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는 마법 같은 음식이다. 이 세상에 치즈를 넣어서 맛없는 음식은없다. 심지어 우리는 라면이나 떡볶이, 김밥 같은 우리 음식에도치즈를 넣어먹는다. 치즈는 영양과 맛의 덩어리여서 우리 몸은치즈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밥과 빵이 농경 문화의 정수라면, 치즈는 유목 문화의 정수다.
치즈는 동물의 젖을 가열해 멀건 유청을 제외하고, 나머지 영양분인단백질, 지방, 무기질 등을 굳힌 뒤 미생물에 의해 발효시켜서 먹는음식이다. 인간을 비롯해 포유류가 태어나서 얼마 동안 어머니의것으로 모든 영양분을 섭취하는 점을 떠올려보면, 치즈가 가진영양가에 필적할 만한 음식은 없을 것 같다. - P131

이탈리아를 종단해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 내 말에 수긍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많은 문필가들은 알프스와 아펜니노산맥 그리고아드리아해에 둘러싸인 파다노 평원 지대를 ‘벨파에제 Bel Pacse",
우리말로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했다. 단테의 《신곡》에 처음등장했던 이 말은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유럽의 상징은 높은 알프스나 푸른 지중해가 아니라 광활하게펼쳐진 평야다. 지금도 유럽연합은 밀 생산량 세계 1위다. 여기에세계 3위의 밀 생산국인 러시아까지 합친다면 유럽은 ‘밀의땅‘이다(밀 생산량 2위는 중국이다). 이탈리아에서 광활한 평원의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파다노 평원뿐이다.
중부인 로마를 지나 이탈리아 남부로 가면 이탈리아 반도의등줄기를 형성하는 아펜니노산맥 탓에 이런 대평원은 만나기가 힘들다. - P134

재미있는 점은 이 넉넉한 대평원의 남과 북에서 각각 비슷한치즈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북쪽의 그라노 파다노grano padano와 남쪽의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다. 공정에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만드는법도, 생긴 것도, 맛도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포강 남쪽에서생산되는 파르미지아노가 좀 더 가격이 비싸고, 이탈리아 내에서는좀 더 많이 팔린다. 이 치즈는 프로슈토처럼 이탈리아를 상징하는음식 중 하나다. 와인을 제외한 이탈리아 농산품 가운데 가장 많이수출하는 것이 치즈다. 2019년 기준으로 치즈가 농산물 수출에서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4퍼센트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수출하는것이 그라노 파다노다(파르미지아노는 좀 더 고가이기 때문에 수출량은2위지만 이탈리아 내수 판매량은 1위다. 두 치즈의 수출량 차이는 미미하다).
재미있게도 이 이탈리아 치즈를 가장 많이 사가는 나라가음식에서라면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는 프랑스다. 치즈에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랑스도 이탈리아 치즈를 인정한다는의미가 아닐까 싶다. - P135

치즈를 만드는 것도, 치즈를 점검하는 것도, 심지어 치즈를잘라내 파는 것도 모두 수작업이었다. 이 경성 치즈를 처음 만들기시작한 곳은 10세기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의수도사들은 양젖으로 만드는 페코리노 치즈의 제조법을 우유에적용했고, 그렇게 탄생한 이 치즈는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치즈가 되었다.
지금도 이 치즈를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드는 것은 1,000년 전수도사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고집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수작업으로 일관하다가 마지막 과정에서는 최첨단 로봇을 이용하는반전을 보여준다. 이 치즈에는 과거의 전통과 미래의 기술이 녹아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슬로푸드라는 지속가능한 테마까지 입혀져있어 매력을 더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멋진 명분이자 지갑을 열게하는 귀신같은 마케팅이다. - P143

이탈리아 치즈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는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그 다음이 미국이다. 한번은 미국 여성 두 명이나보다 앞서 이 가게에서 치즈를 사갔다. 이곳에서는 치즈를덩어리째가 아니라 쪼개 팔아서, 10유로 정도면 굉장히 푸짐하게 살수 있다. 다만 치즈를 살 때는 몇 년 숙성 제품을 달라고 꼭 말해야한다. 숙성 정도에 따라 사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파스타에 뿌려먹는 것은 부드러운 1년산을, 샐러드 등 치즈맛을 입히는 요리에는 2년산을, 와인 안주로는 3년산 치즈를 쓰는것이 좋다. 심지어 5년 이상 숙성된 것도 판다. 치즈는 숙성 기간이길수록 수분이 빠지고 아미노산이 응축된다. 이런 성분들이미생물에 의해 발효되면서 다채로운 풍미가 나는 것이다. 이런 것을구분하지 못하면 볼로냐에서는 촌놈 취급을 받는다. 아니이탈리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촌놈이 되고 만다. - P151

① 우리는 소에게 건초와 풀만 먹인다.
② 우리는 우유에 어떤 비자연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
오직 우유만을 사용한다.
③ 우리는 최소 12개월을 숙성한다(참고로 그라노 파다노는 최소9개월을 숙성해 출하한다)."
그들이 이렇게 멋진 고집을 부리는 근거는 상당히 과학적이다.
옥수수나 사료가 아니라 풀로 소를 키워야 조상들이 먹던 치즈와똑같은 맛이 나온다는 것이다. 같은 지역에서 자라는 같은 풀을먹어야 우유에 동일한 미생물이 생긴다는 게 그들의 근거다. 그들은자기 고장에서 생산하는 치즈 맛의 기원이 토양에서 자라는미생물에 기초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유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저온살균해 응고시킨 뒤, 형태를 만들어 오랫동안 숙성하는 것이다. - P156

이런 고집 덕분인지 이 지역 파르미지아노의 금전적 가치는굉장히 높은 편이다. 이 치즈는 40킬로그램 한 통(숙성 과정에서수분이 빠져나가고 아미노산이 응축되어 무게가 줄어든다)에 우리 돈으로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잘 만들어진 프로슈토와 비슷한 가격이다.
나는 이탈리아인들이 정치도 엉망이고, 실업률도PIGS(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등 유럽에서 심각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는나라를 말한다)와 함께 유럽 최고이고, 철도나 버스가 툭하면 다니지않아도 늘 웃음을 머금는 이유를 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여기는이탈리아야Siamo in Titalia." 이들이 왜 짜증스러운 상황에서도 이렇게외치며 짐짓 여유를 부리는지 말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은 - P156

하늘, 중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예스러운 거리와 집들, 그리고맛있는 음식들. 이 모든 것에서 이탈리아인 특유의 여유가 만들어진것은 아닐까? "너희가 잘살면 얼마나 잘살아? 우리도 예전에잘살았어"라고 말하는 듯한 그들의 허세 아닌 허세가 이탈리아에서지내다 보면 그렇게 미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때 그들의 부유했던 영광은 파르미지아노 같은 그들의 먹거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탈리아 치즈 맛에 겨우 감을 잡았을 때, 쉰이라는 나이에 음식을 공부하겠다고 정년이 보장된 회사를 때려치우고 20대젊은이들 틈에서 요리를 배운 나의 결정이 아주 잘못된 것은아니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어쩌면 치즈 덕에 나는 한발 더 나아갈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면 우리나라에서이탈리아의 치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우리의 식재료, 간장과 된장그리고 두부를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P157

우리나라의 간장, 된장, 두부의 종류와 맛은 서양의치즈만큼이나 오랜 역사와 다채로움을 지녔다. 된장만 놓고 보아도
‘옻된장, 겨된장, 담북장, 청국장‘ 등 종류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방방곡곡 색다른 지역된장의 제조법과 맛에 대한 표준화와세분화는 이탈리아의 기준에서 보면 많이 부족하다. 각 지방의된장을 지역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만드는 노력도 부족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캔에 든 미국산 파르메산 치즈를 내미는 레스토랑을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파랑새는 집 안에 있다." 이탈리아가 내게 준 깨달음이다.
‘맛의 파랑새‘는 반백이 넘은 나를 또 다른 길로 안내할지도 모른다. - P157

이미 앞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나는 심각한 볼로냐빠다. 한국에돌아와서도 나는 나를 서슴없이 볼로네제(‘볼로냐 사람‘이라는 뜻)라고말하곤 한다. 내가 졸업한 ICIF는 피에몬테주 아스티에 있었는데, 정작 에밀리아로마냐주의 볼로냐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볼로냐에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있었다. 바로 볼로냐를 대표하는 레드 와인 람브루스코 Lambrusco다.
이름은 전에도 많이 들어봤지만 처음 이 와인을 마셔본 것은볼로냐에 와서였다. 그런데 볼로냐에 있을 때 나는 이 와인을 세 번쯤마셔보고 다시는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에밀리아의 람브루스코대신 옆 동네인 로마냐의 산지오베제 Sangiovese를 즐겨 마셨다.
로마냐의 산지오베제는 내가 좋아하는 베리 맛이 풍부하고, 탄닌이약간 있어 이탈리아 요리와 잘 맞았다. 거기에 토스카나의산지오베제에 견줘 값도 착했다. - P159

그렇게 내가 마셨던 이탈리아 와인을 정리하면서 볼로냐에서 나를당황하게 했던 람브루스코에 대해서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제서야나는 비로소 이 와인의 저력을 알게 되었다.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오히려 그 와인이 지나온 역사의 무게에서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피에몬테의 네비올로가 혀로, 시칠리아의 에트나 로쏘가 마음으로 마시는 와인이라면 람브루스코는 머리로 마셔야 하는 와인이었다.
포도의 원산지는 중동 혹은 중앙아시아다. 포도와 포도주는중동을 거쳐 페니키아인 혹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유럽으로전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에서 포도주가 처음 들어온지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던 이탈리아 남부나 그리스와 중동과활발히 교역했던 에트루리아인들이 살던 이탈리아 서쪽 지역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나 칼라브리아Calabria 등에 그리스란 뜻의이탈리아어인 ‘그레코Greeo‘가 붙은 포도 품종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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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음식,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음식이 떠오르는가? 어떤사람은 피자를, 어떤 사람은 파스타를, 또 다른 사람은 치즈를 떠올릴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피자와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넘어서 서양요리를 대표하고 있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영국 런던이나 미국 뉴욕그리고 일본 도쿄에 가도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어디에나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분식집만큼이나 많은 피자집이골목골목마다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 파스타와 피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 스파게티를 먹었던것은 서울 신촌의 어느 음식점에서였다. 1988년에 맥도널드햄버거가 처음 한국에 들어오고, 그 후 피자헛이 들어오더니 어느새미국의 새로운 음식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오던 1980년대 말이었다.
당시 새로운 음식 문화를 접하는 수업료는 꽤 비쌌다. 그때 나는 젊은층 사이에서 핫플레이스였던 종로2가 종로서적에 갈 일이 있으면근처의 맥도널드에서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었다. 시집이 한 권에 있2,000원이고, 구내식당의 장국밥이나 돈가스가 500원, 1,000원 하던시절이었다.  - P21

빅맥 세트는 4,000~5,000원이나 했다. 교내 매점의 햄버거가 250원인것에 견주면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다.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요즘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점심 세트 메뉴를 먹을 수 있는 20,000원정도다.
피자는 한술 더 떴다. 국내에 가장 먼저 들어온 피자 체인점인피자헛의 피자 한 판 가격이 당시 가격으로 무려 20,000원이었다.
심지어 샐러드 작은 그릇 한 접시가 2,000원이었는데 한 번밖에 담을수 없었다. 그래서 샐러드를 켜켜이 눌러 담는, 다소 점잖지 못한기술을 익히려 애쓰기도 했다. 피자를 맘껏 먹을 수 있게 된 것은1990년대 말 피자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면서부터였다. - P22

