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 세계와 기싸움을 벌이며신의 과업을 수행 중이다

이란 사람들은 갖가지 훌륭한 빵들을 만들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밀가루로 만든 바삭바삭한 난에 바르바리 (Nan-ebarbari, 바르바르인들의 빵이라는 뜻으로 바르바르라고도 부름)라는 것인데, 바닷소금으로 간을 하고 참깨와 양귀비씨를 뿌려서 주로 아침에 먹는빵이다. 모양은 대체로 기다란 타원형이고 안쪽에는 위에서 아래로평행선 몇 개가 그어져 있다. 공교롭게도 이란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주 만들어 먹는 이 빵의 외관이 자신들 나라의 모양과 닮았다는 얘길자주 듣는다.
이란은 두 가지 지리적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 하나는 국경지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딱딱한 빵의 가장자리 같은 형태의 산맥이고, 다른 하나는 평행하듯 달리는 저지대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내륙의 평평한 소금사막이다. 산맥은 이란을 일종의 요새로 만들어 준다. 어느각도로든 이 나라로 접근하려고 하면 느닷없이 떡하니 가로막는 고 - P66

지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는 곧 이 나라의 많은 곳이 통과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악지대가 카비르 사막과 루트 사막(루트Lut는 페르시아어로 물이 없고 식물이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을 가리킨다)이라는 내륙의황무지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카비르 사막은 거대한 소금사막으로도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합친 넓이에 버금가는 이 사막은 길이가 800킬로미터 너비가 320킬로미터에 달한다. 나는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난 적이 있는데그야말로 칙칙하고 평평한 관목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뭐라도 볼 만한 것을 찾고 싶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다. 또어떤 곳에서는 지표면에 있는 소금층이 물에 잠길 만큼 깊은 진흙층을 숨기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곳을 만나면 발이 푹푹 빠질 정도다. 사막에서 익사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게 죽는 방법이 있을까 싶다. 또 다른 주요 사막들의 이름은 훨씬 더 매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것도 루트 사막이 <적막한 평원>이라고 알려진 이유를 알기 전까지 만이다. - P67

역사의 대부분 동안 이 땅은 페르시아로 알려져 있었다. 이란이라는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35년부터인데 인구의 40퍼센트가량을 차지하는 비非페르시아계 소수 민족을 고려해서였다. 이란의 국경은 수세기에 걸쳐 바뀌어 왔지만 기본적인 지리적 형태는 여전히 난 에바르바리 빵 모양으로 남아 있다.
이 나라의 국경을 따라가 보려면 먼저 호르무즈 해협을 따라 해안에서 시작되는 장장 1천5백 킬로미터 길이의 자그로스 산맥에서 시계방향으로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이 산맥은 페르시아만을 가로질러 맞은편의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주보고 있는 이란의 일부 지역을 따라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더 북쪽으로 가서 샤트알아랍강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면 이라크와 터키 국경과 마주치게 된다.  - P68

한마디로 이 나라의 지형은 미래의 침략자와 정복자에게는 엄청난장애물이라는 얘기다. 산맥이라는 장벽을 뚫기 위해 치러야 할 부담을깨달은 침략자는 차라리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페르시아, 곧 이란이 그 기나긴 역사에서 이 지리적 조건으로 모든적을 포기시켰던 것은 아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진격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 그가 사망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는 다시 지배권을 가져왔다.
한참 지나 서기 1200년대와 1300년대에는 몽골족이 이어 티무르(칭기즈칸을 존경하고 평생 그의 길을 따르려 했던 티무르 제국의 건설자)가 광활한중앙아시아 스텝 지대를 건너와서 이 땅을 파괴하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학살했지만 페르시아 문화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길 만큼이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또 150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이 수차례에 걸쳐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오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그들도 이나라의 가장자리만 슬쩍 훑고 간 정도였다. 러시아인들이라고 비슷한모험을 감행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또 영국인들도 이 땅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 민족 집단 중 일부를 끌어들여 돈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 P70

나라 안을 들여다보면, 대다수 이란 사람들이 어째서 산악지대에몰려 살고 있는지 그 황량하고 혹독한 풍경을 보면 이해가 된다. 산을 가로질러 오가며 교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에 인구가 밀집된 산악지대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발전시켜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각 소수 민족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흡수 통합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란은 현대 국가로서 국민의 단결이나 화합정신을 발전시키는 데 한층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 산 때문에주요 인구 분포지가 넓은 땅덩어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보니 최근까지도 밀접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에도 이 나라 도로는절반 정도만 포장된 상태다. 그래서 뭉뚱그려 이란 국민이라고는 해도 다양한 소수 민족 출신인 경우가 많다. - P71

"우리는 호르무즈 해협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예아무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적들이 깨닫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어디까지 튈지 알 수 없는 도박의 성격을 띤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미국은 심각한 분쟁이 발발한지 몇 시간 안에 이란의 공격력을 최대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계획을수립했다. 또 걸프 국가들(페르시아만 연안 8개국)은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을 홍해로 향하게끔 설치해서 그곳에서 유조선들이 인도양으로접근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란이 예멘에있는 후티(Houthis, 예멘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단체) 동맹에게 제공한 미사일 공격의 목표가 되는 것만큼은 피하자는 것이다. - P76

어떤 이들에게 쿠데타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그것은결국 이 나라에 기나긴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국왕은 점증하는탄압의 소용돌이 속으로 국가를 몰아넣었고 그 결과 갓 태어난 민주주의의 도정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국왕은 모든 부분에서 즉각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은 그가 비이슬람교도에게 투표권을 주자 분개했다. 또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은 국왕의 기반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한편 자유주의적인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민족주의자들은 굴욕감을 느꼈다.
그 쿠데타는 국민들로 하여금 외세의 입김을 받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석유 산업의 국유화는 결과적으로 국가에게는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정작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 수익이 찔끔찔끔 돌아갈 뿐이었다. 이번 쿠데타는 이란 역사에서 하나의 갈림길이었으며 이후 이 나라 정국은 1979년의 또 다른혁명을 향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 P84

모두가 자유로운 이란을 갈망했고 그것이 주요한 요인이었던 것은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클린턴이 했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안에는 페르시아어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2013년의 선거는 이란의 국제 고립을 심화시키고 경제를 더욱 위축되게 만든 아흐마디네자드 치하에서낭비한 시간들에 대한 질책이었다.
로하니는 2017년 재선에 성공하지만 보수 강경파는 2020년에 총선 몇 개월을 앞두고 선거에 대비해서 모종의 묘책을 실행했다. 헌법수호위원회가 자신들의 위력을 발휘해서 거의 7천 명에 달하는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그 가운데는 90명의 현역 국회의원들도 포함됐다. 이것을 본 수백만 명의 이란인들은 자문했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선거일, 그들은 투표장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1979년 이후 가장 낮은 투표율을보인 이 총선의 결과는 강경 보수파의 압승이었다. 이 메시지는 분명했다. 어찌 됐든 아야톨라파(시아파 성직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와 이란혁명수비대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 P94

미국은 이란을 침공했던 이라크 수니파 정권(사담 후세인 정권)을 갈아치웠다. 이제 다시 한번 메소포타미아 평원은 이란 전면에서 완충지가 되면서 잠재적 적대 세력을 저지하고 무력을 투사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소수파인 수니파 정권을 무너뜨렸으니 이라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지도자들이 확실하게 나라를 통치하도록 시스템을 잘 관리하면 그 결과로 이라크내에서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하지만 이라크내 시아파는 매 단계마다 이란의 도움을 받았다. 이란은 미군의 침공이후 발발한 이라크 내전에서 여러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함으로써이라크에서 외세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탰다. 꽤 많은 미군과 영국군에게 피해를 입힌 노상 폭탄 공격은 이란에서 자주 발생하던 일인데이라크 민병대는 그런 테헤란으로부터 자금과 무기, 훈련을 지원받았다. 이라크는 이란의 푸들 강아지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이라크 지도력으로는 동쪽에 있는 이웃인 이란을 향해 호의적인 손짓을자주 할 수밖에 없다. - P95

