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설명

표지에는 노란색 배경에 짙은 청록색 실루엣 두 개를 그렸다. 오른쪽 중단에 위치한 실루엣은 휠체어에 앉은 인간의 모습으로, 머리,
가슴, 다리 그리고 휠체어의 앞바퀴와 뒷바퀴가 있다. 인간의 머리위에는 형태를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인간의 시선은 표지페이지의 왼쪽 방향으로 약간 아래를 향하는데, 거기에 소가 목을 떨군 채 앞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치 모양으로 구부러진 소의 등, 가슴, 앞다리, 머리가 보이고, 뒷다리 곁에는 커다란 바퀴의 일부도 보인다. 이미지가 잘려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는 사람은 바퀴가 소가 끌고 있을 수도 있는 수레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소를 위한 휠체어 바퀴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더 오래 들여다보면 인간의 머리 위에 있는, 형태를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사실 소의 꼬리와 엉덩이이고, 소 뒷다리 쪽의 바퀴가 인간이 탄 휠체어에 달린 것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림의 양쪽 끝이 이어지는 듯한 효과를 내는 셈이다. 즉 우리는 이것을 분리된두 개의 실루엣으로 볼 수도 있고, 서 있는 소의 엉덩이 쪽에 인간이 탄 휠체어가 이어지는 하나의 전체 이미지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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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통

김종삼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스무 살 무렵, 학교 앞 카페의 벽에 걸려 시인이 되고싶던 나를 내려다보던 <물통>. 그것이 삶이든 시 쓰기든 인간에게 물 몇 통 길어다준 게 전부였다는, 이상하게 사무치는 고백으로 여러 청춘들에게 문학병을 선사했던 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가슴에 와 맺히는 건 그 겸허함보다 물 몇 통 길어다 바치는 일의 어려움이다.
아마 저 "물통"은, 여백이 더 많던 시인의 작품들처럼 비어 있기 일쑤였으리라. 이분은 나중엔 역력히 술을 억누르질 못했는데, 그 또한 이것과 관련돼 있겠지.
물 몇 통 얻기 위해 술병들 적잖이 쓰러뜨리는 일도 이런 시쯤 되면 적잖이 용납되겠지.

서풍 앞에서


황지우

마른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두 번의 직유로 간신히 몇 발짝 이어간 단 두 문장. 하지만 이 짧은 중얼거림은 제 실존적 결단의 힘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누름으로써 피로 얼룩져 거덜 난 시대를 구출하여 역사의 반열에 받들어 올린다.
오월 광주의 비극을 알리려다 고초를 겪은 시인의 이력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박해받는"에서 "박해받고 싶어하는"에 이르는 인식의 질적 전환에는 읽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전율이 들어 있다. 고난받고 싶다는 뜨거운 자발성에 닿기까지 그는 얼마나 피를 말렸을 것인가.
불가능한 것은 이렇게 어떤 영혼에게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순결한 것들은 다 아름답게 미친것들이다.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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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말은 인격이다. 고사성어나 전문용어, 어휘를 많이 안다고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할 수 없다. 그건 그냥 유식하고 교양 있는 거다. 나는 소위 유식하고 교양 있다는 사람들이 인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너무많이 봤다. 인격은 기본적인 어휘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대에게 어떠한 의도로 쓰는지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사람을 물건이나 상품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을도구나 수단으로 취급하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조차 못 하는 이가 최악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씨알머리가 없다. 도사리 같다. 말의 힘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으로 획득된다. 인격은 연출이 불가능하다. - P104

‘세상을 바꾼다 ‘고들 한다. 사회변혁이나 개혁을 의미한다. 나는 멀쩡하니까 세상만 바꾸면 좋아질 것 같은 뉘앙스가 없지 않다. 세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사회를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 언어를 바꾸기도 하지만 언어도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어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 영혼을 베는 말과 일으키는 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생각이 언어를 오염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 조지 오웰이 한 말이다.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상품이나 가축 등에 쓸 어휘를 사람에게 쓰지 않는지, 사람이 - P106

하는 일을 도구나 수단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지, 늘 말본새를 점검해야 한다. 많은 속어나 욕설 등이 가축과 관련한 어휘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때는 가축이 흔했고 지금은 물건이 흔하다. 이 대목에서 "존중할 만해야 존중하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악머구리 끓듯 악한과 파렴치한이 적지 않으니 심정이야 이해하나 경계한다. 그 옛날 양반이 백정과 노비에게, 백인이 흑인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부자가 빈자에게, 어른이 어린이에게 같은 말을 했다. - P107

