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알라에게는 코알라의 잔이 있고, 나무늘보에게는 나무늘보의 잔이 있고, 나에게는 나에게 어울리는 잔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운명의 한계로 오인되지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잔의 외형이나 크기로 인해 차별당하거나 파괴당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의 규모를 존중하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 P25

그제야 나는 눈금자를 0에 맞추고 나에게 ‘저금‘ 되어 있던 말들을 하나둘 떠올려보았다. 희연아, 환히 지내라. 희연아, 너는 너를 좀 더 사랑해야 하겠다. 겨울 창문에 붙어 있는 마른 나뭇잎 같은 말. 성냥갑에 딱 하나 남은 성냥 같은 말.
공중으로 날아오른 풍선은 터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날아오른 풍선은, 날아가는 시간만큼 다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대기권에서 바라본 지상의 모습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는 오직 풍선만이알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지나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게 된다. 다행히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그러니 성냥 같은 말들을 쥐고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내 안에서 내가 피어나는 날 초에 불을 붙일 수있게. 축하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무구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 P29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벽에 새겨진 작가의 한 문장이었다. ‘가장 간단한 것이 가장 힘 있다고 생각한(I think that the simplest thing is the most powerful thing),
작품에 대한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설명을 얼마든덧붙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겨우 한 줄이지만, 강력한 한 줄이었다. 그의 주악 앞에서 나의 거울이 와장창 깨지는 경험을 했다.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들, 칭얼거리며 튀어 오르고 무한 증식하는 나를 두더지 잡듯 몽둥이로 내려치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은 고요와 적막. 새하얀 벽.
이제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선 기분으로 나의 주악을 찾고자 한다. ‘간단하면서도 짜임새가 있다‘는 뜻의 간결. 당분간 내 삶의 모토는 그것이다. 분별과 선택, 집중의 시간이 성큼 다가와 있다. - P34

‘세상엔 경제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정도가 아니라 세상 만물에는 영혼이 스며 있고 그것들이 삶의 목격자이자 때론 신의 역할을 대리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릇 시인이란 ‘보는 자여야하고, 그냥 보기만 해서는 안 되고 ‘똑바로‘ 보고 ‘현상 너머까지도‘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들어왔다(내가 교수자의 입장이 되어도 늘 그것을 강조하게 된다). 그것이 습관이 된 탓인지 때로는 너머의 너머를보느라 몸이 아예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비유적으로 말했지만 현실감각이희박해질 때가 종종 있다는 뜻이다(이 나이에도 관공서와 은행이 치과보다 무섭다). 그러니 식물로부터 재테크를 연상할 줄은 모르고 신화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방향으로만 연상을 이어가는 것일 테다. - P37

그런데 사실 최고의 수확은 다른 데 있다. 우리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심판에게 진격의 거인처럼 달려가 따지던 김연경 선수의 포스 말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절대 못 하는 소심의 왕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저 당당함. 부당하다고, 재고하라고, 할 말 끝까지 하는 (심지어는 영어로) 저 똑 부러짐. 자기 과실일 땐 미안해서 입을 꾹 다물고, 다른 선수 과실일 땐 "괜찮아!" "할 수 있어!" 어깨든 팔뚝이든 꼭한번 두드려 독려하며 공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저너른 품. 그러니까 김연경 선수가 짱이라는 결론.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시의 시작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매 순간 버저 비터를 던지는 심정으로쓰는 사람. 깊고 넓고 높고 알록달록하고 날카롭고 - P57

따뜻한 거 다 하지만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시.
단전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올려 외쳐본다. 우리 존재 파이팅! 나의 시도 파이팅! - P58

"당사의 눈동자에게 건배"라는 저 유명한
 <카사블랑카>의 대사가 세기의 고백일 수 있었던 까닭을 생각해본다. 이 문장은 조도가아니라 휘도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여기 있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먼저 거기있기에 이렇게 나도 당신 눈 속에 담길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빛나는 사람은 없다. 탄생부터 죽음까지우리는 모두 타인의 보살핌 속에서, 관계망 속에서살아간다. 영악하다는 말은 욕이어도 영리하다는 말은 칭찬이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힐난이지만 너 덕분이라는 말은 상찬이다. 그러니 어떻게 말할 것인가. "비올라에 있어 위대한 날이에요"라는 문장이 반사하는 겸손하고도 따뜻한 빛을 오래도록 기억하려한다. 네, 나도 당신을 통해 나를 보고자 합니다. 내모든 당신들의 눈동자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살고싶어요. - P62

이 세계가 광산이라면 신은 성실하게 인간 광물을 캐낼 것이다. 그것이 신의 일이니까. 어떤 원소를포함하고 있는지에 따라 광물은 제각기 다른 책을띤다. 금인지 은인지, 흑연인지 석탄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냥 버려지고 말 버력인지 일단은 캐봐야 한다. 시작해봐야 알고, 끝나봐야 안다.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의 최후를 미리부터 결론 내지 말고 일단은나를 잘 다듬어가는 게 맞다. 적어도 내 삶을 버력의자리에는 두지 않기 위해서. - P73

