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리도 일주도로변의 다른 마을들처럼 군 토벌대에 장악되었다. 어쩌다 보이던 군용차량이 이제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상시적으로 일주도로에 나타났다. 이웃 마을 함덕리에는 9연대 3대대가 주둔했는데, 구성원 대부분이 서청 출신이어서 ‘서청 대대‘라고 불렸다. 대대에서 조천리에 파견한 한개 중대는 소학교 자리에 진을 쳤다. 그들의 업무란 도피자를 찾아낸다면서 마을 사람들을 족치고 들볶아대고, 이틀에 한번꼴로 술판을 걸게 벌여 질탕하게 노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술판을 마련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대접이 소홀하다 싶으면 총을난사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젊은 여자들이 술심부름을 해야 했고, 허리띠를 풀고 배불리 먹은 그들은 여자들에게 덤벼들곤 했다. 젊은 여자들은 강간이 두려워외출을 삼갔고, 집 안 마루 밑이나 장독대 밑, 외양간 바닥에 구덩이를 파서 군인이 나타나면 그 안에 숨었다. - P102
이제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아가리 앞에 놓인 신세가되어버렸다. 호루라기 소리, 고함치는 호령 소리, 부대의군홧발 소리, 군용차량의 엔진 소리가 수시로 들렸다. 대낮에 함부로 쏘아대는 총탄에 비석거리의 비석들과 팽나무, 멀구슬나무가 상처를 입었다. 밤이면 더욱 무서웠다. 한밤중에 순찰대가 도피자를 수색한다며 수시로 민가를 급습했던 것이다. 창문앞에서 갑자기 군홧발 소리가 우르르 나고, 다음 순간 발길에 걷어차여 문이 벌컥열리면서 방 안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뛰어들고 손전등불빛이 쏟아지곤 했다. 소학교 운동장에서 한밤중에 군인들을 집합시키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도 무서웠고, 출동하는 차량이 전조등 불빛을 내쏘면서 터뜨리는엄청난 엔진 소리에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어떤 때는 밤중에 방향도 모르게 총성이 울렸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다투어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오들오들 떨어야했다. 누가 쫓기고 있는가보다. 누굴까? 우리 집으로 뛰어들지 몰라! 공순네 네살짜리 아기에게도 그 공포가 전해졌는지 늘 입에 물고 있던 울음이 사라졌다. - P103
토벌대의 최고 지휘관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천명했다.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 - P104
경비대 연대장 박진경이 부하들에게 본때를 보인다고화북리의 주민 한명을 총살하고, 그 죽은 아비를 안고 울부짖는 소년마저 쏘아 죽였다. 산군이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그곳에 산군이 없자 총살해버렸고, 사격연습을 한다며 마을의 말과 소를 함부로 쏘아 죽였다. - P105
산부대가 경비대 영내에 삐라를 뿌렸다. "친애하는 국방경비대 장병 여러분! 우리의 적은 오직 경찰과 서북청년단이다. 우리는 미군정과 경비대를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친애하는 장병 제형이여! 제형의 민족적 양심과 정의에 불타는 올바른 행동을 우리는믿노라." - P105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서로의 얼굴이 또렷이 드러났다. 두 연인은 준비해온 담요를 깔고 나란히 누웠다. 하늘에 가득한 별빛이 그리운 서로의 얼굴을 비추어주었다. 천지에 가득한 공포와 그 속에서 조마조마하게 이어온 사랑,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기에 그리움은 깊어져 참을 수 없는 갈증으로 변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기 어려웠는데 오늘 만나고 헤어지면 그보다 더 오랜 이별이될지 모른다는 생각, 앞으로 그들의 사랑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 P107
초원에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물결치면서 서걱거리는 풀잎 소리에 묻혀 선조들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수많은 연대에 걸친 고난과 투쟁의 흔적이 저 질펀한 초원의 들풀 아래에 묻혀 있었다. 양수, 번석, 문행노, 김통정, 강제검, 방성칠, 이재수와 함께 일어난 수많은인간들의 피가 스며든 곳이었다. 그들이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바람은 옛 바람 그대로 불고, 세찬 바람에 밀려 초원의 풀들이 그 옛날의 인간들 무리처럼 물결치며 앞으로 내달리는 듯했다. - P111
고문은 빈틈없는 완벽한 고통이었다. 극단의 고통 속에서 생명은 한점으로 위축되어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몸과 정신을 송두리째 몰수당한 채 모진 고문을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리고고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총살이었으니, 그런 절대 절망,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어서 고문 도중에자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 P114
고문의 무서운 고통이 지나간 후 완전히 탈진한 몸에서는 그 고통이 만들어낸 송장 냄새 비슷한 야릇한 냄새가 풍겼다. 죽지만 않을 만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는혹독한 고문이 만들어낸 냄새였다. 고문을 받다가 그 자리에서 죽거나, 풀려나더라도 한달 안에 맷독으로 죽는일이 드물지 않았다. - P115
중산간 지대에서 잡힌 청년들 예닐곱명이 포승줄에묶이는 중이었다. 지서에 끌려가 고문당할 생각에 가슴이 오그라들고 무릎에서 힘이 빠져 비틀거렸다. 머뭇거리며 포승줄을 받으려고 두 손을 내밀던 한 청년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어 경찰의 면상을 주먹으로갈기고는 아아아, 소리치며 산을 향해 내달렸다. 그를향해 수십발의 총알이 날아갔다. 자살이었다. - P115
장 경찰지서의 취조실,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 채 한번만 봐달라고, 살려달라고 쉴 새 없이 애원하는 청년의입을 고문자의 군홧발이 걷어찼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죽기로 결심한 청년이 난로의 부삽을 들고 덤벼들어 고문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다른 경찰이 부삽을 든 청년을 사살했다. 자살이었다. - P115