‘사람에 대한 존중‘은 내가 옳다고 느끼면 옳은 것이라는 식으로 서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상대주의가 아니라 절대적 가치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우선에 두는 것이 인격이며 인격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 - 타고 나는 것은 인성이다. - 배움과 습관을 통해 갖출 수 있다. 사람을 존중하는자세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에게 배어 있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적절치 못한 어휘를 쓸 수 있다. 아직 배우지 못했거나 잘못 알아 그렇다. 문제는 다음이다. 모르거나 잘못 아는데 올바로 알려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성별이나 출신, 외모, 나이 등을 차별하는 어휘가 아닌 - P107

지도 살펴야 한다. "여자가 할 수 있겠어?", "남자가 그것도못 해?", "뚱뚱해", "키가 작아", "어린 사람이 뭘 알아?", "나이가 있는데 할 수 있겠어요?" 등이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도 해당한다. "여자가 능력 있어",
"남자치고 세심하네", "가정교육을 잘 받았네", "좋은 대학나와서 스마트해", "예쁘게 생겼어", "키가 크고 날씬해서 뭘입어도 잘 어울려", "젊은 사람이 아주 예의바르고 겸손해",
등등.
"젊게 사시네요", "나이보다 훨씬 건강하고 젊어 보이세요" 등등. - P108

칭찬으로 들리는가? 고정관념에 기준한 수직적 평가다.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칭찬으로 착각하기 쉬운 이런발언은 부모 자식 간에도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칭찬이랍시고 하면 칭찬이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으로성별이나 외모, 능력 등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고 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게 된다.
평가가 해악인 이유는 사람을 물건이나 상품, 가축처럼 등급을 매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등급을 왜 매기겠는가? 물건이나 상품, 가축 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싼 값에 팔기위해서다. 무엇이 쓸모 있을지 계산하는 것이다. 평가는 필연적으로 차별로 이어진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관종‘이라는 말로 놀림 받지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생존과 직결돼 - P108

있다. 그러나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이 앞서의 조건들을 채워야 하는 거라 주장한다면 사람을 수단화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에 대한 존엄이라니, 턱도 없다.
사람을 평가하면서 세를 과시하는 어휘를 쓰지 않도록조심하자. 인간의 도구화를 피할 길 없는 세상이라지만 이것만 지켜도 영혼을 다치는 사람들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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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정언 "에서 ‘나의 세계‘는 사고뿐 아니라 국가와 자연 같은 물리적 환경도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연 환경은 언어뿐 아니라 미술과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에 영향을 주고 같은 작품을 보고도 다른 것을 연상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말했다.
"월트 디즈니의 <판타지아>를 기억하세요? 한 섹션에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음악을 사용했죠. 하지만 디즈니 사람들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음악에 맞춰 공룡들이 쿵쾅거리는 장면을 만들었죠. 디즈니 사람들은 남부 캘리포니 - P86

아에 너무 오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들은북유럽이나 러시아 같은 곳에서 겨울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땅을 뚫고 힘차게 솟아오른다는 것을 잊은 겁니다.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힘찬 소리는 공룡이 땅을 내리찍는 소리가 아니라 자연이 솟아오르는 소리인 거죠." (70체험한 낱말과 체험하지 못한 낱말은 자연이 솟아오르는 소리와 공룡이 땅을 내리찍는 소리만큼이나 간극이 크다. 자신이 몸과 정신으로 체험한 낱말을 사용해야 오해의소지를 줄일 수 있고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성할 수 있다.
가끔 멋 부리고 싶어서 체험하지 못한 낱말을 쓸 때가 있는데 여지없이 체하거나 탈나서 뱉어내야 한다.
체험한 낱말의 개수가 살아온 나날만큼 늘 수 있기를바란다. 동시에 체험하고 싶은 낱말을 수집하는 것은 매우설레는 일이다. 우리 십대 시절에 ‘사랑‘이 꼭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당신에게 사랑은 체험한 낱말인가, 체험하고싶은 낱말인가. 체험해서 잘 아는 것인가, 아직 체험하지 못해 잘 모르는 것인가. 세상엔 이처럼 알쏭달쏭한 낱말도 적지 않다. 인간뿐 아니라 낱말 하나도 소우주다. - P87

그렇다 해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 하나. ‘나무가 말을한다.‘는 문장을 예로 든다면 ‘나무‘와 ‘말‘이 어떤 뜻이냐에대해서는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실제로 낱말은 배우고 외워야 한다. 또 ‘말을 한다‘라고 하지, ‘말이 한다‘라거나 ‘한다 말을‘이라고 하지 않는 등의 문법과 형식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이 또한 물리적으로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러나 ‘나무가 말을 한다.‘는 문장이 어떻게 뜻을 가질수 있느냐 묻는다면 이에 대해 가르칠 수 없고 배울 수 없다. 이는 언어적 직관으로 스스로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적 직관이 부족한 사람에게 시적 상상력, 은유, 함축, 의인화 운운해봐야 난해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언어적 직관이 통한다는 의미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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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물리적으로 지나치게 빈약한 환경은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떨어뜨린다.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언어로 발화된다.

