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 이것이 술의 힘이다. 최초로 술을 받아들인 우리의 조상도 아프리카 초원의 저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해마다 돌아오는해방의 하루 숙취의 고통을 알면서도, 술깬직후의 겸연찍음을 알면서도, 동물들은 그날의 해방감을 잊을 수 없어또다시 몰려드는 것일 테다.
술은 스트레스를 지우고 신분을 지우고 저 자신의 한계도 지워, 원숭이가 사자의 대가리를 밟고 날아오르듯, 우리를 날아오르게 한다. 깨고 나면 또다시 비루한 현실이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러면 또 어떠한가. 잠시라도 해방되었는데! 잠시라도 흥겨웠는데! - P67

"지금까지 들은 술 예찬 중에 최곱니다!"
그날 그도 업무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오후 네시도 되지 않아 시작된 술자리는 새벽 네시에야 끝났다.
술은 접대라며 괴로워하던 오사카 지부 임원이 4차까지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름도 얼굴도 잊었지만, 감사했습니다!
여담이지만, 굳이 내셔널지오그래픽 비디오를 찾지는마시라. 내 말에 혹한 사람들 몇이 찾아본 모양인데, 나더러 소설을 썼다며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쩌랴. 소설가의 기억이란 그따위인 것을! - P68

다음 날, 오후 들어 구축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온통안개에 잠긴 산은 아름답다 못해 신비로웠다. 어디선가 산의 정령이 나타날 것 같은 비경이었다. 그러나 초행인 일행들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주저앉은 사람을다독여 일으켜 세우고, 뒤처진 사람을 데리러 왔던 길을되짚어갈 수 있었던 것은 빨치산의 딸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있을까? 아님 강인한 촌년이어서였을까? 아무튼 탈 없이 연하천 산장에 도착했다.
온몸은 비에 젖고, 멈춰 서니 젖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누군가 가져온 석유버너는 불이 붙지 않고, 가스버너는 엉뚱하게 가스선으로 불이 번지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일행 중 누군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식사 준비를끝낸 낯선 사람들에게서 버너를 빌려왔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 우리가 만든 카레는 물 반, 카레 반이었다. - P82

할매는 그때마다 막걸릿값만 받고는 안줏거리를 무한리필해줬다. 할매의 푸짐한 인심 덕인지, 불쾌하게 오른 술기운 덕인지, 서로 싸늘했던 고모와 B도 다정하게 어깨를 맞댄 채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다. 막차에 올랐을 때는 누구랄 것 없이 만취 상태였다(물론 쟁반과 술잔 등등은 얌전히 반납했다. 90도 각도의 깍듯한 인사와 함께).
일행들은 젖었다 마른 등산화를 벗고 서로의 다리 위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올려놓은 채 이내 곯아떨어졌다. 얌전하고 소심한 A가 우렁차게 코를 곤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유난히 크고 밝은 만월이 기차를 따라 함께달렸다. 산은 우리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고, 술도 그러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허물을 덮기도 한다.
살면서 다시는 그런 날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날이 어찌 흔하랴. 오천 원으로 여섯 명이 만취한 밤이라니! 할매의 따스한 호의가 만든 기적과도 같은 밤이었다. - P86

술이 사람을 이리 만든다. 3박 4일 동안 우리는 쪽잠을 자며 내리 술을 마셨고, 흥건히 취했으나 누구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적당한 취기 속에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세상이 아득한데 감각은 100퍼센트 막힘없이 열려 창밖으로 후박나무 잎사귀가 땅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의 자잘한 소음이 우리와 세상의아득한 거리를 왁작왁작 메우고 있었다. 옆집과 내 집의좁은 담 사이로 고운 햇살이 춤을 추었다. 옆집에서 숨죽인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당당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옆집은 토마스 집, 뚱뚱한 아메리칸 토마스는 나를 모른다. 나는 그를 안다. 그는 어느 대기업의 통역으로 일한다. 그가 번역한 글을 내가 감수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보게 된 서류에 그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세상이 좁기 - P95

도 하지, 내 집 바로 옆이었다. 덩치가 큰 토마스는 소리도우렁찼다. 남녀의 교성이 세상의 자잘한 소음을 누르고 당당히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소리에 놀란 후박나무 잎사귀가 또 한 잎 고요히 내려앉았다. 이상하게 숙연해졌다.
살아 욕망을 분출하는 토마스 부부도, 죽어 고요히 떨어지는 후박나무 잎사귀도, 종말이 머나먼 태양에서 시공을 뚫고 지구, 그것도 누추한 내 집의 담 사이에 당도한 햇살도,
모든 존재가 서글펐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슬픔을 애도하며 나는 한 방울의 눈물을 찔끔 떨궜다. 위스키든 소주는천천히 오래오래 가만히 마시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을.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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