피자도 사정은 비슷해서 한국인이 알고 있는 프랜차이즈피자와 이탈리아 피자는 많이 다르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절대 미국의 파르메산 치즈처럼 공장에서 만든 치즈를 식사와 함께내놓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온 미국식 이탈리아음식의 특징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레스토랑에서는 대부분 피자를팔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동네에나 피자만 파는 피체리아pizzeria가따로 있다. 피자 가격은 한 판에 10유로선으로 저렴하고푸짐하면서도 맛있다. 당연하게도 피체리아는 내가 이탈리아에서가장 많이 간 음식점 중 하나였다. 또 피자의 원조인 이탈리아 남부식피자는 도우가 두껍지 않다. 나폴리 피자협회AVPN에서는 피자 중심의두께가 3밀리미터를 넘으면 나폴리 피자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고규정했다. 그래서 두툼한 도우를 쓰는 중부 지방의 피자는 피자가아니라 ‘핀자pinzza‘ 등 다른 이름을 쓴다. 나는 토스카나 Toscana의두툼한 핀자를 좋아하며 두툼한 라치오 Lazio식 피자도 좋아한다. - P24

그렇다면 이탈리아 남부의 음식인 스파게티와 피자는 어떻게이탈리아 음식을 대표하게 된 것일까? 이탈리아 남부는 오랫동안스페인의 식민지였기에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1861년 이탈리아통일 후에도 이런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 브라질, 호주등의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다. 특히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많은이탈리아인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미국에 건너간 이탈리아 이민자는 500만 명이 넘는데, 이 가운데80퍼센트는 남부 사람들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남부사람들의 음식인 피자와 스파게티가 이탈리아 음식의 전부인 것처럼알려지기 시작한 계기였다. 미국 문화권인 우리나라도 그중하나였다.
핀자에는 피자처럼 바질이 아니라 민트를 뿌려주는데 그 향과 맛이 매우 독특하다. - P26

이탈리아 파스타를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북부의 토마토 고기 소스인 라구 소스를 남부의 스파게티 면에버무려주면 큰일이 난다. 쫄면으로 만든 평양냉면처럼 경계를허무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경계를 오가는음식을 ‘불경‘으로 간주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창의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시도가 이탈리아에서는 완전히 금지되는 것이다.
그런 음식을 이탈리아인에게 대접하면 그 음식을 받아든 사람이접시를 요리사 얼굴에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파스타는 자국 음식을대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보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식재료다. - P26

이들의 보수성은 좀 더 근본적이다. 이들에게 ‘전통‘은 자신의정체성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인은 완전히 별개의지역에서 별개의 역사를 일구어왔다. 이들에게는 지금도 이탈리아의국가적 정체성보다 자기가 사는 지역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강하다. 내 이탈리아 친구들은 "이탈리아는 월드컵 기간에만 한국가이고 그 외의 시간에는 2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어"라고말하기까지 했다. 이토록 지역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인의 특징을증명해주는 게 바로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열쇠다.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지역마다 완전히 개성이 다르다. 같은북부 지역이라도 피에몬테 주에서는 파스타 반죽에 계란을 넣고,
리구리아 Liguria 주에서는 계란을 넣지 않는다. 리구리아주의 파스타로는 - P27

바질 페스토를 이용한 파스타가 대표적인데, 대부분 건면인 링귀니를쓴다. 바질 페스토는 바질 잎과 구운 잣을 찧어 올리브 오일과양젖으로 만든 페코리노 치즈 가루에 버무린 소스다. 바질 특유의상큼한 향과 오일의 부드러움, 치즈와 잣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진소스로 파스타는 물론이고, 샐러드나 생선구이 등에도 어울린다.
리구리아주는 바질과 올리브의 대표적인 산지 가운데 하나다. 고도가 높은 편인 리구리아주의 올리브는 남부의 올리브에 비해열매는 작지만 풍미가 뛰어나다. 리구리아의 바질 역시 원산지보호"를 할 정도로 명성이 높다. 그런데 바질 페스토처럼 산뜻한소스의 파스타에는 계란으로 반죽한 생면보다는 건면이 더어울린다. 리구리아주가 북부인데도 생면을 잘 먹지 않은 이유는, 오래전부터 시칠리아Sicilia에서 밀을 수입해 건면을 만들어 주변지역에 판매해오던 그 지역의 상업적 전통 때문이다.
리구리아에서는 심지어 치즈도 북부의 치즈가 아니라 남부의페코리노 치즈를 수입해 먹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파스타에는 저마다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 P28

볼로냐 역시 또 다른 파스타의 성지다. 시칠리아가 건면의 성지라면, 볼로냐는 생면 파스타의 성지다. 이탈리아의 생면 파스타는 기원전에트루리아인들이 최초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1세기 고대 로마의작가 아피키우스Apicius는 파스타에 고기와 생선을 곁들인 양념에 대한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과는 별개로, 볼로네제 파스타는 전 세계에서즐겨먹는 토마토 고기 소스 파스타의 원조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많이 먹는 파스타가 바로 이 볼로네제 파스타다. 내가 대학 때 처음먹었던 미트볼 스파게티도 이 볼로네제 파스타의 미국적 해석이다.
볼로네제 bolognese란 ‘볼로냐의‘란 뜻의 이탈리아 형용사다. 영어 단어차이니즈나 재패니즈와 비슷하게 ‘-ese‘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볼로네제 파스타는 아마 이탈리아의 파스타 이름 가운데 도시지명이 붙은 보기 드문 예일 것이다.
대부분의 파스타에는 각양각색인 파스타 면의 이름이 붙는다. 바질 페스토 파스타Pesto Genovese에 ‘제노바의‘란 뜻의 제노베제 Genovese가붙기는 하지만 볼로네제의 명성에 견주기는 어렵다.  - P29

볼로냐에서는 건면 파스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파스타를 만날수 있다. 파스타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은 라자냐에서부터 볼로네제라구 소스와 어울리는 두꺼운 면인 탈리아텔레tagliatelle와 같은 다양한길이와 모양의 파스타를 파는 생면 파스타 레스토랑을 도시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많은 거리에는 키오스크 매장이있는가 하면, 클래식한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도 단품 메뉴로 생면파스타를 즐길 수 있다.
볼로냐 파스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맛도 맛이지만 가격이매우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에몬테의 고유한생면 파스타인 타야린이나 수제 라비올리인 아뇰로티는 가격이 좀비싼 편이다. 반면 시칠리아의 스파게티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노점이 아닌 레스토랑에서도 10유로도 안 되게 파는 파스타를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반 인분씩 팔기도 한다. 여행 중에 자주갔던, 시칠리아 팔레르모 중심가에 위치한 어느 레스토랑 파스타작은 접시의 가격은 6유로였다(와인 반병은 5유로, 맘마미아! 저렴한가격임에도 엄청 맛있었다). - P32

내가 요리학교 인턴을 마치고 볼로냐와 시칠리아 딱 두 곳만을선택해서 각각 한 달씩 머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시칠리아를 선택한 것은 우리 요리학교인 ICIF에 강의를 하러온셰프들이 이구동성으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려는 사람이라면시칠리아는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우리에게 시칠리아를 거의 이탈리아 미식의 원류쯤으로 강조했다.
평양냉면을 먹으려면 서울의 냉면집이 아니라 평양 옥류관을 가봐야한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시칠리아에 가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거의 모든 음식의 고향이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밀, 소금, 쌀의 고향이다. 또 오렌지,
아몬드, 피스타치오, 체리 같은 과일과 가지, 펜넬 같은 채소가시칠리아를 통해 이탈리아에 전달되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칠리아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탈리아 음식은 없었을 것이다.
시칠리아의 밀이 파스타가, 시칠리아의 쌀이 리소토가, 시칠리아의과일이 젤라토와 디저트가 됐다. 이탈리아인들이 왜 볼로냐를
‘미식의 수도‘라 부르고, 시칠리아를 ‘미식의 고향‘ 혹은 ‘미식의조국‘이라 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 P34

볼로냐에서 특히 생면이 발달한 까닭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자연환경 덕택이다. 볼로냐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리구리아주제노바와 베네토 Veneto주 베네치아에서는 건면을 주로 먹은 반면에, 볼로냐에서는 생면을 먹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각각 시칠리아와 풀리아, 동유럽의 경질밀로 만든 스파게티나 링귀니를 먹었던 반면, 볼로냐는 일반적인 밀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만든 손칼국수를 먹은것이다. 볼로냐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면을 고집했을까?
볼로냐 사람들이 먹는 생면 파스타를 탈리아텔레라고 부른다.
탈리아는 ‘자르다‘라는 뜻의 동사 ‘탈리에레tagliere‘에서 왔다.
우리말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다. 칼과 국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칼국수‘다. 여기에 사람 손으로 만들었다는 뜻의 ‘손-‘이 붙으면 ‘손칼국수‘가 된다. 이탈리아의 손칼국수 면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탈리아텔레다. - P39

볼로네제 파스타 외에도 볼로냐 사람들이 자주 먹는 파스타가 있다.
관광객들보다는 볼로냐 사람들이 더 즐기는 로컬 음식이라고 해야할 듯하다. 관광객이 뜸한 볼로냐 주택가나 대학가에 들어서면볼로네제 파스타 가게는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무수히 많은토르텔리니 가게가 나타난다. 볼로냐는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작은만두, 토르텔리니의 성지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라비올리는 이탈리아 만두를 총칭하는말이다. 이 중에 토르텔리가 있는데 보통 네모나게 만드는 북부식라비올리를 가리킨다. 토르텔리 가운데에서도 조금 큰 만두 형태로빚는 것을 ‘토르텔로니‘라고 하고, 아주 작게 만드는 만두를
‘토르텔리니‘라고 한다. 따라서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할 때에는 어떤 것을 주문할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P45

나는 해외여행을 다닐 때 늘 말린 다시마를 가방 속에 가지고다닌다. 언제든 한식을 손쉽게 해먹기 위해서다. 다시마의 감칠맛을내는 아미노산은 소고기의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과 비슷하다.
말린 다시마는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유용하다. 타지에서한국식 국물이 간절할 때 다시마와 파를 넣고 간단히 계란탕만끓여도 충분하다. 어느 날엔가는 이렇게 아끼던 다시마에 양파와당근, 샐러리 등을 넣고 간단히 채수를 내어, 삶은 토르텔리니나토르텔로니를 넣고 만둣국처럼 끓여먹기도 했다. 이 레시피는한국의 사찰 요리 레시피를 변주한 것이다. 사찰에서는 떡국을 끓일때 다시마와 표고버섯 육수를 사용한다. - P49

실제로 볼로냐와 모데나는 특이한 동네다. 이 지역프로슈토prosciutto와 경성 치즈가 이탈리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인기 있는 농산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지역에는 이런 독특한 특산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비싼 식초 중의 하나로 꼽히는 발사믹이다.
나는 발사믹 식초의 고향인 모데나에 가서 식초 박물관과거기에 달린 매장을 돌아봤다. 이곳에 가면 5년, 10년 숙성 식초는물론이고, 50년, 100년 숙성된 발사믹 식초도 있다. 10년이 넘은발사믹은 그냥 먹어도 시큼한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이미식초가 아니라 풍미 진한 음료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25년 된식초가 가장 맛있었는데, 식초의 향도, 설탕의 맛도 느껴지지 않는완숙미가 있었다. 와인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세월의 맛이었다.
모데나에서는 이 발사믹을 별다른 양념 없이 고기와 음식에는 물론디저트 위에도 무심하게 뿌려먹는다. - P59

