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에 삶의 길이 있고 

 

(인생을 알게 하는 우리 수필 21선) (사계절1318문고 3번째)

전우익 도종환 강은교 석지현 백기완 장준하 권정생 김정한 노무현 
최성수 김형석 윤명혜 장기표 정진홍 최정현 이상석 김영현 신영복 최현배 김명수 루쉰
강혜원 엮음



나의 인생, 나의 분노(노무현)


우리 또래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의 어린 시절도 무척이나 가난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상고3학년 시절의 초겨울, 잠잘 곳이 없어 학교 교실에서 이틀 밤을 잤던 일이다. 밤새 이를 악물고 얼마나 떨었던지 아듬 날, 이가 아파서 온종일 밥을 한 숟가락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런 고생과 설움 속에서 나는 이 담에 커서 출세를 하면,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벗어나 설움도 갚고, 나처럼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도와 주리라 다짐하곤 했다. 

(중략)

막상 판사가 되고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고, 알아 주는 사람 많고, 굽신거리는 사람도 많아 편한대로 생각하면 정말 살판나는 세상이었다. 1981년, 소위 부림 사건이란 시국 사건의 재판을 밭고서부터 나의 이기적인 삶의 껍질은 깨지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청년 20여명이 「역사란 무엇인가」, 「전환 시대의 논리」등 사회 과학 책을 읽었다 하여 최고 57일간 대공분실에 불법으로 갇혀서 고문에 의해 좌경용공으로 조작된 사건이었다. 

(중략)

모진 고통 속에서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던 청년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부모님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던 성실한 청년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오로지 죄가 있다면, 순수하게 불타던 이상이 죄였고, 순수한 이상을 가진만큼 남달리 이웃을 사랑하고, 조국의 장래를 누구보다 걱정하며 뜨겁게 사랑했고, 불의에 대해 용감히 항거한 것이 죄였다. 

그 때부터 나는 학생, 노동자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일을 내 일처럼 도맡아하게 되었다. 권력을 쥔 사람들과 재벌이 한통속이 되어 법을 맘대로 주무르는 것을 보면, 나 혼자 이 때위 무료 변호 몇 건 해봤자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깊은 절망에 빠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는 순수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의 망설임을 확고한 신념으로 바꾸어 주었다. 

(중략)

그 이후 나는 암울한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인권 변호사를 지냈고, 국회 의원으로 당선이 되어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되기도 했다. 내가 국회 의원이 되었던 것은 잘못되어 가는 정치에 대한 위기 의식도 있었고, 나를 죄인으로 기소한 검찰에 맞서 국민의 심판을 받고자 함이었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한 몸 던지고자 함이었다. 


사계절지기 曰.

2010년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지 1주년 되는 날입니다. 추모 콘서트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는데요.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네요 ; 시간은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더라도 그 분의 살아 생전 정치적 신념과 소탈하셨던 모습은 오랫동안 우리 가슴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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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눈을 들면 넓은 세상이 보인다

사계절 1318문고 네 번째
윤구병 도종환 백기완 이호철 이이화 신경림 곽재구 
이옥분 김구 장준하 함석헌 김진경 박완서 고재종 김종철
강혜원 엮음

 
이이화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문학에 열중하다가 한국학에 매력을 느껴 중퇴하고 역사분야로 방향을 돌렸다. 이이화는 역사적 인물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평가하고, 재미있고 쉬운 문체로 역사를 대중화하는 등 학벌이나 권위라는 기성질서에 짓눌리지 않고 역사 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백두산을 뵈옵다
  
매표소 입구 옆에 세워진 ‘장백산 간개(長白山簡介)’라는 안내판에 눈길이 갔다. 그 소개판 앞에는 “우리나라 길림성 남부 중국·조선 양국의 경계선에 웅건위대하고 장건한 높은 산이 있으니 장백산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어 하, 주, 진 시대에는 장백산 또는 불함산, 당 시대에는 태백산이라 불렀으며, 명·청 시대에는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시조 발상의 땅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중략… 


그런데 이 안내판에는 조선족이 백두산으로 일컬었다는 기록이 없고, 또 조선족이 나라를 연 산 또는 민족의 발상지로 여긴다는 기록도 전혀 없었다. 연변 조선족 인민 정부는 왜 백두산이라는 이름과 조선족 발상지라는 내용을 쓰지 않았을까? …중략…

연길에서 이런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간도가 우리 땅이라거니, 백두산이 우리 산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이런 까닭 때문에 백두산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 아닐까? 이 안내판 앞에서는 새삼스레 백두산 경계 문제를 떠올렸다. …중략…

천지도 동강이 나 있었다. 백암봉과 백운봉을 경계로 하여 중국과 조선이 반절씩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계는 6·25가 끝나고 국경을 확정지을 적에 이루어진 경계라 한다. 백두산, 그리고 간도 일대의 중국과 우리나라 국경은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청나라는 백두산에 봉금을 만든 이후, 강희제의 명에 의해 백두산의 경계를 조사했다. 2차에 걸쳐 조사를 끝낸 그들은 1712년, 목근등을 시켜 조선과 함께 국경을 확정짓게 했다. …중략…

이 분쟁은 1883년, 1885년, 1887년에 걸쳐 다시 일어났다. 이때 결정을 보지 못했는데, 1907년 일제는 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하여 조선인 보호를 위해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했다. 그 후 1909년, 일제는 간도와 백두산 일부를 포기하고, 도문강으로 국경을 활정 짓는다는 이른바 간도 협약을 체결했다. 그 대신 남만 철도 부설권을 따낸 것이다. 이 철도 부설은 만주 침략의 전초를 위한 음모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 백두산 천지의 경계는 애매하게 되었다. …하략…




사계절지기 曰
'내 땅을 밟고 백두산을 다시금 올라가겠다" 라는 다짐을 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총 15개의 수필 중에서 이 수필이 가슴에 남는 이유는 남북이 분단된 지금 서울, 홍콩, 상해, 북경등지를 거쳐 연길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로 열두시간을 소모하며 백두산에 오른 지은이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중국과의 영토문제나 간도문제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도 언급하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풀어야 할 숙제를 던져 주어, 읽은 후에 진지한 생각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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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7-0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의 동북아 공정 때문에 김정일 사후에 한반도 북쪽의 영토가 어찌될지 심란한...
필진에 고재종 시인도 보이네요.
어제 광주방송에서 가사문화권 누정 소개하는 프로에서 담양문화원 사무국장이 고재종 시인이 나와서 방송 후 잠시 통화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