전쟁 가능성이 낮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손실을 입고 있는 것을 본 미국 국민들은 군사적 모험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또한 그 요인들 가운데 하나다. 이점을 잘 알고 있기에 이란은 미국의 부당한 침략에 대해 확실하지만, 그러나 애매한 수위까지 밀어붙이는 도박을 할 수 있다. 이란 정부는긴장이 고조되면 공습을 받을 수도 있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통해 자그로스 산맥으로 접근하거나 페르시아만에 주둔하고 있는 함대의 병력을 상륙시키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란의 군사력은 빈약하지만 수백만 명의 남성들을 징집할 수 있으며 19만 명의 혁명수비대를 포함한 60만 명의 현역병들까지 동원할 수 있다. - P102

지금부터는 이란 정권이 직면하고 있는 내부의 도전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란의 상황은 경제적으로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형국이다. 하지만 정부는 유독제재 부분에만 문외한인 박사학위 소지자 공무원들을 채용하고 있는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와중에 경제는 해가 갈수록 비틀거리고 있다.
이란은 중국과 경제적 우호관계를 다져왔다. 중국은 러시아가 그러하듯 제재 조항들을 무시하려고 하는 여타의 나라들보다도 무시하려는 그 의지가 훨씬 크다. 국내에서의 정부에 대한 시위는 더 잦아질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 의견을 잠재울 수 있다면 국민 수천 명 정도의 목숨은 무시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간다면 돌이키기 어려울 것이다. - P105

나는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들에게 정면으로 반발한, 믿기 어려우리만치 큰 용기를 발휘한 이란 젊은이들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또한 순교라는 개념이 그들 문화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도보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희생하러 나설 사람들의 수는 제한적일 것이다. 수많은 청년 군인들과 민병대원들이 더 이상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지 않는다면 이 역동성은 바뀔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특히혁명수비대와 바시즈민병대의 광신도들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인다. 정권은 자국 군대를 밀착 감시하고, 법 집행 기관 안에 비밀경찰을 심어두며, 군대를 배치할 때 혁명수비대를 함께 보낸다.
마지막으로 내부에서 활동하는 개혁주의자들이 있다. 20여 년에 걸쳐 그들은 선출된 기관들을 이용해서 외형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보여주도록 이슬람 성직자들과 혁명수비대라는 실제 권력과 균형을 잡는 노력을 해왔다. 이들은 강력한 이슬람 전통을 보존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확립해 보려고 한다. 그들의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큰 진전을 이룬 것 같지는 않다. - P107

이란 정권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양태 가운데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혁명적인 <신정 국가>(지배자를 신 또는신의 대리인으로 간주하는 국가일 거라는 점이다. 그만큼 신권 정치는 이나라의 기본 원리이며 스스로 기반이 약화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다.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의 국시인 자유, 평등, 박애를 더 이상 찬성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런 일은 일어날리 없다. 그렇다면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신의계획의 선언>이라는 신념을 가진 아야톨라파가 큰 악마(미국)와 타협하고, 성적 자유를 허락하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고, 진정으로 다원론적 정치 체제를 선언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 땅에서 신의 뜻을 집행하는 이상 지금 말한 사항들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 P110

현체제 아래에서 이란은 소위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있다. 정권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는 수백만 명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정통성의기반을 약화시키는 체제 완화를 시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그렇게 하지 않으면 젊은 세대는 날이 갈수록 21세기보다는 16세기에 더 어울려 보이는 체제에 점점 더 환멸을 느낄 것이다.
1979년의 이란 혁명, 즉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인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세워지는 것을경험한 세대는 시간과 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그들에게 불리하다는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러 카드가 있다. 핵 이슈는아직도 살아 있고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비좁다. 또한 정치와 테러리즘 영역에서 써먹을 다양한 대역 배우들을 그들이 부를 수 있는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다. 안팎에서 조직화된 내부 전복 시도에 대응하기 위해 이란 정권은 훨씬 무시무시하고 무자비한 보안 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선뜻 타협하는 것은 죄악이며, 저항이야말로 신성한 행동이다. 종교를 내세운 이들 혁명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 P112

사우디아라비아,
한 가문의 성이 나라 이름이 되다

이처럼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위는 곤란한 상황을 낳는다. 역사적으로 사우드 가문이 자신들이 통치하던 네지드의 일부 지역을 자신들 가문의 이름으로 부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머지 아라비아는 어떨까?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오늘날이 나라 인구의 상당 부분이 사우드 가문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것은 채 1세기도 안된다. 만약 120년 전에 누군가가 샴마르족에게샴마르 토후국이 곧 사우드 왕국의 일개 속주가 될 거라고 얘기해 줬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검을 잘못 쥐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또 대다수가 페르시아만을 마주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시아파 주민들도 자신들이 수세기 동안 부딪쳐 온 사우드 수니파와하비 원리주의자들의 통치를 받게 될 거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현대의 왕국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표면 아래 흐르는 긴장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치하는 왕가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중심이 외곽을 품어야 하는 법이다. - P117

이 나라가 주요 동맹국이자 보호국과 맺고 있는 관계의 근간이기도 하다. 그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석유는 이 나라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고, 이 부는 <이슬람원리주의>라는 극단적인 브랜드의 폭력적인 해석을 수출하는 이 나라를 석유에 목말라하는 권력 구조 사이에서 살아남게 해주고 있다. 최근에도 사우디아라비아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국왕이나 석유 갑부가 아닌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계가 조금씩 석유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래와 검은 원유밖에 없는 국토, 다루기 힘든 국민들, 정통성 시비에다 안팎의 적들에게까지 시달리는 사막 국가의 왕조는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나라에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현대화다.
21세기에 살아남으려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하는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이 시도는 중동의 보다 넓은 지역과 그 너머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 P118

이 사건이 장기간에 걸쳐 끼친 영향은 이 사태로 겁을 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사회 영역을 현대화하려는그 어떤 시도조차 지레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할리드 국왕은 다수의반정부 세력이 국가보안대에 부대원 대부분을 공급하는 부족들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해답은무엇이었을까? 더욱더 종교에 기대는 것이었다. 이슬람교 말이다.
신문에서 여성들의 사진이 사라졌고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여성 진행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추가 지원금을받았고, 극장들은 문을 닫았으며, 공교육 과정에서 종교 교육 시간이더욱 늘었다. 이후 종교 경찰의 야외 실전 훈련도 40년이나 지속되었다. 학교와 대학은 보다 더 많은 이슬람 성직자를 채용해서 와하비즘만이 진정한 이슬람이라고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니 훗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무신론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수만 명의 사우디아라비아 청년들이 그리로 달려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 P135

여기서 알카에다의 전략이 확연히 드러났다. 혼란을 조장하고 보상을 얻어내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정보에 따르면 고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의 20퍼센트 정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더 많은 수가 짐을 쌌고 브리티시 에어웨이는 사우디아라비아행 비행 편을 잠정 중단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나라의 첨단산업, 특히 가장 중요한 에너지 부문이 서서히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국민들의 생활 보조금을 보장해줄 수익이 없다면 정부에대한 그들의 반발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이 상황이국가를 붕괴시키고 알카에다가 정권을 장악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당국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1990년대 중반의 탄압을 넘어서는 강한 탄압이 재개됐고 다시 정보 기관이 상황을 장악했다. - P140