언어는 나다.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나, 그리고 대상.
세상은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나를 제외한 전부가 대상이다.
- P46

대상은 내가될 수 없지만
나는 모든 대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따금 내가 나에게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상의 명명(命名)은 이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어사전에 등재된 50만여 개, 세계 최대 백과사전인 브리태니커 전자사전에 등재된 5,500만여 개.
우리는 그 낱말들로 대상과 사물을 가리켜 묘사하거나설명하고, 생각과 느낌 등을 표현해 상호작용하며 성장한다. 0어휘력은 낱말에 대한 지식의 총합을 일컫는다.
달리 말해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것들을 불러내나와 대상에 일어나는 현상을 구조화하며 의식세계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재량이다. - P47

‘산말(실감 나도록 꼭 알맞게 표현한 말)‘, ‘산소리(어려운가운데서도 속은 살아서 남에게 굽히지 않으려고 하는 말)‘는 있어도 ‘죽은 말‘, ‘죽은 소리‘는 없다. 대신 ‘거짓말(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미는 말)‘, ‘신소리 (상대편의 말을 슬쩍 받아 엉뚱한 말로 재치 있게 넘기는 말)‘, ‘허튼소리(함부로 지껄이는 말)‘, ‘헛소리(실속이 없고 미덥지 아니한 말)‘ 등이 있다.
접히고 구겨지고 꼬부라지고 늘어지고 너절해지는 한이 있어도 죽지 않으며 하거나 듣거나 못하거나 많거나 적을 수 있을 뿐이다. 나거나 굳거나 떨어지거나 뜨거나 되거아닐 수 있을 뿐이다. 죽이려 한 권력자는 많았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말을 죽일 수는 없다. - P48

사람에게 났으나 사람보다 오래도록 존속하다 깊숙히 묻힐 것이다. 지구에서 태어나 가장 멀리 날아갔다. 얼마나멀리 갔느냐 하면 지구로부터 무려 210억 킬로미터 이상이다. 참고로 지구 한 바퀴는 고작 4만 킬로미터다.
나는 사람들이 꼴보기싫어지거나 사는 게 힘에 부칠때면 보이저 1호를 떠올린다. 지구의 자연과 인류에 대한정보를 담은 ‘골든 레코드‘를 싣고 1977년에 우주로 날아간그는 44 년째 춥고 어둡고 하염없는 고해를 홀로 헤쳐 가고있으며, 2030년이면 지구와의 교신마저 완전히 끊긴다. 그의 목표는 다른 생명체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4만 년을 더 가야 하고 그 즈음이면 지구의 현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4만 년 후, 보이저 1호가 다른별의 생명체에 건네는 지구의 골든 레코드, 지구의 말과 글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 P49

다음은 ‘말‘에 대한 관용구했다.
말(을) 내다; 남이 모르고 있던 일을 이야기하여 소문을 내다
말(을) 듣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다.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당하다. 기계 따위가 마음대로 잘 다루어지다.
말(을) 못 하다: 말로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말(이) 굳다; 말할 때 더듬거려 말이 부드럽지 못하다.
말(이) 나다; 남이 모르고 있던 일이 알려지게 되다. 말이 이야깃거리로 나오게 되다.
말(이) 되다; 하는 말이 이치에 맞다. 어떤 일에 대하여서로의 사이에 약속이 이루어지다.
말(이) 떨어지다; 명령이나 승낙 따위의 말이 나오다.
말(이) 뜨다; 말이 술술 나오지 않고 자꾸 막히거나 굼뜨다.
말(이) 많다. 말수가 많다. 수다스럽다. 말썽이 끊이지아니하다.
말(이) 아니다: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지가 매우 딱하다.
- P50

