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에게는 혐오가 많았고, 이 온화하고 뛰어나며 매력적이고 독실한 남자가 그런 혐오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그 미움을 정당화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건 무시무시한혐오였다. 루이스는 자기 신념에 독선적이었다. 전투적 기독교인은그래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단히 지적이고 고등 교육을받은 남자가 자기 의견과 편견에 독선적으로 군다는 건 허용해도 좋을 일이 아니다. 오직 인사이드 클럽만이 지지할 일이다. - P426

루이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J. R. R. 톨킨도 많은 분야에서 루이스와 같은 견해를 보였고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톨킨의 소설에서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톨킨이 악을 다루는 방식을 보자. 톨킨의 악당들은 오크와 검은 기수들(고블린과 좀비들: 신화적인 존재들이다.), 그리고 인간으로보인 적도 없고 인간 같은 구석도 없는 어둠의 군주 사우론이다.
이들은 사악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악의 화신이며, 증오의보편 상징이다. 잘못된 일을 하는 인간들은 완성된 인물이 아니라보완 요소로 작동한다. 사루만은 간달프의 어두운 자아이고, 보로미르는 아라고른의 어두운 자아다. 뱀혓바닥 그리마는 거의 대놓고 세오덴 왕의 약한 부분이다. 놀랍도록 혐오스러운 타락한 골룸도 있기는 하다.  - P427

하지만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읽는 그 누구도 골룸을 미워하거나, 미워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다. 골룸은 프로도의 그림자다. 그리고 모험을 완수하는 존재는 영웅이 아니라 그림자 쪽이다. 톨킨이 악을 "타자"에게 투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진짜 타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톨킨은 이 점을 아주 분명히 드러낸다. 톨킨의 윤리는 꿈의 윤리처럼 보상 성격을 띤다. 마지막 "답"은 미지의 상태로 남는다. 하지만 책임감이 받아들여지기에, 너그러움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황금률‘이 개가를 울린다. 사실 『반지의 제왕을 좋아한다면 골룸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루이스의 경우, 책임감은 적과 싸워 이기는 기독교 영웅이 - P427

라는 형태로만 나타난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의 승리다. 적은 자기자신이 아니라 온전히 타자이며 악마들린 자다. 이렇게 투사하면저자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고, 실제로 이 이야기들 몇 개는잔인함이 지배한다. 루이스의 우주 3부작 주인공 랜섬은 이 책의주요작 『다크 타워』에도 나온다. 랜섬의 몇 마디는 진정 인사이드클럽답게 아주 겸손하면서도 대단히 아는 체하는 투로 나온다. 나는 언제나 골룸이 더 좋다.
루이스는 우주 3부작 중에서 첫 권인 『침묵의 행성에서」핵심 장면들만 보더라도 SF 작가로 불려야 한다. 여기에 나오는 화성 풍경과 거주자들에 대한 묘사는 웅장하다. 선명하고, 감정적으로 강력하며, 정말로 기이하다. SF는 그 후 줄곧 그 장면을 흉내 냈다. 다크 타워』에도 그런 시각적인 힘이 넌지시 보이기는 하지만,
민망할 정도로 순진한 성적 색채 때문에 약화되고 말았다. 루이스는 자기 소재를 통제하지 못한다. 깊은 무의식의 소재를 끌어내는사람이라면 가끔 그 속에 잠긴다 해도 탓할 수 없다. - P428

감정적인 성향에 더 흥미가 가기는 한다. 감정 선호가 예술적으로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미지와의 조우에서는 때로 감정이 마음을 움직인다. 영화 내내 아이들이 정말로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외계인들이 순수한 빛 속에 잠긴 어린아이 같고 가냘프고 거의 태아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 순간에는 깊은 반향이 울린다. 하지만 그러다가 스필버그가 재앙 같은 클로즈업으로 그 순간을 날려 버린다. 손재주 참! 아무도 아무 일도 조용하게나 수월하게 하지 못한다. 카메라에 필름을 넣는 장면마저 그렇다.
모두가 거대한 상어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움직임이격하고 부산하다. 그래도 배우들은 워낙 훌륭해서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도 개성과 믿음이 가는 반응들을 다진다. 우리는 배우들과함께 느끼고, 동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또 과도한 흥분이내려앉고 볼륨이 커지고 만다. - P435

