전쟁을 회상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결혼식에서도 세례식에서도, 기념일에도 추도식에서도 언제나전쟁을 얘기했다. 심지어 아이들의 대화에서조차 어느 날 이웃집 남자애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땅 밑에서 뭐하는 걸까? 땅 밑에서 어떻 - P13

게 살지?" 우리는 전쟁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때 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고 어느새 죽음은 나에게 삶의 중요한 비밀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그 두렵고 비밀스러운 세계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외할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전사해 헝가리 땅 어딘가에 묻혔고, 친할머니는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티푸스로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두 아들은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할머니의 세 아들 중 한 명만 살아 돌아왔다. 바로 우리 아버지이다. 먼 일가친척들 중에서 열한 명이나 되는 친척들이 아이들과 함께 산 채로 독일군에게 불태워졌다. 누구는 자기 오두막에서, 또 누구는 시골 교회에서 집집마다 그런 사연 하나쯤은 있었다. 어느집이나. 시골의 사내아이들은 오랫동안 ‘독일인‘이나 ‘러시아인‘ 흉내를내며 놀았다. 아이들은 ‘헨데 흐흐! ‘추뤼크! ‘히틀러 카푸트! 라는독일어를 크게 외치곤 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 P14

전쟁이 끝난 뒤 내 어릴 적 시골마을은 여자들의 세상이었다. 여자들의 마을, 남자 목소리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의 풍경은, 마을 여자들이 전쟁을 이야기하고 흐느껴 울고, 흐느끼듯 노래하던 모습으로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학교 도서관의 책은 절반이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마을 도서관도, 아버지가 책을 빌리러 자주 들르곤 하셨던 구청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정말 우연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전쟁을 하거나 전쟁을 준비했다. 다들 어떻게 전쟁을 치러냈는지 이야기했다. 우리는 한 번도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고, 어쩌면 다르게 사는 법을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세상,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조차 할수 없는 우리는, 언젠가 다르게 사는 법을 오랫동안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 P15

학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우리는 의 이름으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에 대해 글을 썼고그것을 꿈꿨다.
하지만 학교 밖의 세상은 다른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 다른 이야기에마음을 더 빼앗겼다.
나는 오랫동안 현실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다. 현실은 나를 놀라게했고 또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삶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겁도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본다. ‘만약 내가 좀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면, 이처럼 밑도 끝도 없는 깊은 나락으로 달려들 수 있었을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무지 때문에? 아니면 이 길을 갈 것만 같은 예감 때문에?  - P15

사실 그런 예감은 있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 어떤 말을 써야 내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세상을, 내 눈이 보고, 내귀가 듣는 이 세상을 표현해낼 수 있는 장르를 나는 애타게 찾았다.
어느 날 우연히 ‘나는 화염에 휩싸인 마을에서 왔다』라는 책을 읽게되었다. 아다모비치, 브릴, 콜레스니크의 소설. 그런 충격은 우연히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으며 충격받았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소설의 형식은 놀라웠다. 소설은 삶 그 자체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소설은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 지금도 거리와 집과 카페와 전차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바로 이거야! 세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찾은 것이다. 사실 찾을 줄알고 있었다.
알레시 아다모비치는 나의 스승이 되었다…… - P16

2년 동안 나는 생각했던 만큼 자주 사람들을 만나지도 글을 쓰지도못했다. 읽기만 했다. 내 책은 무엇을 이야기하게 될까? 글쎄, 전쟁에 대한 또 한 권의 책이라…… 무엇 때문에? 전쟁은 사실, 크고 작은 전쟁 - P16

들에서부터 널리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전쟁들까지, 이미 수천 번도 더 넘게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들지 않았다. 우연히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더라도, 그건 ‘남자‘들의 전쟁 이야기이지, ‘여자들의 전쟁은 아니다. 이들의 행동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매번 똑같다. 집에서나 전쟁을 같이 치른 여자들의 모임에서만 잠깐 눈물을 보인 뒤, 비로소 자신들의 전쟁, 나는 알지 못하는 전쟁에 대해서 입을 연다.  - P17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알지 못하는 여자들의전쟁, 취재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여러 차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들의 목격자가 되고 유일한 청취자가 되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처럼 큰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치가 떨리도록 극악하고 참혹한진실이 숨어 있었다…… 여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읽거나 들어서 익숙한 내용, 그러니까 어떤 이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를 거뒀는지, 아니면 어떻게 패배했는지, 어떤 기술들이 사용됐고 어떤 장군이 활약했는지 따위의 내용은 아예 없거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 P17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왜? 나는 여러 번 자신에게 물었다.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자신들의 언어와 감정들을 지키지 못했을까?
여자들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나의 또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자들의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바로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여자들의 역사를. - P18

