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신문 엿보기 
  
 

호헌 철폐, 독재 타도…종철이·한열이를 살려내라  

6월민주항쟁, 한국의 정치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다.
  

 
 민주화를 열망하며 명동성당으로 구름처럼 몰려가는 시민들
 


[1987년 6월]
역사에 길이 남을 한달이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집권을 연장하려던 군부정권의 뜻이 시민들의 민주 항쟁에 의해 꺾였다.
정부는 본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현행 헌법대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 라고 발표하며(4·13호헌조치) 민주화 염원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체육관 대통령’ 제도를 유지하고, 후임자를 자기 뜻대로 지명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곧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계기는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3)을 연행한 경찰이 10시간이 넘는 물고문을 가해 박씨를 숨지게 만든 사건이었다. “책상을 탁 치자 박씨가 억 하고 죽었다.” 라고 변명하던 경찰은 1월 19일 마지못해 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말단 경관 2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정권 차원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축소·조작하려 했음을 폭로했다. ‘물고문 중 질식사’ 소견을 낸 부검의에게 사인을 심장마비로 하라고 협박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화장하려 한 사실 등이 드러난 것.
국민은 부도덕한 정권에 치를 떨었고,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거리 시위가 확산됐다.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시위는 조직적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경찰 진압 과정에서 또 한 명의 젊은이가 희생됐다. 이달 9일 연세대생 이한열(21)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아 중태에 빠진 것. 이것이 불씨가 돼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전 국민적 민주 항쟁으로 발전했다.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각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에는 24만여 명이 모였다. 그런데 이날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다음 ‘체육관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며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이에 항쟁은 들불처럼 번졌다. 최루탄 추방 대회(18일), 평화 대행진(26일)으로 이어지며 시위대는 1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회사원들과 중산층까지 동참하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라는 함성을 경찰력만으로 막아 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머뭇거리던 야당도 24일 여야 회담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지, 평화 대행진에 합류하겠다고 밝히며 정권을 압박했다.
시위대를 “불순 폭력 세력”으로 몰아가던 정부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정권 내부에서는 1980년 5월 광주에서처럼 다시 군대를 투입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으나, 미국의 반대와 내년 올림픽 개최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 등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29일 노태우 대표가 돌연 직선제 개헌을 청화대에 건의하겠다고 밝히면서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6·29선언).
많은 국민은 이를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이며 환호하고 있지만, 6·29선언은 계산된 책략이라는 비판도 많다. 항쟁에 밀려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자 노 대표가 역사적 결단을 내린 것처럼 청와대에서 연출한 쇼라는 것. 그러나 어떤 시도도 거대한 민주화 흐름을 막지는 못할 전망이다.
  

근현대사신문(현대 15호)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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