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부모님 이야기를 『빨치산의 딸』이라는 실록으로쓰고 수배를 당했다. 책을 출판한 사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적표현물 제작만이었으면 굳이 도망 다니지 않았을것이다. 그 전에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약칭)이라는 조직의 기관지 <노동해방문학> 기자로 2년정도 일했는데, 그 조직이 반국가단체로 몰려 전 조직원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함께 일하던 친구 대부분이 붙잡혀 7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 P11
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사회주의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런데도 나는 감옥 대신 도피생활을 선택했다. 내 나이 스물여섯, 감옥에 가서 7년 형을 선고받는다면(그 이상의 형량을 받을 확률도 농후했다) 서른네다섯에나 사회로 복귀하게 될 터였다. 서른네다섯이라니! 스물여섯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이였다. 허세쩔었던 문학소녀 시절, 나는 서른셋에 스스로 목숨을 끊겠노라 결심했다. 서른셋,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육신을 버린 나이, 보잘것없는 내가 그 이상 살아있는 건 오만이라 믿었던 것이다. 실소를 금치 못할 유치한 생각이지만, 아무튼 그때의 나는 그랬고, 서른네다섯에 출소하느니 숨죽여 숨어 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 P12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여자 혼자 산에, 그것도 지리산에 혼자 갔다가는 수많은 등산객이 나를 간첩으로 신고할 판이었다. 산이 그리워 몸살을 앓다 에라 모르겠다. 무작정 용산에서 밤 기차를 탔다. 새벽 다섯 시쯤 구례구역에 내렸다. 부모님을 뵈러 노상 다니던 길이었다. 그러나 수배 중이라 부모님을 뵐 수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내 집같이 드나들던 구례구역은 손님 하나 없이 적막했고, 문을 열고 나가자 운무에 쌓인 섬진강이 나를 반겼다. 바람조차 잠잠한데 코끝이 쨍한 겨울날이었다. 지금은 성삼재까지 버스가 다니고 거기서 걸으면 노고단이 지척이지만 그때는 지리산 종주를 하려면 무조건 화엄사 뒷길로 9킬로미터를 하염없이 올라야 했다. 한겨울에는 잠시만 걸음을 멈춰도 뼛속까지 추위가 스민다. 그러니 걸음을 멈출 수도 없어 하염없이 걷기에 딱 좋다. - P14
사실 패스포트는 내가 마신 최초의 위스키다. 그날, 지리산에서 위스키를 처음 마셨다. 물론 대학 시절 위스키인줄 알고 캡틴큐를 마시기는 했었다. 캡틴큐는 마시는 누구라도 거의 혼절에 이르게 하는 기적의 술이다. 종일 지끈거리는 두통은 덤이다. 그게 자본주의 종주국 영국의 술, 위스키의 위력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캡틴큐는 기타재제주, 한마디로 화학약품이나 진배없었다. 돈도 없는 수배자주제에 먹어보지도 않은 패스포트를 지리산행의 동반자로 삼은 이유는 간단하다. 맥주는 한겨울에 먹기에는 너무차가울 뿐만 아니라 무겁기도 하고, 소주 또한 3박 4일의 일정을 버티려면 그 양과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독한 위스키라면 두 병으로 3박 4일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 P16
영하 20도가 넘는 지리산의 겨울밤, 내 부모는 이런 날에도 투명옷 한 벌만 입은 채 눈밭에서 잠들었다고 했다. 나에게는 이천 원 주고 빌린 침낭이 네 개나 있었고, 옷 사이에 넣은 뜨거운 수통도 있었고, 밤새도록 혈관을 돌며내 체온을 높여준 위스키도 있었다. 패스포트에 취해 다들추운 줄도 모르고 기나긴 겨울밤을 따시게 보냈다. 다음 날, 우리는 모르는 사람으로 만났듯 모르는 사람으로 헤어졌다. 흐린 램프 아래 보았던 그들의 얼굴은 지금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의 코펠 잔에 위스키를 따르던순간의 안타까움, 나의 정체를 발각당한 순간의 당혹감, 모두가 같은 편, 모두가 위스키에 취했다는 기이한 연대의식만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다. 인생 최초의 위스키 패스포트는 내게 지리산의 겨울밤이다. 낯선 이들과 따스히 함께했던. - P20
다들 앉은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목만 길게 빼고 내다본 바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백색의 순수였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한 뼘씩 쌓여 있었다. 뒤란의 대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끝까지 휘어진 채였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췄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누구도 감히 입을 - P28
열지 못했던 걸 보면 친구들 역시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열아홉, 그때는 믿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순백의 시간을 순백으로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로부터 4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날 함께했던 친구 중누군가는 먼저 세상을 버렸고, 누군가는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었고, 누군가는 교수가, 작가가, 회사원이 되었다. 회사원이 된 친구는 머나먼 미국에서 산다. 그 친구를 본지 참으로 오래되었다. 한 친구는 아예 연락이 끊겼다. 눈이 퍼붓는 날이면 그날이 떠오른다. 고요히 내리는 눈처럼 고요했던 내 인생의 첫 술자리. 다음의 40년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 걸까. - P29