그들 대다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그러니 나 또한 이곳 사람들이 조상의 오래된 기술을 이어받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24세 이하 청년 실업률이 28퍼센트에 달하지만 그렇다고 이곳 청년들은 제다의 부둣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어망을 수리하고 싶지는 않은가 보다.
이 노동자들을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로 대체하는 것과 석유를 기술로 대체하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다. 서둘러 미래로 가려는 시도를 이 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시도는곧 종교와 부족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계획은 지역 간 긴장감을 높일 위험도 있다. 이 나라의 13개 행정 구역가운데 리야드와 제다가 속해 있는 2개 지역은 일찌감치 투자가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이스턴 주와 예멘과 접경지대에 있는 주민들은 "이 계획에서 과연 우리를 위한 것은 뭐가 있지?"라고 물으면서 중앙 권력과 점점 더 거리를 두려 할 것이다. - P153

이 나라는 태양광 패널을 생산하는 공장, 패널을 설치할 공간, 그리고 연료가 될 태양빛이 풍부하다. 게다가 발전에적합한 태양광의 세기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정부는 2032년까지그 수치를 20퍼센트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공격적인 목표라 할 만하다.
그런데 걸핏하면 <역사적 순간>이라고 말하기 좋아하는 정부이다보니 태양력 발전 계획도 지나치게 야심차고 거창한 목표가 돼버린듯하다. 관료주의적 논쟁과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일부 계획은 무산되거나 중단되기도 한 상태다. 하지만 당국은 뭐라도 해야 될 때라는것을 알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또 다른 균형화 조치가 행해지고 있다. 요컨대 석유에서 탈피해 산업을 다각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석유에서얻는 수입으로 지불하는 보조금을 급격하게 철회해서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지 않게 하면서도 나라의 장부를 맞추는 게 관건이다. 재생 에너지, 해외 투자, 관광과 홍해 항구들 같은 성공적인 인프라 개발 등이 도움은 되겠지만 유조선의 방향을 돌리는 것은 아무래도 크나큰 도전이 될 것이다. - P156

전략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향후 몇 년간은 미국에 밀착할 수밖에없을 것이다. 미국이 그들과 관계를 끊지 않는 한 말이다. 미국이 안보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이곳의 해상 방위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페르시아만과 홍해는 비좁은 데다 하나같이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자국 해군력이 없다면 적대 세력은 인도양이나 수에즈 운하로 가는 이 나라의 수출로를 봉쇄할 것이다.
그런데 안보 면에서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도 중국과의경제적 끈은 더욱 단단해질 것 같다. 중국은 이곳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팔았으며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의 원유 수입을 급속도로 늘렸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화웨이가 중동 지역에서 성사시킨 12건의 5G계약 가운데 한 건에 서명했다. 미국과는 달리 중국은 자국과 거래하는 나라들의 인권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권위 있는 중동 정치 분석가인 미나 알 오라이비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국가 자본주의라는 중국 모델에 대다수 아랍 지도자들은 매료됐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별개로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다수 이지역 정부들이 추구하는 것이어서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성공한 모델로 칭송받고 있지요." - P157

이슬람 교단의 보수적인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결정한 종교 생활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는 한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받아들이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나라가 현대화된다면 자신들이 사회에미치는 위력 또한 약화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와하비즘의수출 역시 축소될 수 있다. 만약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덜 중요해진다면 세계는 부분적이나마 빈 라덴 또는 ISIS를배출한 그 이념을 마냥 용인해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일들이 현실화된다면 이는 거의 3백 년간이나 다져온 사우드 가문과 와하비파 연합의 기본 틀을 깨는 것이 된다. 왕세자의 조부인 이븐 사우드는 국민들이 복종한다면 오일 머니는 그들에게 윤택한 삶을 제공할 것이라는 계약을 제시했다. 하지만 왕세자가제시하는 새로운 21세기형 모델에서는 오일 머니의 역할이 한층 축소될 것이다.
개혁이 이행되지 않고 세계 또한 석유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새로운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과연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 모래? - P160

이 나라의 지도자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경제, 그리고 유능한 군대를 건설해야 한다. 아직은 그 검은 물질로 세계 경제의 바퀴가 잘 돌아가도록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싸워줄 수 있겠지만 이곳의태양광 패널을 지켜주기 위해 싸워줄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향해 우리는 점점 더 다가가고 있다. - P161

영국,
지리에서 파생된분리의 정서가 남아 있다

"영국인들이 오고 있다!" 이것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전 세계 여러나라에서 많이도 외쳤던 말이다. 영국인들이 지구의 4분의 1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는 동안 들어왔던 이 말을 지금 다시 들을 수 있게됐다. 물론 그때와는 매우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말이다. EU를 탈퇴하기로 한 2016년의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새로운 동맹>을 찾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20세기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국제적 역할을 모색해 오고 있었다. 탈식민지화가 가속화되는 동안 지도가 바뀌면서 영국도 많은 것을 잃었다. 이제 이 나라는 제국의 시대가 아스라한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새로운 세계를 항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국은 무엇이 그들에게 오고 있는지, 아니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대에도 북유럽평원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섬이라는 그 지리적 위치가 갖는 영향력은 여전할 것이다. - P166

북해의 혹독한 기후와 차가운 바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몇 년 전 유럽에서 가장 큰 섬을 두 바퀴로 탐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LEJOG(Land‘s End to John O‘Groats, 랜즈엔드에서 존 오그로츠지)라고 알려진 길을, 즉 영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총길이 1천6백 킬로미터를 사이클로 종단을 했다. 가는 내내 내 등 뒤로는 남에서 북으로 부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완전히 종단하는 데 12일이 걸렸는데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희열을 선사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하루를 마칠 때쯤 되면 사람들의억양은 물론 방언, 장소의 명칭들이 너무도 뚜렷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심지어 50킬로미터 이내 정도의 짧은 거리인데도 그 안에서조차 선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에는 지리적, 역사적 배경이 있다. - P170

각 지역들은 상대적으로 고립된 상태로 발전해 오면서 로마인과 앵글로색슨족, 바이킹족과 노르만족의 출현에 영향을 받았다. 한 예로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현재 동앵글리아라고 부르는 곳에 정착했는데 ty라는 접미사는 마을을 뜻하는 덴마크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국 동부 해안 지역에서는 휘트비 whitby 라든지 그림즈비Grimsby 같은 도시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도 남부에서 온 사람이라면 북동부인 요크셔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을 온전히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 지방에서는 아이를 bairn, 개울을 beck이라고 한다. 물론 대다수 나라들에도 고유한 지방색이 있지만 영국처럼 작은 지역에서 이처럼 두드러진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 나라의 주요 지리적 구분은 흔히 생각하듯 남과 북이 아니라 동과서, 즉 고지대와 저지대로 구분된다. 북동쪽의 티스에서 시작해 - P170

서 남서쪽 데번의 엑스강까지 내려오는 선을 긋는다면 잉글랜드와웨일스의 저지대와 고지대 사이의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서쪽에는 단단한 바위가 많은 고지대인 레이크 지역, 캄브리아 산맥, 다트무어 같은 황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반면 동쪽은 보다 평평하고 바위들도 마치 분필처럼 좀 더 잘 부서지는 무른 지형이다. 이런 특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도버의 화이트 클리프(white Cliffs, 영국해협과접해 있는 높이 250미터의 절벽)다. 이 같은 분리는 영국의 서쪽이 동쪽보다 더 포근하고 비도 더 자주 내리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카리브해에서 시작된 멕시코 만류는 대서양을 지나 영국의 서부 해안까지 온다.
멕시코 만류가 몰고 오는 바람은 습기를 빨아들이는데 서쪽 지역의고지대에 부딪히면서 수증기로 떨어뜨린다. 영국이 열대 낙원이 될것까지야 없겠지만 대체로 러시아나 캐나다처럼 위도가 비슷한 다른나라들에 비해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후가 온화해서 작물 재배가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 P171

