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장부
인간이 처음 문자를 만들면서 한 일은 하늘의 음성을 받아 적은 것도 지모신에게 올리는 기도문도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도 아니다 곡물 수확량을 조사한 세금 장부였다
사실, 글이 어두운 시대에 한 동네의 최초 기록은 주막집의 외상장부 아닌가
힘 있는 인간들 우리가 발 뻗고 사는 꼴을 못 봐 세금 뜯어낼 온갖 지혜를 다 짜내었고 주막집 주모는 외상으로 먹은 자의 용모와 금액을 그려두어야 했다 인간에게 문자가 필요했던 것은 태어나면서 우리가 이 땅에 역사에 외상을 먹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기에 모든 책은 외상 장부 같다 내게 뭔가를 전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 갚을 거냐고 묻고 있다
사랑의 이야기도 혁명의 기록도 내게서 뭔가를 받아내려고 한다 지난 것 같지 않으면 더는 외상을 주지 않을 것 같다
그 외상장부가 말의 가락을 담아내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세워진 길
꼬리를 문 차량들의 질주 한걸음도 들여놓을 수 없던 난폭한 길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고 누군가는 몸을 던졌고 몸과 몸의 사슬이 쳐지고
속도가 거칠게 투우처럼 피 흘리며 바닥을 긁었고 길이 엎질러졌을 때 길은 수직으로 세워져 있었음이 드러났다.
달리던 것은 실은 속도가 아니라 정지된 사슬이었다 바리케이드가 원하는 것은 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난폭한 선과 질주의 체제 세워진 길을 눕히는 것이었다
세워진 길 위로 달릴 수도 흘러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눕혀진 길 위에 광장이 일어났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의 광장은 다시 세워진 길이다
그때가 좋았지
깎은 네 머리는 누가 강제로 밀어버린 것만 같다 그 시절이 그래도 좋았지 않았느냐고 휠체어에 앉아 뒤를 올려다보는 제발 좋았다고 말 좀 해줘 애원하는 네 눈동자는 끓는 물에 데쳐버린 듯 고름이 차 있다
벌건 대낮에 거리를 걸어본 기억도 제대로 없고 외출복인 작업복에 기름때 페인트 얼룩 가셔본 일 없고 어디 따듯한 불빛 아래 여자아이들과 편한 저녁을 먹어본 적도 없었던 시절을 아련하게 그려보다니 그걸 추억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두자 그땐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땐 우리 근육이 강철이었으니까 철야를 하고도 축구 풀게임을 뛰었으니까 사막으로 가는 배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고통도 자학적인 쾌락이었으니까
우리 살아온 날들 그래도 꽤 괜찮았어 맞아 그땐 분명히 그랬어 그땐 이처럼 버려지진 않았으니까 그땐 이처럼 쓰레기는 아니었으니까
소를 끌고
눈 덮인 낮은 집이 저 너머에 있다. 사방길은 지워지고 따듯한 섬 같은 집 감나무 한그루가 돛대처럼 지키고 있는 집 저녁연기가 목화솜처럼 깔리던 집
아궁이 곁불에 닭들이 졸고 아랫목에서 메주가 뜨고 설은 다가오고 까치는 마당에 내려와 놀고 들판을 달려온 바람이 몸을 녹이다 가고
장독간가는 길에 눈을 쓸고 김치를 내오고 볼이 튼 아이는 눈밭에서 뛰놀고 입김 불어 손을 녹이며 아낙은 소 없는 외양간 아궁이에 소죽을 쑤고
산 너머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 밤새 들리고길을 재촉하는 부엉이 먼 산에서 울고
나는 아직도 희미한 그 집에 가고 있다
흙과 짐승과 나무가 주인인 집에 이랴이랴소 한마리 끌고 돌아가는 중이다
갈수록 멀어지는 그 사람들 그 집에 내가 살던 집도 아닌 그 집에 이상한 일이다 수십년 동안 나는 돌아가는 중이다
겨울비
겨울비 천장에서 떨어진다 거실 바닥 흥건하다 보일러 배관은 얼어 부풀었다 그래도 바닥이 편하다 모든 바닥은 따듯하다 노동이 빠져나간 몸은 퇴적암이다 어쩌라는거냐 문자메시지는 아침부터 부고다
세면실 거울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디피 삼백불 밤 완행열차를 타고 볼 터진 운동화 한켤레로 열여덟에 떠난 공단거울 속에는 내가 아닌 늙은 아버지가 있다
양치질할 때면 한번씩 가슴에 이는 불덩이는쌓인 쇳가루와 시너 가스와 최루탄 연기 뒤집어지나 빈손과 상처투성이 그리고 툰드라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고맙고 부끄럽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
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 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 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겨울비 온다 어깨에 머리에 찬비 내린다 배가 고파온다 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무게
시내버스에 앉아 졸고 있으려니 차가 기우뚱 쏠리면서 서서 졸던 살찐 사람의 무게가 사정없이 내 가슴을 밀어붙인다 그 당황한 무게의 여운이 얼룩처럼 몸에 남는다 연민처럼 번진다
모든 절박한 것은 무게다 슬픔의 모든 것은 무게에서 배어나온다 견디기만 해왔던 무게 들어내려고만 해왔던 그 무게에서
언제나 허덕여온 무게 벗어버리고 싶던 짐짝 초월을 꿈꾸던 중력 나의 배후에 수줍게 실려 있던 그 무게
그런데 이렇게 쾌활한 무게라니 묵직하게 실리는 무게의 실감이여 긍정적인 무게라니
정지의 힘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평범한 일상
