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릴라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믿었다. 내 머릿속에는한 손에는 누의 머리를, 다른 한손에는 티나의 머리를 들고 긴 팔을흔들거리며 지하터널을 뛰어다니는 돈 아킬레의 기형적인 형상이자리 잡았다. 나는 너무나 괴로웠고 그 때문에 성장통이 왔다. 조금나아졌나 싶다가 다시 앓아눕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일종의 촉각장애를 앓고 있었다. 내 주변의 생명체들이 각자의 생활 리듬에 맞춰 바삐 움직이는 동안, 손가락 아래 딱딱한 표면이 말랑말랑하게 변하거나 안에 있는 내용물과 표충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며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몸도 만져보면 부은 듯했다. - P68

이 사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공처럼 부풀어 오른 뺨과 톱밥으로 채운 손과 너무 익은 마가목 열매 같은 귓불과 커다란 빵 덩어리 모양의 발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몸이 나은 후 다시밖으로 나갔을 때 학교며 거리며 나를 둘러싼 공간 자체가 변한 것같았다.
주변 세상이 어두운 두 극 사이에 낀 것처럼 느껴졌다. 양극의 한쪽에는 지면 밑에서 건물의 지반과 인형이 떨어진 어두운 동굴을 압박하는 거대한 공기방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위에서 우리들의 인형을 훔쳐가버린 돈 아킬레가 살고 있는 건물 5층을 짓누르는 거대 - P68

한 구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 개의 거대한 구체가 철로 만든 봉 끝에 고정되어 건물, 길, 들판, 터널, 선로를 지나며 이 모든 것을 납작하게 해버리는 상상을 했다.
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과 함께 그 사이에 끼어서 짓눌린느낌이었다. 입에서는 기분 나쁜 맛이 났고 계속되는 구역질에 기진맥진해 있었다. 모든 것이 나를 짓누르며 옥죄어 들어와 결국에는내 몸이 역겨운 크림처럼 짓뭉개질 것만 같았다.
그런 불편한 상태는 상당히 오래갔다. 사춘기 중반으로 들어설 때까지 몇 년 동안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느낌이 막 시작되었을 때 즈음, 나는 예기치 않게 처음으로 남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 - P69

터널 맨 오른쪽 입구는 암흑에 싸여 있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어두운 곳으로 들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터널은 한없이 길었고 반대편 끝에 보이는 빛나는 둥근 출구는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발소리와 함께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은빛 물줄기와 물웅덩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잔뜩 긴장한 상태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릴라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크게 울려 퍼지는 자신의 소리를듣고 웃었다. 우리는 함께 또는 각각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P93

아직 남은 시간은 많았고 가족 중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나는 항상 그날 여행의 전반부를 생각한다. 터널에서 나온 순간과 끝없이 펼쳐진 곧은 길을 마주했을 때의 그 느낌. 리노는 그 길의 끝에 바다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미지에 노출된 듯한 그 느낌을 즐겼다. 그때의 느낌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나 돈 아킬레의 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를때의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태양은 잔뜩 낀 구름 위에 떠올랐고 어디선가 강한 탄내가났다. 우리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무너져내린 담벼락을 따라서사투리로 이야기하는 소리와 뭔가가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간간이흘러나오는 낮은 건물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P94

릴라가 있어서 내가 길을 잘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갔지만 느낌으로는 릴라가 나보다 열 걸음은 더 앞서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만년2등이었던 나는언제나 1등인 릴라라면 가는 법과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 바다까지가는 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릴라라면 온 세상이 머릿속에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그 때문에라도 우리 주위를 둘러싼 세상이 엉망이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느낌에 나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나는 하늘이 아닌 땅속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줄기를본 것을 기억한다. 땅의 표면에서 보는 그 빛은 어딘가 빈곤하고 불결해보였다. - P95

얼마 후 우리는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릴리는 걷는 속도를 늦췄고 나 역시그녀를 따라 속도를 늦췄다. 내게 못된 장난을 치려다가 후회하는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릴라의 시선과 두세 번 마주쳤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릴라가 너무 자주 뒤쪽을 바라보고 있다는사실을 깨닫고 나도 덩달아 뒤를 돌아보았다.
릴라의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우리 동네와의 경계선인 터널의 모습이 자취를 감춘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우리는 이미 익숙하지 않은 길에 들어섰고 우리 앞에 펼쳐진 길도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P95

1958년 12월 31일 릴라는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를 경험한다. 경계의 해체는 내 표현이 아니다.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를 극대화해서 릴라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릴라는 사람이나 사물을 구성하는 윤곽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1959년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옥상에 모인 그날 밤, 릴라는 생전 처음 경계의 해체를 강렬하게 체험한다. 그때만 해도 그 느낌이 무엇인지정확히 규정짓지 못했기에 혼자서만 간직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1980년 11월 어느 날 밤에 이르러서야, 옥상에서 경험했던 현상에대해 내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도 하고 자식도둔 36세의 여자가 되어서도 때때로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고백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 P113

그 사건은 내 기억 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사내들을 끌어당기는자석 같은 내 몸의 힘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그보다 더 그 사건이 뇌리에 남은 이유는 릴라라는 존재가 카르멜라뿐 아니라 요구 사항 많은 유령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단순히 혼란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 결정을 내렸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릴라와 함께있을 때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는 분명 릴라의 팔을 잡아끌면서 어서 가자고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다 릴라가 남기로 결정을 내리면그녀 옆에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옆에 없으니,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나는 릴라가 했을 법한 결정을 내렸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마음을 그녀에게 내준 것이다.
지노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 내 안의 자아를 뒤로 밀어내고 싸움할 태세를 갖출 때 릴라가 취하는 건방진 눈빛, 억양, 몸짓을 모방하고는 흡족해했다. 순간 약간 걱정이 되었다.  - P124

릴라는 열정적으로 나를 그 언어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서인지사람들의 발을 편안하고 튼튼하게 감싸는 신발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리노와 페르난도 아저씨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뛰어난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릴라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가면 구둣방에서 일도 할 수 없고 아버지는 한낱 시청 수위에 지나지 않는나는 릴라가 누리는 특별한 혜택에서 제외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학급에서도 의미 없이 자리만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개월이 지나도록 나는 교과서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거나 힘을 얻지 못했다. 불행함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갈 때면작업장 구석에 있는 릴라만의 작업 공간인 작은 탁자 앞에서 일하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구둣방을 지나가곤 했다. - P126

그렇다. 게다가 이 말을 할 때의 릴라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웠지만 이제까지 그녀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힘없는 목소리였다. 릴라는 어떤 소설인지 영화에서 살인자의 딸이 피해자의 아들을사랑하게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카르멜라에게 이야기해줬다고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구일 뿐 현실이 되려면 진실한 사랑이 생겨나야 한다고 했다.
카르멜라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 날부터 알폰소와 사랑에 빠졌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녀의 말은 다른 소녀들에게 멋있게보이려고 만들어낸 거짓말일 뿐이고 이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알 수 없었다. - P136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이가 기껏해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지나가는 트럭 뒤로 일어나는 먼지와 파리사이로 타는 듯이 뜨겁게 달아오른 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모습은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던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서로의 몸에의지하며 걸어가는 두 노인네 같았다.
나는 그 누구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돈 아킬레의 목에 칼을 꽂은 것이 전직 목수인 알프레도 아저씨가 아니라 하수구의 생명체이고, 살인자의 딸이 희생자의 아들과 결혼한다면 기억하는 한 언제나 존재했던온 동네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장막이 조금이나마 걷힐 것이라는 사 - P136

