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이발소에 들르면 새삼스레 격식을 차려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다. 나는 이발하러 들른 것이고, 이발사는 이발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고리를 벗고, 의자에 올라앉는다. 이발사는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나일론 보자기를 두르고, 특별한주문이 없으면 알아서 머리를 깎는다. 얘기가 필요없는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일론 보자기와 면타월을 목에서 떼어낸다. 면타월을 탁탁 턴다. 그것으로 이발은 끝이다.
드라이한 과정이다. 그녀와의 섹스가 그랬다.
그녀는 말이 없을뿐더러 표정도 별로 없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얼굴은 희고 머리는 갈색이었다. 조금 살이 찐 편이었다. 키는 보통이었다. 말하자면, 별 특징이 없는 그런 여자였다. - P230

또 몇 날이 지났습니다.
남편은 제게서 바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제가 외출하고 온 날이면 제게서 끼치는 바깥바람 냄새가 좋다고 말하던 남편이었습니다. 그것을살아있는 것으로부터의 서슬‘이라고 남편은 명명했습니다.
바람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저로서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외출에 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남편은 급기야 저에게 바람다운 바람을 쐬어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바다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남편이 왜 그런저런 말을 했던가 알았지요. 남편은 은밀히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255

아이 여자는 세상과 얼마간의 완강한 거리를두고 있구나. 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타입이었던 것입니다. 집착 뒤에 올지도 모르는 허무와 환멸 따위를감당해낼 저항력, 그것이 그녀의 몸에는 단 하나도없는 것처럼 보였지요.
허무와 환멸 따위를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것 같았습니다. 그 두려움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유지하도록 그녀를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다 그녀는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걸까. 궁금했지만 그런 건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건 대개는 원형질과도 같은 것이어서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은 거니까요. - P266

저는 공주로 달려가기로 맘먹었던 겁니다. 갑사라는 절이 공주에 있으며, 그 공주라는 곳이 대천으로부터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같은 충청도 안에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기막힌 겨자소스를 먹는 순간, 저는 그곳 갑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있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밤바다에 남겨두고, 저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어떤 남자한테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충동적이며 비현실적입니다.
- P287

미친 해일이 일어 파도는 제 몸을 무너뜨립니다. 저는 소리를 지릅니다. 대지가 사정없이 요동치고, 어디선가 용암이 펑소리를내며분출합니다. 저는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바람이 자고, 바다가 잔잔해졌을 때, 그는 제 몸에서 천천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보았지요.
그의 두 뺨에 번들거리던 눈물을, 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순 있다. - P361

거기엔 거리가 있고 시간이 개입돼 있다. 두 달이조금 넘었을 뿐인데, 그녀와 나 사이엔 감히 겁(劫)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거리가 존재한다. 특별히 내가 비정하고 몰인정한 타입의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뭔가가 잘 정리된 듯하다. 정돈된 듯하다. 성적인 욕구를 모르고 살아가던 예전의 그 질서가 다시찾아온 듯했으나, 결코 예전의 그것은 아니었다. 훨씬 더 정리되고 정돈된 느낌.
어쩌면 나는 이런 형태의 안정을 찾기 위해 강보경이라는 혼돈의 늪을 건넌 건지도 모른다. 거듭말하지만, 물론 내 의지가 시킨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나도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 P378

그것은 오히려 저를 비이성적이고 원시적이고어쩌면 신화적이며 상징적인 관계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점차 다른 세상으로 멀어져가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몇날 며칠 그를 지독히도 그리워하고, 흐느끼고, 격정에 휘말리고, 관계의 해체를 두려워하고, 죽음처럼 고통스러워한 뒤로는 이제 그다지 혼돈스럽지만도 않습니다.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이제 차라리 자유롭다고까지 느끼니 말입니다. 저어쪽 사납게 흐르는물 너머로 아이들의 땅이 보입니다. 남편의 땅이 보입니다. 저의 땅이 보입니다. 한 사내가 저를 태우고 격류를 가로질러 이쪽 땅 위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사내는 물을 따라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이제 이곳에, 이쪽 세상에 또 다른 제가존재하는 것입니다. - P392

