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총격 사건 이후 반년 가까이 계속된 경찰의 가혹한 탄압은 도민의 가슴에 깊은 적개심을 심어주었다. 많은 젊은이가 피의자 신분이 되었고, 쫓기면서도 곡식공출 반대와 단독정부 반대 삐라 투쟁을 필사적으로 벌였다. 입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북청년단은 이러한 상황을 당분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육지 경찰에 대한 도민의 적대감을 익히 아는 터라 섣불리 본색을 드러내지않았다. 그들은 각 지서에 배치되었는데, 그중에는 글자를 좀 알아 경찰학교에서 일개월 과정을 마치고 이제 막순경으로 탈바꿈한 이들도 있었다. - P9
봉급이 없는 그들에게는 폭력 행위만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폭력을 사용해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폭력일수록 피의자로부터 뇌물을 받아내기 쉬웠다. 잡혀가면 다짜고짜 사정없이 구타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돈을 달라는 뜻인 줄 모르고무조건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만 했다. 미군정이 서청에게 봉급을 주지 않는 것은 굶주린 야수처럼 그들의 잔인성을 극대화해 민중의 저항을 짓밟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리베라 상회의 장영발은 판단했다. 또한 그들은 세관이 하는 일에 불법적으로 관여하여 복시한 사 건때처럼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으니, 일본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밀수품이라고 압수하여 육지 상인들에게 팔아넘겨 이득을 챙겼다. 미군정의 조선인 일인자 조병옥이 "공산주의자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떠한 악마와도 손을 잡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악마가 바로 서청이었다. - P12
날씨 화창한 10월의 어느 날, 문득 자기가 공부하던 책상을 보고 싶어진 창세가 몰래 학교 울담을 넘어 들어갔다. 학교 바로 뒤, 길건너에 경찰지서가 있기 때문에 무척 조심스러웠다. 학생들이 사라진 학교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쾌활한 목소리들, 몸짓들이 가득하던 운동장은 텅빈채 잡풀만 자라 있었다. 살그머니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창세는 오래고여 있던 뻑뻑한 공기에서 기분 나쁜 묵은 냄새를 맡고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언젠가 행필과 함께 상여막 안에 들어가 맡았던 바로 그 냄새, 묵직한 죽음의 냄새였다. 한쪽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창의 조그만 사각 무 - P17
늬를 바닥에 떨구고 있을 뿐 교실 내부는 전체적으로 그늘져 어두웠다. 학생들이 사라진 텅 빈 교실에 살아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은 책걸상들과 그 위를 덮은 먼지뿐이었다. 낯선 정적 속에 잠겨 있는 책걸상들, 그 위에 두꺼운 천처럼 덮여 있는 뿌연 먼지…… 그 야릇한광경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어떤 불길한 징후처럼 느껴져 몸서리가 났다. 어둠 속으로, 그늘 속으로 사라진이들이 다시는 이 교실의 자기 책상으로 돌아오지 못할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발을 떼고 몸을 움직이자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창세는 소매로 코를 가리고 재채기를 참으면서 자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를덮은 잿빛 먼지는 고르게 반반하고 부드러워 뜻밖에 아름답게 보이기까지했다. 창세먼지 위에다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써보았다. 안창세. - P17
그와 반대로 창세의 모친은 서청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종종 공짜로 군복을 수선해주었다. 만옥과 창세 두남매에게 장차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그들을 사귀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군복을 수선하는 동안 그들은 툇마루에 얌전히 앉아서 능란한 미싱 박음질을 홀린 듯이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의 얼굴은사악한 그늘이 조금도 없는 앳된 모습이었다. 창세 모친은 그런 모습이 신기하고 가슴이 뭉클해 찐 고구마 같은것을 내놓았는데, 그러면 진심으로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 P39
해가 바뀌어 1948년 무자년이 왔다. 창세는 이제 열여섯살이 되었다. 이팔청춘의 십육세, 아이에서 어른으로 탈바꿈하는 나이였고, 그래서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는 위험한 나이였다.