한편 볼로냐를 비롯해 많은 에밀리아로마냐의 도시에서는여전히 고집스럽게 손으로 생면을 만들어 먹는다. 그리고 자신들의소스인 볼로네제 라구 소스는 기계로 뽑은 스파게티에 얹어먹어서는안 된다며 열을 올린다. 나는 볼로냐 사람들의 이 고집스러운
‘면부심‘이 재미있다. 볼로냐가 미식의 수도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이하게도볼로냐는 음식과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끝을 생각했던 것 같다.
프로슈토도, 치즈도, 파스타도 그렇다. 서양 요리와 음식 문화의정점인 와인에 있어서도 그렇다. 볼로냐는 언제나 이탈리아 음식의시작과 끝에 서 있으려 한다. 그래서 볼로냐는 ‘뚱보의 도시‘라는별명과 ‘현자의 도시‘라는 별명을 동시에 차지했나 보다. - P61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의 중심 도시인 볼로냐 중앙역첸트랄레에 내리면 두 가지에 놀란다. 먼저 역사의 규모에 놀란다.
생각보다 작아서다. 볼로냐는 우리나라의 경부선과 호남선이갈라지는 대전과 같은 전통적인 교통의 요지다. 나폴리와 로마에서출발하여 밀라노, 토리노를 거쳐 프랑스로 뻗어나가는 철도 노선과,
베네토, 베네치아, 트리에스테를 거쳐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으로가는 노선의 분기점이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와 가장 빈번한전쟁과 교역을 해왔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로 가는 갈림길이 바로볼로냐에서 시작된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도시 국가로 분리되어있던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중세 내내 전쟁을 벌였다. 이 지난한전쟁은 18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전쟁을 벌인 두 세력은 스페인이나헝가리 등의 동유럽에까지 걸쳐 넓은 영역을 장악했던 오스트리아의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를 지배했던 발루아 부르봉 왕가였다.
볼로냐는 이 두 국가의 왕가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여왔다. - P63

살루미는 사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피자나파스타보다 한 수 위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그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음식으로, 파스타나 피자가중세 이후 외국과 교류하던 중에 자연스레 탄생했던 것과는대조적이다. 파스타는 아랍에서, 피자는 대항해시대 이후 토마토가신대륙에서 들어온 뒤에 등장했다. 따라서 살루미는 세계에서인정받는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음식의 대표 주자다.
멀쩡하던 이탈리아인들이 잠시 이성을 잃고 떠들게 만드는대화 주제가 있다. 하나는 축구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정말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왜그럴까? 이탈리아인들은 19세기 말까지 도시 국가에서 살아왔다.
우리나라처럼 1,000년 넘게 한 나라로 통일되어 살아온 게 아니다. - P84

그래서 "이탈리아는 도시가 시골이고 시골이 도시"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작은 소읍이라도 자기들만의 탄탄한 이야기와 역사를 지니고있다는 뜻이다. 이들 이야기의 첫 장은 거의 대부분 음식에서시작한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자기 동네만의 와인이 있고, 치즈가있고, 살루미가 있다. 뭐든지 서울식으로 통일해야 직성이 풀리는한국과는 퍽 다른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전통‘을강조하곤 한다. 내가 다녔던 ICIF에서나 현지 레스토랑에서 인턴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전통이란 뜻의 ‘트라디지오네radizione‘
였다(두 번째로 많이 들었던 단어는 ‘빠삭빠삭하게‘라는 뜻의
‘크로칸테(croccante였다). 이들은 음식이 전통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큰일 나는 것처럼 군다.
이렇게 먹는 것에 유별난 이탈리아인들은 전통 햄도 유별나게만든다. 이들은 살루미를 만드는 돼지를 숲에 방목해서 적어도 2년동안 키운다. 그래야 육질이 더 맛있단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다른많은 나라에서 돼지를 6개월 정도 키운 후에 도축하는 것과는 사뭇다르다. 그만큼 가격도 비싸서 잘 만들어진 프로슈토 한 덩이는100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 P85

이탈리아 햄은 생햄(프레스코)과 조리햄(코토)으로 나뉘는데, 보통생햄을 더 쳐준다. 이탈리아식 생햄에는 소금이나 향신료를제외하고는 인공적인 것을 가급적 첨가하지 않는다. 그게 전통이기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편리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햄을만들 때 밀가루도 넣고 인공 조미료에 발색제에 방부제까지 넣는다.
대량 생산을 하니 그만큼 가격도 저렴하다. 반면 이탈리아에서는아직까지도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켜서 만든다. 대신 가격이 비싼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동네가 이 제품을 칭찬하고 격려하며앞장서서 소비한다. 그리고 자기 동네 음식이 이만큼 독특하다는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맥도날드가 자기 나라에 매장을 열자마자 그에 반대해서 ‘슬로푸드 운동‘을 한 것도 이탈리아인들이었다. 또 스타벅스가 가장늦게 들어온 나라 중 하나도 이탈리아다. 지금도 이탈리아 전역에서밀라노와 토리노 단 두 도시에만 스타벅스가 들어와 있다. 그래서내게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추상명사는 ‘전통‘과 ‘지역‘이다. - P87

그는 수업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러 온 외국의젊은이들에게 "햄을 맛있게 만드는 비결은 숨겨진 제조 비법이아니라 돼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돼지를미국의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넓이가 1제곱미터도 채 되지 않는축사에 가둬놓고 유전자변형GMO 사료를 먹여 키울 경우, 소금만써서 자연 바람에 말리는 이탈리아 전통 프로슈토를 만들 수가없다는 그의 이야기는 큰 울림이 있었다. 레지노 대표는 학교에서강의를 했던 강사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고, 가장 기억에 남는강사였다. 내가 수업을 마친 후 다가가서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자고청했던 사람은 주로 셰프가 아니라, 살루미 장인과 치즈 장인 그리고와인 소믈리에였다. 생각해보면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당시 나는요리법보다는 식재료 그 자체에 호기심을 더 가졌던 것 같다. - P89

완벽한 프로슈토를 만드는 데 필요한 3대 요소는 방목해서 키운 돼지뒷다리와 소금 그리고 풍부한 바람이다. 산맥과 평원을 모두 끼고있는 에밀리아 지역에는 돼지와 바람이 풍부하다(에밀리아로마냐주와함께 프로슈토가 유명한 프리울리 Friuli주 역시 알프스산맥과 아드리아해를끼고 있다. 둘을 비교해보면 프리울리주의 산 다니엘 프로슈토가 좀 더짜다).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데레니아해 (우리로 치면 서해에 해당하는 위치다)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아펜니노산맥과 부딪쳐 습기를 잃고 건조해진 뒤 에밀리아를 향해 분다. 이런 바람은에밀리아가 프로슈토의 중요한 산지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P9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로냐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대중화되어 많은 귀족과부자들이 가난한 자의 음식이라고 여기던 파스타를 좀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미식의 도시라는 볼로냐의 명성은 프로슈토를 얇게 썰 수 있는기계인 고기용 슬라이서가 볼로냐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지면서더욱 공고해졌다. 1873년 볼로냐의 젊은 엔지니어 루이지 주스티 LuigiGiusti가 고안한 이 기계는, 오직 숙련된 장인만이 할 수 있었던프로슈토를 얇게 저미는 일을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계식 슬라이서 덕분에 종잇장처럼 얇게 썬 프로슈토와모르타델라를 꽃처럼 돌돌 말아서 접시를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게되었다. 그때부터 볼로냐의 식자재는 탄탄한 스토리와 독특한맛에다가 멋진 형식미까지 갖추게 된다. ‘볼로냐 사람들은 늘산해진미를 멋지게 차려놓고 먹는다‘는 시샘이 다른이탈리아인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P99

세계에서 토마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어딜까? 토마토생산량 1위를 차지하는 국가는 의외로 중국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 FAO 통계자료를 보면 중국은 2017년 1,033만 톤의토마토를 생산했다. 이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20퍼센트에 이른다.
2, 3위도 다소 예상 밖인데, 인도와 나이지리아다. 이탈리아는 10위로세계 생산량의 불과 2.1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토마토 하면 이탈리아가 떠오른다. 아마 이렇게생각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부터 ‘토마토=이탈리아‘
라는 불문율이 성립된 것이다. 이제는 이탈리아의 음식이 아니라 전세계인의 음식이 된 파스타와 피자 덕분이다. - P101

만들었다. 볼로냐 특유의 ‘볼로네제 소스‘가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볼로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생면 파스타에 이 라구 소스를얹어서 볼로네제 파스타를 만들었다. 향신료와 설탕 범벅이던과시적인 음식이 볼로냐에서 비로소 미식의 음식으로 재탄생한것이다.
볼로냐와 나폴리의 토마토소스 대결은 어떻게 보면 사골국물로 만든 손칼국수와 멸치국수의 대결처럼 기호의 차이 때문에벌어진 큰 의미 없는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손칼국수와멸치국수 사이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이탈리아에서는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 골라먹으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맛을 자랑하는 북부의 파스타와 남부의 파스타는 전혀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맛도 매우 다르다. 이렇게 맛과역사가 다른 파스타가 미국으로 건너가 뒤섞이면서 문제가 시작된것이다 - P122

볼로냐, 아니 이탈리아에서는 정작 먹지 않는 미트볼스파게티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여겨지니 이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한 일일까. 사실 이탈리아에서는 스파게티같은 가는 면은 주로 해산물이나 바질 페스토처럼 가벼운 소스에 곁들여 먹었고, 주로 이탈리아 남부나 남부의 밀로 파스타를 만드는 해안 도시에서 주식으로 먹었다. 목축이 발달해 버터와 치즈가풍부한 이탈리아 북부는 눅진한 소스를 만들어 두께가 넓은 면에 비벼먹었다. 그들에게 파스타는 끼니를 때우는 용도가 아니라 명절이나 손님이 찾아왔을 때 내놓는 정성스러운 음식이었다.
이렇게 각 지역마다 파스타에 대한 역사와 기호가 다른데 그걸하나로 뭉뚱그려 제멋대로 바꾸어버리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손칼국수와 멸치국수가 엄연히 다른 음식인 것처럼, 이탈리아인에게 파스타는 제각기 다른 역사와 맛을 지닌 존재다. - P122

이탈리아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음식과 관련해 ‘하면 안 된다‘는규제가 많은 나라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원칙 중 하나가 볼로네제소스를 스파게티 면과 먹으면 안 된다는 거다. 볼로냐 사람뿐 아니라이탈리아인에게는 상식인 이야기다. "볼로네제 소스에 스파게티면을 쓰는 건 개인의 자유다"라고 이야기하는 이탈리아 정치인이있다면 적어도 에밀리아로마냐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장을 당할지도모른다.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신공격을 감내해야 할 수도있다. 이렇듯 이들에게 파스타는 이념보다 앞서는 정체성의 문제다.
- P123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볼로냐 사람들의 자부심 때문이아닐까 싶다. 고대 에트루리아인이 세운 도시였던 볼로냐는켈트족이 다스리면서 ‘볼로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켈트족의목축 기술을 전수받은 그들은 다시 게르만족의 새로운 유목 문화를흡수했다. 특히 그들은 롬바르디아인의 돼지 사육에 대한 지식을그대로 배워 프로슈토나 모르타델라 같은 새로운 살루메를만들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치즈인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도, 또 가장 독특하면서 가장 비싼 식초인 발사믹 식초도 이 지역의 작품이다. 이들이 잘 만드는 것에는 볼로냐와 모데나에서 생산하는슈퍼카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도 포함된다. 볼로냐를 포함한 에밀리아로마냐 사람들이 "우리는 필요하면 우리가 직접 만든다. 그리고 잘 만든다"라고 자신하는 이유다. - P125