북쪽과 남쪽을 가르는 특징도 있다. 산은 주로 섬의 서쪽 절반에 대부분 있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지대도 점점 더 높아진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고지대의 대부분은 북서쪽에 치우쳐 있다. 사회 기반시설은 평지에 건설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이러한 분리는 발전의 측면에서 차이를 낳았다. 북동쪽에는 리즈, 셰필드, 뉴캐슬, 요크셔, 북서쪽에는 맨체스터, 리버풀 같은 산업혁명으로 유명해진 도시들이 포진해 있다. 하지만 면화 산업, 광업, 중공업의 쇠락이 유독이 지역을 세게 강타했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날씨, 평평한 강, 농사에 적합한 토양, 수도와 가까운 것 등은 남부가 북부보다 더 발전한이유가 된다. 땅덩어리의 절반 정도인 잉글랜드에 인구의 84퍼센트 - P171

가 모여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도 인구와 산업대다수가 잉글랜드 국경과 가까운 남부에 몰려 있다. 스코틀랜드의인구를 전부 합쳐도 잉글랜드의 5천6백만 명에 한참 못 미치는 550만 명에 불과하며 웨일스는 3백만 명, 북아일랜드는 2백만 명을 밑돈다. 잉글랜드 남부는 런던의 주요 기차역과 히스로 공항, 개트윅 공항을 경유하는 국내외 철도와 항공 여행의 허브이기도 하다. 또 가장 붐비는 항만들도 이곳에 있고 영불해협 터널도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남동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런던은 사방팔방으로 뻗은 고속도로망의 허브이기도 하다. 수도 런던은 영국 의회를 비롯해금융 분야의 많은 대기업 본사를 유치하고 있는 등 세계 금융의 중심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이 나라는 현대화된 나라다. 이 나라가 이 같은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그만큼 많은 <피>가 필요했다. - P172

설상가상으로 스코틀랜드는 제국주의를 도모하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698년 다섯 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파나마에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를 출발했다. 당시 열렬한 국민적 호응에 힘입어 국민 모금으로 마련한 원정길이었다. 하지만 파나마에 정착한 수백 명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이들이 질병으로 사망했고 결국 스코틀랜드는 식민지 사업을 접어야했다. 나중에 스페인 해군이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 애초에는 파나마식민지가 스코틀랜드를 부자로 만들어 줘서 스페인, 포르투갈 잉글랜드에 견줄 수 있는 국력을 키울 수 있게끔 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독립의 불씨마저꺼버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안타까운 사연의 흔적은 현재 파나마의 지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도에서 푼타 에스코세스(Punta Escocés, 스코티시 포인트)를 찾아보라.
이 잘못된 모험에 들어간 비용을 두고 역사가들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스코틀랜드는 적어도 국부의 5분의 1은 잃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 P180

그래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후속 협정을 맺으면서 그들이 빚을 갚을 수 있게 재정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양국 의회에서 이 협정안이 통과됐고이로써 이 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정부를 갖기에 이른다.
이어지는 두 세기 동안 브리튼섬의 힘이 최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모두 서로의 국경을 감시하기 위해 상비군에게 엄청난 국방비를 투입했다. 하지만 이제 그 돈은 유럽 본토의 침공에 대비하고 제국의 확장을 위한 자금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 내부를 살피기 위해 소요되던 자원과에너지, 시간도 외부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인들에게 외부란, 바로 세계 world를 의미했다. - P181

나폴레옹은 영국에게는 소름 끼치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는 유럽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고 프랑스가 주도하는 정치,경제, 군사 시스템을 유럽에 도입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모은 힘을 쓴다면 영국을 거의 굴복시키거나 적어도 프랑스의 뜻대로 할 수 있을거라 보았다. 아직 침공이라는 직접적인 위협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영국으로서는 이제 전쟁은 선택이 아니라 불가항력이었다.
당시의 침략과 방어계획 모두에서 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과현저하게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해협을 건너 프랑스 군대를 영국으로 실어나를 대형 선박들이 파리 교외 불로뉴의 해안선 양쪽에 집결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일단 시어네스와 채텀(둘 다 켄트주)에 상륙해서 곧장 진격해 나흘 안에 런던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영국군과 민병대는 켄트 주와 서식스 주 주변 해안선을 따라 새로 지은요새 뒤에 배치해 있었다. 당시에 설치된 포좌와 요새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막상 침공은 무산되었고, 나폴레옹은 그대로 워털루로 갔고, 유럽군들은 기진맥진했으며, 홀가분해진 영국은 자기네 제국 건설에 다시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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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2]
첫번째 챕터인 <오스트레일리아,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강점이자 약점이 된다>를 읽는데 지금 우리는? 지금 우리의 외교는? 씁쓸하게도 물음이 많아진다. 우리는 뒤로 가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무데도 아닌 곳의 한복판에 있다가, 매우 중요한 어딘가가 되더니, 이제는 중심 무대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른바 <다운 언더down under> <유럽에서 보면 아래쪽에 있다는 의미로 여기서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뜻함)라는 땅은 섬이다. 하지만 보통 섬이 아니다. 이 섬은 무엇보다 엄청나게 크다. 얼마나 큰지 무성한 아열대 우림지대와 타는 듯이 뜨거운 사막지대, 완만한 사바나 지대와 눈 덮인산맥까지 품고 있을 정도다. 동쪽의 브리즈번에서 시작해 서쪽의 퍼스까지 운전해 간다면 이 나라를 횡단하는 셈인데 그 거리가 무려 런던에서 베이루트까지, 즉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 시리아 모두를 경유해 가는 거리에 버금간다.
아무데도 아닌 곳의 중심에 있다 보니 브리즈번에서 태평양 너머 - P22

북동쪽을 바라보면 미국은 1만 1천5백킬로미터, 남아메리카는 동쪽으로 1만 3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아프리카는 퍼스에서 서쪽으로인도양을 8천 킬로미터나 건너야 도달한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이웃이라는 뉴질랜드조차 남동쪽으로 2천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여기서 남극 대륙에 도달하려면 5천 킬로미터의 물길을 더 가야 한다. 하지만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진면목을 보려면 북쪽을 바라봐야 한다. 엄청나게 넓은 영토를 가진 이 나라는 서구 지향적이며 발전된 민주주의를 이뤄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바로 지구상에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독재 국가라 할 중국이 있다. 이모두를 종합해 볼 때 하나의 국가이면서 대륙이기도 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21세기 경제 강국이라고이해할 수 있다. - P23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것은 많은 도전을 의미한다. 먼저 섬이 되고 인간이 도착하기 전까지는(대략 6만 년 전) 이곳만의 독특한 생태계가 번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것을 고려하면 그토록 물리고,
찔리고, 쏘이고, 독 공격을 받았을 텐데도 인간들이 출현해서 3만년내에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보다 더 어려웠던 도전은 땅과 기후일 것이다. 이곳 지형의 대부분은 넓고, 평평하고, 몹시 건조한 평야지대인데 그 중 해발 6백 미터이상은 6퍼센트에 불과하다. 대륙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사막부터열대우림, 눈 덮인 산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다양한 기후와 지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국토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부분은 이른바 아웃백Outback 이라 알려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 P25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인간이 행동에 옮길 때마다 이곳의 지리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다. 원주민들이 아웃백에서 워크어바웃(walkabout, 아웃백에서 혼자 지내도록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 의식을 치르던 시절에 유럽에서 온 정착민들은 주로 해안 쪽으로 모였다. 그 현상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어서 이 나라의 인구 분포는 동부 해안의중간 지점에 있는 브리즈번에서 시작해서 초승달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시드니, 캔버라, 멜버른을 거쳐 남쪽 해안의 애들레이드로 내려가면서 해안을 빙 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서쪽으로 향하는 초승달 모양을 따라 교외와 위성도시들이 형성되는데, 산맥을 넘고 내륙으로 320킬로미터까지 확장되는 등 머나먼 지역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인구 분포도도 점차 옅어진다. 서부 해안에는 퍼스가 자리 잡고 있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다윈(노던준주의 주도)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해안 지역에 몰려 산다. 아무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26