씨앗에 독이 있다? 순간 그 말이 벼락처럼 나를가르고 지나갔다. 내가 상상하는 씨앗은 한없이 맑고 여린 존재였기 때문이다. 엄마 배 속에 막 자리 잡은 생명 같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충분한 보살핌이 없다면 영원히 캄캄한 땅속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혜적으로 바라보기 쉬운 생명 말이다. 그런데 씨앗에 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게다가 그 독이라는 게 식물로 하여금 외부 물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할 목적으로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세상 모든 씨앗을 달리 보게됐다.  - P76

그 즈음 읽었던 책의 한 대목도 겹쳐졌다. 세계적인 작가 존 버거와 그의 아들 이브 버거가 주고받은편지 모음집 《어떤 그림》(열화당, 2021)에서, 부자는회화 작품을 사이에 두고 예술과 삶 전반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다. 모든 페이지, 모든 사유가 아름다웠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나의 시선을 붙잡았던건 ‘흰 물감‘이 등장하는 대목이었다. 화가인이브버거는 종종 흰 물감을 만들어 사용한다고 했다. 물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료에 기름을 섞어 부드럽게 개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자신의 창틀에는 몇 년째사용 중인 "린시드유 병들이 놓여 있고, 그 기름 "표면에 형성된 주름진 피막 아래" "벌집에서 딴 벌꿀" 같은 "황금빛 기름"이 담겨 있다는 설명이었다.  - P77

병 안에 담긴 기름에 피막이 생기기까지의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하루아침의 일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몇 년에 걸쳐, 병 속의 기름이 이곳에 ‘고인‘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빚어진 결과 아닐까. 그 피막이라는 거, 사랑하고 미워하기를 반복하며 어렵게 어렵게 건너온 시간의 주름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틀린 설명이라 해도 상관없다. 모든현상을 과학적, 논리적으로만 설명하려 들면 세상모든 신비는 몸을 틀어 삶의 반대편으로 떠나버릴테니까. 신비가 아니라면 씨앗이 품고 있는 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가장 여린 마음에까지 독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독은 악이 아니다. 안간힘이고 사랑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씨앗이 품은독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리라. - P78

우리는 모두 찢기기 쉬운 피막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피막에 함부로 막대기를 꽂아휘저을 수 없다. 대단한 무엇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을 둘러싼 피막이 손상될때인간은 죽는다. 아주 작은 찢김으로도 상한다. 그러니 겪고 뒤척이면서 두터워지는 수밖엔 없다. 이 여름, 이 겨울을지나면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겠지. 이 사랑, 이터널을 빠져나가도 또 한 겹의 피막이 생겨나 있을것이다. 그 시간을 믿으며 가야겠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 P79

독일에는 ‘블라이기센(Bleigießen)‘이라는 풍습이있다고 한다. 12월 31일 밤이 되면, 납을 녹여 그림자의 형태나 굳은 모양을 보고 한 해의 운을 점치는 것이다. 마트에 가면 블라이기센 키트(kit)를 팔기도 하는데 1~2유로면 구입이 가능하단다. 내가 녹인납이 권총, 칼, 토끼, 그 밖에 어떤 모양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해석하기 나름일 것이다. 다만 그 작은 의식을 통해 각자가 살아낼 일 년의 모양을 예감해보는 것이겠다. 그 순간 무형의 삶은 깜빡, 하고 빛난다. 얘야, 삶이란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손에잡히기도 한단다. 지금 여기 네 손안에 분명하게 들려 있잖니, 하고. - P83

‘모루‘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 건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의 책 《슬픔의 위안》(현암사, 2012)을 통해서였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우리가 쓰고자 한 것은 ‘grief‘, 즉 ‘슬픔‘이었다고 고백한다. 슬픔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그들은 사별을 경험한 이들과 수많은인터뷰를 진행해왔고, 그 고유한 슬픔이 어떻게 한사람을 통과해가는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폈다. 그리고 이 책을 썼다. 요약하자면, 슬픔과 위안이라는 두 단어 사이의 거대한 협곡을 끝끝내 건너가는 이야기였다. - P87

모든 글이 투명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중에서도 1부〈슬픔의 무게>에 수록된 ‘모루‘ 꼭지는 몇 번을 읽어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마음이 유리처럼 깨진다. 모루는 대장간에서 재료를 올려 두드릴 때 쓰는 판이다. 현실에선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주로 만화영화에서 주인공(혹은 악당)의 머리 위로 떨어져 눈을튀어나오게 만드는 역할로 출연한다고 책은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도 그를 ‘후려치는‘ 모루가 있다고 했다. 괜찮다고, 이미 지나간일이라고, 방금 전까지 씩씩하게 웃어 보이던 이가뒤돌아서서 홀로 짓는 표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 P88