가생각해 보면 그런 암시는 이전에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한 여인의 낯선 오피스텔에서 제가 그를 처음 안던 날, 저는 혼돈을 느끼면서도 15층 상공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 같다는 생각을 얼핏 했었지요. 침대에 누워<인도방랑>을 읽는 저를 제가 내려다보기도 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지요. 애드벌룬을탄 제가 지상의 또 다른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덕수궁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입원한 남편의 병간호를 하는 저는 전혀 다른사람이 돼 있었지요. 하루에 밥을 일곱 번이나 먹는괴상한 여자로 변해 있었다는 게 아니고, 소프트웨어를 갈아끼운 인간이란 게 가능하다면, 바로 그런인간이 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 P393

눈물을 흘리면서도 저는 문득문득 이 세상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신발끈을 조여매고 먼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어쩌면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자라 허공을 떠올라야할 것 같았습니다. 선녀처럼. 제가 살던 곳은 이곳이 아닌 다른 혹성인 것 같더란 말입니다.
저 자신이 불쑥불쑥 낯설게 느껴질 때마다 이게꿈이지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껏 내가살아온 현실이 오히려 꿈이지 싶었습니다. 이렇게무책임하게 세상과의 관계를 저버려도 되는 건가생각되다가도, 더 크고 원초적인 세계와의 관계에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레는 자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 P408

잠시 떠났던 세상의 구조로 다시 돌아간다는 게 저에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력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구조가 좋아서면 그건 이제 아닙니다. 분명 그건 아니지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제가 불편함과 낯설음과 어색함을 감수하자는 것뿐이지요. 견뎌보자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게 최선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저를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나. 저는 언제까지나 남편 곁에 있고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럭저럭 다시 그런 생활과 구조에 자연스럽게 물들어버리면 이전과 흡사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도 끝내 견딜 수 없어지면 독수리가 되든 선녀가 되든 해서 하늘이든 바다 건너든어디론가 날아가버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서.
- P409

그녀의 기록은 거기까지였다. 더이상 그녀의 글은 이어지지 않았다.
WAF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만난건 짧은 꿈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현실로 잠깐 퉁겨져 나갔다 긴 꿈으로 되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그녀는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린 존재였다.
느닷없이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찬란하게 불타오르다.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 환상이었다. 내게 있어 그녀가 그랬듯, 그녀에게 있어 내가 그랬나보다.
그녀는 날 더 이상 그리워하지도 않는다지 않은가. 다만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말했듯, 나로 인해일상적인 경험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버린 것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 P4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뭐가 그리도 우스웠던지. 저는 그녀를 먼저 보내고 카페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남편을 만나려면 아직 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남편을 카페로 불러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어둠으로 푸르게 물들어가는 바깥에서 만나는 게좋을 듯했습니다. 바깥 공기가 상큼할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별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R저는 손목시계와 저녁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시월의 저녁 여섯 시 오십 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섶에도 활기참이 넘쳤습니다. 가로수며, 시청의 전자시계,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네온들이 아주 깨끗한 바람에 씻기운 듯했습니다. - P83

대한문 앞에는 이상한 어둠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상한‘이라는 말에 저는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일 재주가 없군요. 저는 언젠가도 그곳에서 남편을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다. 여름이라면 여덟 시 이후, 겨울이라면 여섯 시 이후의 어둠이 그렇습니다.
대한문 우측에는 55번이라든가 603번 좌석버스를 타는 곳입니다. 대한문 좌측으로 가면 지하철 입구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작은 파출소가 나오지요.
좌석버스 정류장이거나, 우측 지하철 입구께나, 파출소 앞은 그다지 이상할 게 없는 어둠들입니다.
그런데 대한문 앞에, 제가 말한 시간에 한번 가서보세요. 오싹한 기분이 들 겁니다.
그 시간대에 그곳에 있어봤지만 그런 기분을 못느끼겠더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위아래 흰옷을 입고 다시 한 번그 시간에 거기에 가서 보십시오. 그리고 푸른색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옷을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 P85

이런 식으로밖에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고 있는 모호함의 정체를 알기 위해 저는 굳이 슈퍼컴퓨터를 동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동원한다고 해도 아마 알 수 없을 겁니다. 요컨대 우리부부는 문제 제로의 상태라는 겁니다. 문제 제로.
뭔가를 배우는 게 좋겠다는 건 제가 사양을 했고 가끔 밖에 나가는 건 제가 동의를 했으므로, 그날도 저는 밖으로 나와서 가고 싶은 델 갔던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가끔씩은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만, 저는 혼자인 것이 더 좋습니다. 수다를 떠는 건 제 쪽이 아니고 항상 상대편이었으니까요.
이것도 천성인지, 전 수다 같은 걸 떨 줄 모릅니다. 상대편의 이야기가 꼭 제 구미에 맞으라는 법도없지 않겠습니까. 응, 응 하고 최소한의 반응을 보이는 일조차 죽도록 힘겨울 때도 종종 있게 마련이거든요. - P98

