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 P272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 P273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 - P273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 P274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 동시다발적 ·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 P275

는 민주화운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 - P275

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IN고했다.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 P276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과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 P276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둘 모두를 해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자유는 개개인의 생활방식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반공 난민촌‘이었던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병영‘과 비슷했던산업화시대를 통과해 각자의 개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발현되는 민주화시대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P279

앞에서 나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동력이 대중의 욕망이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만든 것도 욕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욕망의 위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망이었다. 자아를 실현하려면 ‘살아가는 방식‘ life style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라이프 스타일은 신념이나 이상의 선택과 같은 추상적 ·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설계하는 개인적 취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언제 잠들고 깨어날지,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입을지, 어떤 직업을 선택하며 무엇으로여가를 보낼지, 결혼을 할지 말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 자녀를 몇이나 낳을지, 종교를 믿을지, 믿는다면 어떤 종교를 어떻게 믿을지,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지, 어느 정당을 지지하며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지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라이프 스타일은 그 사람의 신념과취향, 개성과 욕망을 드러낸다. - P279

지금 광장에서 살고 있다. 병영시대 정부가 한 일의 목적과 방식, 결과가 다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괜찮은 방법으로 훌륭한 목적을 제대로 이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쁜 방법으로 좋은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 목적과 방법, 결과가 모두 추악한 것도 많았다. 국가의명령에 복종하면서 병영사회의 양지에서 살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자유를 얻기 위해 병영의 담벼락을 허무는 일에 인생을 바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박해받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맨손으로 정부와싸우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대통령의 신민이 아니라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담벼락은 결국 무너졌고 병영은 서서히 광장으로바뀌었다. - P280

저출산 현상은 산업화에 따른 출산율의 자연적 감소와 정부의 강력한 출산억제정책의 합작품이었다. 정부는 출산율 억제를 정책 목표로 설정했으며 강압적이고 노골적인 방법을 동원해 그 목표를 달성했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는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1960년대에는 6남매, 7남매가 보통이었다. 셋 이하면 자손이 귀하다고들 했다. 남아선호 사상이 만연한 가운데 노동시장은 고학력 사무관리직과 저학력 생산직으로 양분되어 있어서 공부를 해야 사람 노릇을 한다는 전통적인 의식이 더욱 강고해졌다. 돈이 없어서 자녀들을 다 공부시킬 수 없는 부모들은 아들 교육에 집중했다.  - P287

오늘날은 정부가 시민의 재산권 행사를 마음대로 제약하지 못한다. 정부는 2003년 전북 부안군에 방사능폐기물 처리장을 지으려 했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외곽순환고속도로 사패산 터널 공사와 부산 천성산 터널 공사는 자연 생태계 파괴에 대한 우려와 스님들의 강력한 반대투쟁 때문에 장기간 지연되었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가 옮겨가는 평택 대추리, 해군기지를 세우는 제주 강정마을, 한전이 고압선 송전선을 설치한 경남 밀양시 상동면에서도 지역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이 길고 끈질긴 반대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병영시대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다. 정부의 정책을 내놓고 반대하는 것은 병사가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과 같았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갈 위
‘험을 무릅쓰고 대통령에게 대들 만한 토지소유자는 별로 없었다. 정부는 여론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린벨트를 지정했다. - P307

국민교육헌장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말씀‘이었다.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것은 곧 국가를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1978년 송기숙, 명노근, 이홍길, 홍승기 등 전남대 교수 열한 명은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에서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며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을 하기 위해 학교를 인간화·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교육헌장은 제정경위와 선포절차, 내용 모두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고 비판했다. 초안은 서울대 백낙청 교수가 작성했다. 정부는 관련 교수들을 전원 해직하고 송기숙 교수와 성명서를 외신기자들에게 배포한 연세대 성내운 교수를 구속했다. 이런 일로 대학교수들을 구속한다는 게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감히 국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다니! 물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민교육헌장은 1993년 초등학교 교과서와 정부 공식 행사에서 사라졌다. - P311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인가?
그 판단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헌법이 국민 각자에게 준 것은 교육, 근로, 납세, 국방의 의무뿐이다. 그런데 교육과 근로는 권리에 가깝기 때문에 국민의 의무는 결국 소득을 얻으면 법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으며 우리는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와 다른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지 말지는 각자 선택할 문제다. 할 마음은 있지만 공개적으로 고백하기가 쑥스러우면 맹세를 하지 않아도된다. 헌법은 양심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할 권리를 보장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맹세하게 한다. 나는 이것도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 P312

로기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며 주관적이다. 야간통금은 신체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구속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즐거운 추억으로간직하고 있다. 그때는 자정이 다가오면 버스와 지하철이 북새통을이루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자기 발로 파출소나 경찰서에 가서 기다리다가 오전 4시가 지난 다음 귀가해야 했다. 술집과 학원은 심야영업을 할 수 없었고 기업은 철야작업 야간교대를 하기 어려웠다. 국제선 항공기가 통금 때문에 김포공항에 내리지 못하고 일본이나 홍콩으로 회항하는 일도 벌어졌다. 남자들은 교외로 데이트를 나갔다가 막차를 일부러 놓치는 것을 ‘작업의 정석‘으로 삼았다. 부처님 오신 날, 크리스마스, 12월 31일만 예외였다. 사람들은 단순히 밤거리를 걷고 싶어서 시내로 나갔다. 중학생 시절 크리스마스이브 때 대구 시내 동성로에 나갔다가 어른들 어깨 틈에 끼어발을 땅에 딛지도 못하고 둥둥 떠다녔던 기억이 난다. - P316