 조지프 뱅크스 경의 일기. 1768년부터 1771년까지 엔데버호의 첫번째 여행에동반하다」라는 글에서 쿡의 수석 과학 장교인 조지프 뱅크스는 문명의 충돌과 그들과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숙고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여기 살고 있다. 나는 그들이 거의 행복하다고 말할수 있겠다. 아주 작은 것에도,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도 만족하는 사람들…….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지도 않고, 심지어 유럽인들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없어도……. 그들을 보면 인간이라는존재가 얼마나 적은 것을 바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유럽인들은 이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우리만치 너무도 많은 것을 점점 더 바라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이 만남이 훗날 뱅크스가 영국이 보터니만을 죄수들의 유형지로 탈바꿈하는 것을 막게 해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당시 영국 감옥의 끔찍한 과밀화를 해소할 수 있는 데다 범법자들이 절대로돌아오지 못할 곳에 그들을 데려다 놓는다는 일거양득의 생각이 깔려 있었다. 또 제국의 중심부에서 1만 7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영국의 깃발을 꽂는다는 전략적 함의 또한 고려됐을 것이다. - P31

시드니 주변으로 정착촌이 자리 잡자 멜버른 브리즈번, 태즈메이니아 등지의 정착촌도 성장해 갔다. 이것이 훗날 개척전쟁(FrontierWars, 1788-1934년)으로 알려진 과정이다. 역사가들 사이에선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의 수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2천 명의식민지 주민들과 그보다 몇 배 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원주민들은 대량 학살을 당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아무런 권리도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식민지 주민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화 파괴 행위는 일찍이 1856년에 발표된 한 글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당시 저널리스트인 에드워드 윌슨은 멜버른의 <아르고스Argus》라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글을 실었다.


20년도 채 못 돼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들을 거의 쓸어내 버렸다. 우리는 개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총질을 퍼부었으며…… 전체 부족들을극심한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들을 술독에 빠뜨리고, 질병을 퍼뜨려서 성인들의 뼈를 썩게 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을 겪게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냈으며 머지않아 전멸될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장면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노골적인 학살이 멈춘 뒤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 P33

1965년에 민권운동가인 페이스 벤들러는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라면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등록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원주민들의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고 있다."
전 국민의 93퍼센트가 참여한 국민투표안은 90퍼센트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비록 단기적인 실질적 효과는 제한적이었지만이 투표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보는 시각은 많다. 이것을 통해 평등을확대하고자 하는 국민적 열망이 드러난 것이다. 비록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원주민들의 기나긴 투쟁의 여정이 뒤에 남아 있었다 해도 말이다. 원주민 남성과 여성은 대학을 졸업하고 중산층에 편입되는 등 어느 모로 봐도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국민의 삶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수명은 국민전체 평균에 못 미치고, 만성질환이나 유아 사망률, 수감률은 평균을 웃돈다. 또 일부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면서 가중된 소외감에 따른 심리적 문제와 더불어 실업과 알코올 중독, 질병 등이 만연하고 있다. - P34

에어즈 록이라고 알려진 녹빛 바위산의 명칭이 1990년대에 에어즈록/울루루Ayers Rock/Uluru로 바뀌었다. 이곳을 성스럽게 여겼던 아나구족이 원래 부르던 이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다가 2002년에는 이 이름도 아예 울루루/에어즈 록으로 부르기로 했다. 2008년에는 2백 년이 넘는 대대적인 파괴, 탄압과 방치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원주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잔학 행위에 대해 케빈 러드 총리가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원주민 인구는 온갖 탄압과 파괴 행위에도 불구하고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오히려 증가했다. 1920년대에 6만여 명으로까지 줄었던 그인구는 퀸즐랜드, 뉴사우스웨일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와 노던 준주에 주로 거주하는 원주민들과 민족학적으로 다른 토레스 해협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뉴기니섬 사이의 해협의 섬 주민들까지 합쳐 현재는 80여만 명으로까지 늘었다. 그러나 수백 가지나 되었던 원주민 언어 대다수는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언어 중 적어도 한 가지를 말할 수있는 사람은 5만 명도 넘지 않는다. - P35

사실 이 현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1901년, 아니 훨씬 이전인 1788년부터 시작된 기나긴 여정의 결과다. 그렇지만 이는 비단 시간에 관한문제가 아니다. 2019년 케빈 러드 전 총리의 연설은 아직도 인종차별과 불평등이 남아 있는 나라 중 하나지만 이곳에서 불고 있는 변화의바람을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우리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국가 정체성을 규정할 때는 민주주의사회라는 이상과 제도와 관례에 뿌리를 두어야지 인종적인 구성에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노동자들과 난민을 포함한 외부인들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여전히 매력적인 종착지로 남아 있다. 너무 인기가 많다 보니 어떻게 해서라도 이 나라로 가고 싶은 이들에게 때론 좌절을 안겨주기도 한다.
금세기에 들어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철퇴를가하는 가혹한 법들을 잇달아 제정했다. - P41

전쟁은 오스트레일리아도 비껴가지 않았다. 1942년 2월 19일, 10주2전에 진주만을 공격했던 것과 동일한 일본 항공모함 함대 소속 전투기들이 다윈의 연합군 진지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보다 한 달전에 일본군은 현재 파푸아뉴기니와 인도네시아 일부를 아우르는뉴기니를 침공한 뒤 그 넓은 섬의 북부를 속전속결로 장악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바로 위에 있는 이 광활한 땅덩어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그래서 이 섬이 넘어갔다는 것은 그곳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공격 또는 봉쇄를 위한 전초기지로 이용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파푸아 뉴기니의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로 상륙한다는 일본의 수륙양용 계획은 코럴해 전투Battle of Coral Sea‘에서 입은 피해로 좌절됐다. 이로써 연합군을 겨냥한 일본군의 계획은 수정됐고 맥아더 장군은 뉴기니를 발판으로 삼아 향후 일본을 패배로 몰고 가는 군사 작전의 일부가 된 필리핀 수복작전을 펼쳤다.
그때 이후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는 영국과 맺었던 관계와 비슷한 양상을 띠어갔다. - P49

오스트레일리아는 금세기 중반까지 미국이 중국보다 방위비에 더많은 투자를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냉전시대와 현재는 엄격한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요컨대 과거 저물어 가는 소비에트연방은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에 크게 뒤처져 있었고 결국은 군비 경쟁에서도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은 떠오르는 강국으로 늦어도 금세기 중반에는 GDP가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사안들에 관한 미국의 입장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 선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중국이 상대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도상으로 보면 동, 서, 남쪽이 큰 대륙과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북쪽을 올려다보면 중국이 보이다 보니 심리적으로 이 두 나라를 한꺼번에 묶게 된다. 그런데 우리 대다수가 이용하는 고전적인 지도인메르카토르식 지도는 평면 위에 곡선으로 휘어진 거리를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왜곡시킨다.  - P51

중국에 대해서라면 오스트레일리아는 경제적 이해, 방위 전략, 그리고 외교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가끔 외교상의 온도차에 따라 그 투자 수위가 들쭉날쭉하긴 해도 중국이 단연코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교역 상대국인 것은 분명하다. 최근 몇 년간 해마다대략 140만 명의 중국인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을 왔고 해외유학생의 30퍼센트를 중국인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수출 농산품의 3분의 1을 사들이는데 여기에는 소고기 수출량의 18퍼센트, 보리의 절반이 포함된다. 또한 중국은 철광석, 천연가스, 석탄, 금의 주요 고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보다 큰 관심사는 영유권 주장과 영향력 확장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이해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P52

수도그것이 중국에 무슨 이득이 되느냐고? 영향력은 접근권과 같다. 중국이 바라는 것은 어업 수역 접근권, 자국의 함대를 위한 항구들, 그리고 해저 채굴 가능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주 간과되는 다른 무엇이 있는데 바로 유엔과 다른 국제기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곳나라들의 투표권이다. 중국은 다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을 성공적으로포섭해서 타이완을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태평양에서도 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2019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강력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키리바시와 솔로몬 제도가 타이완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한 일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태평양 전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로서는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태평양의 섬 주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민 역사를 통렬히 인식하고 있으며 약간의 온정주의적인 기미만 보여도 의혹의 눈길로 바라본다. 따라서 바누아투같은 섬나라들을 그들이 현재 선호하듯 <작은 섬나라>라기보다는 넓고 배타적인 해상 수역을 바탕으로 한 <대양 국가>로 인정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해상 수역을 포함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이 지역은 지구 표면의 15퍼센트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55

