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집 큰 생각 - 작고 소박한 집에 우주가 담긴다
임형남.노은주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1년 11월
품절


우리나라 건축, 즉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공간의 주된 관심은 땅과 사람, 땅과 건물,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소통 방식에서 출발한다. 어떤 경우에는 어른과 아이처럼 엄격하고 규범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위아래는 있지만 서로 귀 기울여 주고 각자의 의사를 존중해 준다.

남명 조식은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義라 한다."고 했다. 퇴계는 '거경궁리'에 충실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바르게 함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바른 지식을 얻는 일을 뜻한다. 즉 그는 진리에 이르기 위해 늘 겸손하고 삼가는 자세로 임하는 성실성을 가장 높은 덕목으로 삼았다.

그래서인지 퇴계가 만들어 놓은 공간은 작지만 겸손하고 조용하며 경건하다. 경을 바닥에 깔고 실용성과 합리성을 추구한 그의 건축은 퇴계 자신이라는 현실과, 자신을 만들어 주고 지탱해 주는 책이라는 과거와, 그에게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라는 미래를 담는 집이다.

작고 소박한 집에 우주가 담긴다. -48쪽

위에서 내려다본 집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조감도'라고 하고, 눈높이에서 그리는 그림을 '투시도'라고 한다. 조감도는 신의 시선이고, 투시도는 인간의 시선이다. 으리으리한 규모의 건축을 제안할 때 보통 하늘에서 내려다본 그림을 그리고, 주택이나 동네에 들어서는 건축을 설계할 때는 눈높이에서 올려다본 그림을 그린다.

모형을 통해 간접 경험한 건물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면 여러 차이점을 느끼는 한편, 실제 공간이 주는 감동을 받게 된다. 이처럼 어떻게 하면 상상을 통해 머릿속에 지어는 계획안과 실제로 재현되는 건축물의 차이를 줄이면서 감동스런 공간을 만들 것인가가 내 작업의 화두였다.
-87쪽

남간정사는 무척 간단하고 단순한 집이다. 전면 네 칸, 측면 두 칸짜리 한일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측에는 두 칸짜리 온돌방이 있고 가운데는 네 칸짜리 마루방, 오른쪽은 뒤편에 한 칸짜리 온돌방에 두고 앞에는 기둥을 세워 한 칸짜리 누마루 방을 들였다. 양쪽 방들은 축대 위에 세워졌고 대청은 마치 두 개의 누각을 잇는 다리처럼 걸쳐져 있다.

마치 건물이 땅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연못과 나무로 구성된 자연에 살짝 눌러서 새겨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남간정사는 입체가 아니고 벽에 얕게 새겨 놓은 부조와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그 부족 아래로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통해 물이 흐른다. 위압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적인 집이다.

남간정사는 이름은 송시열의 평생의 큰 스승인 남송시대의 학자 주희가 지은 시 중에 '운곡남간' 즉 볕 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이란 말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이름처럼 집 아래로 작은 샘물이 졸졸 흐른다.

이하계속-93쪽

계속....

사실 집을 지을 때 물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이 물을 끌어들인 방식은 특이하며 직접적이다. 이 집은 물가에 세운 것이 아니라 물 위에 얹어 놓았기 때문이다. 남간정사 앞에 있는 연못의 물은 대청 아래의 물길을 통해서 재워지는 것이 아니다. 주 수원은 고봉산에서 흘러 기국정과 남간정사 사이로 흐르는 계류이며 샘에서 솟아 나와 대청 아래로 흐르는 물길은 일종의 건축적인 제스처일 뿐이다.

그러나 물 위로 떠 있는 대청 아래의 허공은 너무나 강렬해서 마치 커다란 동굴 같은 인상을 주며 그 구멍을 통해 물이 공급되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이곳에서는 대청 아래의 물길을 통해 물과 나무로 이루어진 자연이 집이라는 인공물과 화통을 하게 된다. 그것은 리와 기의 조화로운 화통이라는 우암의 꿈을 보는 것과 같다.

이하계속-94쪽

계속

주자학에서는 세계가 '리'와 '기'라는 두 가지의 질서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리'라는 것은 어떤 사람과 사물이 왜 그렇게 존재하며, 또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기'라는 것은 세계(사물, 사람)의 현실적 모습이며, 비록 불완전하지만 그 배후에는 그 불완전함을 규제하고 보다 완성된 상태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참모습(선한 바탕)이 있다고 믿었다.

송시열은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해 개념적으로는 리와 기가 둘이지만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리와 기가 하나이고, 근원적인 측면에서는 리가 기보다 먼저이만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리기의 선후가 없으며, 서로의 조화와 회통을 통해 세상이 안정된 모습이 찾아진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남간정사에서 강력하고 단순한 도그마로 만들어진다. 통제하기 힘들고 근원적인 자연이라는 '기'와 통제 가능한 건물이라는 '리'가 한 곳에 모여서 조화롭게 회통하는 모습, 송시열은 자신이 꿈꾸던 추상의 세계를 이곳, 남간정사를 통해 구현해 놓고 있다.
-95쪽

집을 설계할 때 그리는 도면 중에 단면도라는 것이 있다. 단면도란 집의 반을 수직으로 쭉 갈라서 내부를 보는 것인데, 그 도면을 그려 보면 우리가 위에서 보는 것을 가정해서 그리는 평면도에서는 알 수 없었던 숨겨진 공간들이 많이 나온다. 물론 이 집처럼 단순한 형태에는 숨겨진 공간이 그리 많았지만, 단면도를 그려 본 결과 높이를 조정하여 다락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예전에 우리나라 집에는 다양한 형태의 부속공간과 수납공간이 있었다. 물건을 수납하기 위해 처마 밑을 이용하여 덧달아낸 공간을 반침이라고 하고 방 옆에 붙은 반칸 크기의 조그만 방을 골방이라고 불렀다. 물건을 수납하기 위해 아궁이 상부공간을 이용하여 덧붙인 공간은 벽장이라고 하고, 부엌 혹은 외양간 등의 상부공간을 막아서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을 다락이라 했다. 또한 신주를 모시기 위해 대청 상부에 만들어진 조그만 벽장을 벽감이라고 불렀다.

이하 계속-106쪽

계속

이 집의 다락은 보일러실 위쪽에 있다. 처음 이 집의 난방 방식을 두고 고민한 끝에, 경유를 사용하는 보일러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보일러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다. 집의 끝에 있는 보일러실은 지면과 같은 높이로 만들어 놓아 방바닥보다 50cm 내려가게 되었고, 보일러 높이에 딱 맞추어 상부를 마감했다. 그 결과, 집안에서 보니 보일러실 윗부분에 제법 올라갈만한 공간이 생겼다. -106쪽

집의 가구들을 어떤 식으로 배치해 놓느냐에 따라 생활은 달라진다. 나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고 기계가 생활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승용차나 텔리비전의 보급은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물리적인 거리의 감각을 바짝 끌어당겨 놓았다. 휴대전화와 컴퓨터가 일상을 지배하고 우리 생활의 범위를 한정짓는다. 특히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기들이 생활에 깊숙이 들어온 요즘은 '디지털'화된 환경과 '아날로그'적 사고와의 괴리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처음 내가 사용했던 스캐너는 A4 크기까지 가능한 기종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일단 A4 용지를 대보고 그 범위 안에 그림을 그렸다. 간혹 큰 그림을 그릴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범위 바깥으로 벗어난 부분은 디지털 세계에서 밀려 나간다....결국 스캐너가 내 그림의 크기를 한정해 주었다.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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