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는 온통 카리부의 바다였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혹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위하여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그바닷속에서 수만 마리의 카리부가 울려내는 발굽소리에 그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를 세우던 5월만 해도 이곳은 황량한 설원이었다. 지금은 벌써 7월, 툰드라에는 흐드러지게 꽃이 피고 북극권은 여름햇살로흘러넘친다. 나는 두터운 다운점퍼를 벗고 스웨터도 벗어버렸다. 땀에전 티셔츠에 북극 바람이 상쾌하게 스친다. 그 거대한 카리부 떼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벌써 한 달 이상을 아무하고도 말을 해보지 못했다. 소형 비행기의프로펠러 소리가 그리웠다. 알래스카를 여행할 때면 늘 이 소리를 기다렸던 것 같다. 부시파일럿 돈이 나를 데리러 세스나를 몰고 올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나는 아마 능선을 응시하면서 온 신경을 귀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귓전을 앵앵거리는 한마리 모기 소리도 세스나 소리로 착각하기쉽기 때문이다. - P66

인간의 삶이 그림이 되는 순간이 있다.
백야의 북극해에 하얀 물보라가 솟아오르더니 그 자리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다. 참고래가 바닷물을 뿜어 올리며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래잡이 캠프는 쥐죽은 듯 고요하다. 빙원에 있는 에스키모의 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오는 참고래 한 마리에 쏠려 있다.
해안에서 바다로 1백 미터쯤 나간 곳에 설치된 각 캠프마다 언제든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우미악(턱수염바다물범 가죽으로 만든 에스키모의전통적인 카누)이 준비되어 있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보름달이 떴다. 사위는 백야의 엷은 빛에 싸여 있다. 바다는 고요히잠들어 있다.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십수 척의 에스키모 우미악이 일제히 바다로 미끄러져 나갔다. 반짝이는 바닷물 위로 많은 그림자들이 소리도 없이 한 점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 P67

5월이 되었다. 남쪽에서 도요새나 물떼새를 비롯하여 많은 철새가떼 지어 날아와 더욱 북쪽으로 향한다. 그들은 알래스카북극권에 둥지를 틀러 찾아가는 중이다. 봄의 전령 흰멧새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봄의 노래. 나는 자연의 질서를 느끼고, 그 철석같은 당연함에 종종 압도된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오후 시간을 얼음 감시대 위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꼭대기로, 리드를 멀리 내다볼 수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는 고래를 일찌감치 발견하는 장소였다. - P72

저녁이 되어 이웃 캠프의 사람이 달려 왔다.
"조 프랭클린 패가 고래를 잡았다!"
몸 전체가 떨릴 듯한 흥분이 일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없었다. 고래가 우미악에 끌려 돌아온다. 사진을 찍어야지. 나는 캠프를향해 달렸다. 전령이 캠프 전체에 소식을 전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카메라를 준비한 나는 재빨리 얼음 전망대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오래된 에스키모의 노래였다. 보니, 아무도 없는 얼음 위에서 노파가 바다를 향해 춤을 추고 있다. 느릿느릿한움직임으로 무엇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마이라였다.
아마도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래에 감사하는 춤일 것이다. 가까이가보니 마이라는 울고 있었다. 나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계속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지금 춤의 원형을 보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때로는 마음의 필름에만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 있다. - P73

커피가 바짝 졸아 있었다. 맥킨리 산의 잔조도 거의 사라졌다. 이제곧 동이 틀 시간이다. 일몰 2시간 후에는 해가 뜨는 것이다. 쓰디쓴 커피를 홀짝이며 푸르스름한 백야에 싸늘한 미풍을 맞고 있었다.
그 카메라를 지금도 쓰고 있다. 종종 그날 밤 사건을 생각한다. 이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카메라들 가운데 그 카메라는 이제 작은 사연을 가지게 된것이다.
언젠가 내가 늙었을 때 이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알래스카에서 말이야. 어느 날 밤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단다 ...... 이리 한 마리가……." - P83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며 석양 무렵의 가문비나무숲을 걷는다. 축축한 대기가 느슨하고 따뜻하다. 숲속 카펫에 떨어지는 무스(사슴과의 포유류) 똥에 물기가 조금 배어 있다. 버드나무의 새싹이 트기 시작했을것이다. 붉은다람쥐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숲도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작은 장작불이 흔들리고 있다. 타닥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의 마음을 풀어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역시 묘한 거야, 사람의 마음이란. 아주 자잘한 일상에 좌우되면서도 새 등산화나 봄기운에 이렇게 풍족해질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만큼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되고 별이 나왔다. 랜턴을 켜놓고 일기를 쓴다. 올해가 다시시작되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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