중국의 기술력과 힘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넘어서고 있다. 중국 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 또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에워싼 바다조차 소용없게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사이버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목표물에 타격을주기 위해 굳이 커다란 쇳덩어리를 날려 보낼 필요가 없다. 전력망, 상수도, 식량 공급망, 운송 시스템 등 주요 기반시설이 사이버 공격을 받으면 전 세계 어느 나라치고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을 나라가 없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물리적인 원조를 받기엔 여전히 먼 거리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기술적으로 세계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
코로나19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하여금 적기 공급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다른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레일리아도 중국에 의존하면서 민감한 주요 인프라 사업에 중국의참여를 확대하던 중 5G 통신망 구축에서 화웨이를 퇴출시키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관계는 깨지기 쉽다.  - P56

지금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최고 우방들과 밀착관계를 유지해 오고있다. 이 나라 외교관들은 80여 년 이상 다져온 관계를 지키기 위해늦은 시간까지도 미 의회, 국방부, CIA와 협업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가 가입한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보 수집망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의 열성적인 회원국이기도 하다. 또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국 정보 수집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인 파인 갭Pine Gap 군사기지를 자국의 앨리스 스프링스 부근에 설치하도록 허락했다. 이곳은 정보 통신을 탐지하는 CIA위성들의 지상기지 역할을 하고,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펼치는 미군에게 전장 정보를 제공하고, 탄도미사일 발사를 탐지 - P58

하고, 미국과 일본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지원하고, 새로 창설된 미우주군 사령부 내에서도 그 역할을 점점 확대해 가고 있다. 이 기지는미국으로서도 떠나고 싶은 곳이 아닐 것이고, 오스트레일리아에게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헌신을 가늠하는 협상 카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파이브 아이즈나 다른 방위시설들이 설치되던시대와는 현저히 달라졌다. 파이브 아이즈가 결성된 1956년 당시에는 미국의 서약은 굳건하다고 여겨졌고, 일본은 패망했으며, 중국은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때는 냉전의 중심축이 멀리 있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어 태세로는 그 지역에 위협이 임박하려면 향후 10년은내다봐야 할 것으로 추측했다. 현재는 분쟁 가능성을 알리는 사전 통고는 줄어들었지만 중국이 주요 주자로 올라서고 있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워싱턴과의 관계에 크게 투자하는 한편으로 약간의 부차적인 내기도 걸어보는 중이다. 물론 그 내기가 본질적인 것은아니고 단지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 P59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는 그와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도 참여하고 있는 쿼드Quad 안에서 인도 해군과 협력하고 있다. 쿼드는 동맹체라기보다는 미국, 인도,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 4개 나라의 해군이 태평양에서 협력하는 전략적 협의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대놓고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늘 해상 항로를 열어두고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힘을 합치자는 명분에 뜻을 함께하고 있다. 이 구상은 2020년 팬데믹 상황에서 각 나라가 중국의 호전성에 주목하고있을 때 중국과 인도 국경에서 양측 군인들의 격렬한 육박전이 벌어지고 난 뒤 더욱 힘을 받았다. 인도는 자국의 해군력이 성장해 감에따라 인도-태평양 지역을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는 뉴질랜드, 한국, 베트남까지 포괄해서 더욱 확장시킨 쿼드 플러스Quad Plus라는 구상까지 언급되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과 베트남은중국과의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고 있는 입장이다. - P60

이 나라는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간 오늘날 지구상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심각한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터라 신중하게갈등 조정을 해야 한다. 일부 분석가들은 인도-태평양 지역을 아프리카 동부 해안부터 미국 서부 해안까지 뻗어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기도 한다. 구식으로 여겨졌던 이 관점이 세상이 변하면서 다시 뜨고있다. 현시점에서 일찌감치 이 관점을 주창한 사람은 일본의 전 총리아베 신조였다. 2007년 그는 인도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다라쉬코라는 무굴제국의 왕자가 쓴 두 바다의 합류The Confluence of the TwoSeas』 (1655년)라는 책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태평양과 인도양은 자유와 번영의 바다로서 역동적인 결합 관계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두에게 투명하게 개방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서쪽으로는 인도양을, 동쪽으로는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두 수역 사이에 자리 잡은 오스트레일리아는 북쪽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 세력을 두고 있다. 현재로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베이징과 건설적인 대화를 이끌어가고 미국과는 방위를 비롯한여러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힘든 경기를 치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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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말은 아프지 않아
폭풍우 치는 밤은 무섭지 않아
아픈 것은 차라리 고요한 것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너의 얼굴

너는 투명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나의 땅은 그럴 때 흔들린다
네가 어떤 모양으로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모를 때
온 풍경이 너의 절망을 돕고 있을 때

창밖엔 때아닌 비가 오고
너는 우산도 없이 문을 나선다

이제 나는 너의 뒷모습을 상상한다
몇걸음 채 걷지 못하고 종이처럼 구겨졌을까
돌아보다 돌이 되었을까

나의 상상은 맥없이 시든다
언어만으로는 어떤 얼굴도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오후
성벽 너머의 성벽들
빗방울이 머물 수 있는 공중은 없듯이

알고 보면 모두가 여행자
너도 나도 찰나의 힘으로 떠돌겠지

그러나 내일 나에게는 하나의 얼굴이 부족할 것이다
깊은 어둠에 잠겼던 손이 이전과 같을 리 없으므로
그 손이 끈질기게 진흙 덩어리를 빚을 것이므로





흐린 5. 18의 아침
어제는 아무렇지않던 시가
오늘은 다르다.
지금, 우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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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역에서는 광활한 요새인 이란과 그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르시아만을 마주한 채 맞서고 있다. 태평양 남쪽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시대 최강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리매김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중해에서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와터키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당장 내일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
서기 2020년대에 오신 걸 환영한다.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시대는 이제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우리는 새롭게 등장하는 열강들이 서로 대립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수많은 주연 배우들은 물론 단역 배우들까지도 서로 밀치며 중앙 무대로들어서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대기권 위의 달과 - P8

그 너머까지에 대해서도 권리를 주장하는 나라들이 등장하면서 지정학적 드라마는 지구 영역 바깥으로까지 튀어 나가고 있다.
몇 세대에 걸쳐 고착된 질서가 일시적인 것으로 변하면 불안을 유발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다극화된 세계를향해 달려 왔다.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극 체제로 재편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체제가 한편에 있었다면, 반대편에는 소련과 중국이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공산주의 체제가 있었다. 이 시대는 당신이 어디에 선을 긋느냐에 따라 50년에서 8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미국의 힘이 거의 요지부동이던, 분석가들이 이른바 단극의10년이라 이름 붙인 시기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양극시대에서 벗어나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 규범과도 같았던, 여러 열강들이 경쟁하는 <다극화 시대>로 회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P9

10년간 러시아는 게임의 바깥에 있었다. 쇠약해진 데다 확신도 없는, 그저 희끄무레한 과거의 잔영 속에 갇힌 채 말이다. 러시아는 나토가 자기네 서쪽 국경지대 쪽으로 전진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또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국가의 국민들이 몇 번이고 나토 또는 EU에 가입하는 문제를 두고 실시한 찬반투표에서 찬성 쪽에표를 던지는 것도 보아왔다. 게다가 라틴 아메리카와 중동에서도 그들의 영향력은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다 1999년에 모스크바는 서방세력과 맞설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도 여기까지였지만. 그기준선이 바로 코소보였다.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 군단에 개입을 명령했다. 비록 차후에 떠오르게 되는 강경 민족주의자인 블라디미르푸틴이 그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 한 역할을 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 P10