이탈리아에서 토마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주는 시칠리아다. 그다음으로는 캄파니아(주도는 나폴리), 라치오, 풀리아 순이다(2018년기준 유엔식량농업기구 통계). 이탈리아 중부의 라치오를 제외하고는전부 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1년에 1인당18.2킬로그램의 토마토를 먹는데, 유럽에서 1인당 토마토를 가장많이 먹는다. 아울러 이탈리아는 토마토 관련 소스를 생산해가공수출을 많이 하는데, 이탈리아의 토마토 관련 식품기업은대부분 볼로냐와 그 주변에 자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토마토가공식품 회사는 미국의 ‘모닝스타Morning Star‘다. 2위, 3위는 중국기업이다. 중국과 미국의 ‘규모의 경제‘에 밀려 이탈리아 회사는 세계13위를 차지하고 있다. 콘세르베이탈리아ConserveItalia가이탈리아에서는 1위의 기업이다 - P126

콘세르베이탈리아는 볼로냐의 협동조합에서 시작한 기업이다.
‘콘세르베cconserve‘는 이탈리아어로 ‘보존‘이라는 뜻이다. 이협동조합은 1976년에 설립되었으며 약 1만 4,500 명의 회원을 둔51개 이상의 대형 협동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탈리아와 유럽각국에 12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매출은 9억유로나 된다. 이탈리아 내에서 매출 2위인 카살라스코(롬바르디아),
3위인 무티(에밀리아로마냐)도 볼로냐 주변 지역의 기업이다.
카살라스코 역시 롬바르디아와 에밀리아로마냐의 접경 지역인크레모나에서 출발한 협동조합이다. 무티는 볼로냐 인근 파르마에서시작한 주식회사다.
이탈리아는 2015년 기준으로 유럽에서 협동조합에 고용된인구가 전체 생산가능인구에 대비해 가장 많을 정도로 협동조합이 - P126

발달되어 있다. 유럽 협동조합 가운데 매출이 가장 큰 상위 8개기업이 이탈리아 협동조합이며, 이 가운데 에밀리아로마냐가협동조합이 가장 발달한 곳이다. 볼로냐에 발달한 협동조합은볼로냐의 생활물가와 실업률을 낮추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전체실업률은 물론,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이탈리아의 청년실업률이 가장낮은 곳도 볼로냐를 비롯한 에밀리아로마냐의 도시들이다. 더불어여성의 취업률도 가장 높다. 볼로냐에 가면 느낄 수 있는 이곳사람들의 친절함은 이런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볼로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넉넉한 풍경이었던 듯하다.
러시아의 작가 파벨 무라토프 Pavel Muratov, 1881~1950는 19세기 말《이탈리아의 이미지》라는 책에서 볼로냐를 이렇게 찬양했다.
"볼로냐는 복잡하지 않고 경쾌하며, 눈을 즐겁게 하는 가벼운무언가가 있다. 이곳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신체는건강하다. 이곳은 기름진 곡창지대와 유명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풍성함과 다양함에서 볼로냐를 따라올 도시는 없다."
볼로냐에 가면 100년 전 러시아 작가가 느낀 감정이 과장이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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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탈리아 하면 으레 옛 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중세 도시국가를 떠올린다. 그래서 대다수 여행자들은 이탈리아반도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밀라노-베네치아-피렌체-로마-나폴리를다녀온다. 이는 1786년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가 선보였던 이탈리아기행 루트와도 비슷하다. 당시 30대 초반의 괴테는 "로마에 들어섰을때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탈리아에서 큰영감을 받았다. 괴테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의 이탈리아 여행코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크게 변함이 없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이한 이탈리아 여행자다. 나의 여행은 이런고전적인 이탈리아 여행 루트에서 한참 벗어났다.
로마-베네치아-나폴리 등을 대신해 내가 고른 도시는 볼로냐였다.
나는 2019년 이탈리아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레스토랑 인턴실습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볼로냐와 시칠리아에 - P6

각각 한 달씩 있다가 귀국했다.
볼로냐와 시칠리아를 고른 데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했던셰프들의 영향이 컸다. ICIF는 토리노가 주도인 이탈리아 북부피에몬테주에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피에몬테는 프랑스 문화와 이탈리아 문화의 교차점에 있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그런데 이 자부심 강한 피에몬테 사람들이 이탈리아 맛의 원조로 꼽는 도시가 바로볼로냐와 시칠리아다.
볼로냐가 자리한 에밀리아로마냐주는 이탈리아인들의골수라고 할 수 있는 치즈와 살루미 (햄)이 유명하다. 우리가 ‘샌드위치 햄‘으로 부르는 커다랗고 둥근 햄은 볼로냐에서 만든 모르타델라에서 시작되었다. 이 햄은 신성로마제국을 통해 스페인으로 전해졌고 남미로 퍼졌다. 이 햄뿐 아니라 이탈리아인의자존심으로 불리는 돼지 뒷다리로 만드는 생햄인 프로슈토의 집산지도 볼로냐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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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인생 여정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최상의 장비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몽테뉴의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발견하고메모해두었는데요, 여러분은 이 표현 어떠세요? 저는 접하자마자 고개를 끄덕였어요. 온몸, 온 삶으로 동의합니다. 몸에 물이 필요하듯 삶에 책이 필요했어요. 매일매일 일상은 비슷한데 왜 매일매일 새삼스럽게 힘이 들까요.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면 왜 또 발목을 잡는 문제들이 불쑥 등장하는지. 한 번씩 알수 없는 허무감에 시달리는데, 환절기 감기처럼 찾아오는 번뇌를 풀어가거나 잠시 도망치려고 할 때 책에 크게 의지했습니다. 제게 책은 생각의 갈피를 잡아주고 마음을 잠잠하게 해주는, 현명하고 너그러운 존재죠. 멋진 책을 읽으면 몸에 통째로 저장해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책을 빨리 떠나보내지 않고 더 잘 사랑하는 방법이 저에겐 글쓰기입니다. - P225

당신을 보려고 애쓸수록
내 두 눈이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
굶주린 아이처럼
당신 자리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그들이 찾는 것은
당신 얼굴이 아니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건
시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을
나 자신의
일부에 가깝게 만드는 것.


미국 시인 오드리 로드의 <치료Therapy>라는 시입니다. - P230

떤 느낌이 들었나요? 저는 "내가 만들고 싶은 건 / 시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 당신을 나 자신의 일부에 가깝게 만드는 것."에서 가슴이 쿵 했거든요. 황지우 시인의 <나는 너다>라는 연작시도 생각이 났고요. 당신을 나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게 아니라 일부에 가깝게 만든다는 표현이 시적이어서 울림이컸어요. 완전한 합일이 아니라 하나됨을 위해 애쓰는 조심스러움이 느껴져서요. 저 시구에서 "시"와 "당신"의 자리에 ‘글‘을넣어도 될 것 같아요.


내가 만들고 싶은 건
글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글을
나 자신의
일부에 가깝게 만드는 것. - P231

그렇습니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읽는 시간도 글쓰기에 대한 나의 생각, 느낌, 의견을 최대한 나에 가깝게 만드는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입니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시를 읽는 게 도움이 되나요?" 이렇게묻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아마 제가 쓴 책에 시가 많이 나와서 그런 듯해요. - P231

제 글쓰기는 시에서 매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에 좋은 영양제를 챙겨 먹듯이 글 쓰는 데 도움받으려고 시를 의도적으로 골라 읽은 건 아니고, 단지 좋아해서읽다보니 시가 글에 스민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가 글쓰기에 미친 영향을 일목요연하게 증명하며 답하긴 어렵습니다만, 시에서 얻어온 것들을 하나씩 짚어볼게요.
시를 허겁지겁 폭식하듯 읽은 시기는 인생이 가장 괴로웠을 때였어요. 정신이 탁해지고 마음이 울렁이면 출구가 필요했고, 그때마다 시집을 폈어요. 시에는 어지러운 것들, 하찮은것들, 삐뚤어진 것들, 버려진 것들, 다친 것들의 이야기가 늘나와요. 읽노라면 내 안의 어둠이 환하게 드러났어요. 특히 저는 최승자 시인을 가장 좋아해요. 고통의 발산과 응축으로 단련된 그의 단단한 시어를 보며 고통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 P232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다음에 "생산했고/생산했고"
라는 식으로 생산했고"라는 시어가 3 행, 4행에 반복되죠. 생산했고/ ~생산했으며 "로 조사 한 개만 바꿔도 시의 느낌이 달라져요. 언어적 긴장이 덜해집니다. 여운이 덜 고여요. 조사 하나 바꾸는 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에서는 조사하나의 무게가 문장 하나의 무게와 다르지 않습니다. 피아노를칠 때 음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처럼 글에서도 그런 것 같아요.
조사가 만든 작은 뉘앙스 차이가 모여서 문장을 이루고 단락이되고 글이 되면서 자기만의 문체를 형성합니다. 문체의 최소 단위인 조사 하나, 단어 하나가 굉장히 낯설어지고 소중해지는 경 - P235

험을 시를 읽으며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시에서 언어를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그리고 어둠을 직시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권해드리고 싶어요. 시를 읽어보시라고요. 글 쓰는 사람은 문자와 단어에 민감할 때 더 정확한 단어, 속 깊은 단어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 읽기가 녹록지 않죠.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도 자주 받아요. 읽어도 그 뜻을 도통 모르겠다면서 말이죠. 최승자 시인의 시는 비교적 이해하기 나은 편이에요. 이번 글 도입부에 소개한 오드리 로드의 시집 <블랙 유니콘》도 글쓰기 수업 교재로 썼는데, 게시판에 질문이 올라왔어요. 도저히안 읽힌다고요. "시 근육이 없는 사람은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수능 시험 끝나고 시 한 편도 안 읽어봤어요."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요. 느낌도 안 와요." 이런 항의성 질문은 시수업마다 반복됩니다. 그래서 시 읽는 방법을 친절하게 답변해드렸어요. 그 답변을 공개합니다. 별건 아닙니다만. - P236

시 읽는 법
1번.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는 읽고서 넘어간다.
2번 ‘이러다가 한 편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싶어도 넘어간다.
3번. 어쩌다 하나 얻어걸리는 시구가 있으면 밑줄을 긋는다.
4번. 맨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일독한 후 해제까지 읽는다.
5번. 다시 시집 한 앞으로 가서 그나마 읽을 만했던 시 위주로 골라서 소리 내어 읽는다.
6번. 세상에는 원래 이해 안 되는 말이 많다는 것, 내가 모르는 게않다는 엄정한 사실을 받아들인다.
7번. 또다시 시집을 편다.
8번. 1~7번을 체력과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반복한다. - P236

저도 시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한 번 읽고 나면 이게 무슨말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죠.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를 읽는 것 같아요. 글자는 알아도 맥락을 모르는 문장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에 대한 환기이죠. ‘왜내말을 못알아들어!‘라고 서로 아우성치는 인간 세상에 대한 축소판이 시집입니다.
시를 읽으면 언어에 대한 유희와 긴장과 겸손을 잃지 않게 되더라고요.
마음에 들어오는 시 한 편 얻기가 얼마나 어렵게요. 그렇지만 운명처럼 마주한 시 한 구절은 한 사람이 한 시절을 버티게도 해줍니다. 여러분도 어서 삶에 시를 들여서 언어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탐닉하시길 바랍니다. - P237