탄압 일변도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새해를 맞았는데, 벽두부터 다시 한번 검거 선풍이 휘몰아쳤다. 배신자 한명에 의해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이 누설되었다. 이름을빼앗긴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만 당원명부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미군 트럭 여러대가 동원된 가운데 단시일 내에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1.22사건이었다. - P42
3월 6일, 조천중학원 자치회 회장 김용철이 조천 지서에 잡혀간 지 이틀 만에 돌연사했다. 마을 청년들과 학생들 수십명이 나서서 샅샅이 수색했는데, 시신은 마을 밖냇가 덤불 속에 버려져 있었다. 얼굴이 피투성이였고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구타로 인한 뇌출혈임이밝혀졌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사쿠라 몽둥이로때렸다고 지서에서 심부름하는 급사 아이가 증언했다. 학우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온 김용철은 마당 한가운데 깔린 멍석 위에 눕혀졌다. 넓은 마당은 뒤따라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들의 시신을 보자마자 어머니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단 한번의 비명이었다. 그러고는 입이 굳어버린 듯 더이상 비명도 울음도 내지 않았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퍼들퍼들 미친 듯이 나뒹굴었다. - P63
김용철의 죽음은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않았던 마을 청년들에게 완전한 좌절을 의미했다. 그들은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려움에 가슴이 짓눌려 잠을이룰 수 없었고,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의로운 국가를 갈망하여 지난 삼년간 열정적으로뛰어온 그들이 아닌가! 나와 세계가 하나였던 열광의 시간, 이제 그 세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희망이 살해당했다는 크나큰 좌절감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몰고 왔다. 그것은 자기파괴의 불씨가 되었다. 그 분노가 그들을 떠밀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돌이키기 어려운 고집 세고 완강한 기질, 참다참다 못 참게 되면 눈이 뒤집혀 물불 가리지 않는, 먼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기질에 불이 붙고 만 것이다. 지난 일년간 죄 없이 모진 탄압을 당하면서 쌓여온분노, 서청과 경찰에 대한 분노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이제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청년들은 생각했다. - P71
행필이 마침내 자기 집 왕대숲에서 죽창을 깎았다. 다른 청년 두명과 함께 죽창을 깎았다. 솔개가 낮게 날면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오르르 숨어들곤 하는 대숲이었다. 솔개에 쫓긴 병아리들처럼 경찰에 쫓겨 대숲에숨던 행필이 이제 거기에서 죽창을 깎았다. 봄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는 짙푸른 대숲, 무수한 댓잎들이 눈부시게 햇빛을 튕기며 초록 물고기떼처럼 파닥거렸다. 결의에 찬 눈빛의 그들은 대숲에 들어가 적당한 왕대를 골랐다. 톱날에 베인 왕대가 쓰러지면서 스댓잎들이 우수수 소리를 냈다. 이제 막 땅거죽을 뚫고 솟아나기 시작한 죽순들이 발에 차였다. 지난 삼년간 왕대발의 죽순처럼 왕성한 생명력으로 빠르게 성장해온 그들이었다. 그 성장의 열정이 무자비하게 짓밟힌 지금, 그들은 왕대를 베어 죽창을 깎았다. 낫자루를 꽉 쥔 손의뼈마디가 하얗게 두드러졌다. 왕대 끝을 낫으로 깎아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그 뾰족한 창끝에서 싱싱한 풋내가 짙게 풍겼다. 창끝을 숯불에 굽고 콩기름에담갔다. - P77
4월 3일,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밤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둠을 태우면서 이 오름 저 오름, 이 동산 저 동산에서 펄떡펄떡 봉화가 솟아올랐다. 봉홧불을 신호로 각 지역의산부대가 일제히 경찰지서들을 습격했다. 곳곳의 전신주와 전화선이 이미 절단되어 통신이 마비된 상태였다.
만세동산, 서우봉, 원당봉, 기시네오름에도 봉화가 올랐다. 대장 양순태가 열댓명의 산군을 이끌고 조천 지서를 향했다. 강행필도 죽창을 들고 참여했다. 총을 가진 자는 단 두명뿐, 나머지는 모두 죽창이었다. - P79
강경 무력 진압 명령을 받은 박진경은 취임사에서 말했다.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삼십만명이 희생되더라도 무방하다. 제주 백성 아니라도 나라가 선다." - P87
경무부장 조병옥 역시 서청 오백명을 증파하면서 공언했다.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비행기로 휘발유를 뿌려온 섬을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 - P88
5.10총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한민당을 제외하고 좌우를 막론한 모든 정당이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상황은 내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으니, 무력 충돌로 쌍방간에 백오십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제주도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산부대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선거인명부를 탈취했고, 선거위원들에게사표를 제출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면서 죽창을 휘둘렀다. 어느 마을에서는 선거위원장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무력 충돌에서는 당연하게도 죽창이 미제 카빈총을 당해낼 수 없어 산부대 쪽 사망자가 세배나 많았다. - P88
때는 개망초꽃도, 찔레꽃도 하얗게 피어나는 5월이었다. 몇발짝 떨어진 돌덩이 위로 얼크러진 찔레 덤불 속 흰 꽃들이 두길의 눈에 들어왔다. 센 바람에 흔들린 꽃향기가 짙게 풍겨왔다. 초원은 지대가 높아 바람이 세고 구름이 빨리 움직였다. 바람에 풀밭이 물결처럼 굽이치고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찔레 덤불, 망개나무 덤불이 들판위로 굴러갈 듯이 마구 뒤흔들렸다. 질주하는 구름들이 초원에 그림자를 던질 때마다 햇빛이 밝았다 흐렸다 했다. 두길에게는 그것이 마치 대지의 불안한 맥박, 가쁜 숨결처럼 느껴졌다. 무사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숨죽이고 뭔가를 기다리는듯, 금방 무슨 큰일이 닥칠 것만 같은 느낌, 아니,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이미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만 듯한 느낌이었다. - P99
제주도민의 총선거 보이콧에 크게 분노한 미군정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발동했다. 박진경의 경비대가 토벌의 주도권을 잡고 나섰다. 경비대가 토벌작전을 전담하게 되자 경찰은 한발 물러나 경비대가 잡아온 사람들에대한 심사를 맡았고, 때로는 군경 합동으로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미군이 토벌 작전을 감독하고, 토벌대를 훈련시키고, 잡혀온 사람들을 심문했다. 미 극동사령부는구축함을 급파하고 날마다 전투기와 정찰기를 띄웠다. 이때부터 섬 도처에서 노골적인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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