고추냉이는 아주 비정한 맛을 가지고 있다. 맛이 풍요롭지 못해 생선회가 아니고는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겨자는 풍요롭다. 아주 좋은 겨자는 기름도 동동 뜨고, 쫀득쫀득한 게, 구수하기조차 하다.
겨자라면 나는 거의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그래서 막걸리에다 밥을 말아먹는다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식탁에 오른 거의 모든 음식을 이 겨자에 찍어 먹는다. 인절미도 겨자에 찍어 먹는다. 마늘도, 식빵도.
초장에서 고추냉이를 거쳐 겨자에 이르는 이 지극히 간단한 노정에다, 나는 거의 십오 년 세월을바친 셈이다. 이 정도면 기구하다고도 할 수 있지않을까.
나는 스카치 투명 테이프와 스테인레스 가위와,이 겨자를 좋아한다. - P117

이해되지 않아도 되고, 변명하지 않아도 되고, 타당성 따위를 찾느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혼돈 자체가 질서가 되는 세상. 합리적이라 일컬어지는것들이 오히려 참을 수 없이 거추장스러운 세상. 제가 이전에 살던 질서와 가치와 의무와 도리의세상은, 저 숱한 빌딩숲을 건너고, 소음의 하늘을지나고, 시간의 강을 건너,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만큼 먼 곳에 조용히 버려져 있다는 기분입니다.
제 삼십사 년의 생애가 잔해되어 널브러져 있다는 기분입니다. 해가 지는 저 서녘의 멀고 먼 벌판위에 말입니다. 저는 제가 다다른, 설레는 이 혼돈의 세계에서 새로운 느낌과, 새로운 활기와, 새로운감정의 피를 수혈받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 P143

그녀는 일원이 되지 못한다. 이 사회의 일원이되지 못한다.
일원이 된다 해도 한시적이다. 나나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다. 그녀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그런 식으로 이십팔 년 혹은 이십구 년을살아온 것이다.
일원이 되지 못하는 삶. 어쩌면 그녀에겐 이미그게 더 자연스런 삶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함께직장에서 일한 것도 일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거처도 늘 일정치않다. 사당동에 사는가 하면, 어느 틈에 원효로다.
면그녀의 유일한 일원이라면 나 정도뿐이다. 적어도 우리는 7년 이상 만남을 유지해 오고 있으니까.
그녀와 한 번 잔 뒤로 또다시 그런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를 15일에 한 번쯤은 볼 수 있다. 왜 다시 자지 않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안다. 그녀의 몸 둘레에 씌워져 있는 투명막이라 - P178

는게 단추만 풀면 언제라도 벗어던질 수 있는 외위와는 정말 다르다는 것.
이제 또 그녀는 거처를 옮기려는 것이다. 정처없는 삶이란 어쩔 수 없는 거라지만, 그녀가 살림살이꾸려들고 서울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걸 보전 왠지 유민(民) 같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결혼을 해서든, 아니면 무슨 든든한 직장을 구해서든 왜 정주하지 못하느냐고 그녀에게 물을 수도있겠지. 그러나 그런 물음은 어쩐지 그녀에게 더 깊은 상처만 줄 것 같다. - P1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의 말


여전히 낯선 여름에


낯선 계절이야 어디 여름뿐이겠는가. 이해될 수없는 한 우리가 놓여 있는 세계 자체가 낯설지 않겠는가. 세계가 밤과 낮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면, 세계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낯선 계절이야 어디 여름뿐이겠는가. 이해될 수 없는 한 우리가 놓여 있는 세계 자체가 낯설지 않겠는가 세계가 밤과 낮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면, 세계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면,
그 낮과 밤, 그리고 모든 계절이 세계라는 이유로얼마든지 낯설지 않겠는가.
필연과 우연은 어떠한가. 이해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필연이라 한다면, 이해의 세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현상들은 우연일 것이다. 필연과우연이라는 건 말하자면 이해와 몰이해, 안과 밖,