실을 아는 사람도 우리밖에 없었다.
사물, 사람들, 건물, 거리가 참아내기 힘든 무엇인가를 내포하고있어서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게임을 하듯이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내야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인데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그녀, 나와 릴라뿐이었다.
라는 뜬금없이 하지만 우리가 나눴던 모든 대화가 결국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우린 아직 친구지?"
"그럼. - P137

"그럼 내 부탁좀 들어줄래?"
릴라와 다시 가까워진 그날 아침, 나는 릴라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줬을 것이다. 집에서 도망칠 수도 있고, 동네를 떠나 농장에서 잘 수도 있고, 나무 뿌리로 연명할 수도 있었다. 수챗구멍을 지나하수구로 내려갈수도 있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지더라도 집에되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내게 부탁한 건별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 순간에는 약간 실망했다. 릴라는 하루에한 번씩, 한 시간이라도 괜찮으니 라틴어 책을 가지고 저녁 시간 전에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성가시게 굴지 않을게."
릴라가 말했다.
릴라는 내가 낙제한 것을 이미 알고 나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했다. - P137

하지만 나는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같은날 파스콸레같은 어두운 매력이 있는 청년의 관심을 받았고, 새로운 학문을 향한 문이 눈앞에 열린 데다, 얼마 전까지 같은 동네 더군다나 우리 집맞은편 건물에 살던 사람이 책을 출판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마지막 사실은 우리도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릴라가 옳았음을증명했다. 물론 릴라는 책 쓰기를 포기했지만 나라면, 파스콸레의사랑에 힘을 얻고 그 어렵다는 고등학교라는 곳에서 공부를 해낸다면 도나토 아저씨처럼 혼자서 책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면 릴라가 구두그림과 구두공장으로 돈을 벌기 전에 내가 먼저 부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63

나는 다음 날 몰래 파스콸레와 약속한 장소에 나갔다. 그는 작업복 차림으로 헐떡거리며 나타났다.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고 여기저기 하얀 석회 자국이 튀어 있었다. 함께 걸어가면서 나는 그에게 도나토 아저씨와 멜리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최근 일어난 일을종합해볼 때 멜리나가 미친 것이 아니고 도나토 아저씨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으며 아직까지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파스콸레가 내 이야기에 민감하게반응하면서 맞장구칠 때도, 이 모든 일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도나토 아저씨가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철도청 직원이 페라로 선생님이 도서관에 비치해뒀다가 빌려줄 수도 있는 그런 책의 저자가 된 것이다. - P163

그래. 그녀도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겉모습뿐 아니라 표현하는 방식까지도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이야기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던 그녀만의 재능이 한층더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그때보다 훨씬 뛰어나게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연스러운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현실을 단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어떠한 기운을 불어넣어 똑같은 현상이라도 더 강렬하게 느껴지게 했다. 릴라가 그런식으로 말할 때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시도했을 때의 결과가 꽤 좋다는 사실에 흐뭇해했다.
나는 카르멜라나 다른 아이들과는 이런 면에서 다르다고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 애들과는 달리 나는 릴라가 내게 이야기를 하는그 순간, 그곳에서 함께 불타오를 수 있었다. 열중해서 이야기할 때릴라의 손놀림, 몸짓,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릴라와 함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불현듯기쁨은 사라지고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내가 잘못 짚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벽돌공이자 공산당이며 살인자의 아들인 파스콸레는 내가 좋아서 구둣방까지 나를 데려다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릴라였던 것이다. - P167

아! 그때 그 바다의 모습이란・・・ 그날 바다는 심하게 요동쳤고 파도소리가 요란했다. 세찬 바람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옷은 몸에착 달라붙었으며 머리카락이 흩날려 이마가 드러났다. 아버지와 나는 그 진경을 바라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바다 반대편 길에자리를 잡았다. 파도가 하얀 계란 거품을 이고 있는 시퍼런 금속관처럼 맹렬히 굴러 들어와서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감탄사를 연발하며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는 길까지 밀려와서 수천 개의 빛나는 파편으로 부서졌다. 릴라가 없는 것이 어찌나 안타까웠던지.
거센 돌풍과 굉음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 엄청난 광경을 온몸으로 흡수하면서도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너무나 많은 부분이 미처손에 쥘 새도 없이 흩어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P178

아버지는 마치 내가 떠내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달려 나가서 길을 건너 바다의빛나는 파편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빛과 소리가 충만했던 그 순간, 나는 새로운 도시에 홀로 남게 되는 상상을 했다. 새로운 인생을 앞두고 나 자신도 새로워져서 말이다.
나는 거칠게 변화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노출되겠지만 분명 승리할 터였다. 나는, 나와 릴라는 오직 함께 있을 때만 발휘할 수 있는그 능력으로 색채와 소리와 사물과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취합해 이야기를 만들고 힘을 부여했을 터였다.
동네에 돌아오니 긴 여행을 마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는친숙한 길과 스테파노와 피누차의 식료품점 모습, 과일을 파는 엔초 - P178

의 모습, 주점 앞에 서 있는 솔라라 형제의 밀레첸토 모습이 펼쳐졌다. 솔라라 형제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 그들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어머니는팔찌에 얽힌 일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리노에게 그날 일어난 일을전하지 않았다.
나는 릴라에게 그날 내가 지나간 길의 전경과 이름, 요란스러운소음과 찬란한 빛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만약에 내가 아닌 릴라가 그날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호응하며 때때로 맞장구를 쳐줬을 것이다. 내가 직접 그 광경들을 보지 않았더라도 생기를 띠며 흥분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질문도하고 의문도 제기하며 언젠가는 꼭 그 길을 같이 걷자고 그녀를 설득했을 것이다. 나와 함께할 때 그 경험은 더욱 풍성해지고 나야말로 릴라의 아버지보다는 훨씬 좋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니 말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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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리노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가 평소처럼 돈을 빌려달라고 할 줄 알고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리노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리노는 자기 어머니가 사라졌다고했다.
"언제?"
"2주 전에요."
"그런데 왜 이제야 내게 전화하는 거야?"
내 말투가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느꼈는지 리노는 당황했다. 사투리를 섞어가면서 어머니가 나폴리 시내에 바람 쐬러 간 줄 알았다고횡설수설했다. 사실 약간 빈정대며 말하기는 했지만 리노에게 특별히 화가 나거나 그가 원망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 밤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시는 거니?"
"어머니가 어떤지 아시잖아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2주 동안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어디 정상이니?" - P15

리노 어머니의 이름은 라파엘라 체룰로다. 하지만 나만 빼고 모두들 그녀를 ‘리나‘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를 ‘라파엘라‘라고도 ‘리나‘
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내게 그녀는 ‘릴라‘였다. 만약 내가 그녀를 갑작스레 리나나 라파엘라라고 부른다면 그녀는 우리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라는 30년 전부터 내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싶다고 말하곤 했다. 사라진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신분을 바꾸거나 머나먼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리노 같은 아들이 자신의 몸에서태어났고 그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릴라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릴라는 말 그대 - P17

로 증발하기를 원했다. 그녀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뿔뿔이 흩어져서 그녀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릴라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잘 알고 있다고믿기 때문에, 그녀가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사라지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P18

다시 며칠이 지났다. 혹시나 해서 이메일과 우편함을 확인해보기는 했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는 릴라에게 자주 내 소식을 전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사이에 정해진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릴라는 내게 편지를 쓰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것보다는 통화를 하거나 내가 나폴리에 갈 때 만나서밤새 수다 떠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서랍을 열어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철제 상자를 꺼내보았다. 이미 정리한 물건이 많아서 남은 것은 얼마 없었다. 특히 릴라와 관련된 물건은 많이 버렸고 이 사실을 릴라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살펴보았지만 정말 그녀와 관련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사진한장, 티켓 한장, 선물 하나 없었다.
릴라와 관련된 물건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랐다. 릴라는 어쩌면 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과 관련된 물건을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일까. 사실 그녀와 관련된 물건을 간직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 P18

