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코하람은 이해하기 복잡했고, 언론이 이에 주목한 시간은 짧았다. 위성안테나들은 곧 짐에 실렸고, 기자들은 새로운 이야기, 이라크와 시리아의 넓은 지역을 차지한 IS의 이야기를 찾아 떠났다.
캐머런 총리가 보낸 영국 정찰기는 다른 곳으로 조용히 이동했고,
FBI는 인질 협상가들을 철수시켰다.
소녀들은 마치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이듬해 2015년3월 굿럭 조너선 대통령은 ‘굿럭‘이 다했는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나이지리아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서 패배했다. 치복 소녀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폭동을 끝내지 못한 것이 패배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승자는 1980년대에 나이지리아를 통치했던 군부 독재자 모하마두 부하리 Muhammadu Buhari였다. 아홉 명의 딸이 있던 그는 치복 소녀들을 찾는 것이 취임 이후 100일 안에 최우선으로 완수해야 할 임무라고 군대에 지시했다. 그러나 100일이 지났어도 보코하람의 공격은 계속됐고 셰카우와의 협상은 진전이 없었다. 2016년 1월 부하리 대통령은 약 300명의 부모를 만난 자리에서 그의 행정부는 소녀들의 행방이나, 사실상 그들의 생존 여부에 대해서도 "믿을 만한 정보가 없다고 말했다. - P71

"그들은 더러운 손으로 우리 입을 틀어막으며 가슴을 그들에게보이게 했어요." 바 암사Ba Amsa가 말했다. 에스더의 딸 도르카스처럼 그녀도 보코하람에게 포로로 붙잡혔을 때 열여섯 살이었다. "저항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에게는 총이 있으니까요. 저항하면 숲으로데려가서 죽이거든요."
그녀는 바마 Bama라는 소도시 출신이었다. 바마는 보코하람의공격을 여러 차례 받았고, 치복 납치 사건 다섯 달 뒤인 2014년 9월보코하람에 점령당했다.
잔혹하기로 잘 알려진 보코하람의 기준으로도 유난히 잔인한점령이었다. 나중에 보코하람이 올린 비디오 영상에는 총을 든 대원들이 지역 학교의 기숙사 2층 침대 옆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민간인을 살육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대부분 성인 남성으로 보였다.
시체가 너무 많아서 대원들이 간신히 비집고 다니며 여전히 몸을 실룩거리는 사람들을 확인 사살해야 했다.
"우리는 이곳 바닥을 피로 붉게 물들였다. 이것이 앞으로 모든공격에서 체포된 불신자들에게 일어날 일이다." 집단의 지도자가 영상 메시지에서 말했다. "지금부터 살인과 학살, 파괴, 폭파가 우리가침략하는 곳에서 수행할 종교적 임무가 될 것이다." - P77

그녀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딸 켈루가 엄마의 빨간스카프 끄트머리를 집어 눈물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저항했다면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는 걸 지켜보게 했을 거예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른 대원 몇 명이 와서 다른 곳으로이동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이 안 가겠다고 하니 그들이 그를 쏴 죽였어요. 그러고는 제게 다른 대원과 결혼하라고 했어요. 거절했더니 여동생을 데려갔어요."
나중에 군용기가 마을을 폭격할 때 그녀는 탈출할 기회를 잡아가시잡목이 우거진 숲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여동생과 다른 가족이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했다.
"아무도 저를 돌보지 않아요. 여기에서 저는 혼자예요. 죽는 게낫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그러면 누가 켈루를 돌보겠어요?"
하루에 두 번 배급되는 쌀과 한 달에 한 번 배급되는 비누 말고는 다른 음식이나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그녀는 전통적인 기도 모자를 뜨개질해서 판다. 하나를 완성하는 데한 달이 걸리는데, 하나당 2000~3000나이라(7~10파운드)를 받는게 고작이었다. - P82

도르카스가 할 수 있다면 제게 연락했을 거라는 걸 알아요. 제번호를 외우고 있으니까요. 5년 동안 아이의 옛 휴대전화로 전화를하고 또 하는데 응답이 없어요. 아이가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든 안했든, 아기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아요. 그냥 돌아오기만 했으면좋겠어요. 147-20305사람들 말이 소녀들 몇 명은 죽었다고 하지만 저는 도르카스가살아 있다고 확신해요. 매일 교회에 가서 딸이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언젠가는 하느님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 P89

버마 군인이 총을 겨눌 때 자식 중 어느 아이를 살려야 할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결정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2017년 12월 내가 만난 로힝야족 엄마 샤히다Shahida가 부딪혔던 불가능한 딜레마였다. 내가 샤히다를 만난 것은 그녀가고향을 도망쳐온 수십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쿠투팔롱Kutupalong 난민촌에 도착한 직후였다.
나중에 그 난민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음이었다. 그리고 어디에나 있던 아이들이었다.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과 선의의기증품에서 구한 것 같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아이들, 모피 깃이 달린 크림색 여성용 울 카디건에 벨트를 두른 소년이 있었고, 분홍색 발레 스커트가 달린 요정 드레스를 입고 작은 발에 큰 하이힐을 신은 소녀가 있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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