낯익음과 낯섦의 관계일 수도 있다.
이해를 보자.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인문·사회 · 자연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세계를 이해의 세계라 한다면 그것으로 증명할 수 없는 세계를 몰이해의 세계라 할것이다. 이해의 세계가 몰이해의 세계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세계를 너무 쉽게부정해 버린다. 이해할 수 없어. 우연일 뿐이야. 낯설어....…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적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미지의 세계, 우연의 세계, 저 바깥의 세계를 부정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낯선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작동하지 않는 것이아니다. 그 낯선 세계는 우리의 삶 순간순간에 엄연히 개입하며 한 인간의 운명을 관장한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가장 극적이고 격정적이며 어떤 인간도 피해갈수 없는 낯선 세계가 사랑의 세계다. 사랑은 인류가구축해 놓은 가치와 제도와 문화와 규범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병적인 증상을 빼곤 이런 경우가 없다.

우리는 사랑을 병이라 일컫지 않음으로써 가까스로 낯선 세계를 긍정한다.
이와 같은 체계 긍정의 개인적 사례가 바로 사황이다. 이로써 모든 인간들이 영매자의 특별한 체힘을 공유한다. 이 낯선 계절의 혼돈을 통과한 자는미지와 우연과 저 바깥 세계의 신비를 알아 눈이 깊어진다. 그런 자라야 비로소 ‘나는 행복하게도 불륜에 빠졌다.‘라는 말로 첫 이야기를 떳떳하게 시작할수 있을 것이며, 그런 자라야 이 첫 문장이 낯설지
않은 독자가 될 것이다.

2005년 7월,
여전히 낯선 여름에
구효서

만성화되무너지면 강물에 빠져 죽기밖에 더하겠어? 이렇게 대범한 척해도 불길함은 언제나 주사 맞는 일만큼 새삼스럽다. 새록새록.
AU불길함을 없애기 위해 불길함이라는 세 글자를되풀이해서 읽는다. 불길함, 불길함, 불길함, 불길함‥…… 이렇게 수십 번을 되풀이해 읽는다. 그러면불길 ‘함‘은 마치 전 ‘함‘의 일종이거나, 특별한 용도의 사서함 이름 같아진다. 이쯤 되면 재미도 없지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삶이 평온했다고 묘사했는데 외부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내가 알게 된 내면의 폭풍과 요동은 더높은 소명에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희귀한 일이 아니었지요. 내 마음의 폭풍이 처음 휘몰아친 건, 초보적인 텍스트를 4년간읽은 후 드디어 성경전서를 읽을 권한을 인가받았을 때입니다. 우리의 성경들은 길리어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자물쇠가 채워진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강인한 정신과 흔들림 없는 인격을 지닌사람에게만 믿고 맡길 수 있었는데, 여성은 해당이 되지 않았고 아주머니만 예외였지요. - P431

나는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베카에게 일부 털어놓았
"알아." 베카가 말했어요. "나도 겪었거든. 길리어드 최상부의 모든사람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어."
"어떻게 말이야?"
하느님은 저들이 말하는 존재가 아니야." 베카는 길리어드를 믿을 수도 있고, 하느님을 믿을 수도 있지만, 둘 다 믿을 수는 없다고했어요. 그런 식으로 자기 내면의 위기를 관리해 왔다고 했어요.
나는 과연 선택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내 은밀한두려움은, 둘 다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었거든요. 그래도 믿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믿음을 갈구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과연 믿음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갈망에서 오는 걸까요? - P434

이것이 아주머니가 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배우고 있었어요. 그들은 기록했어요. 그들은 기다렸어요. 그들은 정보를 이용해 오로지그들만 하는 목적을 달성했어요. 하녀들이 항상 말했듯이 그들의 무기는 강력하지만 감염성이 있는 비밀들이었어요. 비밀, 거짓말, 간교와 기만.…. 그러나 그 비밀들, 그 거짓말들, 그간교와 기만들은 아주머니들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것이기도 했어요.
내가 아르두아 홀에 남게 된다면…… 진주 소녀 선교사업을 완수하고 정식 아주머니가 되어 돌아온다면, 이런 존재가 될 테지요. 이제까지 내가 알게 된 모든 비밀들은 물론, 당연히 존재할 수많은 다른 비밀들까지, 내 것이 될 테고 내가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요. 이런 모든 권력, 침묵 속에 사악한 자를 심판하고 그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처벌할 수 있는 이 모든 잠재력, 이 모든 복수.
말씀드렸듯이 제게는 복수자의 면모가 있고, 과거에는 그런 내 모습이 싫어 뉘우치곤 했어요. 뉘우쳤으나 씻어 버릴 수는 없었죠.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닐 거예요. - P440