이른 아침에 러시아의 기갑 부대가 도심으로 밀고 들어와서 시내외곽에 있는 코소보 공항으로 진격해 갈 때 나는 프리슈티나에 있었다.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은 내가 작성한 기사를 통해 나토군에 앞서 러시아군이 코소보로 밀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러시아인들이 도심으로 밀고 들어옴으로써 세계무대에 복귀했다."라고 썼다. 물론 그 기사가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역사의 한 장면을 증언하는 초안으로서는제 몫을 했다고 본다. 러시아는 그해에 가장 중요한 사건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하겠다면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역사의 파고가 이제는바뀔 것이라고 천명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을 능가할패권은 없어 보였다. 서구는 국제 정세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발의 기운이 야금야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 P10

우리 시대에 가장 경이로운 발전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지정학상의 권력 투쟁이 지구라는 한계를 넘어 우주로 투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누가 우주를 소유할 것인가? 그 결정은 어떻게 내리는가?
사실상 진정한 최후의 개척지는 있을 수 없겠지만 그곳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개척지들은 거친 무법천지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일정 고도를 넘어가면 고유 영토라는 개념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네 나라 바로 위로 레이저로 무장한 위성을 쏘아 보내고 싶을 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여러 나라가 우주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각축을 벌이고 심지어 민간 기업들까지 그 경쟁에 뛰어든 마당에 우주라는 무대는 위험천만한 최첨단 무기들의 격전장으로 변해갈것이다. 과거 우리가 범한 실수에서 배우고 국제 협력을 통해 얻을 수있는 이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선은 지구의 아래쪽부터 시작해 보겠다. 오래도록 고립된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그곳이 이제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상황을이끌어가는 힘을 갖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 이야기의 핵심 주역이 되는 그곳은 섬이자 대륙인 나라, 바로 오스트레일리아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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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마음이라는 거. 쇼팽에게 피아노는 어떤존재였을까. 시인에게 흰 종이가 백지이자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초대장이듯이, 쇼팽에게도 피아노는 여러 의미였을 것 같다. 그는 흰 건반과 검은 건반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세계는 양면을 지니고 있구나. 흰 쪽은 밝고 따뜻하고 안정적이지만 검은 쪽은 어둡고 춥고 위태롭구나. 달의 앞뒷면과도 비슷한 점이 있군. 그런데 왜 인간은 달의 앞면만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었을까. 어디 한번 내가 신이 되어보아야겠다. 그렇게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었던 것인데…. 딱 한 번, 딱 한 음 흰 건반을 누른 후엔 검은 건반 위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라고 만 것이다. - P108

수전 손택과 조너선 콧의 대담(《수전 손택의 말》, 마음산책, 2020)을 읽던 중에 인상적인 구절을 마주쳤다. "내악마들을 빼앗아가지 말라, 천사들도 함께 떠날 테니까." 릴케의 시구라 했다. 릴케의 시에 이런 구절이있었던가? 그 즉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었다. 더 이상 독서가 불가능할 만큼 풍부한 고민이 시작되었기때문이다. 악마를 단순한 악으로 치부하지 않으려는, 쉽게 배척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놀라웠고 악마와 천사를 한 몸 안에 깃든 두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도 좋았다.  - P112

내게 가시손은 단순한 관용구가 아닌, 존재론적슬픔을 함의한 광막한 단어다. 문득 가시손의 반대말이 궁금해진다. 아마도 쓸어 담고 쓰다듬고 치료하는 손이겠지? 다행히 세상엔 가슴팍에 청진기를대고 숨소리를 듣거나 진맥을 짚어 영혼의 상태를살피는 손도 존재한다. 내가 무수한 나들의 총합이듯이 나의 손안에도 무수한 손들이 자리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시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한평생 파괴지왕으로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닐 터. 연습하는 손은 게으른 손을 이길 것이고 호기심 가득한손은 나태한 손을 앞설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오늘당신은 어떤 손을 가졌습니까. 그 손안엔 무엇이 있습니까. 따뜻합니까. - P121

시간이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는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 자신이 그럴듯하게 라벨링돼 진열대에 올려진 와인 같다는 생각이 오래되고희귀할수록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제아무리 고급 케이스에 담겨 기쁜 날 선한선물로 건네진다 하더라도 한 그루 포도나무였던 시절, 포도밭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지기 마련이다. 짓밟고 망가뜨릴 심산으로 포도나무를기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정성과 사랑으로, 기도로 길러진 존재들이다. 포도밭의 태양, 포도밭의 평화를 떠올리면 삶에 찢기고 벌려진 상처가 소독되는 기분이다. 슬픈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 시간으로부터 와 여기에 있다. - P125

한 존재의 기원이자 시작점, 최초의 우물일그곳. 다시 돌아갈 방법은 전무하지만 이따금 그곳을 떠올리면 영혼이 지친 몸을 누이는 것 같다. 언젠가 시에도 적은 것처럼 "눈을 감으면 오는 기차"(《소인국에서의 여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를 타고 나는 자주 그곳으로 간다. 달빛 환한 밤, 수만 평의 포도나무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상상만으로도 어깨가가벼워지고 발이 살짝 떠오른다. 눈을 뜨면 형체 없이 사라지겠지만 아쉬움만 남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다녀오면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절대로 추하게늙어가고 싶지 않다‘ 굳은 결심을 하게 되니까.
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생각될 때에도 당신과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끝끝내 반짝이는 세계, 당신의 빈야드가. - P126

더 오랫동안, 더 멀리에서 담는다. 두눈물은 같은 눈물이지만 완전히 다른 눈물이다.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자의 눈물은 또 다른 의미로그토록 깊다.
그것이 장기든 감정이든 믿음이든 인간은 타인의로부터 무언가를 구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불완전하니까. 약하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득이 가슴을 칼로 그어 억지로 심장을 빼내려는 그악스러운 폭력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구한다고 다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제자리를 찾는 것들이 있다. 마음이 펄펄 끓을 땐 너는 왜 내게 심장을꺼내 주지 않느냐고 따져 묻기 전에 이런 주문을 외워보는 건 어떨까. 일일시호일. 일일시생일. 날마다좋은 날, 날마다 생일이라는 마음으로. - P131

진짜 바느질에는 영 재능이 없을지라도 영혼의수선공으로서는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내 삶이니까. 내 영혼이니까. 고쳐 쓰든 뒤집어 쓰든해봐야겠지. 뭐든 기본이 중요한 법이니 욕심부리지말고 홈질부터 천천히 배우기로 한다. 홈질은 손바느질의 기초입니다. 박음질과 헷갈려하시는 분도 많지만 엄연히 다른 기법이에요. 지금부터 옷감 두 장을 포개어놓고 바늘땀을 위아래로 움직여볼 건데요,
일직선이 되도록 반듯하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이번엔 졸지 않고 화면 속 선생님의 말을 경청한다. 잘 살고 싶다. 나는 정말이지 잘살고 싶다. - P136

그러니까 오늘의 결론은 ‘다시‘에 있다. 다시 볼때 수정되고 겹쳐지고 순해지거나 단단해지는 많은 것들이 인간의 삶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꺼내 든 오늘의 영화는 <오만과 편견〉이다. 아마 이 영화는 지금껏 내가 가장 많이 다시 본영화일 것이다. 오만이 오만을 극복하고, 편견이 편견을 극복할 때 비로소 열리는 사랑 이야기. 이 사랑의 선망선에는 언제고 갇혀도 좋을 것이다. - P143

