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국민들이 투표할 때 중요하게 고려했던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는 토론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다. 선거 결과는 '신성불가침' 영역에 속하지만, 그것을 불러온 국민들의 정치적 판단 기준과 의식은 비판과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국민들은 스스로 원하는 그 무엇을 위해 선택하지만, 때로 그 선택이 소망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국민이 언제나 합리적인 또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 속아서 최선이 아닌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적절한 비판과 반성이 없으면 그런 오류를 반복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변경할 수 없는 결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때로 잘못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165쪽
대통령은 정파의 지도자로서 국가를 운영한다. 이것이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기본이며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정파를 초월한 대통령을 원한다.
대통령이 자기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정파의 성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비난한다.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 대통령을 '만백성의 어버이', '왕' 또는 '국부'로 보는 견해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국민이 헌법상의 주권자가 된 것은 겨우 6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사실상의 주권자로 등장한 것은 불과 20여 년 전이다.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운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민족은 무려 5,000년 동안 왕의 지배를 받았다. 우리의 몸에는 그 5,000년의 삶이 만들어낸 문화유전자가 있다. 그 문화유전자는 자꾸만 대통령을 만백성의 어버이로 보게 만든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따라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정파의 지도자로 보는 헌법 해석은, 이 문화유전자가 생성해내는 낡은 의식과 충돌한다.
이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수 없고 성공하는 대통령이 나오기도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8쪽
노무현 대통령이 일으켰던 국민들과의 정서적,정치적 분화가 주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사회적,정치적 계약의 산물로 보았기 때문에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재신임, 사임, 임기단축 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지율이 너무 낮은 대통령이 계속 재임하는 것이 나라와 국민에게 좋은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제한된 권력을 가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언론, 사법부, 헌법재판소, 선관위, 정당 등 다른 권력기관과 수평적인 다툼이나 권한쟁의를 벌이면서 서로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것이 대통령답지 않은 언행이라고 생각했다. 보수언론과 싸우고 검사들과 논쟁하고 선관위나 헌재와 대립하고 여야 정당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것은 하늘이 내린 운명처럼 무거운 것인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 소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209쪽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낮았던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의 어느 대통령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대통령직은 분명 헌법과 법률의 절차에 따라 국민과 맺은 계약의 산물이지만, 예전의 대통령은 운명이 맺어준 만백성의 왕처럼 말했다. 고은 시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처지가 안타까웠던지, "위정자에게는 때로 위선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위선적 언어를 쓸 필요도 없고 실제 쓰지도 않는 사회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209쪽
왕국의 신민에게는 자애로운 '국부'와 '국모'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화국의 주권자에게는 대통령과 영부인이 필요할 따름이다. 우리 마음속의 왕을 죽여야 민주공화국이 산다. 대통령이 왕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우리의 문화유전자 안에 남은 침팬지의 그림자일 뿐이다.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된다.
그런데 헌법적, 법률적 제약 조건을 받아들이고 5년 계약직답게 행동하는 대통령은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하는 백성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어서 인기를 잃는다. 사실은 계약직 공무원이면서 마치 왕처럼 행동하는 대통령은 권력 오남용을 거부하는 시민의 저항과 비판에 부닥쳐 인기를 잃는다.
우리 사회가 이 딜레마를 해소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211쪽
항간에는 장관에 대한 오해가 제법 많다. 장관이 되고 나서 제일 자주 들은 말이 이런 것이다. "좋겠다. 이제 평생 연금 받게 되잖아."
그런데 장관 연금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직업공무원을 하다가 장관이 된 사람이 퇴직한 다음에 공무원연금을 받을 뿐이다. 장관을 지냈으니 연금액이 다른 사람보다 많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일을 하다가 장관이 된 사람은 재임 기간에만 공무원연금에 가입한다. 최소 20년 가입해야 공무원연금을 받을 자격이 생기니 퇴임할 때는 재임 중 납부한 공무원연금 기여금을 일시불로 돌려받는다. 퇴직 위로금 비슷한 느낌이다.
......
어느 날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흥분해서 내게 말하기를, 대통령이 장관을 자주 바꾸는 것은 되도록 많은 '꼬붕'들한테 연금을 챙겨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물론 뒷자석에 앉은 고객이 전직 장관이라는 걸 알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끝에 예의 후렴구 붙이는 걸 빠뜨리지 않았다. "도둑놈들!" 그런게 있다면야 개인적으로 노후가 얼마나 편안할까마는, 그렇게 불합리한 제도가 있을리 없다. -228쪽
재직 중에는 관사로 이사하지 않았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시장이나 도지사들은 관사가 있는 경우가 많지만 장관은 관사가 없다. 국무총리는 관저가 있다. 국방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도 특별한 보안과 의전의 필요성 때문에 관저가 있다. 하지만 다른 장관들은 해당사항이 없다.
국회의원을 겸직한 장관은 월급을 둘 다 받느냐는 질문도 자주 받았다. 아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받는다. 장관 연봉이 국회의원보다 500만 원 정도 많고 또 국회의원 일은 사실상 개점휴업이기 때문에 누구나 장관 월급을 선택한다. -229쪽
국회의원들에게, 기자들에게, 공무원들에게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일에만 집중했다. 근거 없는 오해나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에도 시간이 해결해줄 것으로 믿고 묵묵히 일했다.
참고, 참고, 또 참는 삶은 때로 고통스러웠지만 또 그만 한 보상이 따랐다.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35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스페인 예수회 신부님의 말씀을 남몰래 암송했다. 벨타사르 그라시안이 쓴 글을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편집한 책 [세상을 보는 지혜]에 나오는 말이다.
- 어리석은 자를 견딜 줄 알라. 똑똑한 자들은 언제나 참을성이 없다. 지식이 많을수록 참을성은 줄기 때문이다. 통찰력이 큰 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제일 우선해야 할 삶의 원칙은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이며 지혜의 절반은 거기에 달려 있다. - -246쪽
위계질서를 가진 모든 조직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무능력이 입증되는 지위까지 승진하는 경향이 있다.
- 피터의 원리 - -243쪽
피터의 원리를 뒤집으면 해결책이 나온다.
- 모든 위계조직에는 아직 자신의 무능이 입증되는 지위까지 승진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
......
집권 세력과 장관들이 공무원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면 공무원들은 자기의 영혼을 감춘다. 하지만 믿고 불러내면 공무원들은 영혼을 보여준다. 공무원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영혼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그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261쪽
그런데 인문사회 분야 책을 쓰는 프리랜서 저술가는 높은 소득을 기대하지 않는다. 시장이 작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살아가는 데 늘 무엇인가 조금씩은 부족하다. 지식소매상은 '결핍'과 더불어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결핍은 때로 삶을 불편하게 하지만 꼭 나쁘지만 않다.
프리랜서 글쟁이로 살아가는 것은 새해 첫날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 다가올 한 해 동안 자기가 얼마의 돈을 벌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독자들이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 어떤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많은 독자를 불러 모을 수 있을지 매 순간 고민한다. 그러나 잘 팔리는 책을 써서 돈을 버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다른 것도 아닌 '지식'을 파는 사람으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 책이 독자의 교양 향상에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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