이것은 주민등록제도 도입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디지털 부작용이다. 2014년 1월에 터진 농협카드, 롯데카드, 국민카드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인터넷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남의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차제에 국민의 주민등록번호 전체를 다시 만들고 국가기관 말고는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거나 보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지구촌 문명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주민등록번호는 대한민국의 진화과정에 병영국가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 - P320

2006년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학교가 해방 이후 60년 동안판매가 금지되었던 책 가운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스무 권을 발표한적이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 (영희), 신동엽전집』(신동엽), ‘순이삼촌(현기영),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빨치산의 딸』(정지아), 사회주의 인간론 (에리히 프롬), 『무림파천황』 (박영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민중항쟁의 기록』(황석영),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민중항쟁 참가자들이 쓴 항쟁기록을 소설가 황석영이 손질해서 출판한 책이다. 1980년대 중반 ‘넘어넘어‘라는 약칭으로 회자되었던 이 책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국민에게 널리 알린 최초의 공개 출판물이었다. 금서가 된 바람에 더 유명해진 무협소설무림파천황이 불온서적으로 지목당한 이유는 좀 우습다. 정와 사파의 대결을 변증법으로 설명한 딱 한 쪽 때문이었다. 그때 공안당국자들은 변증법을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 P321

유신시대에는 중앙정보부의 지휘 아래 법무부,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방부, 내무부 등 유관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금서목록을 정했다. 명분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불온서적과 미풍양속을해치는 음란서적을 규제하는 것이었지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당국자들의 눈에 거슬리는 모든 서적이 판금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를들어보자. 『길을 묻는 그대에게」(김동길), 『지성과 반지성』(김병익), 『이성과 혁명』(허버트 마르쿠제), 『전환시대의 논리』(영희), 학교는 죽었다』(라이머), 『죽으면 산다』(장준하), 『어느 돌멩이의 외침』(유동우), 『순 - P322

이삼촌』(현기영), 『해방의 길목에서 (박형규)가 포함되었다. 수필, 문학평론, 철학, 르포르타주, 소설, 사회비평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판매 금지한 것이다.
누가 어떤 절차를 거쳐 금서를 정하는지, 그 결정이 문제가 있을 경우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23

전두환 정부는 유신시대에 만든 금서목록에 『김형욱 회고록』 (박사월), 『혁명의 연구』 (에드워드 H. 카),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이야기 경제학』(김수길), 『변증법이란 무엇인가』(황세연), 『겨레와 어린이」(이오덕 외) 등 더 많은 책을 추가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파악한 판매금지도서목록은 노태우 정부까지다. 이때는 레닌, 마오쩌둥, 스탈린 등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책과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온 역사서, 북한 주체사상과 관련된 책을 대량으로 판매 금지했다. 1980년대의 혁명적 분위기에서 대학생활을 한 이른바386세대 청년들이 그런 책을 탐독했기 때문이다. 김영삼-김대중-노 - P323

무현 대통령 때는 정부 차원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에 공개된 국방부의 장병 금서목록에서 보듯 개별 국가기관의 목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23권의 국방부 금서목록에는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북한의 우리식 문화』(주강현),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전상봉),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노암 촘스키), 『미군 범죄와 한미 SOFA』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소금꽃 나무』(김진숙),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김남주 평전』(강대석), 『대한민국史』(한홍구), 『세계화의 덫(하랄드 슈만 외), 『삼성왕국의 게릴라들』(프레시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금서목록에 오른 책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국가의 사상통제에 대한 시장의 반격이었다. - P324

민주화 이후에도 방송 사전심의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1993년가수 정태춘 씨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발표함으로써문화관광부가 자신을 고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투쟁을 하면서사전심의를 강제한 ‘음반 및 비디오물에 대한 법률‘에 관한 위헌심판제청을 재판부에 냈다. 마침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4집 앨범 ‘컴백홈‘에 수록된 <시대유감>에 대해 공윤이 가사 수정을 지시하자 서태지가 가사 전체를 삭제하고 연주곡만 수록함으로써 공윤의 검열에대항한 사건이 일어났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의 팬들은 표현의 자유를 빼앗은 공윤에 비난을 쏟아부었다. 결국 공윤은 1996년 6월 사전심의제를 폐지했고 넉 달 후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제도가 표현의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21조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 P328

이어령, 현승종, 양주동, 구상, 박종홍 등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과문인들이 고전독서운동에 힘을 보탰다.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고전독서운동은 암기능력을 테스트하는 경연대회로 변해버렸다. 1968년 11월 제1회 대통령기쟁탈 전국자유교양대회가 열렸고 정일권 국무총리가 시상을 했다. 마치 고교야구대회나 전국체전을 할 때처럼 전국 학교와시도에서 선발한 대표선수들이 출전해 독후감을 쓰고 필기시험을 보았다. 이 대회 전성기였던 1974년에는 전국 학생의 90퍼센트가 지역예선에 참가했다. 육영수 여사는 해마다 입상자를 청와대로 초대해다과를 베풀었다. 1975년 마지막 대회를 할 때까지 연인원 1,900만명이 참가했고 협회는 132종 800만 부의 고전을 보급했다.  - P330