나의 독자여, 나는 이제 면도날 위에 서 있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위험하고 심지어 무모한 계획을 진행해 나가는 길이 있다. 어린 니콜을 통해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킬 꾸러미를 전달해성공할 경우 저드와 길리어드 둘 다를 벼랑 끝으로 밀치는 첫 일격을 가할 수도 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는 당연히 반역자로 낙인찍혀 오욕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아니, 오욕 속에 죽게 될 것이다.
아니면 더 안전한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아기 니콜을 저드 사령관에게 넘겨주어, 한순간 찬란하게 빛나다가 불복종의 죄목으로 휙 꺼지게 둘 수도 있다. 그 애가 이곳에서 자기 역할에 순순히 따를 가능성은 제로다. 그다음에 나는 길리어드에서 아마도 대단할 포상을 받아 챙기면 된다. 비달라 아주머니는 무존재로 변할 것이다. 어쩌면내가 정신병원에 보내 버릴 수도 있다. 아르투아 홀에서 내 지배력은 완전해질 테고 명예로운 노년도 보장되리라.
그렇게 되면 저드와는 골반에서 딱 붙은 한 몸이 될테니, 응징과 복수라는 생각은 포기해야 하겠지. 저드의 아내 슈나마이트는 부수0 - P430

의 피해가 될 것이다. 내가 제이드를 임모르텔 아주머니와 빅토리아주머니와 같은 기숙사 공간에 배정했으므로, 제이드가 제거되그 두 사람의 운명도 위태로워진다. 길리어드에서는 다른 곳과마찬가지로 연좌제가 유효하다.
내가 그런 이중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인가? 그렇게 철저히 배반할 수 있는 위인인가? 쟁여 둔 무연 화약을 끌고 길리어드의 토대밑으로 이만큼 터널을 파 들어왔는데, 여기서 비슬거릴 것인가? 나는 인간이므로, 그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경우, 나는 내가 이토록 힘겹게 쓴 이 페이지들을 파괴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당신도 파괴해야 할 것이다, 내 미래의 독자여, 성냥불을 화르르 붙이면 당신은 사라지리라. 한 번도 존재한적 없고, 영영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싹 지워지고 말 것이다. 내가당신의 존재를 부정하리라. 얼마나 신과 같은 기분인가! 절멸의 신이라 해도 말이다.
나는 흔들린다, 나는 흔들린다.
그러나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 - P451

처참했어요. 무시무시했어요. 시녀를 보는 내 관점에 완전히 다른차원을 더하는 경험이었어요. 아마 우리 어머니도 그랬을지 몰라요,
야성적이다 못해 흉포한 존재. - P4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이데이가 죽인 게 아니야." 일라이자가 말했어요. "파트너였던다른 진주소녀의 짓이란다. 아드리아나는 그 파트너가 아기 니콜의행방에 대한 의혹을 품자 막으려 했을 거야. 싸움이 벌어졌을 거고,
아드리아나는 진 거지."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요. 퀘이커 교도들, 닐과 멜라니, 그 진주소녀까지"
길리어드는 살인에 거침이 없지." 에이다가 말했어요. "광신도들이니까."
원래는 덕망 있고 신심 깊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건데, 광신도라면살인을 일삼으면서도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고 에이다가 설명해 주었어요. 광신도는 살인이, 아니 어떤 사람들을 죽이는 건 도덕적이라고 믿는다고 말이에요. 나도 알고 있었어요. 학교에서 광신도에 대해 배웠거든요. - P288

이 모든 이야기가 다 함정이면…… 나를 길리어드로 꼬여 내려는 영악한 수법이면 어떻게 하지? 들어가긴 하는데 나오지는 못할거야. 그러면 깃발을 올리고합창단이 노래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수없이 행진을 하겠지. TV에서 본 것처럼 대규모 행사들이 열릴 테고, 내가 중앙에서 장식품 노릇을 하게 될거야. 아기 니콜, 제자리로돌아왔다. 할렐루야. 길리어드 TV를 위해 웃어요.
아침이 되어 에이다, 일라이자, 가스와 함께 앉아 기름진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런 두려움을 털어놓았어요.
"우리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 봤단다." 일라이자가 말했어요. "도박이지."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매번 도박이야." 에이다가 말했어요.
"이건 좀 더 심각한 도박이지요." 일라이자가 말했어요.
"나는 너한테 걸 거야." 가스가 말했어요. "네가 이기면 정말 근사할 거야." - P298

