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책을 사다보면 한 두 권쯤 꼭 여행기가 포함되어 있다. 시작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였을것이다. 당시 책방을 하면서 내 것으로 욕심내어 가진 1호가 된 책이다. 읽고나서 그 주체할 수 없는 감동과 회한에 가슴이 벅차올라 그 책에 반했다. 딴에는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난 그저 눈뜬장님에 불과했다는 회한과 그저 스치고 지나친 무수한 절집들, 탑들, 풍경들이 오롯이 살아서 다시 담기는 데에 감동이었다.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이 그저 국보 몇 호, 보물 몇 호에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표현으로 길들여진 내 머리에, 거기 어떤 사연이 담겨있는지, 어떤 조형으로 아름다운지,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언어들로 가득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알고 본 것은 그저 국어사전 속의 낱말들을 아는 것과 같았다. 그 낱말들이 이루어내는 문장의 묘미를 그 책을 통해서 비로소 알아가기 시작했다. 전문가를 위한 문장의 나열이 아닌 나 같은 얼치기의 눈에도 뭔가가 보이게 기록된 답사기, 그 책들을 끼고 참 많이 돌아다니며 더 많은걸 알았고 보았고 깨달아갔다. 아직 그 책 속에 있는 곳 절반도 안 돌아봤지만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곳도 그 책안에는 있어서 가끔 어딘가를 떠나고 싶을 때 다시 꺼내 읽는다. 저자와 다른 시선으로도 이제는 볼 줄 알고 저자의 역사적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생길만큼 이젠 나만의 사관도 생겼다. 책에도 유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의 문화...]의 판매성공은 우후죽순으로 많은 답사기들을 세상에 나오게했지만 아직 그 책만큼 맘에 드는 책을 만나지 못해 내가 가진 답사기는 그 시리즈뿐이다. 그의 말 그대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길을 떠나보면 알게 된다. 보이는 만큼 느낌도 커지고 마음을 열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을 나는 길 위에서 배워가는 중이다.

 



 

 

 

 

 

 

 

 

 

 

 

 

 

 

  그 다음, 나를 사로잡은 건 '바람의 딸, 한비야'다. 대체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렇지만 책에서도 좋아하거나 맘에 드는 작가의 책은 거의 섭렵을 하는 편이라서 그의 책은 전부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시리즈부터 [중국 견문록] 까지 다 가지고 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여행자의 숨결을 느끼고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휴머니티에 늘 감동한다.  그의 글을 통해 세계의 변방과 소수민족, 알려지지 않은 같은 지구인의 아름다운 사연들을 알게 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내 안에만 눈이 머물러 지구 어디쯤에 전쟁의 상처에 신음하면서도 희망을 갖고 사는 이들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 자신들만의 색깔과 습성으로 종족을 지켜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길을 따라 시작했던 도보여행도 이제 나만의 방식대로 할줄 알게되었다. 그책의 인기는 정말 많은 베낭 여행책들을 양산하게 했고 서점 한 켠을 장식하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그의 책이 가장 잘 팔리고 있는 것 같다. 몇 권 아류의 베낭 여행기를 나도 샀지만 실망감을 떨쳐버릴 수 없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아직도 씁쓸하게 남아있다. 

 


 

 

 

 

 

 

 

 

 

 

 