병영국가의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였다. 국가가 특정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강제하면 국민이 아프고 불편하다. 원하는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면 삶에 대한 회의가 생긴다.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적은 북한만이 아니었다. 소련,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같은 소위 ‘국외공산계열‘도적이었다. 그 나라들의 국가이데올로기가마르크스주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단결을 호소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라고 선동했다. 그래서 병영국가 권력자들은 노동자를 북한과 ‘국외공산계열의 잠재적 협력자로 보았으며 그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거나 단결하지 못하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서 특별한 관심이란 철저한 감시와 무자비한 억압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은 심리적고통뿐만 아니라 생존권과 인권을 박탈당하는 ‘물리적 고통‘도 겪어야 했다. - P331

자주적인 노동조합연합체는 광장의 시대가 열린 후에야 비로소탄생했다. 1995년 11월에 출범한 민주노총이 그것이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항의 총파업을 치르면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한 민주노총은 산하에 16개 산업별 노조가 있는데, 거대한 자동차회사 노동조합이 속한 금속노조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공공운수연맹 등이 핵심이다. 민주노총은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10여 년 동안 조직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만성적인 정파갈등과 대기업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행태 등으로 대중의 신망이 크게 하락했으며 2008년 이후에는 정부의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탄압에 직면했다.
권력자는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한다. 한국현대사에 가장 뚜렷한 인격의 각인을 남긴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 지위도 권력도 없는 사람이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하기도 한다. ‘영원한 청년 노동자 또는 ‘노동열사‘ 전태일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 P332

스님도 권력자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현대사에 인격을 각인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는 가톨릭과 불교라는 종교적 배경이 있었다. 전태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은 채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온몸이 불타는 고통 속에서 그는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전신에 3도화상을 입은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타계할 때까지 40년 세월을 ‘노동자의 어머니‘ 로 살았다. - P334

전태일이 청원한 것은 하루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고, 매주 일요일을 쉬게 하며, 건강진단을 제대로 하고, 시다의 급여를 50퍼센트 인상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와 사용자들은 이 요구를 냉정하게 외면하고 짓밟았다. 전태일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분신을 결심했다.
전태일 이전에도 전태일 이후에도 억압과 착취에 항거하면서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에 전태일만큼뚜렷한 각인을 남기지는 못했다. 전태일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린여성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분신했다.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 가운데 급여수준이 가장 높은 재단사였다. 다른 유능한재단사들은 돈을 모아 양복점을 내고 사장이 되는 것을 꿈꾸었고 실제 그렇게 한 사람이 많았다. 타인의 생명과 건강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다.  - P335

그런데 전태일을 분신하게 한 것은 어떤 이념이 아니라 어리고 약한 이옷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가 남긴 일기는 그 자신도 어리고 약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어리고 약한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가 더 어리고더 약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행위가 수많은 국민의 영혼을 울렸다. 그는 한국 사회가 빈곤과 억압, 착취와 인권유린에 고통받는 거대한 노동자 집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드러내 보였으며, 대한민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었다.
분신 소식을 들은 대학생들이 평화시장으로 달려왔다. 조영래, 장기표 같은 사람들이었다. 반독재 · 민주화 투쟁에 몰두하던 대학생과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70년대이후 노동운동, 노학연대와 청년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 민주노총의 탄생은 모두 전태일의 분신에서 시작되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곧바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했다. - P336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88년 7월, 문송면이라는 열다섯 살 소년이 사망했다. 그는 집이 가난해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서울에는야간학교에 다니게 해주는 공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고향인 충남 서산을 떠나 혼자 서울에 왔다. 그런데 영등포구 양평동 공장에 취직해온도계에 수은 넣는 일을 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손발이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나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원인을 알 수없었다. 결국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 진단을 받았고 넉 달 뒤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은 당시 우리나라 산업보건 현실과 노동행정의후진성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때는 직업병 전문병원이 없었다. 회사는 문송면 군의 병이 회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산재신청서 날인을 거부했다. 노동부는 서울대병원이 산재보험 지정 의료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요양신청서를 반려해버렸다. - P337

문송면군 사망 직후였던 1988년 7월 원조가족협의회‘가 발족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비롯한 환경단체와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여기에 결합했다. 박영숙, 노무현 등 야당의원들이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정부의 무관심에 격분한 원진 피해자들이 88올림픽 성화 봉송로를 막으려고 하자 비로소협상에 응했다. 원진레이온은 몇 년 후 폐업했지만 이 투쟁은 그 후10여 년 더 지속되었다. 문제의 설비를 중국 기업에 팔아치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3년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 원진재단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치료와 재활을 돕기 위해 구리시에 원진녹색병원 원진복지관을 지었다. - P338

다시 19년이 지난 2007년 11월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스물세 살 여성 노동자 황유미 씨가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3년부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한 황유미 씨는 2년 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7년에 숨졌다. 1년 전에는 같은 공정에투입되었던 동료 한 사람이 림프구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에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는 2000년 이후최소한 여섯 명의 백혈병 환자가 생겼다. 화성공장과 온양공장에서도 백혈병 환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삼성반도체는 백혈병의 업무연관성을 부인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극히 형식적인 역학조사를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보고서를 냈다. 200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노동자 다섯 명의 산재신청 승인을 거부했다. 백혈병이 직업병이라는 의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 거부 사유였다.  - P339