릴라의 장롱을 보러 간 리노는 장롱이 깨끗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확인했다. 여름옷, 겨울옷 할 것 없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장롱 안에는 낡은 빈 옷걸이들만 걸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집 안 구석구석을살펴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는 릴라의 신발도, 얼마 되지않은 책 몇 권도, 사진도, 영상이 담긴 필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한물간 플로피 디스켓과 함께 컴퓨터도 사라졌다. 릴라가 마법사처럼 기막힌 솜씨로 다루던 전자기기들도 모두 사라졌다. 릴라는아직 펀치 카드를 널리 사용하던 60년대 후반에 벌써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할 정도로 전자기기를 잘 다뤘다. - P19

나는 전화를 끊었다. 리노가 다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릴라는 극단적이었다. 릴라는 흔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저사라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66년이라는 세월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 P20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나는 불현듯 화가 났다.
‘좋아. 이번엔 누가 이기는지 보자.‘
나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 최대한 상세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P21

그날 저녁 돈 아킬레의 현관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층계를 난간을따라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기로 결정한 바로 그 순간 릴라와 나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든 뜰과 따스한 봄날 저녁 공기에서 느껴지던 다채로운 향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릴라와 나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누가 더 용기 있는 아이인지를 입증하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든 학교 밖에서든 우리는 이놀이에 푹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다. 릴라가 어두운 맨홀 구멍 속으로 팔을 쑥 집어넣으면, 나도 그녀를 따라 내 팔을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럴 때면 바퀴벌레가 살결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니거나 쥐가팔을 물어뜯을까봐 두려워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다 - P25

릴라는 그 순간 자신이 계단을 오르고 있는 데에는 정당하고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애당초 그런이유 따위는 잊은지 오래였다. 확실한 것은 내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릴라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어린 시절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의 대상에게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네 번째 난간에 도착했을 때 릴라가 예상치 않은 행동을 했다. 그녀는 멈춰 서서 내가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내가 다가가자 릴라는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이 행동은 이후 우리 둘의 관계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 P28

릴라와 내가 돈 아킬레의 현관 앞까지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릴라때문이었다. 시간관념이 아직 없을 때여서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일이 일어나기 열흘에서 한 달쯤 전에 릴라가 내 인형을 손에 들고 있다가 갑자기 지하창고 바닥으로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돈 아킬레의 집을 찾아가는 지금은 공포의 대상을 향해 함께 계단을올라가고 있지만 릴라가 내 인형을 던져버린 그날은 미지의 세계를향해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갔었다.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릴라와 나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그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 P29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그때 난 너무 어렸다. 심지어는 내 인형마저도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내가 내 인형에게 말을 건네면 그녀도 내게 응답해왔다. 내 인형은 셀룰로이드로 만든 얼굴과 셀룰로이드로 만든 머리카락, 셀룰로이드로 만든 눈을 가지고 있었다. 기분 좋을 때가 흔치 않은 내 어머니가 기분 좋을 때 만들어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있었는데 너무나 예뻤다. - P29

모든 것이 아름다우면서도 두렵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철조망사이 틈새로 빠져나온 지하창고의 어둠이 갑작스레 우리의 인형을빼앗아갈 수도 있었다. 가끔 인형을 팔에 꼭 안고 있기도 했지만 구부러진 그물망 옆에 놓아둘 때가 더 많았다. 지하창고의 차가운 공기와 창고 아래서 들리는 무엇인가가 기어가는 소리며 끼익 거리는소리, 땅바닥을 긁는 소리 같은 온갖 위협적인 소리에 인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누와 티나는 행복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매일같이 느끼는 공포는그들의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바위와 건물, 들판과 거리를 거니는사람들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밝은 빛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그 빛 사이에 어두운 구석과 폭발 직전의 억눌린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태양빛 아래에서 우리를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것을 지하창고의 어둠 탓으로 돌렸다. - P31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후두염, 파상풍, 출혈성 티푸스, 가스, 전쟁, 기중기, 돌담, 노동, 폭격, 폭탄, 결핵에서 화농까지 목숨을 앗아가는 단어들로 가득 찬 그런 세상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일들도 죽음의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땀을 많이흘린 다음 두 손목에 물을 살짝 적시지 않고 급하게 차가운 수돗물을 들이켜다 죽기도 했다.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서 죽기도 했고 기침하다 숨이 막혀 죽기도 했다. 검붉은 색으로 잘 익은체리를 먹다 씨가 목에 걸려 죽는 일도 있었고 미제 껌을 씹다 무심코 삼켜 죽기도 했다. - P34

나는 처음에는 건물 모퉁이에 숨어서 릴라가 오는지 훔쳐보았다.
하지만 릴라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그녀 곁으로 다가가 돌멩이를 집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녀와 함께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내 행동에는 확신이 없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며 많은 일을 했지만 확신에 차서 해낸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내 행동과 내가 항상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릴라는 달랐다. 그때 우리가 여섯 살이었는지 일곱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둘이 돈 아킬레의 집 현관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을때가 아마도 여덟 살이나 아홉 살 정도였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 - P35

주 어렸을 때부터 릴라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아이였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국기의 삼색으로 채색된 펜이든, 돌멩이든, 어두운 계단의 난간이든, 손에 움켜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이미 잘 알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실행할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정확한 손놀림으로 나무 책상에 펜촉을 꽂아놓거나, 잉크를 적신 종잇조각으로 무장하거나, 돌멩이를 던져 동네 사내아이들을 맞히거나, 돈 아킬레의 집 현관 입구까지 걸어가거나 어떤행위든 상관없었다. 릴라는 어떤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 P36

내겐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우리의 유년기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매일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게 기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나는 학교 선생님과 교구 신부님의 친절한 태도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런 태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여자아이였는데도 말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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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기 2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매우 못생겼다고 했다. 신혼시절 장만한 리오네 알토 구역 산 지아코모 데이카프리가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나폴리의 모든 공간도, 얼어붙을듯 차가운 2월의 창백한 햇살도, 아버지가 내뱉은 문장까지도.
나만 혼자 그곳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게 완성된 이야기를만들어주려는 문장들 사이에 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완결 짓지도 못했다. 내 글은 혼란일 뿐,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저 구원 없이일그러진 고통의 나열일 뿐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지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마저도. - P9

나는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아 자로 선을 그어 사진의 일부를직사각형 속에 넣고 선밖으로 색이 삐져나오지 않게 사인펜으로 꼼꼼하게 도형을 색칠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정말이지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직사각형은 사진 속에 있던 무언가를 지운 흔적이고 그 새까만 도형 밑에는 틀림없이 빅토리아 고모의 모습이 감춰져 있을 것이다.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부엌에서 칼을가지고 와서 아버지가 가려놓은 사진의 일부를 조심스레 긁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사진을 긁어내면 하얀 종이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해서 작업을 멈췄다. 이것이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일로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더 식어버릴까봐 두려웠다. - P23

고모와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보다 더 강렬했다. 나는 그때처음으로 짧은 순간에 모든 감정을 욱여넣을 수 있는 공간이 내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통난 거짓말에 대한 부담감, 부모님을 배신했다는 수치심, 그들이 받았을 상처로 인한 괴로움은 어머니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철로 만든 새장 같은 엘리베이터 유리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건물 입구를 지나 차에 들어가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빅토리아 고모 옆에 앉는 순간, 나는 생소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것은 그날 이후 내가 종종 느끼게 될 감정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환경과 나를 향한 변치 않을애정을 이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으로 인해 나는 때로는 안도감을 느꼈고 때로는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위협적이면서도 포근한 여인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 P91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유년 시절 동화 나라로의 회귀는아버지뿐 아니라 나의 책임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모든 악의 기원에 빅토리아 고모의 마법이 있었다면 현 사태는 내가 태어난 순간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고모를 찾게 만든 그 어둠의 힘은 이미오래전부터 작용하고 있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예수님이 내쫓지 말라고 한 아이들처럼 죄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해졌다. - P188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방과 후에 일어난 일로 인해 그 팔찌가 내게만 사무치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내 방 침대 머리맡서랍장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서랍에서 팔찌를 꺼내들고 그것이 마치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팔찌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사악한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새 어머니의 어깨가 축 처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뼈만 앙상한 데다 등이 굽어 있었다. - P189