도리스 레싱은 위험을 감수하지만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유머나 재치나 장난기를 기대하고 레싱의 책을 찾는 사람은 없고, 레싱의 작품에서 장난과 속임수와 조작이라는 의미에서의 게임을 찾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카스타』 서문에서 레싱은 특유의 솔직한 태도로 현대 소설가가 SF에 진 빚에 대해 말한다. 점잖은 "사변 소설"로 도피하지도 않고 자신의 책을 과학소설로 소개하고 있으니, 나도 고맙게 이 책을 과학소설로 평하련다. 과학소설은 지금까지 가식적인 이들에게 사과하고 무지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스스로를 설명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했으니 말이다.
누가 썼는지 모르고 시카스타』를 읽었다면, 저명한 작가가 새로운 모드에 어색해하면서 쓴 작품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 같다. 유감이지만 이렇게 말했을 터이다. 열심이지만 욕심이 과하고, 구성이 나쁘며, 편집도 나쁜데, 발전가능성은 아주큰, 전형적인 첫 소설이라고.  - P437

싸구려 매문가나 괴짜도 아닌, 주목할 만한 작가가 이런 투사가 담긴 윤리를 내미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안하다. 시카스는 기독교 서적이 아닌데도 칼뱅파스럽다. 인류는 뿌리부터 무책임하다고 단언하고 있지 않은가. 구원은 노력이 아니라 은총으로만 이루어지고, 영혼의 수고가 아니라 탄원과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그것도 소수의 선택받은, 뽑힌 사람들에게만 나머지는 심판/대학살/종말의 저주에 처한다. 이것은 최근 유사과학에 흔하고, 자연히 근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주제다. 이 사상의 뿌리는 아마 근동에 있을 텐데, 서구에서는 힘든 시기, 사람들이 절망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마다 나타났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호감이 가지 않고 근본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기에, 보편성을 획득한적은 없다. 대부분의 예술가에게도 동조하기 힘든 사상이다. 이 사상은 세상에 비극이나 자선이 있을 자리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 P440

레싱은 가끔 한 번씩 훈계를 멈추고 자신이 뛰어든 세계를돌아본다. 그런 순간에는 작가가 그곳에 있고, 그곳에 속한다는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다. 레싱이 전통적인 소설을 쓰지 않는 것은 전통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레싱은 전혀 리얼리즘 작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판타지 작가도 아니다. 오래된 구분은 이제 무의미하니, 폐기해야 마땅하다. 비평가들보다 먼저 우리소설가들부터 그 구별을 넘어서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레싱이 어색하게 움직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레싱은 앞으로 나아간다. 나라면 SOWE, 또는 우리-본질의 느낌(substance-of-we-feeling,
대체 본래 뜻이 더 나쁜지 줄임말이 더 나쁜지 모르겠다.) 같은 것을 곱씹고 싶지 않겠지만, 6번 구역에 가려면 SOWF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6번 구역이란 하데스이고, 티베트 『사자의 서」에 나오는 풍경이며, 무의식의 외딴 영역이고, 경계 세계이자 그 이상으로, 개념과 - P442

심상으로서는 참으로 아름답다.
지적인 소설, 아이디어 기반의 소설들은 너무 자주 의견을제시하는 소설로 빠져든다. 방자해진 과학소설은 다른 어떤 예술보다 더 광대한 소재를 가지고서도, 그럴 권리도 없이 고함을 치고설교를 한다. 레싱의 의견, "과학"과 "정치" 등등에 대한 레싱의 혹평은 거의 소설을 망칠 뻔했다. 하지만 그런 의견들 아래에, 그 너머에,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서, 어쩌면 작가의 의식적인 의도마저반하는 창조적인 영혼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권위를 발휘하여테러리스트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거나, 생명의 문 앞에 모여들어우는 영혼들을 상상할 수 있는 작가가.... 그리고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힘겹게 돌아다니는 책은 결점을 상쇄하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불멸하는 다이아몬드와도 같다. - P443