그런 혼잣말들로, 눈물로, 한밤의 달리기와 그네타기로, 시와 음악으로 우리는 모루에 대항한다. 연필 한 자루가 산책의 근사한 핑계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필은 이미 충분하니까. 애초에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신발 끈을 고쳐묶고 문을 열었다면 슬픔에서 위안으로 가는 협곡을뛰어넘는 중이라고 여겨주기를. 썩고 난 뒤에야 묻을 수 있다.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 것이더라도. 너는여전히 대답이 없구나. 그는 그다음 말을 향해 온 마음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 P90

그렇게 적갈색 얼굴로 집에 왔다. 그때 내겐 삼촌 차를 타고 병원에 갔던 기억밖엔 없는데. 환자복을 입은 엄마를 간병인용 간이침대로 밀어내고 병실 침대를 떡하니 차지한 채 쿨쿨 잔 기억밖엔 없는데.
이 글은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엄마를 위해 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루가 있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눈물이 있을지라도 우리 삶의 구체성으로 말미암아이 페이지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될 거라고 귀퉁이를 접어 두고두고 펼쳐보며 엄마의 아팠던 시간, 그림자의 그림자까지 끌어안겠다고.
사과의 갈변은 사과가 운 흔적일까? 유루증은 생각할수록 슬픈 병이다. 적갈색이 생각할수록 슬픈색인 것처럼. - P95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해보면 내력벽이라는 건 모든 걸 부숴도 부서지지 않는 최후의 보루, 영혼의 핵심인 셈이니 그 자체로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이겠다.
팔을 들어 슬픔을 받치고 선 모양. 나란한 두 개의기둥.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친구의 정의다. 그러니팔이 아프면 조금 꾀를 부려도 좋아. 오늘은 나의 친구들에게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써야겠다. 당분간은 내가 받치고 있을게. 손으로 안 되면 발로라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그러니까 다녀와. 커피도한 잔 마시고 숲길도 걷다 와, 기다릴게. - 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이 있었다

그는 날이 제법 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고도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불아 피어나라 불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해와 달이 애틋하게 서로를 배웅하고
울타리 너머 잡풀이 자라고
떠돌이 개가 제 영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안에서 죽은 나를 도닥이다 잠드는

불은 꺼진 지 오래이건만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따뜻한 허밍

안희연은 누군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귀를 먼저 내미는 사람이다. 그는 잘 듣는 사람, 열린 사람, 그리하여 ‘다르게‘보는 사람이다. 그게 시에 관한 거라면,
이것인지 저것인지 헷갈린다면, 산뜻한 대답이 필요하다면, 나는 항상 안희연을 찾는다(그도 잘 알것이다). 그의 눈과 귀, 입과 ‘쓰는 손‘을 믿기 때문이다. 이 책엔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일상과 길음,
자신과 사유, 다정한 태도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단어에서 시작해 생활의 복판에서 끝난다. 문장은 쉽고 따뜻하며 빛난다. 언어를 오래 살피는 사람이 종국에 어디에 도착하는지, 그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잘 살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난다. 읽는 내내귀가 활짝 펼쳐져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가 내는 소리라면 허밍이라도, 단 한 박자도 놓치고 싶지 않다.
- 박연준(시인 《쓰는 기분》 저자)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썼다.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향한다.

저는 이 놀이터를 떠나고 싶지가 않아요. 저에게세상은 양초로 쓰인 글자 같습니다. 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들어서면 감춰져 있던 장면이 서서히나타나기도 해요. 그곳엔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무언가가 있어요. 파닥임과 반짝임이 있어요.
그 마주침의 순간이 좋아서 저는 계속 글을 씁니다.
우리가 가진 촛불은 만능이어서 이따금 돋보기나핀셋으로 변신하기도 해요. 이 세계를 다른 각도로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나, 많고 많은 것 중 ‘내 것‘ 을 골라내는 데에도 꽤 큰 도움이 된답니다.
단어의 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단어의 집은 문턱도 없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여기 이곳 놀이터에서 저와 함께 단어를 골라보시겠어요?  - P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들 민스크를 떠났어. 사람들은 적의 총격 때문에 큰길 대신 숲길을택해 걸었어. 어디선가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들렸지. ‘엄마, 전쟁이래요.‘ 우리 부대는 퇴각하는 중이었어. 호밀이 여물어가는 드넓은 들판을 따라 이동했지. 길가에 나지막한 농가 오두막이 나타났어. 이미 스몰렌스크 지역에 접어든 거야....… 길가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어. 그 여자가 그 여자네 작은 집보다 더 커 보이더군. 여자는 러시아 전통 문양이 수놓인 리넨 옷으로 몸을 감싼 채 양팔을 가슴위에서 십자 모양으로 모으고는 고개 숙여 절을 했어. 병사들은 계속 행군했고, 여자는 병사들에게 깊이 고개 숙이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시길‘이라고 했지. 병사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고개 숙이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어. 그러자 모든 병사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 - P397