‘안전한 곳으로 너를 데리고 가는 거야. 내가 네 부모님과 얘기를하는 동안 너는 거기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안전한 장소에 다다르면꼭 뭘 좀 먹겠다고 나와 약속하렴. 알겠니?"
"배고프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말했어요. 아직도 애써 눈물을 참고있었어요
"좀 안정되면, 배가 고플 거야." 그녀가 말했어요. "어쨌든 따뜻한우유 한 잔만이라도" 에스테 아주머니는 내 손을 잡고 꼭 쥐었어요.
‘다 잘될 거다. 세상만사가 다 잘될 거야."
그러더니 손을 놓고 가볍게 토닥여 주었죠.
내게는 그 이상 위로가 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또 울음이 터질 것같아져 버렸어요. 친절은 가끔 그런 효과를 낳을 때가 있답니다.
"어떻게요?" 내가 물었죠. "어떻게 잘될 수가 있나요?"
"나도 모르지." 에스테 아주머니가 말했어요. "하지만 잘될 거란다.
내겐 믿음이 있단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어요. "믿음을 갖는 건 가끔 힘들게 노력해야 하는 일이란다." - P341

해가 지고 있었어요. 봄 공기는 그맘때 자주 볼 수 있는 황금빛 아량으로 가득했죠 먼지, 아니면 꽃가루, 너무나 상큼한, 갓 돋아나펼쳐진 나뭇잎에는 반들거리는 고유의 광택이 났어요. 잎사귀 한 장한 장이 마치, 절로 포장이 풀리고 흔들려 쏟아지는 선물 같았죠. 하느님이 방금 창조하신 것 같지않니, 에스테 아주머니는 예전에 ‘자연에 대한 감사 시간에 그렇게 말하며, 죽은 듯 보이는 겨울나무들위로 손을 흔들어 싹이 트고 잎새가 펼쳐지게 만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려 보이곤 했어요. 잎새 한 장 한 장 다 저만의 모양이 있단다. 에스테 아주머니는 덧붙여 말했죠, 꼭 너희들처럼! 그건아름다운 생각이었어요.
에스테 아주머니와 나는 차를 타고 황금빛 거리를 지나쳤어요. 이집들, 이 나무들, 이 인도들을 내가 다시 볼 수 있을까요? 텅 빈 인도, 고요한 거리, 집 안에서 불빛이 비치고 있었어요. 저 안에는 행복한 사람들, 자기가 어디 소속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죠. 벌써 추방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내가 나 자신을 추방했으니 자기연민을 느낄 자격이 없었지만요. - P342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첫 번째 면접은 엘리자베스 아주머니였어요. 그녀는 내가 반감을 갖는 게 결혼인지, 저드 사령관과의 결혼인지를 물었어요. 그래서 결혼 전반에 반감이 있다고 했더니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었죠. 내 결정이 저드 사령관을, 사령관의 감정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봤냐는 질문도 했어요. 나는 하마터면 저드 사령관에게는감정이란 게 별로 없어 보였다고 대답할 뻔했지만 베카가 불경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아주머니들이 봐주지 않을 거라고 해서참았어요.
저드 사령관의 감정적 안녕을 바라고 기도했다고, 누구보다 행복할 자격이 있는 분이니 다른 아내가 그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 믿는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인도가 나는 그분께, 아니 다른 어떤 남자에게도 그런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을 거라고 알려 주셨고, 따라서 한남자와 한 가정보다는 길리어드의 모든 여성에게 봉사하는 일에 전념하고자 한다고 말했어요. - P353

‘아그네스‘그녀가 말했어요. "먼저 축하를 해야겠구나. 숱한 장애물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고, 우리와 합류하라는 부름에응답했으니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어떤 부름을 받았느냐고(어떤 목소리를 들었느냐?) 물을까 봐 두려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어요.
"저드 사령관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아주 확실한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고 했어요.
"현명한 선택이야." 그녀가 말했어요.
"뭐라고요?" 나는 놀랐어요. 여성의 참된 의무라든가 뭐 그런 얘기에 대해서 도덕적인 훈계를 늘어놓을 줄 알았거든요. "아, 저, 실례지만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네가 저드 사령관의 아내감으로 적합하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 P356