누구나 가끔은 기분이 가라앉지만, 어떤 사람은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오지 못한다. 우울증은 유일하게 임상적으로 치명적일 때가 잦다고 인정받은 정신질환이다. 자살로 끝날 때가 너무많다. 미합중국에만 4000만에서 6500만의 우울증 환자가 있다.
그중 3분의 2는, 그러니까 진단 사례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주부나임금 노동자나 비슷하고, 집에서 아기를 키우든 사무실에 나가서경력을 쌓든 차이가 없다.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타고난 패배자로여기도록 배운 사람은 승리자처럼 생각하기가 힘들어진다. 매기스카프의 미완의 과제는 여성의 우울증이라는 큰 문제를 다루는 대단한 책이다.
우울증이란 무엇인가?
"자꾸만 결정을 내렸다가 흩어 버려요..." 이 사람은 브렌다, 병원과 진료소에서 인터뷰하여 이 책에 수록한 많은 목소리 중하나다. "내가 뭔가를 애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뭘 애도하는 - P465

건지는 모르겠는 기분이죠." 다이애나의 말이다.
스카프는 말한다. "인생을 계속 이어지는 실로 본다면, 우울증은 그 실이 엉키고 뭉치고 뒤얽힌 자리…… 조정이 실패했다는 신호다." 그 증상으로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음, 생각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손상됨, 결정을 하지 못함, 과민함, 극심한 피로(또는 주체하기 힘든 활동성), 수면 장애, 성교 불능 또는 불감, 슬픔, 그리고 스스로와 스스로의 고통을 제외한 그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못함 등이 있다. "기분 상태 자체가 경험의 필터가 되어서, 즐겁거나기쁜 경험은 하나도 그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다" - P466

지시하는 내용이라곤 이것뿐이다. 스카프는 우울증을 "정의한 다음에 그 안을 색칠하지 않는다. 이 책 전체가 우울증의 정의이고, 스카프가 내미는 우울증의 그림은 개별 사례 연구와 스카프가 논하는 이론과 치료법들로부터 자라나고 그곳에 계속 뿌리를 둔다. 이 논의들은 이 분야에서 보기 드문 폭과 냉정함을 갖추고 있다. 스카프는 자신의 의향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우리에게 생각할 자유를 남겨 둔다. 즉각적인 확신을 제시하는 일은 없다. 이 책은 전문 용어 없이 접하기 쉬운 저널리스트 스타일로 쓴대중 심리학 저술이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책이다. 그렇다고 유행 심리학"도 아니다. 의견을 주입하지는 않아도, 살펴볼 수있도록 내놓기는 한다. 이 책은 대단히 사려 깊고, 그렇기에 비판은 거의 하지 않는다. 게다가 경탄스러울 정도로 온화하다. 전통 심리학의 ‘남성이-표준‘ 요새와 래디컬 페미니즘의 ‘남성은적‘ 전초 - P466

기지 사이 전쟁터에서 냉정을 유지하기란 늘 쉬운 일이 아닌데, 매기 스카프는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심지어 프로이트의 그 유명한 말 "우리는 여자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영영 모를 것이다."
조차도 대처해 낸다. 지금이서평을 쓰고 있는 나를 비롯해서 어떤 여자들은 이 얼빠진 발언을 들으면 자동으로 입에 거품을 문다. 그 지루하기까지 한 남성 인지의 오만이라니. 대체 "우리"가 누구란 말인가? 다시, 또다시 남성이 인간이고 여성은 비정상이라는식 아닌가. 그런데 스카프는 온화하게 "다소 얄궂은 발언이다."라고 하고 논의를 계속한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사실상 그 질문을 반쯤 조롱하는 질문에서 철저히 진지한 질문으로 바꿔 놓는 작업이다. 대체 여자의 삶에 무엇이 부족하면 우울증 상태로 이어질수 있나? 여자들은 다양한 인생의 단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 P467

아, 저 질문에 갈채를 보낸다. 갈채와 환호를
부제 ‘여성의 인생에 존재하는 압력점‘을 잘못 보면 이 책이 예측 가능한 위기 대처 매뉴얼인가 싶어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생단계" 란 단순히 10대부터 70대까지 여섯 번의 10년씩을 말하고, 각 단계마다 하나 또는 여러 명의 인터뷰가 예시가 된다. 각각의 인터뷰가, 인터뷰 속 여자들 모두가 어둠 속의 목소리다. 상실,
애도, 공포, 절망, 분노, 고독의 목소리, 청소년기에 처음 겪는 큰 상실은 바로 아동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자는 어린 시절의 안전을 성인의 독립성과 맞바꿔야 하는데, 사랑이 따르지 않으면 그 과 - P467

