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맥켈란 1926이었다. 에든버러 어느 위스키샵에서 맥켈란 30년산을 본 적이 있다. 녀석은 다른 위스키와 달리 자물쇠가 달린 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맥켈란 1926은 30년산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가의 위스키다. 만져본 적도 마셔본 적도 없지만 맥켈란 1926 의 명성은 나 같은 초짜도 익히 알고 있었다. 1986년, 전 세계에 40병만 출시된 술이다. 셰리 참나무통에서 60년간 숙성했다는 맥켈란 1926 40병은 병당 3,000만 원에 완판되었다고 한다. - P137
싱글몰트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맥켈란 1926 이내잔에도 가득 찼다. 녀석은 뜨겁고 깊고 진했다. 끈적끈적, 끝도 없는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맛이었다. 맥켈란 1926을입에 오래 머금은 채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세상 떠나기 전에 좋은 술, 맛이나 보라고 내 - P137
가 보내준 시바스리갈 18년산을 소주 한 박스와 바꿔 마신아버지를젊은 날에는 똑같이 민족의 통일과 평등을 주장했으나두 사람의 끝은 전혀 달랐다.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아버지의 삶이 늘 애달프고 서글펐다. 아버지 스스로 당신의 삶을 쓸쓸해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맥켈란 1926을 마시며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결말이 내 취향에 더걸맞다는 것을, 아버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는 것을 참으로 다행 아닌가? 성공할 기회가 없어 타락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은! - P138
누가 봐도 남자 같긴 했지만 나는 생물학적 여자여서(실제로 빨치산의 딸답게 지리산을 달려서 내려올 때면 남자들이 나를 두고 내기를 하곤 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심지어 두 남자를지나치면서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거봐. 남자지? 천원 줘. 이런 젠장!) A와 달리 보통 여성적이라 하는 것들을 동경하지않았다. 내게 긴 머리 짧은 치마 같은 건 선택의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A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금기가 풀리자 미친 듯 한때 금기였던 것들을 향해 돌진한 게 아니었을까,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이해하기 어려워더라도 친구라면 기다려주어야 했다. 그런 게 친구다. - P147
그날 밤 나는 A가 사 온 블루를, A는 매취순을 밤새 마셨다(그때만 해도 젊어서 밤새 마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엄마 밥을 챙겨드리고 나니 우리밥 챙길 기운이 없었다. 해장할 필요도 있었다. 때마침 제자 B가 합류했고, 숙취가 가시지 않은 우리를 대신해 B가 운전을 하기로 했다. 벚꽃 흩날리는 길을 달리며 A는 흥이 났다. 벚꽃은 만개할 때가 절정이 아니다. 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 햇볕 환하고 바람 없는 날, 혹은 비 내리고 바람 부는 날, 어느 쪽이든 지는 벚꽃은 처연하게 아름답다. 아니 처연해서 아름답다. - P187
술꾼들의 내밀한 욕망인가, 어리석음인가 숙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장을 한다. 그런데 해장은 반드시 술을 부른다. 하여 숙취에 숙취를 더한다. 우리 또한 어리석어 운전자를 제외한 A와 나는 해장을 하며 다시 술을 마셨다. 밥집이니 당연히 소주였다. 두 병을 채 마시지 못했는데 취기가 흥건히 올라왔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B가 가자며 우리를 부추겼다. 실은 B도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거다. 빨리운전을 끝내고 집에서. A의 차는 흰색 폭스바겐 골프였다. 섬진강을 건너자 이내 꽃길이 이어졌다. 우리가 술에 젖어가는 사이 바람이불기 시작해 길은 온통 흩날리는 벚꽃 천지였다. 차량이끝도 없이 이어져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멈춰 서다시피한 차 안에서 A가 지디(G-DRAGON)의 노래를 틀었다. 지디는 나의 최애 뮤지션이다. - P188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약간 내상을 입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왜 그렇게 싫은지, 묻지도 못한 채 혼자 속을 끓였다. 이럴 때 꼭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상금지! 절대사랑은 아니었고,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도 없다. 그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동경이나 질투뭐 그 비스꾸무리한 것이었다.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보다 깊고 넓다고 생각했던 A 또한 나와 똑같이 청춘의 허세를 부렸을 뿐이라는 걸. 청춘은 허세다. 그러니까 청춘이지, 스무 살 언저리의 A는 인생도 문학도 독고다이, 쓸쓸하게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 그런 찬란하게 유치한 마음으로 홀로 걷고 홀로 마셨던 것이다. - P195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다정한 제자와 술을 마시다그 이유를 깨달았다. 다정한 제자는 일행 중 누군가 깻잎을 집으면 기다렸다는 듯 잡아주고, 취한 듯 보이면 부축해서 방으로 안내하고, 누군가의 어깨에 보푸라기가 보이자 연인인 듯 다정하게 떼어주었다. 그에게는 물론 연인이있었다. 여럿이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행동해서 누구도 오해하지 않았지만 둘만 있었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설렜을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정하다. 불행히도 혹은 공평하게도 다정한 사람은 다정하지 않은 사람 - P198
‘보다 외로움을 잘 못 견디는 경우가 많다. 다정하니까. 마음이 말랑말랑하니까. 늘 아내의 곁에서 다정하게 함께했던 A의 아버지에게는 아내의 공백이 못 견디게 크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리도 빨리 새로운 다정의 대상을 찾아낸게 아닐까? 깨달은 그날 다정한 제자와 밤새 시바스리갈을마셨다. 야! 아무한테나 다정하지 마, 술꼬장을 부리면서. "천성을 어찌할 수 있어?" 다정한 제자는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날 나는 다정에 대한 오랜 갈급함을 버렸다. 다정한 사람도 무심한 사람도 표현을 잘하는 사람도 못 하는 사람도 다 괜찮다. 각기 다른 한계를 끌어안고 사는 셈이니까. - P199
술이 들어가고 말은 차츰 사라졌다. 누군가는 뚫어져라모닥불을 쳐다보고, 누군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누군가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저 고요히 술을 마셨을 뿐인데 잠자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도 우리 곁에 털썩 주저앉아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들도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이런 순간에는 약간의 알코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그러니까 그냥 우리는, 그날 알코올의힘을 빌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잠시 우주의 일부가 되는 경이를 경험했다. 새로운 별들이 떠오르고, 달이 - P208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술이 천천히 우리의 혈관을 매우고 모닥불은 사위고, 그렇게 초원의 밤이 깊어갔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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