문체는 한 작가의 고유함, 즉 글 안에 들어 있는 세계관, 정서,
문제의식, 표현력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글쓴이의 이름을 가리고 글을 읽었는데 누가 썼는지 알겠으면그 작가는 고유한 문체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겠죠. 저에겐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 글이 그래요. 아무런 정보 없이 읽어도 선생님 글인 걸 바로 알겠더라고요. 시대의 풍속화와 삶의 세목을 그려내는 대가죠. 박완서 선생님이 쓴 글은 소설이든 산문이든 흉내 낼 수 없는 단단함과 날카로움이 있어요. 전개 속도가 빠르면서, 생활과 체험의 무게가 실린 튼튼한 문장을 쓰는
‘사실주의 문체‘의 소유자입니다. - P238

제 글에 대한 피드백을 종합해보면 문장의 밀도와 온도에관한 이야기 같아요. 그래서 생각한 저의 문체는, ‘두부체? 몰랑몰랑하고 맛있고 단백질 함량이 높고 몸에도 좋잖아요. 그런 글을 쓰고 싶었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문체를 갖겠다고 의식하지 않았는데, 글을 쓰면서 ‘정확하되 아름답게쓰자‘ ‘현실을 날카롭게 짚더라도 글에 칼날을 넣지 말자‘라는신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저격하는 글이나 과격하고신랄한 글을 읽으면 마음이 힘들어요. 독자로서도 그런 글을잘 읽지 못하기에 쓰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글로 담아내요. 일하다가 죽는노동자의 문제를 파헤치고, 헌신과 희생을 요구당하고 자기몫의 삶을 빼앗긴 여성의 존재, 시민권을 얻지 못하는 존재, 고생 끝에 낙이 온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계속 패배하 - P239

다른 작가의 문체도 살펴볼게요.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쓴 황정은 작가도 고유한 문체를 가진 대표적인 소설가입니다.
<백의 그림자>라는 소설은 작가만의 문체를 비롯해 주제 표현등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아서 글쓰기 수업 교재로 썼었고요.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읽었을 때, 이건 정말 황정은 작가만쓸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았던 구절이 여러군데 있지만 한 단락만 여러분께 공유해볼게요. - P241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문장이 덤덤한데 기저에는 삶에 대한 뜨거움이 있어요. 문장에 쉼표를 많이 쓰고 행도 자주 바뀌어서 장시 같고요. 소설전반에 ‘간장 한 방울‘과 같이 굉장히 사소한 것들과 무의미에가까운 덧없는 존재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읽다보면 가 - P241

슴에 점점 파문이 인다고 할까요.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라고 쓴 문장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애틋하게 느껴지고, 생에 대한사유를 자극합니다.


여러분도 고유한 문체를 갖고 싶다면 이렇게 해보세요. 자신의 글이 어땠으면 좋겠는지 고민해보는 거예요. ‘웃기면 좋겠다.‘ ‘담백한 문장을 쓰고 싶다.‘ ‘서늘하면 좋겠다.‘ ‘독자가얻어갈 게 글에 꼭 있어야 한다.‘ 이런 지향점을 두고 글을 쓰다보면 자기만의 세계관과 정서, 읽는 호흡에 따라 고유한 문체가 생기지 않을까요. 문체는 남들이 가진, 좋아 보이는 걸 가져오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가장 고유한 본질에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글쓰기는 자기 탐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P242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나의 좋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경험, 지혜를 글로 엮으면서 내 것과 의미의 파장이 맞는 다른 이의 표현을 넣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쓴 문장을 곁들이는 일이 ‘인용‘이죠. 저는 인용구를 즐겨 씁니다.
인용구로 이루어진 책 《쓰기의 말들》도 냈고요.
인용구를 쓸 때 주의할 점은 ‘애매하면 뺀다‘입니다. 모자를떠올려보세요. 기껏 옷 잘 입고 안 어울리는 모자를 쓰면 스타일이 망가지잖아요. 글도 마찬가지죠. 글 전반에 맞춤한 인용구를 고르는 게 관건입니다. - P244

극단 작품개발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 강의 의뢰가오기도 했죠. 이처럼 인터뷰는 소통의 도구이자 타인의 삶의맥락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쓰입니다.


우선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인터뷰가 상대의 마음을 여는 일이고, 마음은 마음으로만 얻을 수 있어요. 제가 인터뷰어로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인터뷰이로 인터뷰에 응하기도 하는데요, 상대의 태도에 따라 제 자세도 달라져요. 상대가 최선을 다하면 저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진지하게 임하게 되더라고요. 안 하려던 이야기도 막 하고요. 또 제가인터뷰어로서 ‘이 인터뷰, 특별히 잘하고 싶다‘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임하면 처음엔 덤덤하던 인터뷰이의 눈빛도같이 깊어지는 걸 느끼기도 합니다. - P250

좋아하는 영화 《캐롤》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궁금한 것들이 있는데 당신에게 물어봐도 될지……" 테레즈 (루니 마라)가캐롤(케이트 블란쳇)에게 말해요. 캐롤이 답하죠. "뭐든 물어봐줘요, 제발." 아, 저는 이 장면을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아요. 당신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이요. 캐롤은 중산층으로 가족이나 지인과의 관계가 피상적인 인물이에요. 주변엔 그를 전시하려고만 할 뿐, 그의 내면까지 깊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 테레즈가 자기의 존재를 궁금해하면서 말을 걸어올 때 캐롤이 얼마나 벅찼을까요. - P250

인터뷰도 ‘나는 너를 알고 싶어‘라는 프러포즈입니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일, 인터뷰할 때 저는 두 가지를 상기해요.
첫 번째,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뭐하러 인터뷰해요"라고말하는 인터뷰이가 더러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둘도없어요. 사람은 존재 자체로 귀합니다. 역사적으로 미천한 존재, 고귀한 존재를 나누는 신분 제도가 사회에 관습처럼 남아있을 뿐이죠. 지금도 권력이 있거나 업적을 이룬 인물의 서사만 주목하죠. 그런 무의식의 지배를 받아서 우리도 사회적 성취나 쓸모에 따라 자신을 평가해요. 그런데 ‘그냥 사는 사람‘은없어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다들 엄청난 자기 서사를 품고 있어요. 평범하게 살기 위해선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요.
인터뷰해보면 ‘한 사람이 저마다 우주‘라는 말을 수긍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든 존경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세요. - P251

두 번째로 상기하고 내려놓지 않는 점은 ‘그렇게 훌륭한 인물‘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진순의 열림>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던 이진순 선생님은 6년 동안 122명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많이 물어본대요. 지금까지 만난사람 중에 누가 제일 훌륭하냐고요. 이진순 선생님은 이렇게답합니다. "누구의 인생도 완벽하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 방은 있다." 인터뷰하는 사람은 그 한 방과 - P251

누추함이 버무려진 이야기를 발견하고 끌어내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모자란 구석과 빛나는 구석이 있는 복합적 존재라는 것, ‘그냥 사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없다는 것. 이러한 모순을 통합해내는 게 지성입니다.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질문이죠. 질문은 인터뷰의 꽃입니다. 사전 준비를 잘하는 건 기본인데요, 준비한 내용에만 의존한 채 이미 아는 사실을 확인만 하고 오는 인터뷰는 좋은 인터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좋은 인터뷰란, 그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인터뷰입니다.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시간이고, 그러려면 ‘열린 질문‘이 필요합니다. - P252

인터뷰에 대해 말하려면 책 한 권으로 풀어도 모자랄 것 같은데요. 제게 인터뷰란 ‘나를 흔들어놓는 대화‘입니다. 독서와경험으로 형성된 인식의 지반이 있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들은 타인의 말이 틈을 만들어내요. 균열과 혼란에서 다른 사유로 넘어가고,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계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인터뷰가 ‘인생 수업 심화반‘ 같다는 생각을 자주하죠. 인생 수업, 일대일 과외 같기도 하고요.
"우리는 경험을 가진 개인들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구성된주체들 20이라고 미국의 페미니즘 역사학자 조앤 스콧은 말했죠. 인터뷰이는 자기 경험과 생각을 말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이 됩니다. 인터뷰어도 타인의 삶을 경유하고 나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겠지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삶의신비를 배우는 ‘인생 수업 심화반‘에 여러분도 등록하시길 바랍니다. - P256

제 하루는 글쓰기를 중심으로 굴러가요. 아이들이 학령기일 땐 아침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서 바로 책상 앞에 앉았어요.
서너 시간 쓰다가 집중력도 떨어지고 허리도 아프고, 그러면그때부터 다른 일을 처리했습니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장도 보고, 이메일 답장도 하고요. 여러분도 글을 쓰고자 한다면 ‘글쓰기와 기타 등등‘으로 하루 또는 일주일 계획을 짜보세요. 초고를 쓰기 위해 통으로 최소한 네다섯 시간을 비워두는거죠. 퇴고는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써도 되거든요. 저의 경우, 빈 문서 상태에서 뭐라도 써야 하는 초고 작업에 가장 많은에너지가 들지, 써놓은 글을 고치는 퇴고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해요. 물론 퇴고하다가 미궁에 빠지는 경우도 많지만요.
글을 붙들고 있다보면 시간이 뭉텅이로 흘러가잖아요.  - P258

들지현대인은 시간의 빈자이죠. 돈에 쪼들리듯 시간에 쪼들려요.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라는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22 이런 사회 구조에서 어떻게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앨리스 매티슨은 말합니다. "나는 운이 좋았지만 노력도열심히 했다. 이기적이었다. 나는 글 쓰는 시간을 사수하는 법을 배웠다. "23 여러분도 글쓰기를 우선으로 하여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일상을 재편해보세요. 그렇게 써나갈때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로 살지 않고,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글쓰기가 알려줄 것입니다. - P261

그래서 매일 ‘무슨 일이 있어도‘ 글 쓰는 시간이나 ‘무슨 일이 있어도‘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진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쓰는 일보다 시급한 경우가 있으니까요. 대신 글 쓰는 날을 정했어요. 칼럼 마감일이 정해지면 일주일 전에 하루를 비워놓고, 귀엽고 도도한 방해꾼 고양이 무지를 피해서 아침부터 카페에 가서 글쓰기 활동에 진입합니다. 한 1, 2년 전부터는 주로 신체 배터리가 제일 짱짱한 아침에 쓰기 시작했어요. 밤이되면 하루치 피로가 몰려오고 눈이 침침해서 글쓰기에 집중할수 없더라고요. 30대에는 취재하고 와서 새벽 한두 시까지도거뜬히 글을 썼어요.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지만 과거의 저는그랬고, 지금의 저는 아침에 초고를 씁니다. 제게 글이 잘 써지는 시간대는 배고프지 않고, 체력이 비축되어 있고, 마감을 일주일 앞둔 아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 P263

언제부턴가 이렇게 생각해요. 글 한 편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잘 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요. 글 한 편을 잘쓰더라도 글 쓴답시고 하루가 엉망이 되면, 그게 또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무엇을 위한 글인가, 회의가 들고요. 잘 살려고쓰는 건데 쓰다가 잘 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안 되잖아요.
저한테 ‘잘 사는 일‘은 하루를 잘 보내는 일입니다. ‘인생‘을잘 사는 건 어려운데 ‘하루‘를 잘 보내는 건 해볼 만하죠.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한 편을 초고라도 완성하고, 아이들 먹을 닭볶음탕이라도 한 냄비 가득 만들어놓고, 카페 가서 거품 곱게 내려진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책두어 시간 읽다가 산책하고, 저녁에 친구 만나서 생맥주 한잔하면서 수다 떨고, 잠들기 전 한 시간이라도 책상 앞에 앉아 오전에 쓴 원고를 퇴고한 날. 이런 날이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하루에요.  - P264