  다음은 많은 여행 산문집들.
  작가들의 여행 산문집을 좋아한다. 지금 갖고 있지는 않지만 곽재구의 [내가 사랑한 세상, 내가 사랑한 사람]이 그랬고 강석경의 [인도 기행] [능으로 가는 길]들이 그랬다. 시나 소설속이 아니라 일상을 떠나 여행지에서 느끼는 작가의 시선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하는 듯 했다.
  신영복의 [더불어 숲]을 읽을 때는 날마다 여행지에서 엽서 한 장씩을 받아드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격리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한 지식인의 고뇌가 명징하게 각인되는 한 장의 엽서를 받는 느낌이 그런 것이리라. 가슴 아파하던 그 새벽 희부윰한 안개 내음으로 남아있는 책이다.
  김윤식의 [문화기행]은 읽는 동안 내내 지식이 짧은 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고, 신현림의 [시간 창고로 가는 길]은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박물관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 사람의 열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작은 박물관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해 주었다.
  건조한 문체로 읽고나면 언제나 마른 모래가 서걱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가 윤대녕의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은 말랑말랑한 빵처럼 부드럽게 나를 사로잡으며 여행자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오래 그의 곁에 앉아서 최면에 빠지듯 얘기를 듣고 싶은 느낌이 남는 책이어서 그를 따라 10번 국도를 오래 헤매고 걸으면서 그의 음성으로, 내 눈으로 감탄을 하며 본 풍경이며 느낌은 오롯하게 내 것으로 담겼다.
  이화이 시인의 [어쩌면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 여행]은 제목 그대로 연민어린 시선이 얹어진 풍경을 내게 보여주었다. 특히 해미읍성의 회화나무를, 나희덕 시에서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내게 보여 주었다. 사실 아무런 생각도 감흥도 없이 그 나무 앞에 오래 서있다 온 적이 있는데 그런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를 가장 강력한 끌림으로 사로잡은 책은 구본형의 [떠남과 만남] 이다. 정말 이 책에 반했다. 다 덮기가 아까워서 마지막 한 장을 남겨둔 채로 며칠씩 갖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책을 고르는데 나만의 원칙 같은 게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우선순위고 출판사도 선택 하는데 한몫을 한다. 대부분 어떤 책을 구입할지 메모해두었다가 책방에 나가면 앞 뒷 표지를 보고 특히 뒷면을 자세하게 본다. 사람도 그 뒷모습이 진솔하듯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에. 다음은 발문이 누군지, 서문도 읽어보고 내용을 쫘르륵 훑어보고 살까를 결정하는 것이 순서다. 딴에는 까탈스럽게 그렇게 골라도 실망하는 책들이 더러 있으니 그 방법이 꼭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책을 골라서 살 때보다 책방에서 우연히 고르게 된 책일 때 책방을 나서는 순간 정말 뿌듯한 기대감이 크다. 책은 읽을 때도 그렇지만 고를 때의 기대감도 책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것이다. 요즘은 찜해 놓았다 한꺼번에 인터넷구매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책방에서 빈손으로 나오는 법은 없다. 알고 있는 작가도 아니었는데 그 책을 펼쳐본 것은 좋아하는 작가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빠져있을 때여서 같은 출판사라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펼쳤을 때, 사진이 한 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읽는 동안 내내 그의 유려한 문장, 현실을 직시한 시선, 무거운 베낭에 담긴 많은 느낌들에 반했다. 또한 사진들은 그가 말하지 않은 것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내게 주었다. 내 고향 남도의 서정과 색깔들, 내 그리움의 길들이 거기 살아서 담겨있었다. 오래 그 책을 끌어안고 다니다 까맣게 밑 줄 그어가며 읽었던 첫 번째 책은 오랫만에 만났는데 선물할게 없던 친구에게 가있다. 그것을 시작으로 참 많이 그 책을 선물했는데 요즘은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출판사로 문의를 해볼까 생각 중이다. 그 책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꼭 선물하고 싶은 책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호사가의 취미가 아닌 자기 충전의 내면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그 책으로 얘기해 주고 싶다. 
 

 

 

 

 

 

 

 

 

 

 

 

 

 

  곽재구의 [포구기행] 사진속의 색깔들은 나를 한없이 바다에 가고 싶게 불러댄다. 그 유혹은 강열한 것 이어서 그 책을 품고 기차를 탔다가 그의 문장들이 바다 속보다 더 깊이 끌어내려 나를 익사시키곤 한다. 나는 아직도 자맥질을 반복하면서 그의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멸치 한 마리다.

  얼마 전에 읽은 공선옥의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기대치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땅의 변방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끌고 걸어가는 행상 할머니 보따리 속에 담긴 삶의 애환이다. 굽은 등으로 그의 머리에 인 고단한 생의 보따리를 펼치면 고작해야 하룻저녁 술값에도 못 미치는 우리시대의 자화상이 담겨있다. 슬프지만 외면할 수 없는 끈적끈적한 진창의 이야기들이 책을 덮고난 며칠동안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들의 충일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그 어떤 고고한 지성의 향기보다 나를 취해 흔들리게 했던것이다. 사람들속에서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알아가는 여행이 이 시대의 진정한 여행일지도 모른다. 

                                                                    2003. 9. 14.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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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7-2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과 여행서에 대한 산 님의 글이 마음속 깊이 와 닿네요. 저도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산 님께서 이 글에 담아 소개해 주신 수많은 책들을 보고 나니, 나는 그동안 어떤 책들을 읽으며 여행을 다녔나 싶은 생각도 슬쩍 드네요.(저는 소개해 주신 책들 가운데 유홍준 님의 책과 한비야님의 책 몇 권만 읽은 것 같아요.) 아무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4-07-27 01:05   좋아요 0 | URL
에궁 이런~ 여기까지 걸음하셨군요.
제가 좋아하는 장르이지요.
여행도 결국은 사람 사는 모습의 한 단면일 테니까요.
까마득하게 오래전의 글이라 저도 다시 읽어 보았네요.
ㅎ~ 십년도 전에 썼네요.
제가 썼나 싶을 만큼... 색깔을 감출 수는 없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