황유미 씨 사건으로 출발했던 대책위원회는 2008년부터 다른 반도체 회사의 직업병 피해자 문제를 함께 다루기 위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있다. 반올림에 직업병으로 제보를 해온 사람은 2013년까지 모두171명이었고 그중 70여 명이 세상을 떠났다. 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루게릭, 다발성경화증 등 병명은 다양했지만, 모두 암이 아니면희귀질병이었고 환자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39명이 산재보험보상을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단 세 사람만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질병 원인을 입증하기 어렵다"라며 모두 기각했다. 반올림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진행과정은 1988년 문송면 군과 원진레이온 사건 때와 거의 비슷해 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투쟁의 대상이 글로벌 기업집단인 삼성그룹 소속 최첨단 기업이라는사실, 그리고 민주노총과 여러 시민단체, 자발적 후원자가 되어준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5월,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심장마비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황에서 뒤늦게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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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시어머니가 고관절이 부러져 입원하셨다. 연락을받고 황급히 달려가서 병실 문을 여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의 생리적 반응에 나조차 당황스러웠다. 늘 세로로 서 계시던 분이 가로로 누워 있으니 낯이 설고 며칠 사이 확 쪼그라든 모습에 안쓰러움이 치밀기도 하였지만, 실은 울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심장계 질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긴병에 효자 없다지만, 엄마가 다만 일주일이라도 앓다가 돌아가셨으면이별을 예비했을 텐데 싶어 두고두고 한스러웠다. 입원실에 누워 계신 시어머니를 보는 순간 느닷없이 엄마의 얼굴이 개입한거다. 효심 아니라 통한, 이 눈물의 사회학은, 엄마 장례식장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다. 엄마 친구분이 하도 넓게 울어 이제 고만 우시라고 했더니 그러셨다. "니 엄마 가엾어 우는 게 아니다. 내 설움에 우는 거지." - P134

그 후로 종종 목도했다.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시청분향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들려왔다.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자기 설움 토해 내는 갖가지 궁상과 청승의 사연들소방 호스보다 긴 눈물의 행렬들. 고역의 시절을 살아 내느라지친 민초들은 광장에 마련된 공식 초상집에 와서 꺼이꺼이 울다가 가곤 했던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친절한 복희씨》에서눈물에 담긴 미묘한 복합 감정을 멋진 문장으로 정리했다. 첫사랑이었던 그에게 청첩장을 건네니 그 남자가 울더라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건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우는 건 아니다."
- P135

투명한 눈물의 속사정은 이리도 복잡하다. 2011년 9월 31일 향년 여든한 살로 영면에 드신 이소선 여사의 생애 마지막두 해를 그림자처럼 붙어서 기록한 태준식 감독의 제작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더 놀다 가지‘라는 말을 하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뵐게요‘를 수없이 반복하며 나오던 창신동 골목에서전체의 그림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조직과 효율이라는 몸에밴 그동안의 작업 관성을 버리고 작업했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감독의 눈길이 고맙고도 궁금했다. 그의 가슴에는 어떤 큰 - P135

트 비애의 강물이 있어 한 삶을 이리도 고요히 받아 낸 걸까. 덕분에 나는 이소선 여사의 삶에 나의 삶을 비춰 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는 게 힘든데 그 힘듦에서 어떻게 재밌고 값지게 살아야할까, 삶의 기본값으로 주어진 설움과 청승을 어떻게 품고 갈까,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아주 구체적으로는 어디에 돈과 시간을 써야할까를 생각했다.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집회 현장에서 연행이나 구류로 끌려간 횟수만도 250회가 넘는다는데, 어째서 영화에는 억척스러운 투사가 아닌 다정한 선녀가 노니는가. 마음이 너르고 곧고성정이 귀엽기까지 한 어머니의 영혼을 빌리고 싶다. 남의 입에 밥 들어갈 끼니를 걱정하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주름이 늘고검버섯 피어난 어머니의 생은 얼마나 시적인가. - P136

낮을 가져다 내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챙긴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도 먹고
드러눕고

_허수경의 시 <시>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에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는 더운 목숨이여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황지우의 시 거룩한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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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 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p224

어린 시절 우리에게 ‘박정희‘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통령‘과 뜻이같은 보통명사였다. 박정희는 곧 대통령이고 대통령은 박정희여야만 했다. 대통령을 다른 이름과 연결하거나 박정희라는 이름에 대통령을 붙이지 않는 것은 모두 불경스러운 행위였다. 내가 첫돌이 되기전에 권력을 잡았던 그는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대통령이었다. 우리 세대는 유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의 시작을온전히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보냈다. 우리들각자의 개인사에는 많든 적든 대통령 박정희의 인격과 취향이 각인되어 있다.
1961년 5·16에서 1972년 10월 유신까지 민주화운동의 목표는박정희 정권 타도라기보다는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것이었다. 정부는 언제나 주도권을 행사했으며 모든 싸움에서 이겼다. 하지만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다. 4·19혁명의 봉화를 올렸던 고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자라나 대학생과 사회인이 되었다. 그들이 재야세력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전위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191

민주화운동의 후위後衛는 수십 년 구절양장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야당이었다. 운동의 주력은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었다. 전위는 강력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정부에 맞서 싸움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용기를 북돋웠으며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주력을 형성하면 싸움이 커졌다. 야당은 투쟁의 성과를 챙기고 뒷수습을 했다.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대隊伍는 4·19 때부터 오늘날까지 거의 같은 형태로 유지되어왔다.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과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 P191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 P192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년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 P194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변란을 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년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네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강제병합조약 - P198