공감합니다. 저도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마냥 놀기만 하면불안해요. 써야 할 글이 있으면 편히 놀지 못하고, 글을 쓴 뒤놀아야 개운해요. 주말이나 연휴의 무질서가 싫고요. 하지만올리버 색스가 저렇게 일 중독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집안의 누군가가 재생산 노동을 해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아요.
제 손으로 밥상을 차리고 옷을 빨아 입고 타인을 돌보면서 글을 쓰는 사람의 이야기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사는 일에 쓰는 일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당장만 쓰는사람이 아니라 오래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에너지를 안배하고 시간을 조율하는 지혜를 각자 삶에서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 P266

앞서 리베카 솔닛,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최승자 등 수많은 작가를 언급했는데요. 저는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작가를멘토로 삼아요. 그들의 말과 글에 영향을 받았고 닮고 싶어서몸살을 앓았죠. 그렇게 쓰다가 글이 쌓이니까, 언제부턴가 다른 작가가 아니라 과거의 나한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마음, 그야말로 ‘글쓰기의 최전선‘에있다는 긴박함과 절실함으로 다졌던 다부진 각오, 무모한 결의, 순정한 마음을 여전히 잘 간직하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일전에 어느 분이 《쓰기의 말들>에서 "글쓰기에는 충분한시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이 인상깊어서 필사했다고 말했어요. 사실 뜨끔했어요. 저야말로 시간을 안배해놓지도 않고서 글 쓸 시간이 부족하다며 글 못 쓰는 핑계를 댈 때가 있거든요. 젊었을 때 한 말에만 책임지고 살아도 훌륭한 인간이 되겠구나 싶었죠. 특히 글에는 온갖 사려깊은 말과 훌륭한 생각을 쏟아내니까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내가 어떻게 써야 할지는 내 글에게 물어라." - P272

대작가들은 햇살이고 물이고 바람이에요. 이 햇살과 물과바람은 자기 삶에 뿌리내린 사람에게만 지속적인 양분이 되는 것 같아요. 대작가의 말과 글을 자기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녹여내지 않으면 고유한 글을 써내기 어렵죠. 멘토로 삼은작가를 모방하는 글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는 있어도 언제까지흉내만 낼 수는 없어요. 한그루 나무처럼 자기만의 중심이 있어야 하니까 글쓰기에서 궁극의 멘토는 나 자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 P273

제가 정의 내린 작가란 ‘쓰는 사람‘입니다. 나만 보는 글을쓰는 사람이 아니라 전체 공개로 어디에서든 누구나 볼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 그래서 이번 글 도입부에 소개한 칼럼에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말했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수 있겠죠. ‘쓰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라고 답하겠습니다. 작가는 독자와의관계에서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독자가 당장 내 눈앞에 있든,
내가 죽은 뒤 미래에 존재하든,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쓰는 행위에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고 작가라는 이름에 피가 도는 것 같습니다. - P275

내가 내려는 책과 유사한 도서를 찾아 참고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끝까지 긴장을 내려놓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는 집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국 쓰는 일은 체력 문제이고요.


미국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인데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희귀한 기적을 제외하고, 책을 쓰는 것은 경제적으로 승산 없는 도박과도 같다" 고 말합니다. 맞아요. 고역이죠. 그런데 왜 썼을까요? 자신의 첫 에세이 《바닷바람을 맞으며》에서 "바다의 생명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깊은 확신에서 우러나 이 책을 썼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의 확신은 무엇인가요? 그에 대한 답변이 첫 책의 주제로 담길 것입니다. - P279

능감이 저를 글쓰기 앞으로 자꾸 데려다놓는 것 같습니다. 이재밌는 글쓰기를 저만 할 수 없어서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라는 책으로 여러분과 글쓰기 이야기를 열심히 나눠봅니다.
어서 이 혼란과 재미의 세계로 건너오세요. 마중 나가 있겠습니다. - P295

세월호 1주기 즈음인 2015년 4월에 글쓰기의 최전선》이 출간되었다. 책을 본격적으로 집필하는 1년 내내 슬픔을 등짐 지고썼던 기억이 난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마감하는 중에 이태원에서 젊은 목숨 158명이 무참히 스러져갔다. 이번에도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못했다. "아이들은 놀러 갔다가 죽은게 아니고, 노느라 정신이 팔린 자들 때문에 죽은 것"이라던 세월호 유가족의 말이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게 이 시대의 절망이고 비극이다.
대참사와 대참사 사이에서 책을 내자니 고개가 숙여진다.
글쓰기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쓰는가, 거듭 되묻게되는 시절. 그런데 글쓰기가 아니면 또 어떻게 슬픔에 닿을 수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회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사회 구성원이 맡은 바 자기 일을 하지 않을 때 어떤 참사가 발생하는지 두 눈으로 보았으므로 나는 정신 차리고 슬픔에 집중하는 것으로써 쓰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고 싶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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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키우다보면 질문이 생기고, 질문은 생각을 촉발하죠. 앞선 글 〈상식과 관습을 뒤집어서 사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와 맞닿는 내용이겠네요. 일상에서 상식과 통념에 따라 ‘생각한다‘는 자각도 없이 익숙한 대로 느끼고 판단하며 살잖아요. 이렇게 시스템화된 사고의 회로에 중단이 일어날 때, 진짜 나의 생각이 시작됩니다. 그러려면 부단히 자각해야 하는것 같아요. 마치 그냥 앉아 있으면 허리랑 어깨가 굽기 쉬운데, 일상에서 ‘허리 펴기‘를 의식해서 자세를 잡아야 체형을 바로잡을 수 있듯이요. ‘생각 펴기‘ ‘생각 키우기‘를 의식적으로 해야 질문하는 몸을 만들 수 있겠죠.


제가 아는 질문하는 힘을 기르는 방법은 ‘낯선 환경에 놓여보기‘ 그리고 ‘이방인 되기‘예요. 일상에서 생각하고 질문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익숙하기 때문이죠. 다르게 생각할 계기가 잘 없어요. 저는 일 때문에 낯선 환경에 종종 놓입니다. - P178

강연이나 취재 제안이 왔을 때 익숙한 일, 쉽게 할 수 있는일만 골라서 하면 편하겠지만 안주하기보다 낯설고도 의미 있는 주제를 다뤄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해요. 학생들의 금연교육에 강연자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처음에는 자신이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가봤고요. 있지만 없는 아이들의 집필 제안이 왔을 때 한번 해보자고 결심한 이유도 ‘미등록 이주아동‘의 존재가 저한테 가장 먼 이웃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인터뷰를 위해 만난 이주아동, 이주노동자, 이주활동가의말을 들으면서 편견이 깨지고, 이주아동에 대한 제 생각을 만들어갈 수 있었죠. 책에 나온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25년을 산 인화 씨도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은 불편해야 생각한다고요. - P182

저는 ‘현장‘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요. 삶이 발생하는 자리, 생생한 현실을 일깨우는 삶의 진실이 현장에 있습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낯선 이웃이나 현장을 찾아나설 때, 기존의 앎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그 혼돈의 토양에서 생각의 씨앗이 발아합니다. 여러분도 각자 찾아보세요. ‘나의 현장은 어 - P182

디인가‘ ‘내가 이방인이 되는 자리가 어디인가‘ ‘나의 가장 먼이웃은 누구인가‘ 하는 것들을요. 하지 않던 상상을 하고 현장을 기웃거리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일상에서 생각을 키우는 시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꼭 어딜 가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같은 장소도 얼마든지 낯선 곳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 키우는 여성이 글쓰기에 좋은 환경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를 낳으면 익숙하던 일상이 날마다 한없이 낯설어지거든요. 나는 그대로인거 같은데 엄마가 되면 기존의 내가 사라지는 느낌도 드니까요. 한번은 유자녀 여성 학인이 이런 글을 썼어요. 엄마를 ‘워킹맘‘과 ‘전업맘‘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에 반대한다고요.  - P183

집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도 가사노동을 하기에 워킹맘이고, 회사에 다니는 워킹맘도 집안일을 상당 부분 한다는 거죠. 또한 자신은 아이를 키우면서 본의아니게 직장을 관뒀는데, 전업맘이 되니 ‘집에서 노니까 좋겠다‘라는 말을 듣는대요. 전업맘과워킹맘은 엄마라는 존재를 소득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나눈, 즉 경제적 지표에 따른 구분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쓸모있는 존재는 소득이 있는 경제활동인구를 뜻하고요. ‘사람을나누는 기준이 왜 돈벌이가 됐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글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찾은 좋은 글감이죠.


저는 의문이 들면 그 생각을 말로 많이 해보는 편이에요.  - P183

입 밖으로 꺼내 이야기한 자기 고민을 누군가가 받아주고 그 생각에 살을 붙여주고 뒤집어서 안 보이는 면을 보여주기도 하죠. 질문이 만들어지고 발상의전환이 일어납니다.
모든 멋진 것은 협업의 산물이죠.
‘훌륭하게 생각하기‘라고 하면 부담스러운데 ‘다르게 생각하기‘라고 표현하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방인이되는 자리에 들어가보고, 마음에 걸리는 말을 붙잡아보고, 자기 생각을 말해보는 과정에서 다른 생각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 P185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평을 듣는 글을 고칠 방법이 없나요?"라는 질문에 저는 방법이 있다고 답합니다. 방법이 없는일은 없는 거 같아요. 시간이 부족한 일은 있어도요.
처음으로 마음에 새긴 글쓰기 팁이 ‘멋진 글보다 쉬운 글을쓰라는 말이었어요. 처음에는 이 조언이 못마땅했죠. 쉬운 글은 시시하고 밋밋한데 왜 쉬운 글을 쓰라는 건지, 멋진 글을 지향해서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무조건 멋지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그런데 쓰다보니까 쉬운 글을 쓰라는 말이 맞더라고요. 멋진 글을 쓰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글이 추상적으로 써져요. 괜히 아는 척도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철학 용어도 쓰고, 현실의 구질구질함을 담지 않은 개념어도 골라 쓰고요. 물론 개념어나 관념어도 때론 필요하지만 과하면 글에 메시지가 아니라 허세만 남기도 해요. 쉬운 글을 쓰라는 건, 내가 어떻게 보일지만 생각하며 자아도취 하지 말고 독자 중심으로 독자가 알아듣도록 쓰라는 뜻입니다. "산문에서 모호하게 글을 쓰는 자는 대개 허세를 부리고 자기중심적인 자다. - P186

열린 마음과 공감하는 태도로 자기만의 목적을 넘어서 더 큰 목적을 달성하려고 글을 쓰는 자는 글이 명료할 수밖에 없다."
언어학자이자 작가인 F. L. 루카스가 한 말입니다. - P187

동시에 글 쓰는 사람은 자기 경험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여 구체적으로 써야 해요. 쉬운 듯 어려워요. 어떤상황을 세세하게 쓰려면 기억을 복기해 찬찬히 상황을 되짚어보고 무슨 사건을 쓸지 고민하고, 왜 좋고 나빴는지 감정을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 과정에 상당한 노동이 들거든요. 힘도 들고 시간도 듭니다. 또 낱낱이 쓰려니 무언가 부끄럽고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뭉뚱그려서 추상적인 글을 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의 글이 관념적이고 모호한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게으름‘도 한몫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글이 모호하고 추상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는 건 노동하지 않았다, 자기한테 집중하지 않았다, 감추고 싶은 게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호하고 추상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저는 늘 자기 경험의 특정 상황에서 글쓰기의 발상을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삶의 한 장면이요.  - P188

