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미러클 - 부를 찾아 떠난 아시아 국가들의 대서사시
마이클 슈만 지음, 김필규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2월
품절


인도의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는 1947년 8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바로 전날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성취를 자축하려 합니다. 이는 앞으로 더 큰 성취와 승리를 이루게 할 새로운 기회를 향한 첫발입니다.

인도를 위해 봉사하는 것, 그것은 고난을 겪고 있는 수백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가난과 무지, 질병, 불평등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우리 세대에서 위인이 푸어야 할 야망은 결국 모든 이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능력 밖의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눈물과 고통이 남아 있기에 우리는 이 일을 머추지 않을 것입니다."
-40쪽

마파아들(버클리 마피아 - 수하르토의 경제브레인들)은 과거의 유산을 부숴 버릴 계획을 세웠다. 사회주의,국영기업,민족주의적 정책 등이 퇴출되고 대신 자유주의,외국인투자 등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들의 첫째 과제는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정부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이를 줄이면 덩달아 수요가 감소해 경기가 침체에 빠질 염려가 있었다. 그것은 더 고통스러운 상황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전반적인 경제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아니 가속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했다. 그것은 인플레이션과 싸우면서 동시에 일정 형태의 지출을 과감히 줄여 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 나가는 돈은 틀어막는 대신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는 특정 산업군에 자금을 대주도록 돈은 빌려 줬다. 라디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정책의 목표는 "무(無)의 상태에서 새로운 구매력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라디우스는 "경제 계획을 짜는 입장에서는, 성장 없는 안정은 올림픽 경기에서 4등을 하는 것과 같다"며 "메달도 없고 축하 펄레이드도 없으며 단지 패배자일 뿐이다."
-268쪽

그렇다면 세계 재패자에서 세계적 무능력자로 전락해버린 일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제는 변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경제정책 역시 이에 발맞춰 변해야 한다. 아마도 미러클을 가져온 일본식 모델은 나라가 가난할 때나 부유해지려고 안간힘을 쓸 때는 제대로 작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 수준에 오른 뒤로부터는 한 단계 더 나아가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됐던 것이다.

정부의 간섭과 '일본 주식회사'간의 연계는 기업의 행동범위를 제한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제 구식이 된 경제철학을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정보기술이나 서비스 등 미래 산업으로 옮겨가기보다는 1950년대의 '공장 짓고 모조건 수출(the bulied-factories and export-at-all-costs)'이란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선진화된 일본 경제에선 더 이상 같은 효과를 낼 수 없는 전략이었는데도 말이다. '괴물'사하시의 영향을 받은 통산성 관료들도 너무 오랫동안 권력에 심취해 있었다.

....에즈라 보겔은 [여전히 일본은 일등인가]라는 책에서 '그러나 지금 따라잡히는 입장에서 새로운 단계의 세계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333쪽

미러클 전체의 이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공통된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세계화의 힘이다. 모든 미러클 국가는 자유무역과 신기술을 백분 활용했다. 이것이 전 지구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수출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들은 이런 역사적 변혁에 동참하기 위해 각자 다른 정책들을 끌어와 적절히 섞어 사용했다. 박정희식 강력한 정책집행부터 만모한 싱의 부드러운 시장개혁까지, 그리고 괴물 사하시의 다양한 국가간섭 정책부터 홍콩 기업가인 리카싱의 핵심 자본주의 방식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들 국가의 급속한 성장은 글로벌 경제의 변화에 자기 자신을 잘 맞춘 덕분이었다. 국제시장의 힘은 한 국가의 자원이 합리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분배될 수 있도록 일정한 원칙을 제시했다. 여기서 각국은 성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기회였다. 이렇게 볼 때 권위적인 정부가 민주적인 정부보다 세계시장에 더 잘 접근할 수 있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340쪽

싱은 인도통화인 루피 화의 평가절하를 기대했다. 당시 환율은 정부가 좌지우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민감한 이슈였다.

루피의 평가절하하면 원유 같은 원자재 수입 부담이 느는 등 특정분야에서 국가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통화가치를 억지로 내리면 나라의 경쟁력 자체가 약해졌다는 신호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싱은 확고했다. 그는 평가절하가 "인도경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라고 믿었다. 루피 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야 해외자금을 다시 국내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출 진작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었다. 게다가 이런 조치를 통해 해외투자자들에겐 인도가 이 문제를 정말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고 봤다.
-357쪽

위기는 태국 정부가 자국 통화인 바트 화의 변동환율제를 결정하면서 촉발됐다.