이웃 사람들, 길을 지나다니는 행인들,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할 것 없이 하나같이 눈에 거슬렸다. 특히 어머니가 그랬다. 어머니는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진을 마시고 매사에 느린 말투로 투덜거렸다. 내가 공책이나 책을 사야 한다고 할 때마다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넌덜머리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어머니가 날이 갈수록 헌신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아내와 최소한 지난 15년간 바람을 피웠는데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태도에 질려버렸다.
나는 무관심한 표정 연기를 그만두고 일부러 나폴리 사투리와 표준어를 섞어가며 어머니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영화관에라도 가든가 춤이라도 추러 가라고 고함을 쳤다.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 남편이 아니니 죽은 셈 치라고 했다. - P239

솔직히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내용을 잘 모르겠다. 내게 그날 강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아름다운 입과 목에서 나오는 매혹적인 소리의 흐름이었다. 나는 로베르토의 목젖이 지구에 바글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복제품이 아니라 실제로인류 최초의 남성이었던 아담의 숨결에 의해 진동하는 것처럼그의 툭 튀어나온 목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조각한 듯한 두 눈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강렬했던가. 긴 손가락과 빛나는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 P256

나는 인간을 이토록 연약하게 만든 하나님 아버지가 싫었다. 인간을 끊임없이 고통에 노출시키고 이토록 쉽게 부패하게 만든그가 싫었다. 우리가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배고픔과 목마름질병과 공포, 잔혹함과 교만함, 때로는 불신으로 인한 배신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좋은 감정까지도 어떻게 다루는지 바라보고만 있는 그가 싫었다.
동정녀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자신의 창조물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자들이 겪는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은 것도 싫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 힘을 인류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찮은 놀이에만허비한 아들도 싫었다. 자기 어머니는 홀대하면서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는 화낼 용기조차 없는 아들이 싫었다. 자기 아들을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두고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이 싫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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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동기 없는 살인에 관해 언급했어요. 우리에게 친숙한 치정이나 사리사욕 같은 범행 동기가 없는 살인에 관해서요……. 또는 강한 신념 없이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중간적 인물이 있죠.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하고 말하는인물들 말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개념들은우리에게 이 문제를 다룰 방안을 전혀 주지 않아요. 책상에앉아서 또는 대중 속에서 저지르는 이런 살인에 관해 말하라면.…… 그건 물론 일반적인 살인자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무시무시한 인간형이에요. 자신에게 당하는 피해자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정말로 파리 잡듯 사람들을 죽이는 거죠. - P101

나는 내가 누군가의 정당한 ㅡ정당하다라는 말을 강조해주세요!―이해관계를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쨌든 이게 논쟁적인 이슈고 내가 실제로 그것들을 훼손했다고가정해봐요. 내가 그래야만 옳았을까요? 글쎄요. 나는 그건사학자들이 할 일이라고,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고 그 시절에독립적인 처지에 있던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실적 진리 factual truth의 수호자가 될 필요가 있어요-이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회가 이 수호자들을 내쫓았을 때, 또는 국가가 그들을 구석으로 몰거나 담벼락에 밀쳤을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역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봐왔어요. - P106

러시아를 예로 들어보죠. 러시아에서는 5년마다 새 역사책이 나와요. 국가나 사회는 자기들의 정당한 이해관계가 진실과 갈등하는 상황이 됐을 때도 여전히 이런 사실적 진리의 수호자들과 원칙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질까요? 이 사례에서 나는 그렇다고 말하겠어요. 그런 후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물론,
이 책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두세 가지 진실을 은폐하려고 구구절절한 변명서를 작성해서 시장에 내놓는 거고요. 그런 책략은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역사적으로 그런 종류의 책략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정당한 감정이 무엇이냐 하는 거죠. 거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요.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어요. 내 입장에서는, 내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 P106

줬을 때가 어쩐지 단체들이나 그들의 이해관계에 방해가 됐을 때보다 더 마음이 불편해요. 난 이걸 심각하게 받아들여요. 하지만 그보단 이해관계의 문제가 원칙과 더욱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자, 나는 이런 정당한 이해관계에 본질적으로는 내 스타일을 통해서 그런 것인데 그에 대해 더 많은 얘기는 못하겠네요―상처를 줘왔어요. 그러니까 여기서가져야 할 정당한 감정은 슬픔이라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게유일한 감정이죠! 자기만족의 감정이 아니고요! 그런데 이걸이해하는 사람이 무척 드물어요. 내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할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사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일에대해 얘기할 때 감정적인 어조를 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스스로를 비하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것에 나는…… 우리가 웃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주권sovereignty의 한 형태니까요. 그리고 나는 내가 사용하는 반어법에 대한 모든 비판이, 정말이지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대단히 불쾌해요.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 P108

글쎄요, 유대인 단체들은 괴상한 불안감을 느끼는 게 분명해요. 그들은 사람들이 내 주장을 악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반유대주의자들이 "바로 이거야" 하고 쾌재를 부르면서 "비난받을 사람은 유대인들 자신"이라고 말할 거라고생각해요. 반유대주의자들이 그러기는 하죠. 하지만 내 책을읽으면 알겠지만 그 안에 반유대주의자들이 이용해먹을 건없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독일인들은 아직 분별력을 갖고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글쎄요, 독일인들이 아직 분별력을갖추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겠죠. - P109

논하고 싶지 않아요.
국가 간 차이를 무시한다면, 물론 그 차이는 대단히 크지만요, 그리고 이게 글로벌한 운동-이런 형태로는 결코 존재한적이 없었던 운동―이라는 점만 고려한다면, 또 (운동의 목표와 견해, 독트린은 별개로 하고) 모든 나라의 현 세대를 이전 세대들과 정말로 차별화해서 고려한다면, 처음으로 나한테 강한 인상을 준 그들의 특징은 정치적으로 활동하려는 투지, 정치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느끼는 기쁨,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상황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에요. 물론 이 특징은 각국의 다양한 정치 상황과 역사적 전통에 따라 나라마다 굉장히상이한 형태로 표현돼요. 나라별로 학생들의 정치적 재능이대단히 상이하기 때문에 다르게 표현된다는 뜻이죠.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논했으면 해요. - P112

대학들을 상대로 한 활동이 시작된 것은 나중의 일로, 순전히 정치적 활동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을 그들이 실제로 달성한 뒤의 일일 뿐이에요. 버클리에서 자유언론운동Free Speech Movement으로 시작해 반전운동으로 지속됐죠. 그런데 다시금 그 결과는 꽤나 비범해졌어요. 이런 발단에서, 특히 이렇게 거둔 성공들에서 비롯한 모든 것이 그때부터 세계전역으로 퍼져 나갔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 새로운 자신감은, 미국에서는 특히 소소한 문제들에서 눈에 잘 띄어요. - P113