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195호에 따른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저리 차관2억 달러로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왔다. - P199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월 20일,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 - P204

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월 18일 100만 명의 청중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 - P205

정선거 감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8퍼센트,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퍼센트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 P206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P209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은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월 2일 서울대 - P212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월 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그러나 2006년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 P212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
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 P212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년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 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 P217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77년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 P218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년 8월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YH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때 YH무역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이런 상황에서 자꾸
‘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투쟁을 선포했다. - P219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 - P221

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 P222

1980년 5월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용산 효창운동장과 강남 잠실운동장 인근에 중화기와 장갑차로 무장한 대규모군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총학생회장들이 어디선가 대책회의를 한다고 했다. 마이크로버스 위에 서서 집회를 이끄 - P224

데 서울대 총학생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조직이었다. 심재철도 나도, 그 조직의 결정에 따라 총학생회장과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들이 그 혼돈 속에서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신기했다.
마이크로버스 지붕에 올라가 소형 확성기로 연설을 했다. "우리의 형이요 오빠이며 국민의 아들인 군인들은 우리에게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박수로 반겨주면서 충심으로 호소합시다.
우리는 오늘 밤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이 집회를 해산하면 신군부의 역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학우 여러분, 역사의 대의와 나라의미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충 그렇게 말했다. 이 연설 때문에 나는 강력한 투쟁을 주장한 ‘매파‘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한 연설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움과 번민을 감추고 ‘조직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 P225

그런데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이 집회해산과 대학별 교내농성을 결정했다. 더 준비하고 더 많은시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함으로써 더 크고 성공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면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일제히 가두투쟁에 나서자는 결의를 덧붙였다. 곳곳에서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각자의 학교로 걸어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회군‘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 - P225

운데서 누군가 ‘십원짜리‘, ‘백 원짜리‘ 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아,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 받게 만들었던 바로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 P227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내가 본 것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5월 14일과 15일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벌어진 대학생거리시위를 정밀하게 기획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이 뒤섞 - P227

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5월 13일 밤 연세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학생들이 각자 학교 근처 거리에서 시위를 벌었다. 누가 어떤 의도로그랬는지 나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당시 대학가에는 유신체제를 연장하려 하던 신군부와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를 두고 생각을 달리하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신군부와의 전면적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양한 자생적 학생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정세와 국민여론, ‘3김‘이 이끈 여야 정당들의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어가면서 점진적으로 투쟁수준을 높여나가려 한 주류 학생운동조직이었다. 5월 13일 밤 가두시위를 벌인 것은 아마도 전면투쟁론을 주장한 급진적 학생조직이었을 것이다. - P228

그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인 서울의 총학생회 대표들이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었던 고려대 신계륜 총학생회장이 모임을 이끌었다.
나는 심재철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이 회의에 갔다. 학생대표들은 정부가 휴교령을 내릴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 사이에 전면투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형국이라 거리시위를 더는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앉아서 선제공격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에 결정사항을 알려주었다. 5월 14일 아침 대학생들은 교문의경찰 봉쇄망을 무너뜨린 후 걸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혼돈은 그때시작되었다. 서울의 경우 어느 대학 총학생회도 가두시위를 이끌지못했다. 방송시설도 없었고 전투조직도 갖추지 못했다. 학과별 대오는 모두 흐트러졌다. 학생들은 사방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어갔지만세종로 사거리와 남대문 일대에 구축한 경찰의 강력한 방어망을 뚫 - P228

지 못했다. 휴교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신군부는 전국적 학생시위를 단숨에 제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이동 배치하는 중이었다.
5월 17일 오후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 교정에 모여향후 투쟁방침을 논의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회의장을 급습했다.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체포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총학생회장실로 전화를 해서 오늘 밤은 편한 곳에서 자라고 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니까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 전화를 한죄로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복학생 형들과 친구들이 와서 함께 나가자고 했지만 그러기 싫었다. 나는 학생회관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해산하도록 한 다음 밤이 깊을 때까지 총학생회장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 P229

학생들이 고립된 캠퍼스에서 계엄군에게 짓밟히도록 둘 수는 없었다. 전국의 여러 대학 학생회에서 전화가 왔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근처에서 시위를벌이기로 한 계획을 상기시켰다. 밤 10시 반경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한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쇠사슬로 묶어둔 학생회관 4층 복도 현관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울렸다. 공주사대 총학생회에서 온 전화였다. "여기도 계엄군이 진입했으니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허벅지를 밝혔다. 이마에 닿는 권총 총구가 서늘했다. 나는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편입되어 있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교정과 기숙사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을 소총과 몽둥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모든 대학 교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고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 필요한 용 - P229

기와 의지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독재를 끝내지 않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을 뿐이었다. 10-26에서 5.18까지. 그 다섯 달은 안개 속이었다. 짙은 안개너머에 있는 것이 유신의 연장일지 새로운 민주주의일지 알 수 없었다. 권력의 심장을 잃어버린 집권 공화당은 ‘영원한 2인자‘ 김종필을새 총재로 선출했다. 그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만나 시국 수습책을논의했다. 유신시대에는 재야인사로 일컬어졌던 정치인 김대중 씨도오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정치가 다시 살아날 징후를 보였다.
정부는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최규하 국무총리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지만 유신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 P230