추상적인 글쓰기를 피하는 방법 두 번째는 글을 쓸 때 내 글을 읽었으면 하는 독자 한 명을 상정해보는 겁니다. 친구한테드라마의 한 장면을 말해주듯이 글 속 인물의 행동과 감정의동선을 따라서 생생하게 써보세요.
세 번째는 글을 다 쓰고 나서 개념어, 관념어에 동그라미 쳐보세요. 그런 단어를 지우고 생활 언어로, 구체적인 동사로 바꿔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가령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가끔쓴다. 어떤 일을 계획할 때나 다짐이 필요한 순간에만 쓰는편이다‘라는 문장을 보겠습니다. "가끔" "일" "계획" "다짐" 이런 단어가 모호해요. 계획하고 다짐한 일의 구체적 사실을 문장에 채워 넣어야죠. ‘나는 한 달 동안 글을 두 편 썼다. 필라테스 강사 자격 시험에 대비해 공부 계획을 짤 때랑 나에게 상처주는 친구를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다짐을 할 때였다.‘ 이렇게고치면 자기 상태를 더 명확하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만 했지 쓰지 않았다는 것, 언제 내가 글쓰기 앞에 서게 되는지를 인식하면 다음 문장도 찾아지겠죠. - P189

‘정확하게 쓰자‘ ‘간결하게 쓰자‘ ‘쉽게 쓰자‘ 세 가지 표현은 맥락이 비슷한 듯 다릅니다. "간결하고 쉬운 글이 좋은 글인가요?" 이 질문을 뒤집어보면 "복잡하고 어려운 글이 나쁜 글인가요?"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간단하고 쉬운 글이라고 다 좋은 글이 아니고, 복잡하고 어렵다고 다 나쁜 글도 아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분법 구도에서는 좋은 질문이 안 나와요. 대답도 단순해져요. 세상일을 선악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듯이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우선 ‘쉽다‘ ‘어렵다‘라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겠죠.
쉽거나 어려운 글보단 내용이 빈약한 쉬운 글 혹은 얻어갈 내용 없이 어렵기만 한 글, 이런 글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 P191

저도 간결한 문장을 선호해서가끔 써요. 그런데 과하면 역효과가 생깁니다. 한문 투와 번역투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적절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같습니다. 독자와 소통하려는 마음보다 어휘력이나 지식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지는 글은 좋은 글이라고 보기어렵습니다. 쓰는 사람의 안중에 읽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독자는 다 느끼잖아요. 나쁜 글의 예를 들지는 않고 좋은 글의예를 들게요. 아서 프랭크가 《몸의 증언》에 쓴 글입니다. 

질병 그 자체는 예측가능성의 상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상의상실을 이야기한다. 요실금, 숨가쁨 혹은 건망증, 떨림과 발작, 그리고 아픈 몸으로 인한 다른 모든 "실패들."(…) 질병은 통제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 P192

토목만이 아니라 농사든 가사노동이든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 관해 쓰면 좀 더 간결하고 쉬우면서 아름다운 글로 표현할수 있는 것 같아요.
글쓰기 책에서 말하는 ‘간단하고 쉽게 쓰라‘는 의미는 지식만 전시하는 글, 자아만 비대하고 독자의 자리가 없는 자아도취형 글을 쓰지 말라는 뜻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승객도 안 태우고 자기만 앞서가면 곤란합니다. 좋은 작가는 숙련된 기관사처럼 독자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자신이 본 세계로 데려다줍니다. - P195

긴 글을 쓰고 싶다면 무르익지 않은 생각이라도 표현을 자제하기보단 SNS를 활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발상을 저장해두는용도로요. 글을 완성하면 블로그나 브런치같이 타인의 반응이비교적 즉각적이지 않은, 고요하고 안정적인 느낌의 플랫폼에공간을 마련해 쓰는 겁니다. 우선 얼마나 쓸지 분량을 정해보세요. ‘긴 글‘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니까요. 저한테 긴 글은 A4용지에 서체 크기 10포인트를 기준으로 네 장 넘는 글이거든요.
한 장이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대략 10매이니, 원고지 30~50매 정도 분량으로 청탁이 오면 살짝 긴장하죠. 여러분도 길다고느끼는 글의 분량이 어느정도인지 헤아려보세요. - P197

처음에는 SNS에 쓰던 글의 두 배 분량을 써보겠다고 목표를세우고 그렇게 약 열 편, 스무 편 정도 글을 써보세요. 그 정도분량을 쓰는 일이 수월해지면 A4용지 한 장 반으로 분량을 또늘려보고요. 그 정도 분량이 200자 원고지를 기준으로 15매 정도 됩니다. 제가 글쓰기 수업에서 내는 과제의 분량이죠. 처음글쓰기를 배우는 분에게 A4용지 한 장은 무언가를 온전히 말하기에 좀 짧고, 두 장은 길게 느껴져서 좀 부담되는 분량인 듯합니다. 한 장 반에서 두 장 사이 분량이 자기 생각 한 가지를잘 정돈해 표현해내기엔 무리가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쓰다보면 두 장 정도는 어느새 어려움 없이 쓰는 자신을 발견할 수있습니다. 그렇게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페이지가 넘어가고 점차 써내는 분량이 늘겠죠. - P198

글의 길이와 질이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도 자기 한계를 조금씩 늘려가는 느낌으로 평소 쓰던 글보다 사고의 호흡이 깊은 글쓰기에 도전해보시라는 겁니다. 오늘 주제와 관련된 좋은 글이 있어서 나누며 마무리하겠습니다. 발터벤야민의 <사유이미지>에 나오는 글이에요.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그소망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즉 그 실현이 목표에 정확하게 합당한 실현이 되는지, 아니 - P199

면 탐욕스럽고 흐리멍덩하게 소망에 자신을 탕진하는지 길을 가고 있는 자의 훈련 여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신을 절제하면서 불필요하거나 장황하거나 어슬렁거리는 동작들을 피하면 피할수록, 모든 신체의 자세는 자신에게 그만큼 더 족하게 되고, 그 신체를더욱더 적절하게 운용하게 된다. 열악한 작가는 착상이 많이 떠올라 그 착상들 속에서 기력을 탕진해버린다. 이것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열악한 달리기 선수가 사지를 맥 빠지게 움직이거나 지나치게 활발하게 움직이느라 기력을 탕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열악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냉철하게 말할 줄 모른다.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 P200

"글을 쓰다만 채로 두지 말고 한 편을 끝까지 완성해보세요."
글쓰기 수업에서 자주 하는 조언 중 하나입니다. 격식을 갖춘글 한 편 쓰기를 완수하는 체험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자기글의 현 상태와 능력치를 파악하는 거죠. ‘아, 내가 이 정도 쓰는구나‘ 하고요. 그런데 오래 붙들고 있어도 완성하지 못하는글이 있죠. 가까스로 마무리를 지었는데 분량만 채웠을 뿐 내용은 엉성하기 짝이 없고요. 아무리 시간과 공을 들여도 완성되지 않는 글도 있습니다.
글을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글감에 대한 생각이 설익었기 때문입니다. 멸치 육수를 내는데 멸치가 서른 마리 있는 육수랑 세 마리 있는 육수를 비교해보면 농도가 다르겠죠. 세 마리밖에 없으면 오래 끓여도 육수가 밍밍합니다. 멸치가 서른마리 있으면 잠깐 끓여도 육수가 진하게 우러나고요. 진한 글을 쓰고 싶으면 생각의 멸치를 모아야 합니다.  - P201

2년 동안 나는 생각했던 만큼 자주 사람들을 만나지도 글을 쓰지도 못했다. 읽기만 했다. 내 책은 무엇을 이야기하게 될까? 글쎄,
전쟁에 대한 또 한 권의 책이라……. 무엇 때문에? 전쟁은 사실, 크고 작은 전쟁들에서부터 널리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전쟁들까지, 이미 수천 번도 더 넘게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 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나의 엄마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들지 않았다.
우연히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더라도, 그건 ‘남자‘들의 전쟁 이야기이지, ‘여자‘들의 전쟁은 아니다. - P202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책을 왜 내야 하는지 자기 정리가 필요했다는 겁니다. 저 고민의 시간, 저 읽기의 시간을 통과했고 저 생각들을 차곡차곡 쌓아 발효했기 때문에 이렇게 묵직한 좋은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 한 편을 완성하는 노하우나 훈련법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일단 목표한 분량을 채워 써보는 것. 완성한 글에 세상사람들과 나눌 만한 ‘알맹이‘가 있는지 점검하는 것. 알맹이가부족하다고 판단했다면 보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책을 더 읽을지, 자료를 더 찾을지, 취재를 해볼지 생각해보고 실행하는 것. 다시 써볼 것. 이 과정을 반복하는 거죠. - P203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은 ‘이게 최선이다‘라는 완성도에대한 자기 기준을 세우고 감각을 기르는 일입니다. 글쓰기 경력이 쌓인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지도 않는 것 같아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고민하잖아요. 일전에 아는 시인 선배랑통화를 했는데, 그도 요즘 너무 괴롭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물었더니, 3년 동안 쓴 시를 엮어 시집을 내기로 했는데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계속 붙들고 있었대요. 고치고 다듬으며 계속 글을 매만진 거죠. 그런데 너무 고치고 다듬었는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대요. 소설과 다르게 시는 퇴고를 많이 하면 안 좋은데, 알면서도 이대로는 마음에 안 들고. 이 가을에너무 절망스럽다고 하소연을 했어요. 선배의 이야기가 이상하 - P203

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글 한 편이든, 책 한 권이든 ‘완전한 상태‘라고 느끼는 건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글 완성‘이란 임무에서 너무 빨리 떠나지도 말고, 너무 늦도록 매달려 있지도 말아야 하는 것.
이게 전부 아닐까요.
《올드걸의 시집》은 2008년부터 블로그에 쓴 글들을 엮은책입니다. 블로그에 올리기 전에도, 올리고 나서도, 수정 버튼을 눌러서 거슬리는 단어나 문장을 고치기는 했지만 저 혼자만 보는 글이라고 생각해서 현재 지면에 연재하는 글의 수준으로 공력을 들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인지 어설퍼도 자유로운 활력과 검열 없는 감성이 글에 담겨 있어요. 분량 제한도없어서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썼죠. 퇴고를 많이 안 했다고 해서 열 번 퇴고한 글보다 완성도가 무조건 떨어지는 것 같지도않아요. 그래서 헷갈려요. - P204

글쓰기는 이제 끝내야 하나 계속 써야 하나 영원히 헤매는일 같습니다. 저는 주로 기권하는 심정으로 글을 마쳐요. 이만하면 됐다는 확신보다는 더는 못 하겠다는 몸의 신호를 따르죠. 오래 앉아 있어 허리가 너무 아프거나, 똑같은 글을 너무여러 번 봐서 토가 나올 것 같을 때 "더는 못 고쳐."하면서 그냥 누워버립니다. 하하. 다른 일도 해야 하니까 더 이상 붙들고있을 수 없고요. 이렇게 물리적 한계 상황까지 끈질기게 내 글을 붙들어보는 것. 과연 완성한 것인지, 내가 질문하고 내가 대 - P204

답하는 이 외롭고 불확실한 과정을 견디는 것. 이것이 글 한 편을 완성하는 노하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블랙스완>에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완벽함은 집착만으로 안 돼. 놓을 줄도알아야 돼. 너를 가로막는 건 너 자신밖에 없어."
누군가의 표현대로 완벽함은 안 주시고 완벽주의만 주신 신을 원망하며 끝나지 않는 글쓰기를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 P205