대학의 서비스직 직원들이 기준임금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은 파업을 해서성공을 거뒀어요. 기본적으로 이건 대학의 운영 정책에 맞서 ‘자신들‘의 대학과 연대하는 행위였어요. 다른 예로는 1970년에 대학생들이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겠다면서 휴강을 요구한게 있어요. 많은 수의 대규모 대학이 학생들에게 이런 자유시간을 허용했어요. 이건 대학 당국이 학생들이 시민이기도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가능한, 대학 바깥의 정치적 활동이에요. 나는 두 사례를 분명 긍정적으로 간주해요.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덜 긍정적으로 간주하는 다른 사례들도 있어요.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할게요. - P114

근본적인 질문은 ‘정말로 일어났던 일은 무엇인가‘예요. 내가보듯, 단순히 프로파간다만 진행되는 수준에 머무는 게 아닌자발적인 정치적 운동이, 활동만 정치적인 게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도덕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정치적 운동이 대단히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일어났어요. 일반적으로 단순한 힘겨루기나이해관계에서 비롯한 행위로 보이는 운동에는 꽤나 드문 이런 도덕적 요인과 더불어, 우리 시대에는 생소해 보이는 또다른 경험이 정치 게임에 등장했어요. 정치적 행위가 재미있다는 것이 밝혀진 거예요. 이 세대는 18세기가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이라고 불렀던 것을 발견했어요. 공적 행복이란, 사람은 공적인 생활public life에 참여했을 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에게 닫힌 채로 남았을 인간적 체험의 차원을 혼자 힘으로 열어젖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여러 면에서 완전한 - P114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뜻해요.
이런 모든 면에서 나는 학생운동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해요. 하지만 학생운동의 추후 발전은 다른 문제예요. 이른바긍정적 요인들이 우수한 상태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이미 해체되는 과정에 들어선것은 아닌지 여부를, 한편으로는 범죄와 맞닿아 있고 다른 편으로는 권태와 맞닿아 있는 광신과 이데올로기와 파괴적 성향이 그들을 잠식하지 않았는지 여부를 그 누가 알겠어요?
역사를 보면 선한 상황은 지속 기간이 대단히 짧은게 보통이지만 이후로 장시간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결정적인영향력을 발휘해요. 그리스의 진정한 고전적 시기classical period가 얼마나 짧았는지 생각해봐요. 그런데 그 시기는 사실상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어요.


"혁명가는 길거리에 권력이 떨어져 있는 것이언제인지를 알고, 그걸 집어 들 때가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 P115

에른스트 블로흐가 ‘자연법‘이라고 부른 내용은, 학생운동이도덕적으로 우월하게끔 착색coloration 된 것에 대해 내가 말하면서 거론한 내용이에요. 하지만 혁명가라면 누구나 이와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는 말도 덧붙여야겠네요.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나는 블로흐하고 생각이 다르다는 점도요. 혁명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탄압받고 멸시받던 사람들이 스스로 혁명의길을 이끈 적은 결코 없었고, 탄압도 멸시도 받지 않았지만남들이 그런 처지에 놓인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한 사람들이 혁명을 이끌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도덕적 동기를 인정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사실을 대놓고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런 수치심은 대단히 유서가 깊은데, 여기서 그 역사를 세세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혁명의 역사에도 대단히 흥미로운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요. - P116

에른스트 블로흐는 "도래할 혁명"을 믿는데, 나는 혁명이 도래할지, 도래한다면 어떤 구조를 갖게 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 경험(매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혁명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돼요. 그 이전에는 반란과 쿠데타가 있었을 뿐 혁명은 존재하지 않았어요)으로 볼 때, 혁명이 일어나려면일련의 현상들이 혁명의 전제 조건- 정부 조직이 와해될 거라는 위협, 정부의 존재 기반 약화,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공공 서비스의 실패, 이 밖에 다양한 다른 것들―으로서발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모든 열강이 권력과 권위를 상실한 상황을 확연히 볼 수 있어요. 열강 정부들의 손에 폭력을 행사할 도구가 엄청나게 축적되는 일이 동반 진행되지만, 무기가 늘었다는 사실이 상실된 권력을 보상해줄 수는 없어요.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반드시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 P117

지금 당장을 보면, 도래할 혁명을 위한 전제 조건 하나가 ‘진정한 혁명가 집단‘이라는 조건이 결여돼 있어요. 좌익 학생들이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존재ㅡ혁명가는 그들의 현재 모습하고는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혁명가로서 조직돼 있지도 않아요. 그들은 권력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도 못해요. 권력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고 거기에 그게 있다는 것을안다고 해도 그들은 허리를 굽혀 그걸 집어 들 준비가 가장 덜된 사람들인 게 분명해요. 그런데 정확히 그게 혁명가들이하는 일이에요. 혁명가는 혁명을 만들어내지 않아요! 혁명가는 길거리에 권력이 떨어져 있는 것이 언제인지를 알고, 그걸집어 들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무장봉기가 그대로 혁명으로 이어진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혁명을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혁명으로 이어지는길을 포장해주는 것은 앞선 시대들에 제대로 행해지고는했던 현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에요. - P118

우리, 학생의 자유라는 게 사실상 무엇인지 생각해봐요. 대학은 젊은 사람들이 다년간 모든사회집단과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능하게 해줘요. 학생들이 대학을 파괴한다면 그런 상황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죠. 결과적으로 사회에 맞선 저항도 존재하지 않을 거고요. 그들은 일부국가에서, 그리고 여러 시기에 걸쳐 자신들이 걸터앉은 나뭇가지를 톱으로 잘라내는 작업을 거의 마쳤어요. 그런 작업이결국에는 난동을 벌이는 것으로 이어져요. 이런 식으로 학생저항운동은 그들의 활동을 요구하는 세력을 얻는 데 사실상 실패할뿐더러 완전히 박살날 수도 있었죠. - P123

결국에는 철저하게 신망을 잃은 옛 슬로건-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보다 훨씬 더 정신나간 표어예요. 나는 우리가 역사로부터 대단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않아요. 역사는 늘 새로운 내용으로 꾸준히 우리와 대면하니까요. 하지만 마땅히 학습할 수 있어야 할 사소한 것은 몇가지 있어요. 나는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그런 식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사람을, 그런 현실에 대해 심사숙고하는수고를 감당하려는 사람을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의혹들을 가득 품게 됐어요 - P126

정부는 언제라도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앗아 갈 수 있어요. 거부빚기라도 하면 하룻밤 사이에 취업할 권리조차 없는거지로 전락할 수 있어요.(최근 소련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소련의 문학작품은 얼핏만 보아도 모든 경제이론과 정치이론보다더 강렬한 방식으로 끔찍한 현실을 증언한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우리가 한-이론과 이데올로기하고는 구별되는 경험으로서의 모든 경험은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시작된 수탈과정이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줘요. 경제 세력들과 그들이 장악한 장치들로부터 독립한 법적·정치적 제도들이 수탈 과정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극악한 가능성들을 통제하고 저지할 수 있어요.  - P128

그런 정치적 통제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부르건 자본주의자로 부르건 이른바 복지국가에서 가장 잘 기능하는 듯 보여요. 자유를 수호해주는 것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사이의 분열이고, 또는 마르크스주의 표현을 쓰자면, 국가와 그 구성 세력이 상부구조superstructure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이른바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직원들의 사적 영역private sphere을 무단으로침범하려는 대기업 관리진의 몽상이 현실이 되지 않게 막아주는 사법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이런 몽상은 정부 자체가 직원들의 고용주가 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건 실현돼요. 미국정부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들의 취업을 승인하는 시스템이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죠.  - P128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이런 발전들을 판단해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수탈은 정말이지 현대적 생산의 본질이고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믿었듯, 자본주의에 의해 시작됐을 때처럼 산업화한 사회가 불가피하게 귀결하는 결과물일 뿐이라고. 그랬을 때 제기되는 의문은, 이 과정이 동구에서 전락한 것 같은 극악한 체제로 전락하지 않도록 통제권 아래 두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이른바 특정 공산주의국가들에서 예를들어 유고슬라비아연방 공화국으로 존재하다 1991년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로 해체된 나라에서, 심지어는 동독에서- 경제 관련 규제를 풀고 분권화하려는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고, 수탈 과정에서 나오는 지독히끔찍한 결과들을 예방하려고 대단히 중요한 양보들이 행해지고 있어요. 무척 다행스럽게도, 중앙집권화와 노동자들의 노예화가 특정 수준에 도달하면 생산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증명됐어요. - P129