최규하 대통령의 임무는 유신체제의 안락사安일 것이라고 우리는기대했다. 그가 헌법 개정과 선거 관리를 제대로 해서 새로운 정부가출범하면 유신체제는 조용히 무너질 것이라 믿었다. 최규하 정부는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양심수들을 일부 석방했다. 그런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육사 11기 정치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유신체제를 수호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12월 12일 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수경사, 특전사, 보병 사단 등휘하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등 온건파 국군 지휘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들은 계엄사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그 내막을 알 수 없었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봄이 와서 언 땅이 녹으면 모든 풀과 나무가 한꺼번에 움튼다.  - P230

이것은 사실상 대학생들만의 투쟁이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본대없이 선봉대 혼자 싸운 것이다. 결국 5월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 ·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곳이 광주였다. 그곳에서만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났다.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비슷했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신군부가 김대중 씨를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컸다.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 P232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 때문이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 제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전일빌딩, 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계획적 집단발포였다. 5월 19일과 20일에도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 M16을 발표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 · 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 P233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 M1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표했다는 신군부의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 사례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에 기록된 5월 21일오후 1시 35분 전남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사건이었다. 특전사가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 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 - P233

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 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ㅏ 소식은 닷새째인 5월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 P234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소총을 든 157명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 P235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20년에서 10년,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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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라는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 - P235

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저질렀던독재를 능가하는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해동, 조성우, 이신범, 이해찬, 설훈 등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김대중 씨에게는사형, 다른 사람들에게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 P236

6월 10일 오후 여섯 시, 나는 유인물 몇백장을 품에 감추고 서울시청 광장에 서 있었다. 국본 지도부 인사들이 대회 개막을 선포하기로 한 성공회 본부를 경찰이 미리 봉쇄했지만, 미사에 참여할 피아노반주자 등으로 위장해 성공회 교회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몇몇 인사들이 여섯 시에 종탑으로 올라갔다. 종소리와 동시에 유인물 뭉치가날아올랐고 구호가 터져나왔다. 서울시청 일대 거리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시위대로 뒤덮였다. 최루탄이 터졌고 버스와 택시, 승용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남산 아래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축하연을 하던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최루탄 가스에 쫓겨 흩어졌다.
거리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50만 명의시민들이 참여했고 4,0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밀려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부근 전략거점으로 후퇴했다.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닷새 동안 농성하면서 투쟁분위기를 이어갔다. 명동 일대는 아무나 와서 대자보를 붙이고 연설 - P255

을 해도 되는 ‘해방구‘로 변했다.
나는 노동자와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청년지식인들이 뒤섞인 자생적 비밀결사에 속해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세 곳의 중간집결지를 정하고 나갔다.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유인물은 금방 동났고, 조직원들은 모두 흩어져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1987년 6월 10일 서울 도심에서 내가 본 것도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과 더 나이 든 시민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본이라는지도부가 있었고 양김이 이끄는 야당도 있었다. - P257

지도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의 파도가 밀어.
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전국에서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정부가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주한미군방송AFKN이 미군과 군속, 가족들의 외출자제령을 보도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전두환 대통령에게 긴급친서를 보냈고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6월 24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되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정치인 김영삼의 모든 모습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 P257

세 번째 파도는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6·10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사태추이를 지켜보던 광주 시민들이 마침내 궐기했다. 그들은 이번만큼은 결코 고립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광주에서만 2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목포, 순천, 여수, 광양 등 전남 전역의 도시에서도 수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전국에서 3,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점점수세에 몰렸다. 30개가 넘는 경찰서와 파출소가 화염병에 맞아 불이났다. 민정당 지구당사와 공공기관 건물 여러 곳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경찰차량 20여 대가 불타고 전복되었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무도 정부와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다음 국민대회에서 얼마나 더 큰 시위가 벌어질지가늠할 수 없었다. - P258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소위 ‘6·29선언‘이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기본권과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화,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야권의 분열을 일으키면 선거를 통해서도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품고 6·29선언을 했으며, 이 희망은 결국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를 저지른죄를 완전히 면책받은 것은 아니었다. - P258

7월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서울역 광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정치투쟁이 소멸된 공간은 노동자들이 채웠다. 독재정권의정치적 억압이 약화되자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결성과 파업, 거리시위가 폭발했다. - P259

노동자들은 재벌그룹 대공장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7월 5일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현대미포조선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조설립 신고가 줄을 이었다. 마산,창원, 울산 등 영남지역 중화학공업 대공장을 휩쓴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근로조건 개선투쟁은 중장비를 동원한 거리시위로 이어졌다. 8월22일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거리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검찰은노동자들을 지원한 노무현 변호사와 이상수 변호사를 ‘장례방해‘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투쟁은 수도권 중소기업으로 확산되었으며 정부의 강경대응과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9월까지 지속되었다. 1987년에만 1,500개에 육박하는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되었고 조합원 수는 23만 명이 늘었으며 7월에서 9월까지 3,300건이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국민의 관심은 정치에 집중되었다. - P259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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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 전후방 연관 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을 본격화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들은 2007년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퍼센트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와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 P168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중 누적효과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 P168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파산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 P169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 - P169

제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 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 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 P170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 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개혁을 할 수 있는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L』 - P172