모든 것은 기다리는 여자의 차지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뒷굽은닳는다. 인내심은 미덕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고색창연한 지혜의 말들이 언제나 진실인 건 아니지만 가끔은맞는다. 여기 언제나 옳은 말이 하나 있다. 모든 건 타이밍에 있다.
농담이 그렇듯.
우리가 이 근처에서 농담을 많이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는 경박한 악취미로 비난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권력자의 위계에서농담이 허락되는 건 최정상에 있는 이들뿐이고, 그들도 개인적인 자리에서만 농담을 한다.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가자. - P361

나는 눈물, 아그네스의 위로, 영원한 우정의 맹세, 기도는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있었다. 가장 단단한 심장도 녹일 수있었으리라. 내 심장도 녹을 뻔했으니까.
요지는 베카가 이 침묵의 수난을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는 거다. 하느님이 이걸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여기 만족할 수 없었다. 한번 판사는 영원히 판사다. 나는 판결을내렸고, 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어떻게 집행할 것인가?
한동안 숙고하다가 나는 지난주에 드디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슐라플리 카페에서 민트 티를 한잔하자고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를초대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내가 특별히 골라서 총애를 베풀어 주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 P364

을 모색하고 있을 겁엘리자베스는 이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앙심을 품을 수가 있어요?" 그녀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우정은 살갗 두께밖에 안 될 수도 있는 법. 걱정 말아요. 내가 보호해 줄 테니까."
한없는 감사를 드려요, 리디아 아주머니. 참으로 고매한 인격의소유자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보답으로 한 가지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 그럼요! 물론이지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무엇이지요?"
"위증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말했다.
이건 사소한 부탁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리라. 길리어드에서는 위증을 엄히 다스린다. 그럼에도 빈번하게 행해지는 일이지만. - P368

내가 가출한 제이드로 보낸 첫날은 목요일이었어요. 멜라니는 내가 목요일에 태어났으니까 먼 길을 떠날 거라고 했어요. 이건 오래된 동요의 가사였는데, 수요일의 아이는 슬픔이 가득하다는 얘기도 있었지요. 그래서 나는 언짢고 심술이 날 때면 멜라니가 요일을잘못 안 거라고, 사실 나는 수요일에 태어났을 거라고 말했고, 그러면 멜라니는 아니라고,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태어난 시각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겠냐고 했어요.
아무튼 목요일이었어요. 나는 가스와 함께 인도에 앉아 있었어요. - P371

위에 마젠타 반바지를 걸치고 너구리가 씹어 삼켰다가 토한 것같은 낡은 은빛 젤리 신발을 신고 있었죠. 우중충한 핑크색 티를 입었는데, 에이다가 문신을 보여 줘야 한다고 해서 민소매였어요. 회색 후드티를 허리에 둘러 묶고 검은 야구모자를 썼어요. 맞는 옷은하나도 없었어요. 쓰레기통에서 아무거나 주워 입은 것처럼 보여야했거든요. 험한 데서 잔 것처럼 보이려고 새로 염색한 녹색 머리카락도 일부러 더럽혔어요. 초록색 물이 이미 빠지고 있었어요.
"굉장한데." 의상을 다 갖춰 입고 갈 준비를 마친 나를 보고 가스가 말했어요. - P372

공백으로 에이다와 일라이자는 길리어드에 대해 최대한 많이 가르쳐 주려 노력했어요. 다큐멘터리도 보고 TV 영상도 많이 봤어요. 그렇지만 그곳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눈앞에 그려지지가 않았어요. 전혀 준비가 안된 느낌이었어요.
생츄케어와 여자 난민들이 기억났어요. 나는 그들을 보았지만 정말로 보지는 못했어요. 자기가 아는 장소를 떠나, 모든 걸 잃고, 알지못하는 곳으로 여행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얼마나 허허롭고 캄캄한 기분일까요? 그래도 아마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해 주었던 아주 은은한 희망의 빛은 있었겠지요.
이제 금방, 나 역시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될 터였어요. 캄캄한 곳에서, 아주 작은 불씨만 가지고, 내 길을 찾으려 애쓰게 될 거예요. - P389