정을 해방이 아니라 버려짐으로 여길 수 있고, 그러면 희망과 신뢰가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인생에 대처해야 한다. 인생의 매단계마다 이런 패턴이 일어나거나 되풀이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자립을 성취하는 일, 세상에서 자유롭게 존재하고 행위하는 자아를 획득하는 일은 여자에게 "사람들이 나에게 뭘 원하지?" 묻기를 부추기고 여자가 "난 뭘 하고 싶고, 무엇이 되고 싶지?"라고 물으면 얼굴을 찌푸리는 문화적인 편견에 방해를 받는다. - P46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겨우 25년에서 30년쯤 늦게 노벨문학상을 받고, 다음해에는 이탈로 칼비노가 상을 받는다면………아니, 백일몽은 그만 꾸자. 그사이 여기에 1945년부터 1960년까지 써 낸 칼비노의 단편 선집이 윌리엄 위버, 아치볼드 콜훈, 페기라이트의 멋들어진 번역으로 찾아왔다.
접시에는 개구리, 소스팬에는 뱀, 수프 안에는 도마뱀, 타일 위에는 두꺼비들로 야생동물 가득한 부엌, 동굴 속에는 양, 덤불에는 돼지, 공터에는 소, 여기에는 닭, 저기에는 기니피그로 길짐승 가득한 숲 금전 등록기는 무시하고 크림퍼프와 젤리롤에 파묻힌 도둑들이 가득한 패스트리집, 벌거벗은 채로 모피 상점을 습격해서 담비털, 비버털, 양털을 강탈해다가 깜짝 놀란 가게 직원에게 "모피 토시에 팔이 엉킨 거대한 인간 곰처럼 보이게 된 늙은 거지……. 이 직원의 반응은 그야말로 칼비노스럽다. "귀엽기도 해라!" 이러니 말이다. - P487

칼비노의 초기 단편들은 정확하고, 섬세하고, 친절하고, 건조하고, 말도 안 되고, 자주 이런 동물생명과 인공생명의 침입 또는 상호 침투라는 주제를 따라간다. 기이함이 질서를 전복하는 이야기다. 복잡한 주제이다 보니 더 정확하게 판별할 수가 없고, 이야기 속의 한갓 아이디어로 뽑아낼 수도 없다. 이것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심리학적이며, 매혹적인 주제다. 사실 칼비노가 워낙지적으로 흥미로운 작가이다 보니 독자는 칼비노가 보이지 않는도시들』이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같은 반(反)서사" 스턴트를 소화해 내는 것이 강력한 서사 재능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이 책에서 여러분은 서스펜스 패러다임의 "지뢰밭"에선 순수하고 단순한 이야기꾼을 볼 수 있다. 지뢰가 터질까, 터지지 않을까? 나는 미처 내가 일곱 페이지 동안 숨을 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P488

소설 속에 담긴 세련된 사색은 주목할 만하고, 훌륭하며, 캘리포니아스럽다. 유럽에 집착하는 많은 동부 해안의 사상은 진짜 동부를 아우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드물게 언급되지만 구조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티야그라하 (Satiyagraha)나무위(無違) 같은 개념은, 다 낯선 말이고 서부에서나 하는 무엇, 아니면 셀마에서나하는 뭔가라고 여기는 독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쁠 것은 없다. 일반 독자보다 잘 알아야 마땅한 비평가들이 그걸 몰라서 이 책을 저평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건 빠르고, 책장이 잘 넘어가고, 재미있는 좋은 여름 휴가용 책이다. 또 그이상의 무엇이기도 하고, 주목받아 마땅하다. 궁극의 폭력 행위에 - P526

대해 비폭력적으로 쓰려고 시도하면서 캐럴린 시는 아주 오래된비폭력 전통에 소설의 바탕을 두었다. "남자의 세상"에 대해 여자로서 쓰면서 여성 연대와 인간의 친절로 분노를 갈아 냈다. 캘리포니아 토양에 다진 이 단단한 기반 위에, 섬세하고 뛰어나며 놀라운 와츠타워 같은 책을 지었다. - P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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