천마리 악어를 사육하는 우리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여인이 있다는 것이다 먼 나라에서의 그 일은 끔찍하지만 이 지구 위에서 가난한 자들의 삶에 대한 그저 평범한 비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구덩이 세상을 피해 악어의 아가리로 피신한 것인지 고깃덩어리밖에 안 될 무의미를 악의 없는 저들에게 그저 던져준 것인지 나의 상상도 역시 평범한 비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장의 악어 껍질을 얻기 위해 많은 살아 있는 생명들을 도살해야 하고 그 먹이를 생산하기 위해 또 수많은 누군가의 껍질을 벗겨내는
누군가의 작은 기쁨을 위해 누군가를 벼랑으로 밀어붙여야 하고 또 누군가는 피를 뒤집어쓰는 노동을 해야 하는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일 뿐인 것에 대한
그 잔혹한 일상에 의미가 달아난 육신에 대한삶의 껍질이 벗겨진 육신에 대한 그 무의미한 고깃덩어리를 아가리에 던져 우두둑 뼈째 씹히는 순간에야 깨어났을 의미에 대한 하나의 사소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이 나라에서만 매일 마흔명이나 걸어들어가는 그곳에 대한
길
주유소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오일 게이지는 이미 바닥이었지만 그녀는 위독했고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마디 말을 늦도록 찾지 못했다
캄캄한산자락에 걸린 지방도는 텅 비어 있었다 언제 차가 멈출지 몰랐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그녀는 도시를 버리고 숲으로 갔다 숲으로 가서 깊은 병이 드러났다 우리는 모든 걸 길에서 찾고 길에서 잃어버린다
어딘가에서 이 길도 멈출 것이다 기를 쓰고 달려온 길도 멈추고 보면 길이 아니거나 길 위에 길은 사라지고 언제나 속도만 깔려 있었다
캄캄한 갓길에서 시동을 끄고 기다렸다 미등마저 끄고 나니 뚜렷한 산 그림자 묽다 잿빛 하늘 비친 뿌연 개울이
산자락을 몇굽이나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탄 차는 통째 참선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캄캄한 어둠이다 영영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어둠이다 흥건한 어둠이 내 안에 고여 있었다 희미한 빛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걸 길에서 찾고 길에서 잃어버린다 멈추지 않으면 길을 갈 수 없다
나에게 이르는 길
몇해 전 살구나무 한그루 심어놓고 나는 믿기지 않았다 주위에 살구나무가 한그루도 없어서인데 다음 해에 탐스러운 열매를 보고 또 믿기지 않았다 자가수분을 할 거면 열매로 시작하지 꽃은 왜
힘들여 피우나 속살 벌겋게 드러내고 천지사방 분을 날리고 향기로 어지럽히고 소음에 귀를 열고 온갖 것 불러 모으고 머리를 헤치고 밤바람에 싸돌아다니고 열린 몸은 거친 부리에 노출되면서
꽃에서 시작해서 꽃으로 돌아올 일을 왜 저리 요란을 떠나 나에게 건너가는 길이 내 안에는 없다는 건가저 바람 속에 햇살 속에 거친 눈보라 속에 저 인간들의 아비규환 속에 저 고단한 길 위에나 있어
바람이 나보다 한걸음 앞에 있어서길
길이 언제나 나보다 한발 먼저 있어서 말이 언제나 나보다 반걸음 앞에 있어서
밤이 끓는 동안
밤이 끊는다 현재는 끓는 밥이다 배부르지 않다 맛볼 수도 없다 뚜껑을 열어볼 수도 없다
현자들은 현재만을 살라고 충고하지만 현재를 살아볼 도리가 없다 지금은 끓고 있을 뿐이다
끓고 있는 지금 내가 먹는 것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허공이다 허공만이 실재라는 듯이
현재는 허기다 주린 배로 사냥에 나선 피에 젖은 발톱이다 둥지로 돌아가지 못한 부러진 날개다
지금을 먹을 수 없다 죽을 지경이다 현재는 끓고 있는 창세기다
내가 어디까지인지
산길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곳에서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갈수록 그늘은 짙어지고 넓은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공기와 바위는 서로를 껴안고 그 그늘의 끝에서 생각은 허둥대고 문장을 잃고 한순간 내가 아니라 그늘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늘 하나가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무섬증이 밀려오고 가슴이 뛰었다 점점 낯이 익었다 나는 몸을 떨어야 했다 그뿐이었다 숲을 걸어나왔지만 그 그늘은 내게 묻어 지워지지 않았다
밝은 곳으로 나와보니 그것은 그늘이 아니라한 기억이었다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내 것이 그곳에 있었다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기억이 복원되어 밀려왔다
설산의 바람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는 이십여분 나는 대합실 짙은 연무 같은 빽빽한 웅성거림에 담겨 있었지
저 혼자 떠드는 티브이 앞을 지나자 애타게 길게 뭔가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어히말라야 설산이 화면에 가득 비치고
마방들의 구음인지 늑대 소리인지 바람에 찢겨 늘어지고 휘어지며 새처럼 가파르게 거친 산을 넘는 소리
기차는 설산의 바람을 뚫고 달려가네 눈보라 차창을 때리고 졸음을 흔들고 기억에서 깨어난 듯 나는 머리를 흔드네
깨어보니 낯선 곳에 와 있네 나는 설산을 언제 떠난 걸까 소음의 짙은 연무에 싸인 저 불빛 거리는 나의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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