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어…… 그래서 침대를 깨끗한 시트로 갈고 남편 다리에도 새 붕대를 감아줬지. 그리고 남편을 베개 위까지 끌어올리려는데 남자라 무겁더라고. 그래서 거의 남편에게 닿을 듯 몸을 기울여 끌어당기는데 느껴지는 거야, 이미 끝이라는 게 일이 분 후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게…… 저녁이었어. 9시 15분…… 몇 분이었는지도 기억나 ..… 나도 죽고 싶었지.…… 하지만 그때 뱃속에 우리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지. 아이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견딜 수 있었어. 1월 1일에 남편을 묻었어. 그리고 38일 후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지. 1944년에 태어나 이제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어, 남편 이름은 바실리였어. 아들 이름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우리손자도 바샤야∙∙∙∙∙∙ 바실료크……"

류보피 포미니치나 페도센코, 사병, 간호병 - P409

"날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젊고잘생긴 남자가 죽어간다는 현실을 ..... 죽어가는 이에게 ......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지. 죽어가는 이를 위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면 여자로서라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어......
전쟁이 끝나고 숱한 해가 지났을 땐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당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하더군. 나야 당연히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았지. 수많은 부상병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 미소가 자기를 이른바 저세상에서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여인의 미소가…….."

베라 블라디미로브나 셰발디셰바, 대위, 외과의 - P409

 특무상사는 우리를 위해 시까지 썼어. 아가씨들이 5월의장미처럼 감동적이며, 전쟁 때문에 우리 아가씨들의 싱그러운 정신이 불구가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지.
우리가 전선으로 출발할 때 맹세한 게 하나 있어. 전장에서는 어떤 연애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만약 살아남는다면, 전쟁 후에 하겠다고 전쟁 전에 우리는 키스도 한 번 해본 적이 없었어. 우리는 요새 젊은이들보다 그런 일에 더 보수적이었거든. 우리에게 한 번키스는 평생의 사랑을 의미했지. 전선에서의 사랑은 일종의 금기였어.
만약 누가 연애를 하다가 지휘부에 들키잖아? 그러면 대개 둘 중 한 명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야 했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간단한 방법이었지. 우리는 연인들을 보호하고 지켜줬어. 우리가 했던 유치한 맹세를 어긴 거야…... 그래, 우리는 사랑을 했어....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선에서 못 버텼을 거야. 사랑이 구한 거지. 사랑이 나를 구원했어……"

소피야 크리겔, 상사, 저격수 - P410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고마워. 그 사람 덕분에 사랑이 뭔지 알았고 그 사랑을 누렸으니까. 평생 그 사람을 사랑했어. 숱한 해가 지나도록 그 사랑을 간직했지. 이제 와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겠어. 이렇게 늙어버린걸. 그래,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았어! 하지만 후회하지않아.
딸아이가 ‘엄마, 엄마는 대체 그런 남자 어디가 좋다고 그래요?‘라며그 사람이 세상을나를 비난했어.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떴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 많이 울었지. 그 일로 우리 딸과 다퉜어. ‘왜 울어요? 그 사람은 엄마한테 진즉에 죽은 사람이라고요.‘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해. 내 기억 속에서 전쟁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야. 그곳에서 행복했으니까…..
다만 부탁인데, 내 성은 밝히지 말아줘. 내 딸을 위해서……"

소피야 K-비치, 위생사관 - P413

또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지도에 중립지대가 어디를 통과하며 전선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따위를 표시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얼마나 많은 무장세력들이 목숨 걸고 싸웠는지 헤아리지도 않았다. 이들은 고사포, 기관총, 사냥총으로 싸웠고, 또 낡은 베르당총으로 싸웠다. 잠깐 숨 고를 여유도 대대적인 총공세도 없이 대부분 많은 이들이홀로 싸웠다. 그리고 홀로 죽어갔다. 사단이니 대대니 중대니 하는 군대가 아니라 민중이 직접 빨치산이 되고 지하공작원이 되어 적과 맞섰다. 남자들, 노인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톨스토이는 이처럼 다양한 인간 군상의 결사항전을 두고 ‘민중전의 곤봉‘이니 ‘애국심의 감 - P435

