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신문 : 근대편 1876-1945  


강응천.김성환.김 정.김종엽.김진경.김형규. 

오철우.이권우.정숭교.정인경.최광열 지음 / 사계절출판사 / 2010년 1월

 

 

 



 
 

시내버스 타고 서울 한 바퀴 돌아보자꾸나

  

【 1928년 】 서울의 관문, 아니 한국의 관문 경성역에 내렸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절충했다는 역사의 모습이 압권. 역전에는 인력거와 택시들이 나란히 서 있지만 서둘러 시내버스에 오른다. 요금은 1구역에 5전.

남대문통 5정목은 전차, 자동차, 자전거, 마차, 인력거 등으로 붐빈다. 숭례문을 지나니 경성부청이 우뚝 솟아 있다. 경성부청 앞에 비껴 앉은 덕수궁의 대한문이 오히려 낯설다. 경성부청 앞 일직선으로 뻗은 태평통 1정목양편으로 서양식 빌딩이 여럿 들어서 있다. 차창 밖 황금정과 본정은 일본어 간판을 단 상점과 은행들로 어지러웠다. 서울의 도로망 정비 사업은 도쿄의 전례를 본 뜬 것이라고 한다.

광화문통 동아일보 사옥을 지나는가 싶더니 이윽고 하얗게 빛나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 종점. 여기서 종로행버스로 갈아탔다. 종로에서는 기독교 청년회관의 3층 붉은 벽돌집이 가장 높다. 그 옆 종로경찰서는 2층 석조 건물. 북촌의 번화가지만 남촌과 비교해 길은 넓은데도 쓸쓸해 보였다.

 

 

출처 근현대사신문 http://blog.naver.com/hi_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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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
   제국주의 시대와 갑신정변

 

2면 | 세계
   유럽, 아프리카 분할하고 제국주의로 진군
      - 13개국, 베를린에서 나이프와 포크 들고 땅따먹기 경연 대회 【 1885년, 베를린 】

   우아한 사회주의자들 페이비언협회 결성 【 1884년, 영국 】

   청, 프랑스에 참패… 베트남마저 넘겨줘
      - 동네북 신세로 전락… 동아시아 질서 새 틀로 짜야 【 1885년 6월, 톈진 】

 

3면 | 한국
   조선, 갑신정변 잠재우고 자주적 근대화 멈칫
      - 개화파 혁명 좌절… 청 군사 개입, 일본은 지원 약속 어기고 ’오리발’ 【 1884년, 서울 】

   청, 베트남서 뺨 맞고 조선 기웃거리기
      - 조선과 러시아 밀약설 불거지자 조선에 노골적 내정간섭 【 1886년, 서울 】

   병인양요 일으킨 프랑스와 조약 체결 【 1886년 5월, 서울 】

 

4면 | 전망
   [사설] 답은 저 아래에 있다 - 갑신정변 이후의 과제

   이 험한 세상에 ’조선 중립화’ 어때요? 
      - 해설 :  부들러의 ’중립화론’ , 유길준의 ’중립화론’

   [기/록/실/] 톈진조약 — 갑신정변 사후 처리를 위한 청·일조약

 

5면 | 사회·경제
   미국은 벌써 ’8시간 노동제’ 투쟁 중
      -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서 야간 시위… 노동운동 지도부 검거 선풍 【 1886년, 시카고 】

   르포 - 신식 교육의 현장을 가다
      - 관립·사립학교 이어 여학교까지

 

6면 | 과학
   ’행성삼강지설’을 아시나요?
      - 『한성순보』 서양 과학 이론 소개로 독자들의 눈길 끌어

   벤츠와 다임러, 가솔린 자동차 개발에 성공 【 1885년 】

   서울 — 인천 간 전신 개통 【 1885년, 서울 】

 

7면 | 문화
   "우리 일본은 더 이상 아시아가 아니다"
      -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에 이어 ’탈아론’ 발표 【 1884년, 일본 】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 윌리엄 모리스 【 1884년, 런던 】

   "신은 죽었다" - 니체 신간 ’충격 속 화제’ 【 1885년, 독일 】
 
8면 | 생활·단신
   제3세계 통신 - 트란스발, 골드러시 속으로 【 1886년, 트란스발공화국 】
   콩고, 벨기에 국왕의 사유지 【 1885년, 콩고 】
   버마,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 【 1886년, 버마 】

   노비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 1886년 】

   꽈배기 열차 타러 가자 【 1884년, 미국 코니아일랜드 】

   자유의 여신상 완성 【 1886년, 미국 】

   약값 대신 총을 쏜 청나라 군사 【 1884년,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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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양까지 55년

