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정申鉉正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대립對立」(1983), 「염소와 풀밭』(2003)이 있고, ‘서라벌문학상‘ (2003), ‘한국시문학상‘ (2004)을 수상했다. 20여 년 동안 시쓰기를 중단했다가 최근 다시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서라벌고등학교 등에서 국어선생을 지냈으며 한동안 카피라이터 일을 하다가 현재 광고 및 편집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 시인의 말


시가 무엇입니까.
초월, 우주적 자아, 아닐 것입니다.
눈물, 삶의 더러운 때, 아닐 것입니다.
위로, 화해, 더구나 아닐 것입니다.
희망, 절망 아닐 것입니다.
죽음 관념, 아닐 것입니다.
자유, 피의 전율, 그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이 지상에 초대합니다.
당신이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습니다.

세 번째 시집을 내며
신현정

신현정의 시는 극소지향적이다. 그의 시선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에 밀착돼 있다. 오리, 물고기, 염소, 복숭아, 참새, 소금쟁이, 풍뎅이, 달팽이집, 강아지풀, 애늙은이, 이슬 한 개, 그리고 하느님. 그는 이런 미시적인 사물에 대해 情意的인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보지만 자신이 들어가 밀착될 수 있는 틈새를 찾아낸다. 그 틈새에서 그가 발견하게 되는 마음은 아름답다. 대상과 자신과의 거리를 소거하며 포개어지려는 이 밀착에의 욕구는 시를 극소화하는 질서를 낳는다. 극소화된 시의 질서와 공간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허무의 굽은 물결을 저어가기에는 너무나 선한 인성을 지닌 오리떼를 따라가는 마음 속에도 있고 모처럼 소풍을 나와 급행을 보내버리고 천천히 완행을 타려는 마음에도있다. 신현정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공간은 극소화한 일상의 소품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 사회적 자아가 껴들어 있을 틈도 없다. 이것은 엄청난 고통이며 극기의 정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이 결백주의자의 ‘강아지풀에 대한 명상‘에서 시인 스스로가 삭제하고 삭제해버린 사회적 자아를 애써찾을 필요가 없다. 시인 자신이 시를 꿈꾸는 걸인이요, 하느님 앞에서 생각을구걸하는 걸인으로 시적 자아가 변형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정권(시인)

이름을 가려놓고도 누구의 시인지 알 수 있다면, 그런 시를 쓴 시인을 일컬어 흔히 一家를 이룬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현정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일가를 이룬 시인이다. 시에 조금만 관심을 지닌 사람이면 신현정의 시는 신현정의 시인지 알 수가 있으니 말이다. 예술가란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자신의 시적 스타일을 만들어나간 신현정, 그렇다면 신현정은 참으로 이 시대 몇 안 되는 예술가이며, 예술가의 길을 가는 시인이다. 왜 그런가? 신현정의 시가 다만 외적인 스타일만 유니크한 것이 아니라, 시예술로서의 언어의 싸움까지, 그러므로 시적 이미지까지 유니크하기 때문이다.
尹錫山(시인)

경계


나, 해태상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나는 모든 것의 경계에 섰노라 하고

외쳐보려고 한다

해태의 눈을 하고

이빨을 꽝꽝꽝 내보이며

뿔을 나부끼며

경계가 여기 있노라

연신 절을 하려고 한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 P13

오리 한 줄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 가면 된다

뒤뚱뒤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줄 일제히 꽥 꽥 꽥. - P16

자전거 도둑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 P18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 P19

낮달


와, 공짜달이다

어젯밤에 봤는데 오늘 또 본다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놈이면

오늘 공짜달을 다 보는가 말이다. - P25

기러기 울음


난 그렇게 듣는다

기러기들이 감나무 위를 날아가니까

기럭기럭 우는구나 하고 듣고

억새밭 위를 날아가니까 억새억새 우는구나 하고 듣고

또 달을 지나가니까 달빛달빛 우는구나 하고 듣는다

오늘 기러기들은 임진강에 떠 있는 임진각 위를 지나

북녘 하늘을 날아가니까 북녘북녘 우는구나

하고 나는 듣는다. - P26

일진日辰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나온 보라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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