춰진 온기‘라 칭했고, 히틀러는(나폴레옹에 이어서) 자기 부하들에게 ‘러시아가 규칙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 전쟁에서는 죽음이 가장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두려운 건따로 있었다..... 전쟁의 한복판, 전선에서 자기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병사를 상상해보라. 아이들과 아내와 늙은 부모, 언제든 사랑하는 가족을 희생시킬 각오가 돼 있어야 했다. 가족을 죽음의 길로 내보낼 각오가. 그래서 이 전쟁에서는 용맹무쌍함도 비열한 반역 행위도 증언해줄 목격자 없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시골마을들에서는 전승기념일에 기뻐하는 대신 눈물을 흘린다. 아니 통곡을 한다. 가슴을 친다.  "정말 끔찍했어….... 피붙이들을 모두 땅에 묻었지. 전쟁터에 내 영혼도 묻고 왔어." (B. G. 안드로츠크, 지하공작원) - P436

지휘관은 항복해야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번민에 휩싸였지. 우리는 지휘관을 잠시도 혼자 두지 않았어. 계속 옆에 붙어 있었지. 자살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모스크바와 연락을 취했어. 상황을 보고했지. 지시가 내려왔고 ...... 지시를 받은 바로 그날 부대에서 회의가 소집됐어. 결국 ‘독일군의 도발행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지. 지휘관은 공산주의자로서 당의 규율에 복종했어…… 이틀 후 우리 정찰병이 마을로 내려갔어. 그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끔찍했어. 지휘관의 가족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었으니까. 첫 전투에서 지휘관은 전사하고 말았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어.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 내 생각에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그저 눈물만 흘려 말은 못하고 ...... 나 스스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확신이 안 서는 걸 어떡해? 믿게 할 자신이 없는 걸.…… 사람들은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지. 고통스러운 이야기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 (V. 코로타예바, 빨치산 병사)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 일을 멈출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 P437

밤에 누워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엄마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아니, 나 때문이 아니야…… 만약 내가 가족 때문에 겁을 먹고 적과 싸우지 않았다면, 만약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이유로 똑같이 그랬다면,
또다른 누군가도,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도 그랬다면 지금의 승리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 일을 다 잊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 엄마가 저만큼 걸어오는데..... 발포 명령이 떨어지는 거야…… 그러면 나는 엄마가 나타나는 쪽에 총구를 겨눠야 했지..… 엄마의 하얀 머릿수건…… 이런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당신은 몰라. 알 리가 없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힘들어. 밤에 문득 창밖에서 아이 웃음소리나 목소리가 들리면 온몸에 경련이 일지. 꼭 그때 그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아서, 비명소리 같아서. 하루는 문득 잠이 깼는데 숨을 못 쉬겠는 거야.  당신은 사람 타는 냄새에 숨이 막혀서..…탈 때 나는 냄새가 어떤지 모를 거야. 특히 여름에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면서도 달짝지근한, 그런 냄새지. 지금 나는 구역집행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어. 어디든 화재가 발생하면 그곳으로 가서 서류를 작성하는 게 내 일이야. 하지만 농장 같은 데서 불이 나 동물들이 타 죽었다고 하면그곳은 절대 안 가. 갈 수가 없어..…그때가 떠올라서...... 그 냄새 …… 사람들이 불에 타던 냄새 ..... 밤에 잠이 깨면 정신없이 향수를가지러 가. 하지만 향수에서도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사방에서 그 냄새가 나…… - P4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늘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은 늘 그네들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삶만큼이나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네들이 어떻게 이 한없는 죽음의 실험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번 목숨을 내놓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는지.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P 373, 374



전쟁터의 수많은 사람들 ...... 그리고 전쟁터의 수많은 일거리들……
죽음의 언저리만이 아니라 삶의 언저리에도 일은 많다. 전쟁터라고해서 총을 쏘거나 맹사격을 퍼붓고, 지뢰를 놓거나 제거하고, 폭격을 가하거나 폭파하고, 백병전에 뛰어드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터에서도 빨래를 하고, 죽을 끓이고, 빵을 굽고, 부엌 식기들을 씻고, 말을 돌보고 자동차를 수리하고, 관을 짜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군화에 밑창을대고, 담배를 들여온다. 어쩌면 오히려 전쟁터에 더 많은 일상의 삶이있는지도 모른다. 하찮고 사소한 일들 역시.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 거예요. 그렇죠? 전쟁터야말로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다면말이에요." 위생병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미슈티나는 이렇게 회상한다. 군대가 앞서가면 ‘제2전선‘이 그 뒤를 쫓아갔다. 세탁부, 요리사, 기 - P299

계수리공, 우체부.…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는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대 뒤에 가려졌지요." 그곳, 무대 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진창길을 따라 행군중이었지. 말들은 그 진창에 빠지거나 정신없이 넘어졌어. 화물트럭들도 진흙 속에 박혀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했지…… 병사들은 대포를 자기 몸에 감아서 끌었어. 어디 그뿐이야.
곡식수레며 속옷수레며 이불수레도 끌어야지, 담배상자도 끌어야지. 담배상자 하나가 미끄러져 진흙탕에 빠졌어. 그랬더니 세상에, 욕을 욕을하는데 ...... 병사들에겐 담배도 포탄이나 탄약만큼 중요했거든......
남편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한테 그러는거야. ‘두눈똑바로 뜨고 봐! 이건 서사야! 서사라고!"