이 실험들 중 어느 것도 합법적 재산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재정의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실험들은 그 방향으로 걸음을떼었어요. 동독의 협동조합들은 사유재산을 생산과 분배 수단으로서의 공유재산joint property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는 방향으로, 노동자평의회는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대신에 고용을보장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죠. 두 사례 모두에서 개별 노동자들은 더 이상 원자화돼 있지 않고, 새로운 집단과 계급에소속된 데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서 협동조합이나 공장평의회에 속해요.
당신은 실험과 개혁에 대해서도 물었죠. 그건 경제 시스템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경제 시스템이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앗아 가는 데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요. - P133

이런 우려는 사회주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건 과거에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순전히 권력정치power politics의이슈죠. 나는 소련이 연방 내부의 반대를 염려하지 않는다면, 지식인들의 반대뿐 아니라 연방에 속한 민족들의 잠재적인 반대까지 염려하지 않는다면 체코슬로바키아에 행군해 들어갔던 것처럼 연방에 속한 나라들로 행군해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체코 정부가 분명 러시아인들의 영향력아래서 최근에야 취소된 상당한 정도의 양보를 ‘프라하의 봄‘ 동안 슬로바키아인들에게 허용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권력을 분권화하려는 이 모든 시도는 모스크바의 두려움을 자극해요. 새 모델은, 러시아 입장에서는, 경제적이거나지적인 문제들을 인도적으로 처리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러시아제국을 해체하려 든다는 위협을 뜻하기도 해요. - P139

그런데 세상에 그런 건 없어요. ‘부르주아‘ 정부의 법으로 보장되는 자유도 자유고 ‘공산주의‘ 국가의 법으로 보장되는 자유도 자유예요. 오늘날 공산주의 정부들이 민권을 존중하지않고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권리와 자유가 ‘부르주아적‘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레 도출되는 것은 아니에요. ‘부르주아적 자유‘를어떤 사람이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자유하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꽤나 빈번해요. 사실 이것은 누군가 극도로 부유해질 수 있는 곳인 동구에서도 유일하게 존중하는 ‘자유‘니까요. 소득의 관점에서ㅡ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알아듣기 쉬운 용어로 얘기한다면ㅡ부자와 가난뱅이의 차이는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동구에서 더 커요.  - P141

자유라는 용어는 항상 ‘반대할 자유‘를 의미해요. 스탈린과 히틀러 이전의 어떤 통치자도 "예" 하고 말할 자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히틀러는 유대인과 집시를그의 의견에 동의할 권리로부터 차단했고, 스탈린은 누가 됐건 "예" 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요" 하고 말할 수도 있다고판단했기 때문에 자기를 열렬히 추종하는 지지자들의 머리조차 자른 유일한 독재자예요. 그들 이전에는 어떤 폭군도 그지경까지 나아가지는 않았고, 그렇게 성공하지도 못했어요.
이 시스템들 중 어느 것도, 심지어 소련의 시스템도ㅡ내가중국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네요―여전히 진정한 전체주의 시스템은 아니에요. 현재 그쪽 체제에서 배제당한 유일한 사람들은 체제와 뜻을 달리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뿐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떤 식으로건 그곳에자유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아요. 반대 세력들이르게관심을 갖는 것은 정치적 자유와 기본적 권리의 보장이거든요. - P142

열강들 입장에서 권력을 상실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앞에서 말했어요.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 그건 무슨 뜻일까요? 대의정부representative government를 가진 모든 공화국에서권력은 국민에게 있어요. 그건 국민이 특정 개인들에게 자신들을 대표해달라며, 자신들의 이름으로 활동해달라며 권한을이양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권력 상실에 대해 이야기할 때그건 사람들이 그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하는 일에 대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이양받은 관리들이 하는 일에 대한 동의를 철회했다는 뜻이에요.
권력을 이양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힘이 넘친다고 느껴요. 국민들이 그 권력의 토대를 철회했을 때조차 권력을 가졌다는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그게 미국이 처한 상황이에요. 미국만 그런 건 아니지만요.  - P144

라이프
당신의 저작 『폭력론』으로 돌아가죠. 책에(즉, 그 책의 독일어버전에) 당신은 이렇게 썼습니다. "민족의 독립, 외세 통치로부터의 해방, 국가의 자주독립, 국제 정세 속에서 제약받지않는 힘을 무제한 주장하는 일이 눈에 띄는 한 그리고 그어떤 혁명도 이런 국가 개념을 흔들 수 없는 한―‘인류의 미래‘보다는 ‘인류에게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매달리는 전쟁 문제의 이론적 해법은 상상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지구 상의 평화 보장은 동그라미를 네모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유토피아적이다." 당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국가의 다른개념은 무엇인가요? - P153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상이한 국가 개념이라기보다 이 개념을 변화시킬 필요성이에요.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기껏해야 15, 16세기에 생긴 개념이에요. 자주독립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고요. 자주독립이란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성격의 갈등이 최종적으로는 전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걸뜻해요. 전쟁 말고 다른 최후 방책은 없어요. 하지만 오늘날강대국들끼리의 전쟁은 모든 평화주의적인 고려와는 사뭇별개로 폭력의 수단이 무시무시하게 발전한 덕에 불가능한일이 돼버렸어요. 따라서 이런 의문이 제기되죠. ‘이 최후 방책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는가?‘ - P154

전쟁은 소국들만 치를 수 있는 사치품이 됐고, 그런 그들도강대국들의 영향권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을 때만 전쟁을 할 수 있어요. 강대국들은이런 전쟁에 개입해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의존국client을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오늘날 세계 평화가 의지하는 상호 억제mutual deterrence 전략의중요한 일부가 돼버렸기 때문이에요.
독립국들 사이에는 전쟁 말고 최후 방책이 있을 수 없어요.
전쟁이 더 이상 그 목적에 봉사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새로운 국가 개념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입증하죠. 이 새 국가 개념은 확실히,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보다 더 잘 작동할 새 국제사법재판소를 창설하거나새로운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UN의 전신을 창설하는 데서 비롯하지는 않을 거예요. 자주적인, 혹은 겉으로만 자주적인 정 - P154

부들 사이의 동일한 갈등이 거기서도 다시금 발생하게 될 테니까요-담론 수준에서 그럴 텐데, 담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내가 보는 새로운 국가 개념의 기초 원리는 연방 시스템에서찾아볼 수 있어요. 연방 시스템의 이점은 권력이 이동하는 방향이 상향도 하향도 아니라 수평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연방에 참여한 기구들은 각자의 권력을 상호 억제하고 통제해요.
이런 사안들을 사유할 때의 진정한 난점은 최종 방안이 초국가적super-national 시스템이 아니라 국가 간inter-national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초국가적 정권은 비효율적이거나, 어떤식으로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에 의해 독점될 거고,
그러면서-최종적으로 와해될 때까지는-글로벌한 경찰력을 피해서 도망칠 곳이 없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전제 정권으로 변하기 쉬운 세계정부로 이어질 거예요 - P155