자기 검열, 남들의 시선과 평가로 자신을 옭아매는 상태죠. 아마 글쓰기 최강의 방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쭉쭉 써내려가도 글을 완성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데, 자기 검열을 하면 망설임과 주저함이 더해지니까요. 특히 상실을 다루거나 자신의 취약함을 내보이는 글을 쓸 때 내 안의 검열관이 더 엄격하게 활동해요.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죠. 때로는 어떤 시선이나 평가가그릇된 사회 통념인 걸 알아도 자꾸 위축되고, 제아무리 내가옳다고 생각하는 걸 쓰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하며 써내길 망설이는 건 자연스러운 자기 보호라고생각해요. 그래도 자기 검열에 너무 오래 결박되어 있으면 생각이 시들고 글이 되지 못하겠죠. - P206

보통 성폭력 피해를 다루는 기사에서 피해자에게 씻을 수없는 상처가 남았다‘라는 표현을 관용구처럼 쓰잖아요. 그런데 성폭력 피해로 생긴 상처를 정말 씻을 수 없을까요? ‘씻을수 없는 상처‘라는 말 자체가 순결주의에 따른 낙인이죠. 사라져야 할 말입니다. 제가 《아버지의 사과 편지》의 해제를 썼는데요. 쓰면서도 그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씻을 수 없는 상처의 기록이라서가 아니라 ‘기록할 수없는 상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이 책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여성들, 혹은 자신이 목소리를 가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여성들에게 용기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책이 있습니다. 한국 조직 문화의 고질적인 위계 폭력을 드러낸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생존자 김지은씨가 쓴 《김지은입니다》가 그렇죠. 자기 검열이라는 두터운벽을 뚫고 힘 있게 써낸 ‘진실 말하기parrhesia‘의 좋은 교본이라고 생각합니다. - P208

사람은 변합니다. 노력하면 느리게라도 달라져요. 당장은자기 안에 있는 검열관의 눈치를 보느라 쓰지 못하지만 쓰고싶은 글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쓴 글로 주변을 채우세요. 젊은여성이 청소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기록한 김예지 작가의 책 - P208

<저 청소일 하는데요?>가 있어요. 청소노동을 낮추어 보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직업을 부끄럽게 느낄 수도 있는데 자기검열을 덤덤하게 넘어선 작품이에요.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낳고 싶지 않다면 최지은 작가의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같은 책도 좋고요. 결혼을 안 했지만 아이를 원해서 아이둘을 입양한 백지선 작가가 쓴 <비혼이고 아이를 키웁니다>라는 책도 있어요. 그런 비출산 경험자들의 글에서 언어를 수집하면 됩니다.
소위 ‘정상적인 삶‘에 대한 환영을 지운 자리에 저마다 자기삶의 지도를 그리도록 용기와 지침을 주는 책은 찾아보면 반드시 있습니다. 긴 시간에 걸쳐 이런 책을 꾸준히 읽어나간다면 자기 검열로 고민하던 여러분도 ‘아, 그냥 쓰면 되는구나‘
‘써도 별일 안 일어나는구나‘ ‘쓴 사람이 이상해 보이는 게 아니라 당당하고 멋있어 보이는구나‘라고 느낄 거예요. 서서히그런 언어에 물들 때 자기 안에 있는 검열관의 목소리가 힘을잃을 것입니다. - P209

독서 행위를 강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책에 손이 갈까요? 제 경우, 지금 제가 품고 있는 화두와 관련 있는 책에 끌리거나 믿을 만한 사람이 쓴 책에 관심이 가요. ‘무슨 책이냐‘보다 ‘누가 쓴 책이냐‘ 혹은 ‘누가 추천하는 책이냐‘를 더 중시해요. 책은 자기 주관과직관에 따라 집었을 때 실패 확률이 적을 것 같아요. 버지니아울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서에 관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아무 조언도 따르지 말고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결론에 이르라는 것뿐이다. - P214

제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좋은 책이란 읽는 사람을다른 생각,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책이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해주고, 모호했던 감정을 선명하게 만들고, 도망가고 싶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책. 이해 안 되는 사람을 이해하는 단초를제공하는 책. 무력감이 들 때 하고 싶은 일을 안겨주는 책, 그래서 읽다보면 자세를 고쳐 앉게 하는 책. 베껴 쓰고 싶은 문장이 많아서 다급하게 노트와 펜을 찾게 하는 책. 궁극적으로 읽고 나면 나도 세상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도록 돕는 책.
이런 책이 저한테는 좋은 책입니다.
읽을 당시에 하는 고민에 따라 좋다고 느끼는 책도 달라지 - P214

는데요. 30대였던 제게 좋은 책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예요. 요즘도 인생 책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표지가 나달나달해진 저 책이 먼저 떠오릅니다. 문장이 아름답고 명쾌하고 통찰력 있는 표현으로 일깨움을 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힘든 노동을 좋아하고, 신속하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는 너희들 모두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의 근면이란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  - P215

처음 이 문장 읽고 굉장히 놀랐어요. 꾀부리지 않고 묵묵히일하는 ‘근면·성실‘이 좋은 덕목인 줄 알았는데 ‘열심히 일하는 건 너 자신을 잊기 위해서‘라는 일갈이 너무 맞는 말인 거예요. 일하느라 지쳐서 생각할 겨를이 없잖아요. 퇴근 후엔 맥주한 캔 따서 넷플릭스 보다가 자고 싶지, 내 문제만 해도 머리아픈데 남 일이나 사회문제에 신경 쓰고 싶지 않고요. 니체가이런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듯이 말해요. 니체의 또 다른책 《아침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 - P215

준다. 따라서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고대 노동자와 달리 근대 노동자는 노동에 대한 ‘독특한 자기 위안‘이 있다고 니체가 말합니다. 노동이 자아실현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자아붕괴를 초래하고 건강을 해치기도 해요. 김밥집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이 온종일 김밥을 말다보니 손목관절이 망가져서 다른 일을 못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글 쓰는 노동도 허리와 손가락 관절을 망가뜨립니다.  - P216

니체가 물음을 제기합니다. ‘신체와 영혼을 변질시키는 활동으로써 노동이어떻게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을까?‘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 윤리학이 성행하자 사회에선 근면·성실한 모습을 찬양하게 되었고 개개인의 충동을 효과적으로 길들이고 노예화하였다는겁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행해지는 고된 노동을 비판하며 이렇게 단언하죠. ‘노동은 경찰이다.‘
니체를 ‘망치의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낡은 관념을 깨부수고 새로운 사상을 세운다는 의미에서요. 그 말이 딱 맞는 거예요. 니체는 ‘나‘와 세상을 둘러싼 장막을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언어를 구사했죠. 자기 자신에 대한 의도적 무지와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일깨워주었고, 내가 행하는 노동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를 정신 차리고 따져보게 했거든요. - P216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은 책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어요.
"나는 이웃들의 삶 속에 존재의 혁명을 일으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은 충분히 그런 역할이 가능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과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인식 체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면 다르게 살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책 쓰는 사람으로서 존재 해방에 기여하는 책을 쓰는 데 욕심이 나거든요. 대단한 프로젝트라기보단, 그저나를 해방시킨 언어들을 타인의 삶에 이식하려는 노동이 제게는 글쓰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 책을 읽고 삶이 달라졌다거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리뷰를 볼 때 보람을 느낍니다.
《글쓰기의 최전선》 추천사에 홍세화 선생님이 이런 표현을 - P218

썼어요.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 좋은 책을 읽거들랑 내게 들어온 가장 좋은 것들을세상에 풀어놓는다는 보시의 마음으로, 글로 써서 널리 나누시길 바랍니다. - P219

주변에 글 쓰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다독가예요.
읽기가 쓰기에 곧바로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독서 행위로인해 생각할 시간을 확보하고 좋은 문장을 통과하게 된다는점에서 장기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이 발아했을 때, 이미 사유의 줄기가 튼튼히 뿌리내리고 열매가 열린 책을 읽으면 힘을 얻기도 하죠. 나의 직관이나 느낌이 영 엉터리는 아니었음을 확인하면 안도감이 들어요. 반대로 나의 어떤 생각이 무지에 근거한 편견이었음을 알아채기도하고요. 이렇게 책은 생각의 토양에 햇살과 바람과 물을 공급해줍니다. 장대비와 천둥, 번개를 동반한 자극도 주죠. 글쓰기에 필요한 양분을 제공해주는 책에 본능적으로 손이 가는 것 같습니다. - P220

그랬더니 도수 맞는 안경을 낀 것처럼 세상이 더 선명해졌어요.
내가 놓여 있는 사회의 구조와 모순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그걸 어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읽기가쓰기를 재촉한 거죠.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도 있겠어요. 어떤 읽기는 읽는 사람을 쓰지 않을 수 없게만든다고요. 제 경험을 근거로 말씀드리면 ‘좋은 엄마란 뭘까‘
‘인간답게 산다는 건 뭘까‘ 이렇게 자기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을찾는 수험생의 마음으로 한 독서는 쓰기에 큰 도움이 됩니다. - P222

단, 이 책 저 책 여러 권을 읽기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보세요. 생각을 펼치고 다지는 읽기를 지나서 나만의 언어를고르고 만드는 읽기로 도약하기 위해서요. 물론 지적 쾌락을위한 독서는 끌리는 대로 폭넓게 읽어도 되지만 쓰는 사람으로서 관찰력, 사고력, 표현력을 기르고 싶다면 꼼꼼하게 읽어야 책을 내 것으로 만들겠죠. 저는 처음 집어든 책은 일단 그냥읽어요. 그러다보면 개중에 느낌이 강렬한 책이 있어요. ‘이 책좋다‘라는 생각이 들면 다시 첫 장으로 가요. 인상적인 단어나문장을 베껴 쓰면서 한 번 더 읽어봅니다. 그리고 필사한 내용만 따로 추려서 또 보고요. 그렇게 책 내용을 충분히 소화해내내 살과 피로 저장해둡니다. 좋아하는 것을 곁에 계속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으로요. - P222

제게도 재독 삼독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아요. 다시 읽고정리하려면 귀찮고 번거롭죠. 책은 매일 쏟아집니다. 날 봐달라는 신간 도서의 유혹도 물리쳐야 해요. 이미 읽은 책에 머물기보다 어서 새 책으로 달아나고 싶잖아요. 그럴 때면 저에게준엄하게 묻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책을 빨리, 많이 읽으려고안달이란 말인가.‘ 장안의 화제인 그 책을 나도 읽었다고 말하거나 1년에 100권 읽었다는 식으로 어디 가서 권수를 내세운들 순간의 기분에 그칠 뿐이죠. 과시하기엔 좋을지 몰라도 실속이 없어요. 고백하자면 저도 분명히 읽었는데 내용이 전혀기억 안 나는 책도 있고, 이미 산 책을 안 본 줄 알고 또 산 적도 있어요. 그런 어이없는 일을 하던 중에 아래 글귀를 만났습니다. - P223

속성을 바라기 때문에 옛것을 익힐 겨를이 없으며, 읽고 있는 글또한 세심히 살피고 익숙하게 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음은 바쁘고언제나 급박하게 쫓기는 것과 같아서, 본디는 여러 가지 글을 널리읽고자 하되 소홀히 하고 잊어버려 나중에 가서는 한 번도 글을 읽지 않은 사람과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한 권 읽고 나면 한 권 정리하는 수고로운 절차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훈련이 힘들면 실전이 쉽다는 말이 있죠.
의미 없는 헛수고처럼 느껴지더라도 조급함을 내려놓고 거듭 - P223

Tv TORT blog읽고 정리하며 머릿속에 들어온 것들은 나만의 언어로 무르익는 것 같습니다. 생각을 펼치고 지식과 지혜를 얻는 읽기에서나아가 자기 언어를 고르고 만드는 읽기 활동을 해보세요. 그런 뒤 나만의 독서 노트에 잘 정리해두는 거죠. 좋은 책이 주는언어와 사유를 한 단어도 흘리지 말고 살뜰히 챙기시길 바랍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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