고결한 곳으로 향하는 길과 비열한 곳으로 향하는 길, 천사로부터 짐승에 이르는 길 회상이란 지금은사라져버린 옛 현실에 대한 열정적인, 혹은 심드렁한 서술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올라간, 과거의 새로운 탄생이다. 무엇보다 새로운창작물이다. 사람들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삶을 새로 만들어내고 또 새로 써내려간다. 있는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보태고‘, 있는이야기를 뜯어고친다‘. 바로 이 순간을 조심해야 한다.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고통은 어떠한 거짓도 녹여내고 없애버린다. 고통은 너무나도뜨겁기에! 확신컨대, 간호사나 요리사, 세탁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꾸미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 이들은 신문이나 책따위에서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는다.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뽑아낸 진짜 고통과 아픔을 들려준다. 많이 배운 사람들의 감정과 언어는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시간에 의해 다듬어지기 쉽다.  - P19

이를테면, "우리는 너무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갔어. 얼마나 어렸으면 전쟁중에 키가 다자랐을까" 같은 말. 이미 수십 미터에 달하는 녹음테이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말 역시 꼼꼼하게 수첩에 적는다. 녹음테이프만 벌써 네다섯 개다……
무엇이 나를 돕는 걸까? 그건 바로 우리가 함께 사는 데 익숙하다는사실이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행복도 있고눈물도 있다. 우리는 고통스러워할 줄도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줄도 안다. 고통은 남루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아픔, 그건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이다. 우리 여자들이 바로 이 아픔과 고통의 길을 향해 용감하고 당당하게 나아갔음을 나는 밝혀야만 한다…… - P20

이제 누구를 속일 이유도 누군가에게 속아줄 이유도 없다. 죽음에 대한 사유 없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분명해졌다. 죽음의 비밀은 그 어떤 것보다 우위에 있다.
전쟁은 지나치게 내밀한 체험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만큼이나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한 여인(비행기 조종사였다)은 나와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전화로 거절 사유를 설명했다. "옛날 일을 떠올릴 수가 없어요. 생각조차 하기 싫어요…… 3년이나 전쟁터에 있었어요. 그 3년 동안 나는 여자가아니었죠. 여자로서 내 몸은 죽어버렸어요. 생리도 끊기고 여성으로서의 욕구도 거의 없었으니까. 나는 꽤 예뻤어요…… 우리 남편이 나에게 청혼했는데……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그이가 청혼하면서 그러더군요. 전쟁은 끝났고,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우리는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 자기랑 결혼하자고. 나는 엉엉 울고 싶었어요.  - P22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곳. 그곳에선 역사보다 더 강력한무언가가 사람을 다스린다. 내 글의 폭을 넓혀야겠다. 전쟁에 대한 진실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을 담은 책을 써야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물음. 사람은 자신 안에 또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른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까?‘ 이 물음을 이제 나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악은 분명 매혹적이다. 그리고 선보다 솜씨가 뛰어나다. 마음을 더 잡아끈다. 내가 전쟁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세계에점점 더 깊이 빨려들어가는 사이, 다른 것들은 모두 빛을 잃고 흐릿해지며 시들해졌다. 거대하고 무자비한 세계다. - P23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 P25

다시 한번 똑같은 이야기…... 나는 우리를 둘러싼 외부의 현실만이아니라 우리 내면의 현실에도 관심이 있다.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 속감정이 더 흥미롭다. 이렇게 말해두자. 사건의 영혼이라고. 감정이야말로 나에겐 현실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역사는 거리에 있다. 군중 속에 나는 우리 한 사람한 사람이 역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반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또 어떤 사람은 두세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우리는 함께 시간의 책을 써내려간다.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뉘앙스의 함정. 그래서 이 모든 진실의 외침을 명확히 들어야만한다. 이 모든 것 안에 녹아들고 이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 P26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거리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를 하나로 잘 버무려내야 한다. 어려운 점 한가지 더. 그건 우리가 지금 현재의 언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네들은 지난날의 감정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 P27

여자들이 전쟁에 대해 아무리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도 기본적으로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전쟁은 살인행위‘라는 생각이 또렷이 박혀 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전쟁은 ‘힘겨운 일‘이자 ‘평범한 보통의 삶‘이기도하다. 그래서 그네들은 전쟁터에서도 노래를 하고, 사랑에 빠지고, 머리를 매만졌다……
여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두려움이 감춰져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원치 않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선물하는 존재.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 안에 생명을 품고, 또 생명을낳아 기른다.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P29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이 일이 워낙 그렇다. 그렇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늘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든다. 사람은 전쟁터에서 가장 잘 보이고 잘 드러난다. 내면의 깊은 곳까지, 저 깊숙한 피하조직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사랑할 때도 그럴지 모르겠다. 죽음의 얼굴 앞에서는 모든 사상과 이념이 그 의미를 잃는다. 누구도 미리 대비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영원의 세계가 열린다 - P31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 고통은 지난한 삶의 증거이다. 다른 증거따윈 없다. 다른 증거 같은 건,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했던가.
나는 비밀에 직접 잇닿는, 비밀에 대한 최상의 정보인 고통에 대해 생각한다. 삶의 비밀을 간직한 고통을 모든 러시아문학은 고통에 대해 말한다. 사랑보다 고통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리고 사람들도 내게 고통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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