오늘날 쉽게 생길지도 모를 오해를 막기 위해, 히피와 기성체제 거부자들이 이룬 코민들은 이 시스템하고 아무 관련도없다는 말을 반드시 해야겠네요. 그들의 밑바탕에는 그와는반대로 공적인 삶을, 전반적으로 정치적인 삶을 완전히 포기하는 태도가 놓여 있어요. 그런 공동체는 정치적 조난 사고에시달려온 사람들을 위한 도피처고, 그들은 개인적인 기반 위에서 철저히 옹호되고 있어요. 나는 독일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런 코뮌 형태를 대단히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반감도 전혀 없어요. 그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무의미한 존재예요. 평의회는정반대의 것을 욕망해요. 그들이 지역 평의회, 전문직 평의회, 공장 내 평의회, 아파트 단지 평의회 등―대단히 작은 규모로 시작하더라도 말이에요. 정말이지 결코 노동자평의회에만 국한되지 않는 무척이나 다양한 종류의 평의회가 있어요.
노동자평의회는 이 분야에서는 특별한 사례일 뿐이에요. - P157

한 나라의 모든 주민이 반드시 그런 평의회의 멤버가 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사람이 공적인 사안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에요. 한 나라의 진정한 정치 엘리트들을 한데로 끌어모으는 자기 선출 과정 self-selective process 이 이런 방식으로 가능해져요. 공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나서서 개입하는 일 없이 그런 사람들이 선출됐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할 거예요. 하지만 기회만큼은 각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해요.
나는 새로운 국가 개념을 형성할 가능성을 이 방향에서 봐요.
자주독립의 원칙이 전혀 들어맞지 않을 이런 종류의 평의회국가council-state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연방에 더없이 적합할거예요. 특히 그런 국가에서는 권력이 수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구성될테니까요. - P158

하지만 그런 국가가 실현될 가망이 있느냐고 지금 나한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겠네요. 있기야하겠지만 매우 희소하다고요. 하지만 결국에는 다음 혁명의결과로 생겨날지 모르죠. - P159

자, 이 나라는 민족국가nation-state가 아니에요. 미국은 민족국가가 아닌데, 유럽인들은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요. 결국에는 그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인식하게 되죠. 그러니까 이 나라를 통합하는 요소는 유산도 아니고 기억도, 국토도, 언어도, 동일한 혈통도 아니에요…… 이 나라에는 토박이가 없어요. 인디언들이 토박이였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시민이고, 이 시민들은 딱 한 가지 것으로통합돼 있어요. 즉, 당신은 헌법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단순한 절차만 따르면 미합중국 시민이 돼요. 프랑스뿐 아니라 독일의 보편적인 여론에 따르자면 헌법은 그저 종이 쪼가리일 뿐이고 우리는 그걸 바꿀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나라에서 헌법은 성스러운 문서로, 건국이라는 성스러운 행위를 항구적으로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품이에요. 헌법이라는토대는 완전히 이질적인 소수민족들ethnic minorities과 지역들을하나의 연방으로 묶어내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a) 연합을 유지하면서 (1) 각각의 차이점을 완전히 흡수하거나 차이의 강 - P165

도를 줄여 평준화해요. 외국인 입장에서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외국인으로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죠. 미국 정부는 인간에 의한 정부가 아니라법에 의한 정부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말이 진실인 한, 그리고 국가의 안녕을 위해 진실일 필요가 있는 한…… 국가의 안녕을 위해, 미합중국을 위해, 공화국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말은 정말이지……


"우리가 이 나라에서민주주의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그건 엄청난 실수예요" - P166

에레라
펜타곤 문서에 관한 에세이 정치에서의 거짓말Lying in Politics: Re-flections on the Pentagon Papers」, <뉴욕리뷰오브북스>, 1971. 11. 18, 30~39쪽-원주 뒤에 "공화국의 위기에 수록되었다에서 당신은 당신이 "전문적인 해결사들professional problem-solvers"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심리를, 당시 미국 정부의 고문이었던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합니다. "그들은 해결사라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들은 단순히지능이 좋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에 ‘감상성sentimentality‘을 상당히 무서울 정도로 웃돌고 ‘이론‘과, 순수한 정신 활동의 세계와 사랑에 빠져 있다……." - P171

아렌트
끼어들어도 될까요?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대단히 좋은 사례가, 정확히펜타곤 문서들에서 가져온 사례가 있어요. 그 사례는 다른 모든 통찰을 모조리 압도해요. 당신도 ‘도미노이론‘에 대해 알거예요. 1950년부터 펜타곤 문서가 공개된 직후인 1969년까지 냉전을 관통한 공식 이론이었죠. 중요한 사실은 펜타곤 문서들을 작성한 대단히 수준 높은 지식인들 중에 그 이론을 믿은 사람은 극히 적었다는 거예요. 내 생각에 행정부 고위층에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두세 명뿐이었는데, 정확히 말해 그들은 유달리 지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 P171

이 전체적인 사안과 관련한 골칫거리는, 이건 정말로 미해결된 안건인데, 다음과 같아요. 우리는 미래를 몰라요. 세상 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감안하면서 행위를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요. 미래는 현재 만들어지는 중이니까요. 행위는 ‘우리‘가 하는 것이지 ‘나‘만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유일한 사람인 곳이 있다면, 나 혼자만 있다면, 내가 하고 있는일을 바탕으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언할 수 있겠지만요. 이런 점이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적으로불확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요. 우발성은 정말로 모든 역사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에요.  - P173

미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변수들에, 달리 말해 단순한 hasard(우연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한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일어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한편 당신이 역사를 회고적인 시선으로 돌아본다면, 당신은 이 모든 일이 우연한것이었다고 해도―사람들에게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요? 모든 역사철학 입장에서는 바로 그것이 진정한 문제예요. 과거를 돌아보면 역사가 항상 다른 식으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는식으로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요? 모든 변수가 자취를 감췄고현실이 우리에게 그토록 압도적인 충격을 가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한히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것들에 신경을 쓸 수 없는 거죠. - P173

에레라
그런데 요즘 커다란 위협은 정치가 추구하는 목표들에는 한계가 없다는 생각 아닌가요? 자유주의 liberalism는 결국 정치적목표들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요즘 가장큰 위협은 스스로를 한계 없는 목표로 설정하는 사람 및 운동의 발흥에서 비롯하지 않나요?


아렌트
나 자신이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걸 전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 당신이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있잖아 - P177

요, 나는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이런 의미에서는 어떤 신조도 갖고 있지 않아요. 나는 하나의 주의ism라고 부를 수 있는 명확한 정치철학이 없어요.


에레라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당신의 철학적인 심사숙고는 자유주의 사상의 토대 안에서, 그것이 고대로부터 차용한 사상들과 함께 이뤄집니다. - P178

아렌트
몽테스키외가 자유주의자인가요? 내가 고려하는 모든 사람을 당신은 그리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건가요…….
내 말은 "moi je me sers où je peux(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마음대로 할 거예요)". 나는 내가 취할 수 있고 나한테 적합한 것은 무엇이건 취해요. 우리 시대의 커다란 이점 중 하나는 르네 샤르René Char, 1907~1988.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시인가 말하기도 했죠. "Notre héritage n‘est garanti par aucun testament. (우리가물려받은 유산을 보장하는 유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샤르의 올바른인용문은 "Notre héritage n‘est précédé d‘aucun testament"으로 『히프노스의 장Feuillets d‘Hypnos』(갈리마르, 1946)에 있는 문장이다. 아렌트는 이 인용문을 『과거와 미래 사이』를 여는 문장으로 사용하는데, 이 책에서 그녀는 이 문장을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은 유언장 없이 우리에게 남겨졌다"로 옮겼다원주 - P178

아렌트
이건 어느 곳에서건 우리가 과거 경험과 사유를 나름껏 취하는 데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에요.