쇠좆매, 사쿠라 몽둥이, 목검, 장작개비로 두들기고, 후려치고,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찍고, 집게로 손톱을뽑고, 드럼통에 넣어 마구 굴리고, 꿇어앉혀 장작개비와 각목을 무릎 안쪽에 끼우고 허벅지를 군홧발로 자근자근 밟고, 일본도 칼등으로 머리통과 어깨를 내리치고, 군홧발로 복부와 고환을 걷어차고, 벗은 가슴팍에 담뱃불을 비벼 끄고, 노인의 수염을 라이터 불로 태우고,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푼 물을 코에 졸졸 붓고, 긴 머리를 말꼬리에 묶어 말을 달리고, 두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 비틀고, 말고삐 올가미를 목에 걸어 끌고 다니고, 개머리판으로 입을 부숴 부러진 앞니가 옥수수알처럼 토해지고, 찌르르찌르르 전기 고문으로 까무러뜨리고, 어깨뼈를무너뜨리고, 고막을 파열시키고・・・・・ - P118
이러한 무차별 강경 진압은 경비대 내부에 큰 반발을불러일으켰다. 경비대 병사 마흔한명이 집단 탈영하여 입산했는데, 이틀 후 그중 이십명이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8월 15일, 마침내 삼팔선 이남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 P119
그런 상황에서 삼팔선 이남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자민심은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수립되었으니 이제는 모든 게 끝나버렸다고, 싸움은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얼마전까지는 모든 활동이 분단을 획책하는 외세, 즉 미군정에 대한 정당한 투쟁이었지만, 단독정부일망정 정부가수립된 지금 더이상의 투쟁은 반역 행위가 될 뿐이라는생각이었다. - P125
살기 위해서는 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공포가 사람들을 똘똘 뭉치게 하더니, 절망적 상황이 된 지금에는 공포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군경 토벌대의 무자비한 파괴 공작은 그때까지 한 몸 같았던 도민공동체를두쪽으로 찢어놓았다. 두쪽으로 찢겼을 뿐만 아니라 서로 적대 관계가 되도록 내몰렸다. 한 몸의 오른팔과 왼팔이 서로 적이 되어버렸다. 모든 사람이 좌냐 우냐, 산이냐 해변이냐, 철저하게 양분되어 찢겨나갔다. 저항 세력을 산부대, 산군 혹은 산사람이라고 부르던 것이 토벌대가 시키는 대로 차츰 폭도 혹은 산폭도로 변해갔다. 폭도놈, 폭도 년이라고 흔히 불렀다. 처음에는 차마 그 말을입에 담지 못했으나 차츰 그렇게 부르는 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산사람은 이제 두렵고 낯선 대상이되었다. - P127
불 속의 나무들이 하나씩 타서 바스라져 가라앉을 때마다 무수한 금빛 불티가 화르르 날아올랐다가 허연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 두길이 조금씩 작아져가는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넣어 불길을 키웠다. 모닥불 주위의 사람들은 취기에 몸이 무거워지면서 말이 점점 느려졌다.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가 이어지면서 자주 침묵이 끼어들었다. 펄럭이는 주황빛 불길의 황홀한 춤이 그들의 정신을 빼앗았다. 불은 따뜻한 온기로 그들의 몸을감싸주었다. 혈육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온기였다. 두길은 그 불 속에 영혼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느낌은 조상들이 그 들판에서 노숙하면서 피웠을 모닥불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 P168
활활 타는 불 속에서 조상들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불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표정으로홀린 듯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그 불 속에 모든 게 있다는 듯이, 그 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그 모닥불은 옛 조상들이 피웠던 모닥불과 똑같고, 조상들의 표정과 똑같은 표정으로 자신들이 불을 바라보고 있다고두길은 생각했다. 추방당한 자들, 유배자들, 망명자들, 착취당한 자들의 설움, 초원에 뿌려진 문행노, 김통정, 강제검, 이재수의 군사들의 사나운 피…… - P169
보름달이 구름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밤이 늦어 사람들이 모닥불을 끄고 아지트로 돌아갈 무렵이었다. 대림을 부축하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두길은 달빛 비치는 초원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묻혔던 드넓은 공간이 달빛에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그 환한 빛이 뼛속까지 스미는 듯시리게 느껴졌다. 사방은 바람도 없이 고요했다. 드넓은 하얀 정적 속에서 문득 어떤 야릇한 울림이 들리는 듯했다. 우우우우우, 땅속 깊은 데서 울려나오는 듯한 대지의 탄식 소리, 거기에 묻힌 조상의 탄식 소리…… - P169
그러나 허서방을 경찰의 첩자로 의심한 산군들은 그를 전송하는 척 산길을 함께 내려가다가 처형해버렸다. 그 사실은 다른 아지트에도 알려져 조천리 입산자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우리가 적을 닮아가고 있다고,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고,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냐고 개탄했다. 그러나 증오에 가득 차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 산군들 앞에서는 두려움에 차마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없었다. - P170
10월 17일,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지역의 통행을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이 떨어졌다. 10월 18일, 해상봉쇄령이 내려 공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을 제외한 민간인의 육지부 출입이 금지되었다. 10월 19일, 여수의 14연대가 제주도 파병에 반대하여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 직후 경찰이 산부대 대장 이덕구와 그의 두 형제의집에 방화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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