말이 화살일 때가 있다. 얼마 전엔 10년 전쯤 알고지내던 지인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다. 반색하며안부를 나누던 중 지인이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며 "그런데 너…." 하고 운을 뗐다. 내 쪽에서 황급히말을 받았다. "왜요 왜! 저 늙었다는 소리 하시려고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데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굴었다. 상대도 부정하지 않았다. "어… 분위기도 그렇고 뭐가 좀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날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말씀이시냐, 그럼 세월이얼만데 변하지 안 변했겠냐 눙치듯 응수했는데 며칠 - P149

이 지나도 그 말이 아프게 나를 찔렀다. 박힌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화살이.
아픔의 이유는 명백하다.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있어서, 생기 있고 질문 많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이사라지고 거울 속엔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뭘 쳐다봐?‘ 묻는 사람만 있어서. 하필 그 즈음 세사르 바예호의 시를 읽고 있던 것도 문제(?)가 됐다. 시 <시간의 횡포〉(《태양의 돌》, 창비, 2013)의 모든 문장은 "죽었다"로 끝난다. 안또니아 아줌마도, 싼띠아고 신부도, 금발머리 아가씨 까를로따도, 외눈박이 노인과 라요도..… 남김없이 전부 죽은 것이다. 시간의 횡포 아래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한 줄 한줄 시를 읽어 내려갈 때마다 귓가에 들려오던 총성 소리. 다 읽고 나면 마른 우물 속에서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드는 시. 그렇다.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 던 저 슬픈 세사르 바예호의 시는 내 안의 무력 버튼을 꾹 누르고 만 것이다.
매일 진다. 지는 기분이 든다. 피곤해서도 지고 귀 - P150

찮아서도 지고 허무해서도 지고 우울해서도 진다.
그날따라 입고 나온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도 지고, 하필 우산을 두고 온 날 소나기가 내려서도 지고, 편의점에 들러 만 원이나 하는 우산을 샀는데 비가 홀랑 그쳐 씩씩거리며 또 진다. 텀블러 뚜껑이 제대로안 닫혀 가방 안이 홍수가 되어서도 지고, 눈앞에서버스를 놓쳐서도 지고, 주차장 구석에서 들려오는고양이 울음소리가 구슬퍼서도 진다. 변해서 슬픈이유는 다름 아닌 그것이다. 응전할 힘이, 무기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 - P151

그때도 부적을 붙이듯 탕종, 탕종, 입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같은 이응인데 탕종의 이응과는 너무나 다른 이용이 세상에는 너무 많구나, 하면서.
탕종의 힘은 나날이 커져갔다. 놀랍거나 두렵거나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슬픈 일이 닥칠 때마다 탕종, 탕종 하고 입 밖으로 되뇌는 것이다. 토붕 앞에서도 탕종, 자몽의 무지몽매함 앞에서도 탕종, 죽음 앞에서도 탕종이라고 말하면 종소리가 은은히 번져 나를 위한 안전한 막이 생겨나는 기분이다.
탕종이라는 말의 비밀스러운 느낌은 오래도록 내곁에 남아 있다. 비록 단호박크림치즈 탕종식빵은 하루도 못 가 사라져버렸을지라도. 탕종, 탕종. 나는 단어 하나로도 나를 지킬 수 있다. 단어가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려 한 사람의 집이자 우주가 된다는 것.
참 따뜻한 움막이다. 뜻밖의 신비다. - P163

일방통행인 길이었고 무조건 앞으로 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때, 맞은편 하늘에 상상으로 한 점을 찍었다. 시선을 점에 두고, 점만 뚫어져라쳐다보며 걸었다. 그곳의 나를 이곳으로 건너오게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꼭두의 한 점.
존재가 깃털 같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럴 때 인간은 아주 작은 입김에도 날아갈 수 있다.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가버린다. 그럴 때 한 편의 시가 당신의 누름돌, 당신의 한 점이 되어줄 수는없을까.
한 점. 딱 한 점만 보고 걷는 것이다. 나도 이쪽에서 딱 한 점만 보며 걸을 것이다. 그쪽의 당신도 그렇게 와주었으면 한다. - P168

문학이라는 모닥불 앞에 모여앉은 우리가 공유해야 할 것은 사는 곳, 나이, 학벌 따위가아닌 ‘문학적 영혼‘일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합니까. 가장 깊이 찔린 기억과 가장 높이뛰어올랐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떨 때 흩어지거나맺힙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온도, 색깔, 질감, 경도는어떠합니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당신이 거기 있다.
사각거리는 연필소리. 손등에 돋아나는 힘줄. 집중하는 입.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 문학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단단한 결속력을느낄 때가 많다. 왜 하필 문학인가요. 세상에 재미난게 얼마나 많은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삶의 다른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건 어떤가요.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은 안으로 삼키고 나도 나의 백지를 채워보기로 한다. - P172

어는점: 손발이 차갑고 눈앞은 캄캄하고 머리가꽝꽝 얼어버린 것 같은 상태. 주로 마감 직전, 백지를 마주한 나의 모습이다.
끓는점 : 나는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랑할 때만 찾아오는 온도.
녹는점 : 시를 쓰며 가장 자주 도달하는 상태. 내게 녹는다는 건 부드러움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 물속에서 녹고 있는 물고기. 한낮의 태양 아래, 아이스크림보다 먼저 손이 녹아버린다면? 눈사람에게 허락된 마지막 밤. 흰 사슴의눈동자가 호수로 변하는 순간. - P173

저 문장들은 시를 예비하는 ‘안료‘와 같다. 안로는 염료와 다르다. 안료와 염료는 물질에 색을 발현시키는 색소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염료는 물에 녹아스며드는 반면 안료는 물이나 기름에 녹지 않는 성질을 지녔다. 안료는 다른 무엇과 섞이더라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분명하게 자신임을 증명한다. 그런 안료를 재료 삼아 빚는 시는 빛에도 열에도 추위에도 강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문장이라도 좋다. 백지 안으로 걸어들어가 자신만의 은밀한 다락, 혹은 지하실을 열어볼 수만 있다면.
내가 쓴 문장이 나를 보여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존재들이고, 살아 있다는건 얼고 녹고 끓고 흩어지는 모든 순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 P174

목소리는 정말 신비롭다. 시간의 공격을 피할 수없는 인간에게서 가장 마지막까지 함락되지 않는성. 어릴 때 즐겨 보던 만화 주인공의 목소리와 성우의 얼굴이 겹쳐질 때 저분의 목소리는 늙지 않는구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목소리는 한결같구나 놀라울 때가 많았다. 한 사람이 생래적으로 지닌목소리는 지문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고유(固有)‘ 카테고리에 담길 인간의 조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고유한 목소리가 있기에 다른 목소리, 또 다른 목소리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는 사실 또한. - P176

그땐 정말이지 시가 너무 아프고 무거웠다. 울면서 쓰거나 쓰고서 울었다. 이렇게 망가져 있는 세상도 싫고, 세상의 미래가 내 펜에 달린 것마냥 심각했던 마음도 싫었다. 그래서 쉽게 가려고, 손쉬운 위로를 구했던 것인데…. K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그건 잘하는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하던 걸 하세요.
하던 걸 하라는 말. 아마도 그 말에 깊이 찔렸던탓일까.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또 무슨 용기에선지) 이런 거창한 대답을 내어놓고야 말았다. "사람들 들어간 뒤에 신발을 다 정리해놓고 들어가는 시를 쓰게 되지 않을까요." 그때로부터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한다. 하던 거라도 잘하는 일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여전한 신발들, 정리되지 못한 미숙하고 어려운 마음들, 너무 많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목소리를 꿈꾸지 않는다. 세 번째 시집을 펴내며 적었던 말을 기억한다. "나는 평생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 P178

살다 보면 ‘조금‘은 슬퍼지는 순간이 왜 없겠는가.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쓴 문장들이 징검다리가 될 때가 있다. 과거의 문장을 딛고 현재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현재의문장을 딛고 미래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간신히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망망대해 같은 바다를. 말과 사람이 함께, 느리더라도 함께.
그러니 하던 걸 하자. 이런 노래는 이런 노래고, 탁성은 탁성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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