파란 스케치 잉크 병, 내 만년필, 은닉처에 맞춰 책장 여백을라낸 내 공책, 이것들을 통해서 나는 내 메시지를 나의 독자, 당신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어떤 종류인가? 어떤날은 나 자신이 길리어드의 죄악을, 나 스스로의 죄까지 포함해서,
낱낱이 모으는 ‘기록의 천사‘라고 생각한다. 다른 날은 어깨를 으쓱하고 이처럼 고고한 도덕적 어조는 털어 버린다. 나는, 근본적으로,
지저분한 가십을 배포하는 자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안타깝게도 나는 어느 쪽이든 당신의 평결을 끝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더 큰 두려움은 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길리어드가 천년을 가리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에,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폭풍의 고요한 심장에 자리한 이곳에서는, 그렇게만 느껴진다. 너무나평화롭다, 거리들은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정연하다.  - P398

그러나 기만적으로 평온한 표면 아래로, 전율이 흐른다, 고압선 근처에 있는것처럼, 우리 모두는, 가늘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우리는 진동한다. 우리는 떨고 있다. 우리는 항상 경계를 놓지 않는다. 흔히 공포정치라고 말하곤 하지만, 정확히 말해 공포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
대신 공포는 마비시킨다. 그렇게 해서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 P398

베카와 나는 진주 소녀와 개종자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추수 감사에서 처음 제이드를 보았습니다. 행동거지가 다소 어색한 키 큰 소녀로, 자칫하면 너무 대담해질 수도 있는 똑바른 눈길로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어요. 벌써부터 그 애가 길리어드는 물론이고아르두아 홀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곧 아름다운 의례에 정신이 팔렸고, 그 아이 생각은 별로 많이 하지않게 되었지요.
머지않아 우리 차례가 될 거야, 나는 생각했어요. 베카와 나는 탄원자로서의 수련을 마쳐 가던 참이었어요. 정식 아주머니가 될 채비도 거의 끝났어요. 이제 곧 우리가 입는 갈색 옷보다 훨씬 예쁜 은색 진주 소녀 드레스를 받게 되겠지요.  - P409

그로브 박사가 참여 처형에서 갈가리 찢겨 죽자 베카는 기절했어요. 몇몇 아주머니들은 이런 반응을 효심 때문이라고 봤어요. 그로박사는 사악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남자였고 고위직의 남자였으니까요. 그는 또한 아버지였고, 순종적인 딸은 아버지에게 존경을바쳐야 했고요. 그러나 내가 아는 바는 달라요. 베카는 그의 죽음에책임감을 느꼈던 거예요. 베카는 애초에 내게 그의 죄상을 털어놓지말았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베카를 안심시켰지만, 베카는 나를 믿지만 리디아 아주머니가 어떻게든 알아낸 게 틀림없다고 했지요. 아주머니들은 그런 식으로 권력을손에 넣었다는 거예요. 진상을 알아내서 차마 입에 올려서는 안 될일들을 알아내서 말이에요. - P411

우리 삶이 평온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적당한 단어가 아닐지도 모보겠어요. 우리 삶은 어쨌든 질서정연했어요. 비록 다소 단조로웠지번호 우리 시간은 꽉 채워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잘 가지 않았어로 탄원자로 입회했을 때 나는 열네 살이었고 이제는 성년이 되었근데 나 자신은 별로 성장했다는 실감을 할 수 없었어요. 베카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는 어떤 면에서 동결된 것 같았어요. 얼음 속에행동되어 보존된 것처럼요.
창설자들과 나이 든 아주머니들에게는 날카로운 서슬이 있었어요 그들은 길리어드 이전의 시대에 인격이 형성되었고, 우리는 면제받은 투쟁을 해야 했고, 이 투쟁이 그들에게도 한때는 있었을 부드러움을 모두 갈아 없애 버렸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수난을 강제받지 않았어요. 우리는 보호받았고, 전반적인 세상의 가혹성에 대처할 필요도 없었어요. 우리는 선조들의 희생으로 수혜를 입었어요.
우리는 이 사실을 꾸준히 상기해야 했고, 감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그러나 측량할 수 없는 부재에 감사하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안타깝지만 우리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세대가 불속에서 단련된 정도를 온당히 평가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결여된 무자비한면모를 갖고 있었어요. - P4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