에레라
그런데 이런 극단적인 자유는 몇몇 기성 이론, 기성 이데올로기를 찾아내 적용하길 좋아하는 많은 동시대 사람에게 경고신호가 되지 않을까요?


아렌트
Certainement, Aucun doute. Aucun doute.(분명히 그렇죠.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정말 그래요.)


"자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 P179

에레라
이런 자유가 소수 사람들, 그러니까 새로운 사고방식을 고안해낼 만큼 충분히 강인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을까요?


아렌트
Non. Non.(아뇨, 아니에요.) 그건 오로지 모든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고 나처럼 심사숙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그래서 원할때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는 확신에만 의지해요. 그의 내면에서 이런 소망을 이끌어내는 법은 나도 몰라요. 내생각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réfléchir(심사숙고)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 - P179

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기반을 약화시켜요.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돼요.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위험천만한사유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사유하지 않는 것이, ne pas réfléchir c‘est plus dangereuxencore(사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래요. - P180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뒤에서 정말로 단결돼 있어요. 이 발언은 당시 일어난 사건들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욤키푸르 전쟁이 촉발됐다원주. 유대인들은 아일랜드인, 영국인, 프랑스인처럼 자신들에게도 국가가 있다고,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조직이 있다고 느껴요. 그들은 고국이 있고, 더불어 민족국가를 이루고 있어요. 아랍인들을 향한 그들전체의 태도는 당연히 이런 인식에 크게 의존해요. 중부 유럽출신의 유대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이런 인식을, 즉 국가는 모름지기 민족국가여야만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자, 이스라엘 또는 예전에 팔레스타인이었던 지역과 디아스포라의 관계는 전체적으로 변했어요. 예전에 폴란드는 시오니스트들이 폴란드의 가난한 유대인들을 위해 부유한 유대 - P183

인들에게서 돈을 얻으려고 애쓰던 곳이었는데 요즘 이스라엘은 더 이상 폴란드의 그런 약자를 위한 피난처가 아니니까요. 오늘날 이스라엘은 실제로 세계 전역에 있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유대인의 대리인이에요. 우리가 그걸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여부는 별개의 문제예요. 하지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생각이 이스라엘 정부의 의견과 항상 일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건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예요. 그리고 국가가 존재하는한, 이 국가는 당연한 말이지만 세계인들의 눈앞에서 우리를 대표해요. - P184

"국적을 바꿀 수 있고 다른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지식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통일체로서의한민족의 감정과 일치하지 않아요"


에레라
10년 전, 프랑스 작가 조르주 프리드만Georges Friedmann,
1902~1977은 『유대 민족의 종말?Fin du peuple juif?』 (갈리마르,
1965)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미래에 한편에는신생국 이스라엘이 있을 것이고, 다른 편에는 디아스포라로살다가 거주하던 나라에 동화돼 차츰 고유한 특징을 잃어갈유대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아렌트
Cette hypothèse(이 가정은) 무척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내 생각에는 꽤나 틀렸어요. 고대에, 유대인의 국가가 여전히 존재 - P184

하는 동안에도 이미 엄청난 수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어요. 많은 상이한 형태의 정부와 국가가 있었던 여러 세기를거치면서,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남은 유일한 고대 민족인 유대인은 결코 동화되지 않았어요……. 유대인이 동화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동화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스페인 지배기에도 그럴 기회가 있었고, 로마 지배기에도 그럴 기회가 있었어요. 18세기와 19세기에도 당연히 그럴 기회가 있었고요. 자, 민족은, 집단은 스스로 목숨을끊지는 않아요. 미스터 프리드만은 틀렸어요. 그는 지식인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국적을 바꿀 수 있고 다른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통일체로서의 한 민족의 감정과 일치하지 않아요.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그런 법률들로 구성된 국가의 국민들 감정하고는 특히더일치하지 않아요. - P185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惡이 위 - P190

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브레히트에게서 이런 문장을 찾아냈어요. 
이 인용문은 작품집: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판본에 대한 견해 Werke: Große kommentierte Berliner und Frankfurter Ausgabe』(주어캄프, 1988, 24:315~19)에 실린 희곡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출세Deraufhaltsame Aufstieg des Arturo Ui」에 단 브레히트의 주에서 가져왔다 원주.

 "거물정치범들은 사람들 앞에, 특히 폭소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들은 거물 정치범들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히틀러가 벌인 일들이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 P192

자, 히틀러가 멍청이라는 것은 물론 모든 사람이 가진-히틀러의 정권 장악 이전에 히틀러를 반대했던 모든 사람이 가진-편견이에요. 따라서 대단히 많은 책이 히틀러를 옹호하면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죠. "히틀러가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가 벌인 일의 규모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즉, 멍청이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란 얘기죠. 이 모든 범주의 위대함에는 마땅히 적용할 대상이 없어요. 브레히트는 말하죠. "조무래기 사기꾼이위대한 사기꾼이 되는 걸 지배계급이 허용한다면, 그는 우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특권적 위치에 설자격이 없다. 즉, 그가 위대한 사기꾼이 됐다는 사실과 그가 한 일이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 그의 위상에 덧붙지는 않는다." 그(브 - P192

레히트)는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말을 했어요. "비극은 인류가 겪는 고통을 희극이 그러는 것보다 덜 진지한 방식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물론 충격적인 발언이에요. 동시에 나는 전적으로 맞는말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필요한 것은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진실성을 유지하고 싶다면―그러한 상황들을 살피던 오랜 방식들을 기억해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거예요. 무슨 일을 하건, 설령 그가 1000만 명을 죽였더라도그는 여전히 어릿광대다.


"당시 내 폭소는 이를테면 순진무구한 폭소였고, 되새겨볼 것 없는 폭소였죠.
내가 목격한 것은 어릿광대였거든요"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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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 맑은 공기가 그리워 우수(雨水)지난 공원으로 나섰다.

마른 나뭇잎이 봄꽃 같이 아름다운 나무위로 하늘이 무한하다.

파고드는 바람은 날카롭지만 봄은 머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덮어두고나온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속 시가 가뜩이나 무거운 발목을 잡는다.







봄에 죽은 아이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

두 손에 나누어 쥔 유리구슬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만 맞히실까?



부드러운 작은 몸이 그렇게 굳어버렸다

어느 오후 미리 짜놓아 굳어버린

팔레트 위의 물감, 종이 울린 미술 시간

그릴 것은 정하지도 못했는데



초봄 작은 나뭇잎에 쌓이는

네 눈빛이 너무 무거울까 봐 눈을 감았다

좋아하던 소녀의

부드러운 윗입술이 아랫입술과 만나듯

너는 죽음과 만났다



다행이지, 어른에게 하루는 배고픈 개들

온종일의 나쁜 기억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그러니 개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 줄 개들을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세월이 어서 가고 너의 아빠도

말랑한 보랏빛 가지를 씹어 그걸 쉽게 삼키듯

죽음을 삼킬 테지만



그 전에, 봄의 잠시 벌어진 입속으로

프리지어 향기, 설탕에 파묻힌 이빨들은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비좁은 장소에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다란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봄날에 죽은 착한 아이, 너를 위해







광교수원지의 물도 성급한 봄빛이다.

열흘째 앓고 있는 몸살은 봄을 맞는 통과의례처럼 이쯤에 다녀가는 단골이시다.

또 한번의 봄이 오고있다.

살아가겠지.

물론 그래야하고.







언제나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

언제나 낫에 묻은 봄풀의 부드러운 향기

언제나 어느 나라 왕자의 온화한 나무조각상에 남는 칼자국

언제나 피, 땀, 죽음

그 뒤에, 언제나 노래가

태양이 몽롱해질 정도로

언제나

너의 빛







시인의 말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2022년 8월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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