1984년 가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투수가다시는 볼 수 없을 전설을 썼다. 그는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일곱경기를 치르는 동안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를 오가며 4승을 거두어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나는 7차전 경기를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보았다. 그리고 그 겨울을 영등포구치소 0.7평짜리 독방에서 보냈다.
사실 나는 평생 누군가를 때린 일이 ‘거의‘ 없다. 초등학생 때 얄밉게구는 누이동생을 한 번 쥐어박은 것, 그리고 말년병장 시절 상습적으로 후임병을 괴롭힌 상병 하나를 슬리퍼로 때려본 게 전부다. 그런데도 그때 ‘폭력행위등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죄로 옥살이를 했다. "하필이면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났단 말인가. 프랑스나 독일, 영국, 미국 같은 나라에 태어났다면 좋았을걸!" 그렇게 운명을 원망했다. 그 나라들이 부자나라여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나라여서 그랬다.
우리 세대는 세상과 삶에 대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자랐다. 그래서인지 나는 무엇보다도 자유가 좋았다. - P173

민주주의 선진국도 원래부터 그런 나라였던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으며 교회와 귀족계급이 종교적 도그마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민중을 억압했다. 미국에는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제도가 있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피가 강물처럼 흐른 폭동, 반란, 혁명과 반혁명, 내전과 전쟁을 겪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거저 얻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대한민국을 떠나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가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는 길이었다.  - P173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아니다. - P177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 P178

항쟁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문화적 · 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 P179

민주화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과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 ·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 P180

그렇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예의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대부분 분신과 투신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노동조합활동의 자유 보장, 임금과 근로조건개선 같은 것이었다. 직업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경원대학생 송광영(1985), 구로공단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 서울대 학생 이재호·김세진 · 이동수·박혜정(이상 1986), 서울교대 학생 박선영, 하남 신흥정밀노동자 표정두(이상1987),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 최윤범, 운수노동자 이문철(이상 1988), (주)통일 노동자 이영일, 노동운동가 최동(이상 1990), 전남대 학생 박 - P180

승희,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광주시민 이정순과 차태권, 보성고학생 김철수, 인천 운수노동자석광수(이상 1991)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분신과 투신은 1986년과 1991년이 가장 많았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두환과 미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중반기였던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진 시기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타살당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격화하면서 ‘분신정국‘이라는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이 죽음으로 정부를 규탄했다. - P182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4·19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典型이었다. 우리 국민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중항쟁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만약 그때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궐기했 - P182

다면 신군부가 광주 한 곳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상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를 권한다. 본문만 합쳐서 2,3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책이다.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사건들이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수십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이 된다. - P183

또는 정부가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집권세력당과 재야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여기서인사들이재야인사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시민사회 리더를 가리킨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생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지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다. 주동자를 구속하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 P183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곧바로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정치혁명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6월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시민들은 더 높은 수준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
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 P188

그런데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 - P188

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는 범죄조직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예컨대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 국가보훈처등 여러 국가기관이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것 자체도 문제지만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응방식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헌법정신을 파괴하고 법률을 위반한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관련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원세훈 국정원장 등 대선 불법개입 주모자들에게 선거법 위반혐의를적용한 검찰총장을 내쫓으려고 ‘혼외아들‘로 지목한 어린이의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해 언론에 유포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탈북자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보원과검찰이 중국 정부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몇몇 실무자들의 사표제출과 구속으로 끝내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조직의행태를 보인 것이다. - P189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이승만 정부 시절 어떤 외국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미군 장성은 한국 국민이 강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쥐떼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쓰레기통이 아니었으며, 국민은 쥐떼가 아니었다. 세계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우리는 보란 듯이 자유를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세워냈다. 평화적 권력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그에 맞는 시민의식과 행동양식을발전시켰다.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자유에 대한 욕망과 꿈, 정의를 향한 열정과 헌신, 존엄을 지키기 위한 분투와 희생으로 점철된 고난과 영광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길을 다 걷지 않았다. 어지러운 오늘의 현실은 민주화의 역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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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긴요. 딴 애들이 불쌍해서죠. 소설에 쓴 모든 문장이 그 ‘한방을 위해 쓰이는 것 같잖아요. 그 한순간을 들어올리기 위해 팔을 벌벌 떨며 벌을 서고 있는 것 같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뭐 소설계의 대장장이가 되어 모든 문장을 평평하게 두들겨 신scene들의평등을 꾀하겠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럴 주제도 못 되고요. 그저모든 자잘함을 지우며 홀로 우뚝 선 한순간을 지지하는 것을 찜찜해한다는 거죠."
"네가 못해서 그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내는 건 소신이 아니라 능력의 문제야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거랑 못해서 못하는 건깔이 다르단다."
"언니."
동생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못해서 못하니까 좋은 거예요. 무능해서 귀한 거예요. 잘하는데 억지로 안 하는 사람은 반드시 흔적을 남겨요.  - P11

틈 없는 정신과 틈뿐인 몸의 간극을 메운 것은 무수한 규칙이었다. 천가방을 챙기지 않았다면 맨손으로 모든 물건을 옮겨야한다. 유리 용기가 없다면 생고기든 굴이든 가지고 있는 것으로싸야 한다-올드 셀린, 언니가 갈색 핏물이 밴 스카프를 펼치며말했다. 그래야 버릇을 고칠 수 있다.  - P13