타티야나 아르카지예브나 스멜랸스카야 종군기자 - P300

-전선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부상병들을 돌봤어. 물을 먹여주고 밥을 먹이고 변기를 가져다줬지 이 모든 게 우리 일이었어. 나보다 나이 많은 어떤 언니랑 짝이었는데 그 언니가 처음에 나를 많이 도와줬어. ‘환자가 소변기를 찾으면 나를 불러.‘ 부상자들은 전부 팔 없는 사람, 다리 없는 사람 같은 중환자들이었어. 첫날은 언니가 도와줬지만 그다음부터는 나 혼자 해야 했지. 그언니가 하루종일, 밤새도록 나랑 같이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부상자가나를 불렀어. ‘간호사, 소변기‘
그 환자에게 변기를 내밀었어. 그런데 받지를 않네. 보니까 팔이 없는거야.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막연하게나마 알겠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말 모르겠는 거야. 몇 분을 가만히 서 있었어. 나를 이해하겠어? 그 환자를 도와야 하는데...... 나는그게 뭔지 몰랐어. 한 번도 본 적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스베틀라나 니콜라예브나 류비치, 위생부대원 - P303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 그래서 꾸며서 말할 줄은 몰라…… 우리는 병사들 옷을 담당했어. 병사들의 옷이란 옷은 죄 가져다빨고 다림질도 했지. 그러니 거기 무슨 영웅담이 있겠어. 기차를 타고가는 일은 별로 없었고 주로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말들이 너무 지쳐서 베를린까지 거의 우리 발로 걸어갔다고 보면 돼. 글쎄, 또 무슨 일을 했더라. 우리가 한 일이라…… 그래, 부상자들을 끌어 나르는 것도 도왔어. 드네프르에서는 탄약이며 포탄도 우리가 직접 다 들어서 나르고, 차로는 운반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 몇 킬로그램씩을 팔로 안고 날랐지.
그리고 방공호도 파고 다리도 놓고…….
한번은 적에게 포위를 당했어. 그래서 나도 다른 병사들처럼 뛰어다니고 총도 쐈지. 내 총에 사람이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나는 그저 다른 병사들처럼 뛰고 총 쏘고 한 것뿐이니까.
그런데 어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그 많은 일을 겪어놓고도! 차차기억이 나겠지....… 우리집에 한번 더 와……

안나 자하로브나 고를라치, 사병, 세탁병 - P306

"나는 군대에서 기록병사였어..... 그 일을 맡기기 위해 나를 사령부로 보내려고 설득들을 하는데 ..... 내가 전쟁 전에 사진사로 일한 사실을 안다면서 자기네 사령부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나는 죽음을 카메라에 담는 게 싫었어. 전사한 사람들을 찍고 싶지는 않더라고 주로 병사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지. 담배를 피운다거나 포상을 받고 활짝 웃는다거나 할 때, 그때 나한테 컬러필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흑백필름밖에 없었거든. 아, 연대 깃발하강식 ..... 정말 멋지게 찍을 수 있었는데……
요즘.…. 기자들이 찾아와 물어. ‘전사자들 사진도 찍었나요? 전장은....‘ 그런 사진이 있나 뒤져봤지…… 별로 없더라고. 죽음에 대한 사진은 잘 안 찍었거든…… 부대에서 누군가 전사하면 병사들이 나를찾아와 사진을 부탁했어. ‘혹시 그 친구 살아 있을 때 사진 있나요? 그러면 같이 사진을 찾는 거야…… 환하게 웃고 찍은 사진을……"

엘레나 빌렌스카야, 중사, 기록병 - P307

"우리는 건설 일을 했어…… 철도 건설하고 배다리도 놓고 엄폐호도 만들었지. 전선 바로 옆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밤에만 땅을 팠어.
벌목도 했어. 우리 분대원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어. 게다가 다들 어렸고, 남자들도 몇 명 있긴 있었지만 벌목을 할 만한 건강이 아니었지. 그러면 그 나무를 어떻게 날랐냐고? 여러 명이 다 같이 달려들어 날랐어, 어떤 나무는 분대원 전체가 힘을 합쳐서 겨우 끌어내오기도 했지. 손바닥이 파이고 까져서 피투성이가 되곤 했어. 어깨도……"