오랜 세월 먼 길 돌아 열린 남북정상회담…세계의 톱뉴스

근현대사신문 19호 2면 "서울에서 평양까지 55년"에 실린 사진

[2000년6월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첫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났다. 2박 3일의 평양 방문을 마친 김 대통령은 ‘6․15남북공동선언’이라는 큰 선물을 안고 순안공항을 떠나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북한의 취재 허락을 받지 못해 서울의 프레스센터에 진을 치고 방북한 한국 언론의 보도를 지켜보던 1,000여 명의 외국 기자들은 ‘지구상의 마지막 정치적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을 잇따라 본국에 타전했다.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공군 1호기 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13일 오전 10시 27분. 비행기 앞문이 열리자 김 대통령은 트랩 아래 자리한 김 위원장과 눈인사를 나누며 함께 손벽을 쳤고, 잠시 후 승강구를 내려가 두 손을 맞잡고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나눴다. 약 20분에 걸친 공항 환영 행사를 마친 두 정상은 포드사의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을 타고 백화원 영빈관으로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사실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열었다. 길가에는 60만 명의 평양 시민이 몰려나와 꽃술을 흔들며 두 정상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날 만찬 때 김 위원장은 “망국의 분열로 이어진 20세기 민족사는 외세의 간섭과 그에 영합한 뿌리 깊은 사대주의의 후과”라며 자주 평화통일을 다짐했고, 김 대통령은 답사에서 “21세기는 무한 경쟁의 시대”라면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 민족도 남북이 하나 되어 힘을 합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기존의 적십자회담 등 남북 접촉과 달리 양측 최고 책임자가 통일 의지를 한목소리로 밝혔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불과 1년 전 서해교전으로 충돌했던 남북 관계가 화해의 길로 들어선 것이 무엇보다 큰 성과지만, 실질 협력의 분야에서는 특히 경제 협력에 거는 재계의 기대가 크다. 김 대통령 자신이 햇볕정책(대북 화해 협력 정책)은 일방적 퍼주기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밝혔듯이 기업인들은 이번 정상회담으로 한국 자본이 북한의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과 결합해 시장을 넓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고 있다. …중략… 구본무 LG회장,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이원호 부회장,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는 조만간 대북 사업을 구체화해나갈 뜻을 밝혔다.
한반도 주변 4강의 주요 언론도 이번 회담을 대서특필해 남북 관계가 세계정세에 끼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워싱턴포스트』는 “남북 화해는 장기적으로 아시아 주둔 미군과 국가 미사일 방위 체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라고 분석했고, 중국의 『런민르바오』는 “평화와 발전이라는 세계적 주류에서 한민족의 자주와 평화통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중략… 2000년 6월, 세계의 톱뉴스는 ‘한반도’였다.

근현대사신문 현대 19호 2면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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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 철폐, 독재 타도…종철이·한열이를 살려내라  

6월민주항쟁, 한국의 정치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다.
  

 
 민주화를 열망하며 명동성당으로 구름처럼 몰려가는 시민들
 


[1987년 6월]
역사에 길이 남을 한달이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집권을 연장하려던 군부정권의 뜻이 시민들의 민주 항쟁에 의해 꺾였다.
정부는 본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현행 헌법대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 라고 발표하며(4·13호헌조치) 민주화 염원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체육관 대통령’ 제도를 유지하고, 후임자를 자기 뜻대로 지명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곧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계기는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3)을 연행한 경찰이 10시간이 넘는 물고문을 가해 박씨를 숨지게 만든 사건이었다. “책상을 탁 치자 박씨가 억 하고 죽었다.” 라고 변명하던 경찰은 1월 19일 마지못해 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말단 경관 2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정권 차원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축소·조작하려 했음을 폭로했다. ‘물고문 중 질식사’ 소견을 낸 부검의에게 사인을 심장마비로 하라고 협박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화장하려 한 사실 등이 드러난 것.
국민은 부도덕한 정권에 치를 떨었고,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거리 시위가 확산됐다.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시위는 조직적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경찰 진압 과정에서 또 한 명의 젊은이가 희생됐다. 이달 9일 연세대생 이한열(21)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아 중태에 빠진 것. 이것이 불씨가 돼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전 국민적 민주 항쟁으로 발전했다.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각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에는 24만여 명이 모였다. 그런데 이날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다음 ‘체육관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며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이에 항쟁은 들불처럼 번졌다. 최루탄 추방 대회(18일), 평화 대행진(26일)으로 이어지며 시위대는 1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회사원들과 중산층까지 동참하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라는 함성을 경찰력만으로 막아 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머뭇거리던 야당도 24일 여야 회담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지, 평화 대행진에 합류하겠다고 밝히며 정권을 압박했다.
시위대를 “불순 폭력 세력”으로 몰아가던 정부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정권 내부에서는 1980년 5월 광주에서처럼 다시 군대를 투입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으나, 미국의 반대와 내년 올림픽 개최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 등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29일 노태우 대표가 돌연 직선제 개헌을 청화대에 건의하겠다고 밝히면서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6·29선언).
많은 국민은 이를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이며 환호하고 있지만, 6·29선언은 계산된 책략이라는 비판도 많다. 항쟁에 밀려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자 노 대표가 역사적 결단을 내린 것처럼 청와대에서 연출한 쇼라는 것. 그러나 어떤 시도도 거대한 민주화 흐름을 막지는 못할 전망이다.
  

근현대사신문(현대 15호)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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