표정으로 떠오른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 덕에 나는 한번도 실감한 적 없는 한국어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한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고유의 언어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역사가 깊고 문화적인 나라일 거라 추측했고 종이를 내밀며 "네 이름을 네 나라 글자로 써달라" 하더니 내가 써준 한글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며칠 후 다시 그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또 내게 물었다.
"선경, 너의 나라에도 바다가 있니?"
얼른 바다가 있다고, 삼면이 바다라고 자랑했다.
"멋지구나. 그런데 너의 나라 바다는 무슨 색이니?" - P55

우리나라에선 웬만한 자연 풍경의 색을 ‘푸르다‘로 두루뭉술하게 통칭한다. 하늘도 푸르고, 강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나뭇잎도, 풀도, 산도 푸르다. 눈으로 그것들의 색이 뻔히 다른 걸 보면서도 ‘푸르다‘로 통칭한다. 파란색을 푸르다고도 하지만 연두색도 초록색도 푸르다 하고 물색까지 푸르다 하는 셈이다. ‘빛깔이 밝고 선명하다, 싱싱하다‘는 뜻으로 푸르다고 할 수는 있으나 색깔을 묻는데 하늘도, 강도, 바다도, 나뭇잎도, 풀도, 산도 푸르다 하면 틀린 말은 아니나 옳은 말도 아니며파랑인지 초록인지는 순전히 듣는 사람이 알아서 알아들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 삼면의 바다 색깔이 모두 다르고 무엇보다 블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무 살이나 먹고 대한민국삼면의 바다가 없는 독일에서 알아차렸다. 5분도 안 되는사이에 벌어진 이 날의 대화는 내게 중대한 인식의 전환점이었다. 사물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지 못하 - P57

고 있었다. 남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말과 글의 관성에갇혀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타성적으로 표현하고있었다.
관성이나 타성은 건성이나 비슷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반대말은 ‘관심‘ 42이다. 나는 사람이 제일 가지기 45힘든 것이 관심이라 여긴다. 강퍅할 때는 온통 자기만으로가득 차 깃털 한 개조차 꽂을 데 없는 것이 마음이다. 그 안에 다른 무엇을 들이는 게 쉽겠는가. 대수롭지 않은 주변과일상이라면 더욱 데면데면하다. 옆에 있어도 옆에 없고봐도 본 게 아니며 들어도 들은 적 없다. - P58

어휘력은 문장을낱말로, 서술을 명사나 형용사로 줄이는 기술이기도하다. 세상의 사물과 현상은 저마다 명칭을 가졌고 이 장에 소개한 것처럼 소소해 보이는 것들마저가지고 있다. 심지어 사전에 실린 풀이는 평소 말로 풀어서술한 내용보다 두루뭉술하지 않고 명확하다.
맞춤한 낱말을 구사하면 불필요한 곁가지 서술을 줄여효율적일 뿐 아니라 그 낱말을 디딤돌 삼아 하려는 이야기를 자신감 있게, 자유자재로 발전시킬 수 있다.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을 안다고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사물과 현상은맞춤한 이름을 알면 거의 아는 것이다. 단순히 이름만 아는게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아는 것이다. - P75

앞서 내 동생도 세상에 태어난 지 5년이나 됐는데 내말에 대응하지 못했잖은가. 나 역시 세상 산 지 7년이나 됐어도 중학생과 말다툼을 벌이면 턱없이 밀렸을 것이다. 혹여 이겨도 중학생 언니나 오빠의 분노를 유발해 꿀밤 맞았을지 모른다. 그러면 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을 거다.
울고싶지만 울지 않고, 꿀밤 때리고 싶지만 때리지 않고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감정을 품위 있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표시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파악하고 최종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퀴지을 지성을 갖췄다는 뜻이다. 이과정은 언어라는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뇌속에 수많은낱말들이 혼잡스럽게 뛰어다니느라 다소 골치 아플 수 있지만 활용 능력치가 커질수록 앞서의 과정을 명확하게 진행시켜 세상살이를 한결 수월하게 만들 수 있다. 언어와 의식은 함께 성장하며 총본산이 문학이고 인문학이다. - P81

어른이라고 올 일 없으랴. 목 놓아 펑펑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저마다 가슴 열어젖히면 눈물이 그득히 쏟아져 온 땅이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그뿐, 눈물은나를 변화시키지도 상황을 바꾸지도 못한다. 말 안 하면 왜우는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울지 마라, 소리 내 말하라, 글을 쓰라.
그래야 내가 변할 수 있고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내 속을 풀어내는 것도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설령 말 때문에 사달 68 날 위험이크다 해도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타인과의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되며 이런 상호작용은 주로 말을 통해 확립된다." 장 폴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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