조야 루키야노브나 베르즈비츠카야, 건설대대 분대장 - P308

"나는 전쟁이 치러지는 4년 내내 돌아다녔어.... 도로 표지판을 안내 삼아 각지를 다녔지. ‘슈킨 농장‘ ‘코즈로 농장‘ .… 내가 맡은 임무는 보급기지에서 물품을 받아다 최전방 병사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었어. 주로, 병사들에게 꼭 필요한 담배, 궐련, 부싯돌 같은 것들을 가져다줬지. 어디는 차량을 타고 가서 전달하고, 또 어디는 짐마차로 가기도했지만 대개는 병사 한두 명을 데리고 걸어서 갔어. 그 많은 걸 다 우리가 직접 들고서. 참호 같은 곳은 특히나 마차로 갈 수가 없었거든. 독일군이 마차 소리를 들으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전부 우리가 이고지고 해서 가져갔지. 우리가 직접 다……"

엘레나 니키포로브나 옙스카야, 사병, 물품보급병 - P309

나는 고리키 시 통신학교의 우편근로자 양성 과정에 들어갔어. 과정을 마치고 전방부대인 제60보병 사단으로 발령받았지. 연대 우체국에서 장교로 복무했어. 그래서 최전선 병사들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지. 얼마나 좋은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편지에 입을 쪽쪽 맞추더라고. 하지만 전쟁통에 가족을 잃거나 가족이 독일군 치하에 사는 병사들도 많았거든. 그런 병사들은 편지를 받을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익명으로 편지를 썼지. ‘안녕하세요, 군인아저씨! 이름 모를 소녀가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적군과 싸우세요? 언제 적을 물리치고 돌아오시나요?‘ 밤마다 앉아서 편지를 썼어…… 전쟁 내내 그런 편지를 수백 통도 넘게 쓴 거야.……"

마리야 알렉세예브나 렘네바, 소위, 우편병 - P310

몇 년 사이에 수백 가지 이야기들이 모였다…… 종류별로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돈된 수백 개의 녹음테이프와 수천 장의 이야기 원고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찬찬히 페이지를 넘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예기치 못한 모습을 드러내는 전쟁의 세계, 예전에 나는, 이를테면 이런 건 묻지 않았다. ‘어떻게 몇 년씩 참호안에서 쭈그려 자고, 맨바닥에 모닥불 피워놓고 잘 수 있나? 어떻게몇 년씩 똑같은 군화에 똑같은 군용외투만 입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몇 년씩 웃지도 않고 춤도 안 추고 살 수가 있나? 여름에 여름옷도안 입고 어떻게? 높은 구두와 꽃도 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그네들 모두 열여덟,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 아니었던가! 나는 으레 전쟁터에 무슨 여자의 삶을 위한 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여자로 사는 건 불가능하며 전쟁터는 여자에게 금기의 장소라고 말이다.  - P337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나는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 아이가 죽어서 관속에 누웠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 거야..... 꼭 어여쁜 신부 같더라니까……"(A. 스트로체바, 보병) "메달을 받게 됐어. 그런데 내 군복이 너무 낡은 거야. 그래서 가제로 군복 칼라를 만들어 달았지. 어쨌든 하얀색이니까…… 칼라 하나 만들어 달았을 뿐인데, 그 순간 내가 최고로 아름다운 아가씨가 된 것 같더라니까. 거울이 없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아휴, 그땐 거울이 다 뭐야, 폭격에 죄 날아가고 남아난 게 없었는데……"(N. 예르마코바, 통신병) 그네들은 그때 어린 아가씨답게 어수룩했던 자신들의 작은 속임수부터 자잘한 비밀들, 남몰래 자기들끼리만통하던 신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모두 즐겁게 털어놓았다.  - P338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일상 속에서,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임무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들려주었다. 스스로의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그들은 놀랍게도(4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쟁의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소소한 사건들과 그때의 느낌, 색채, 소리 들까지. 그네들의 세계에서는 일상과 존재가 하나였고, 따라서 존재의 흐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쟁도 평범한 삶의 한때일 뿐이었다.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을 압도하는 순간을 여러 번 목도했다. 역사마저 간단히 제압해버리는 그 순간을. "내가 전쟁터에서만 예뻤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지나가버렸어.  - P338

다 타버렸지. 그러고는 순식간에 늙어버렸어……" (안나 갈라이, 자동소총병)
수많은 시간의 결을 지나오면서 어떤 일들은 갑자기 커졌고 어떤 일들은 작아졌다. 인간적이고 내밀한 일들은 커졌다. 그리고 그게 나에게는 재미있게도 그네들 자신에게도 더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왔다. 인간적인 것이 비인간적인 것을 이겼다. 단지 인간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울더라도 걱정하지 마. 불쌍해하지도 말고 내가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둬. 하지만 당신이 고마워.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해줘서……" (K. C. 치호노비치, 중사, 고사포 병사)
그건 나도 몰랐던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339

"내가 정말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을 쏘았는지는이야기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울었는지는 말 못하겠어. 그건 아마못다 한 이야기로 남을 것 같아.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사람은 전쟁터에서는 무시무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그런 사람을어떻게 이해하지?
당신은 작가잖아. 직접 한번 생각해봐. 뭔가 아름다운 말, 들끓는 이도 더러운 진흙탕도 없고 구토물도 없는…… 보드카 냄새도 피냄새도없는 그런 말을…… 우리 삶처럼 끔찍한 그런 거 말고……"