두 사람이 손을 잡거나 살을 비비거나 땀방울을 빨아먹는 일 따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못박힌 듯 강렬히 보는 눈빛에서 목경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원감이, 깊은 이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왜 그랬니?"
고모가 물었다.
"나도 해봤어요."
무경이 말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고모의 그 일을, 내가 했어요"
고모는 만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더니 이런 소릴-목경은 억장이 무너졌다하는 게 아닌가.
"너는 내 딸이구나."
"고모, 나 열나요."
목경이 말했다. 그날이 목경이 고모에게 처음으로 존댓말을 쓴날이었다. - P39

"다른 괄호들은 어땠어요? 한 번에 다른 사람 꿈으로 갔어요?"
눈에 덮여 차선이 사라진 도로를 건너며 나는 바에게 물었다. 규희 다음으로 나는 세모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 년에 서너번, 계절이 바뀔 때나 안부를 묻던 친구보다 서로의 벗은 몸을 본 연인이 나을 듯했다. 싸우면 경쟁하듯 저주를 퍼붓던 애인이 아무래도 덜 미안하겠지. 좀 아프게 해도 괜찮은 사람, 서로에게 준상처보다 사랑했던 기억이 큰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세모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P79

이혼녀, 정체성이란 스스로 밝히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안다는 것을 알아챌까 오히려 눈치보게 하는 강한 힘이라고 말하던 사람. 힘이 정체성이라니. 세렝게티에 사는 초식동물도 아니고 왜 세상을 온통 적으로 보느냐고 내가 물으면, 세모는 그 경계심이 자신의 유일한 방어수단이라고 했다. 잡아먹히기 전에 들이받을 수 있는 뿔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않겠느냐고 했다.
세모는 치과에 갔을까. 사랑니를 뽑았을까.
내가 꿈에 나타나면 세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84

읽고 쓰는 것만이 제 고집과 고립을 이 불가능성을 잠시라도넘어서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병과 관련된 기억과 감정들은 여전히 저의 내면 한구석에 뿌리박고 있고 저는 자주 그리로 되돌아갑니다. 병에 걸린 몸의 고통과 고독을 잊지 않아야 또 아프게 되었을 때 조금이나마 태연한척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동안 때때로 저는멀리 달아납니다. 저에게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순간의 착각일지라도, 결국 같은 문제로 돌아오게 되고 현실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여러 번 당겨서 느슨해진 고무줄처럼 제마음도 조금씩 고집스러운 탄력을 잃어가며 확장되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혹시나 여러분도 잠시나마 기진과 진화를 따라 어둡고 축축한버섯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셨다면, 이 이상한 이야기를 어리둥절한 채나마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140

-노출 관종이네. 가족들이 모르나? 알면 좀 말리지.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럴 줄 알았다. 가족까지욕먹게 할 줄 알았어!
오후 업무를 어떻게 해냈는지도 모르겠다. 퇴근 시각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처음엔 악플에 휘둘려 오근희를 끝까지 말리지 않은 나를 탓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지가 뭔데 남의 가정에 참견인가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속이 터질 듯 갑갑해서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편의점으로 뛰어들어가 캔맥주를 사서 원샷했다. 식도를 훑고 내려가는거칠고 시원한 느낌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지들이 뭔데 내 동생을 욕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있는 권한은 나한테밖에 없었다. - P176

언니, 관종이 되려면 관종으로 불리는 걸 참고 견뎌야 해. 그게얼마나 힘든 일인지 언니는 모르지? 한가지 더 언니가 모르는 게있어. 관종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걸 왜 모를까. 왜겠어.
언니가 꼰대라서 그런 거지.
언니, 나는 언니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꼰대가 되어버린 게슬퍼. 혹시 우리 가족이 언니를 그렇게 만든 걸까. 나는 맨날 부동산 얘기, 연금 얘기만 하는 언니가 차라리 대놓고 자긴 꼰대라고말했으면 좋겠어. 정색하면서 안 그런 척해서 얼마나 꼴 보기 싫은지 몰라. 언니는 자기가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깎아내릴 때 쾌감을 느끼는 언니를 볼 때마다 참 속물적이라는생각이 들어. 그런 걸 스노비즘이라고 한대. 책에서 봤어. 나 북튜버 하면서 많이 똑똑해지고 있어. 사기를 당한 이유도 똑똑해져서인 것 같아. 옛날 같았으면 사기꾼이 설명하는 수익 구조가 알아듣기 힘들고 귀찮아서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진지하게 수익을 따져본다니까. 그래서 내가 사기를 당한 것 같아. - P184

그때 근희는 무슨생각을 했을까. 언니의 실패가 자신의 실패는 아닐 거라는 생각?
언니의 실패는 자신의 실패이기도 하다는 생각? 한 가지는 알 것같았다. 근희의 행진은 나의 행진과 명백히 다를 것이란 걸.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댓글을 달았다. 처음엔 악플러 못지않게지저분한 욕을 쓰다가,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고 묻다가 너를 낳고 너희 엄마도 미역국을 드셨냐고 모욕하다가 결국 다 지우고 한참을 고심했다. 이걸 근희가 볼 수도 있다. 나는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콧물을 훌쩍이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쩐지 졌다는 심정으로, 나의 동생 근희와 관종 오근희를 바라보는 이 세상을 향해.

-나의 동생 많관부.

나의 동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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