이름을 잊어버린 신촌의 어느 바에서 그가 주문한 것은시바스리갈 12년산 더블샷이었다. 대학 시절, 가난한 문학청년들이 양주인 줄 알고 간혹 마시던 캡틴큐와는 이름부터 격이 달랐다. 캡틴큐 끝에는 크가 따라붙어야 제격이고, 시바스리갈 끝에는 말줄임표(…)가 따라붙어야 제격일 것 같았다. 한 모금을 머금은 순간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마셨던 위스키 패스포트보다 더부드럽게 혀에 감기는 천상의 맛이었다. 맛에 취해 있는데느닷없이 그가 외쳤다. "시바스! 너어어! 어디 있다 인제 왔어어!" - P34
내 눈이 더 똥그래졌다. 그가 숨죽여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눈이 그렇게 말하는 중이라고." 나는 입 안에 든 시바스리갈, 그러니까 위스키 한 모금을 오래도록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그날 처음으로 30년간 나의 일부였던 식도와 위의 위치와 모양을 구체적으로 체감했다. 위스키가 훑고 간 자리마다 짜릿한 쾌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나는 젖 먹는 송아지처럼 자꾸만 입술을 핥았다. 보다 못한 그가 700 밀리 한 병을 주문했다. 그것이 나와 시바스의 첫 만남이었다. 어쩌면 그날의 시바스리갈은 가난과 슬픔과 좌절로 점철된 나의 지난 시간과의 작별이었다. 짜릿하고 달콤했던 건 위스키의 맛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작별의 맛이었을지 모른다. 그날로부터 나의 변절과 타락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날이지 아니한가! - P35
옆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고도 남았으니까. 차마 우리의 술자리를 위해 옆방까지 환해지도록 형광등을 켤 엄두는 누구도 내지 않았다. 옆방의 투숙객은 젊은 장병과 연인이었다. 그때는 면회도 휴가도 요즘처럼 쉽지 않았다. 교통도 불편했다. 아마 두 연인은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움을 달래는 중일 터였다. 숨죽인 여성의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쩐지 서글픈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어둠 속에서 옆방의 청춘은 숨죽여 사랑을 나누고, 우리는 소리 죽여 술을 나누었다. 서글픈 노래는 장병의 짧은 비명과 함께 허무하게 빨라도 끝났다.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뜻밖에 우리의 청춘도 저토록 짧을지 모르겠다는. 옆방의 남자가 무슨 일인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연 - P40
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별이라도 고한 것일까.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잠겨, 취기에 잠겨, 그 순간에 젖어 들었다. 달콤하도록 우울한 포천의 밤이었다. 내 예감이 옳았다. 영원할 것 같던 청춘은 참으로 짧았다. 우울하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한탄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청춘이 아니었다. 청춘을 함께했던 친구 중 둘은 미국에 있어 얼굴 보기 어렵고, 국내에 있는 친구들도각자의 일이 바빠 얼굴 보기 어렵다. 드문드문 안부전화나 주고받는 정도다. 그래도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믿기지 않거나 어색한 날이면 포천에서의 그날 밤이 떠오른다.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그게 청춘이었구나, 그때는 정작 그걸 몰랐구나, 무릎을 치면서. - P41
초승달 달빛 아래 신비로운 어둠의 정령 같았던 나무들이 짙푸른 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다 못해 시커먼 호두 한 알이 눈에 띄었다. 어쩐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논리적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시커먼 호두 한 알이 내 눈에 들어왔을때 우리들의 축제의 밤이 끝났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을 뿐이다. 호기심 어린 독자들께서 뻔한 상상을 하지는않을 테지. 내가 말술임을 확인했을 뿐 그날 밤, 아무 일도일어나지 않았다. 초승달과 밤바람, 그리고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 풀숲 어딘가 존재를 숨긴 채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바닥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을 뿐이고, - P49
그때마다 어쩐지 나의 존재를 상대에게 온전히 들킨 듯 부끄러웠을 뿐이다. 첫차 핑계를 대고는 서둘러 그 집을 빠져나왔다. 신데렐라처럼 구두 한 짝을 남기진 않았지만 마음의 한 자락은어느 나뭇가지에 슬쩍 걸쳐두고 나온게 아니었을까? 두고두고 그날이 가슴 시리게 그리웠던 것을 보면 그 집을빠져나올 때 밤에는 보이지 않던 새가 목청 높여 울었다. 축제의 밤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라도 되는 양. - P49
나는 아직도 말하지 않은, 혹은 돌려 말한 A의 말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여자로 보일까 봐 젊은 저의 혈기를 가라앉히려는 말이었다는 건가, 어리석은 나는 그리 짐작할뿐이다. 그런들 저런들 무슨 상관이랴. 환갑 앞두고. 나는 아직도 A가 겪고 있는 불행의 긴 터널을 A처럼 담담하게 직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A와 술 마시는 게 즐겁지 않다. 가슴이 먹먹하고, 알 수 없는 무엇엔가 화가 치민다. 그 여름밤, A가 직접 만든 밤나무 위 오두막에서의 그하룻밤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때의 싱그럽던, 똑똑하던, 깔끔하던, 능청스럽던 스물두엇의 A도 눈물겹게 그립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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