아나스타시야 이바노브나 메드베드키나, 사병, 기관총 사수차 - P366

"문득 음악 소리가 들리면…... 아니면 노랫소리…... 여자 목소리도…… 그러면 그때 그 느낌이 되살아나. 그때랑 비슷한 뭔가가 느껴져……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햇살도……"

올가 니키티치나 자벨리나, 군의관 외과의 - P367

"우리는 가시철조망이 쳐진 게토에 살았어…… 화요일에 그 일이 일어났지. 모르겠어, 왜 화요일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또렷한지. 화요일 ..… 며칠이었는지, 몇 월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분명 화요일이었어. 우연히 창밖을 봤어. 세상에, 우리집 맞은편 벤치에 소년과 소녀가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 끔찍한 살육과 총살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 아이들이 키스를 하고 있더라니까. 나는 그평화로운 광경에 충격을 받았어…… - P367

짧았던 우리 거리 한쪽 끝에서 독일군 순찰병이 나타났어. 그들도 당연히 아이들을 봤지. 앞이 훤히 트여 있었으니까. ‘저걸 어째‘ 하며 놀라고 말고 할 틈이 없었어. 정말 그럴 새가 없었어…... 비명소리. 그리고 온 거리를 울리는 굉음, 총소리……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당장 공포심이 밀려오더군. 소년과 소녀가 잠깐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내 고꾸라지는 모습만 볼 수 있었어. 둘은 함께 쓰러졌어.
그렇게 그 일이 있고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 다시 하루가 지나는데....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거야. 알아야만했어. 그 아이들은 왜 집이 아닌 거리에서 입을 맞췄을까? 왜? 그런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걸까..... 아이들은 언젠간 게토에서 죽을 운명이란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다른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거고. 그건 사랑이었어.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어..... 사랑밖엔.
당신에게 이야기하다보니 ..... 그 일이 아름답게 들리기도 하네. 하지만 실제로는? 실제로는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지…. 그래…… 아니면 뭐? 지금 생각해보면 ..… 그 아이들은 맞서 싸웠던 거야…… 아름답게 죽고 싶었던 거지. 나는 그게 그 아이들의 선택이었다고 확신해......"

류보피 에두아르도브나 크레소바, 지하공작원 - P368

나는 늘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은 늘 그네들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삶만큼이나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네들이 어떻게 이 한없는 죽음의 실험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번 목숨을 내놓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는지.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 P373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그네들 중 한 명을 벨라루스 국립대학교강당에서 만났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즐겁게 떠들며 노트를 챙기고있었다. "그때 우리가 어땠냐고?" 그녀가 내 질문에 역시 질문으로 답했다. "지금 여기 학생들하고 똑같았어. 글쎄, 다른 게 있다면, 옷 입는 거나 액세서리 정도? 그땐 더 검소하게 하고 다녔어. 구리 반지, 유리 목걸이 그리고 고무 슬리퍼 청바지나 녹음기는 없었고."
나는 바쁘게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P374

이제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랑은 전쟁터에서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개인적인 사건이다.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동의 사건들일 뿐 죽음까지도.
그네들을 만나면서 의외라고 느낀 점이 있었다면? 그건 그들이 죽음을 말할 때보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덜 솔직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마치 자기방어라도 하듯 줄곧 뭔가를 감추고 털어놓지 않았다. 언제나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아주 철저하게 선을지켰다. 그네들 사이에 ‘더이상은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장막이 쳐졌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지 이해가 된다. 전쟁 후에 자신들을 향해 쏟아진 곱지 않은 시선과 악의에 찬 오해이리라. 그네들은 이미 고통을 당할 만큼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끝나고도 그들은 또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 P395

이미 치르고 돌아온 전쟁에 견줘 결코 가볍지도 쉽지도 않은 또다른 전쟁. 만약 누군가 밑바닥까지 솔직하기로 작정하고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고백을 하고 나면 대화를 마무리할 즈음 반드시 이렇게 부탁해왔다. "내 성을 다른 성으로 바꿔서 내줘." "우리 때는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내는 게 아니었어....…
상스러운 행동이었지...." 하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들 중엔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사연들이 더 많았다.
당연히 이 이야기들이 그네들 삶의 전부도 아니고 모든 진실도 아니다. 하지만 그네들의 진실이다. "전쟁이여 저주 받을지어다. 우리의 가장 아픈 시간이여!"라고 통탄한 전쟁 세대 어느 작가의 솔직한 고백처럼. 이 이야기들은 그네들의 삶에 대한 암호이자 에피그라프다.
아무튼 그곳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음이 맴도는 그곳에서의 사랑은..... - P3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