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눈을 들면 넓은 세상이 보인다

사계절 1318문고 네 번째
윤구병 도종환 백기완 이호철 이이화 신경림 곽재구 
이옥분 김구 장준하 함석헌 김진경 박완서 고재종 김종철
강혜원 엮음

 
이이화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문학에 열중하다가 한국학에 매력을 느껴 중퇴하고 역사분야로 방향을 돌렸다. 이이화는 역사적 인물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평가하고, 재미있고 쉬운 문체로 역사를 대중화하는 등 학벌이나 권위라는 기성질서에 짓눌리지 않고 역사 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백두산을 뵈옵다
  
매표소 입구 옆에 세워진 ‘장백산 간개(長白山簡介)’라는 안내판에 눈길이 갔다. 그 소개판 앞에는 “우리나라 길림성 남부 중국·조선 양국의 경계선에 웅건위대하고 장건한 높은 산이 있으니 장백산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어 하, 주, 진 시대에는 장백산 또는 불함산, 당 시대에는 태백산이라 불렀으며, 명·청 시대에는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시조 발상의 땅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중략… 


그런데 이 안내판에는 조선족이 백두산으로 일컬었다는 기록이 없고, 또 조선족이 나라를 연 산 또는 민족의 발상지로 여긴다는 기록도 전혀 없었다. 연변 조선족 인민 정부는 왜 백두산이라는 이름과 조선족 발상지라는 내용을 쓰지 않았을까? …중략…

연길에서 이런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간도가 우리 땅이라거니, 백두산이 우리 산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이런 까닭 때문에 백두산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 아닐까? 이 안내판 앞에서는 새삼스레 백두산 경계 문제를 떠올렸다. …중략…

천지도 동강이 나 있었다. 백암봉과 백운봉을 경계로 하여 중국과 조선이 반절씩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계는 6·25가 끝나고 국경을 확정지을 적에 이루어진 경계라 한다. 백두산, 그리고 간도 일대의 중국과 우리나라 국경은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청나라는 백두산에 봉금을 만든 이후, 강희제의 명에 의해 백두산의 경계를 조사했다. 2차에 걸쳐 조사를 끝낸 그들은 1712년, 목근등을 시켜 조선과 함께 국경을 확정짓게 했다. …중략…

이 분쟁은 1883년, 1885년, 1887년에 걸쳐 다시 일어났다. 이때 결정을 보지 못했는데, 1907년 일제는 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하여 조선인 보호를 위해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했다. 그 후 1909년, 일제는 간도와 백두산 일부를 포기하고, 도문강으로 국경을 활정 짓는다는 이른바 간도 협약을 체결했다. 그 대신 남만 철도 부설권을 따낸 것이다. 이 철도 부설은 만주 침략의 전초를 위한 음모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 백두산 천지의 경계는 애매하게 되었다. …하략…




사계절지기 曰
'내 땅을 밟고 백두산을 다시금 올라가겠다" 라는 다짐을 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총 15개의 수필 중에서 이 수필이 가슴에 남는 이유는 남북이 분단된 지금 서울, 홍콩, 상해, 북경등지를 거쳐 연길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로 열두시간을 소모하며 백두산에 오른 지은이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중국과의 영토문제나 간도문제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도 언급하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풀어야 할 숙제를 던져 주어, 읽은 후에 진지한 생각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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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7-0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의 동북아 공정 때문에 김정일 사후에 한반도 북쪽의 영토가 어찌될지 심란한...
필진에 고재종 시인도 보이네요.
어제 광주방송에서 가사문화권 누정 소개하는 프로에서 담양문화원 사무국장이 고재종 시인이 나와서 방송 후 잠시 통화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