태국은 그동안 바트 화 환율을 미국 달러를 포함한 외환 바스킷에 연동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외환 트레이더들은 이 바스킷 통화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 점쳤다. 달러가 다른 통화에 비해 계속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연동해 바트 화 가치까지 오르니 태국의 수출품은 이웃 국가들에 비해 비싸지게 됐다.

그러자 태국의 경상수지가 적자를 보였다. 즉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수입, 혹은 다른 거래 탓에 밖으로 나가는 돈이 더 많아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태국 기업과 은행들은 상당부분 해외에서 자금을 들여온 상태였다. 국가부채도 눈덩이처럼 불었다. 국제 외환 딜러들은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결국은 바트 화의 평가절하를 가져올 거라 예상했다.

이런 전망이 나오자 시장에서 바트 화에 대한 공매도가 속속 이어졌다. 이는 바트 화의 가치를 더 갉아먹었고 태국 정부는 이제 통화연동제를 포기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됐다.

-404쪽

태국 중앙은행은 쏟아지는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보유하고 있던 주요 외화를 내다 팔면서까지 바트 화 가치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해 6월가지 태국은 가지고 있던 외화 300억 달러를 모두 소진했다. 거의 파산 직전에 놓이고 나서야 태국은 링 위에 수건을 던졌다. 1997년 7월 2일 태국 정부는 통화연동제를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그날 바트 화는 16% 이상 폭락했다.

당시 많은 전문가는 이 조치가 태국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해결할거라 믿었다. 미국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은 워싱턴에서 "태국이 이 혼란을 극복한 뒤에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4년 멕시코 페소 화 붕괴를 직접 겪은 경제위기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루빈 같은 이들이 품었던 아시아에 대한 전망은 지나치게 장밋빛이었다. 그들은 단지 투자자들이 이 지역에 대한 자신감을 잃을 것뿐이기 때문에 태국의 문제는 이웃 국가로 분산되면 해결될 거라 믿었다.
-404쪽

그러나 이런 낙관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외환 트레이더들은 이번엔 말레이시아 링깃을 공격했다. 이 역시 바트 화처럼 달러에 연동돼 있었던 것이다. 이내 링깃의 가치도 폭락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해외투자자와 외국 은행들은 다른 지역들도 태국과 마찬가지로 불균형과 과다한 부채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수십억 달러씩 돈을 빼내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 화가 폭락했고 그해 10월 바이러스는 한국까지 퍼졌다. 금융권에서 이런 현상을 '전염'이라고 불렀다. 치명적인 인풀루엔자처럼 위기는 국경을 넘어 전염됐던 것이다.
-405쪽

화가 잔뜩 나 독을 품은 마하티르는 발언 시간에 세계적인 금융 엘리트의 면전에서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그는 "과거의 '근린궁핍화(beggar-the-neighbor, 이웃나라 거지 만들기) 본능이 횡행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여전히 부자 나라 그룹의 행동원칙인 것 같다"고 공격했다. 또 "그들은 다른 이들을 착취해야만 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이번 위기는 자신들의 지배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아시아 경제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서양 국가들이 저지른 음모라는 주장이었다.

.....소로스는 당시 서양 자본가들과 IMF, 글로벌 금융기관 사이에 넓게 퍼져있던 인식을 소개했다. 이번 위기는 잘못된 정책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아시아 각국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정부와 관계가 좋다는 이유로 경쟁력이 약한 기업들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이런 과정을 통해 너무 많은 국가 부채를 졌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호랑이들은 시장기능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패는 '아시아 모델'의 자연적인 결과물이라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자유시장이 자리를 잡고 경제의
-407쪽

경찰 역할을 할 때 위기는 진정될 수 있다고 봤다. ...이런 주장은 서양이 오랜동안 지켜 온 시장기능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실수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경우와 같았다. 지나친 낙관주의였다. 미러클은 그 자체가 기적이었기 때문에 투자자나 경영진, 정부 관계자들까지도 이것이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버트 루빈이 추후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이처럼 신흥국을 향항 거대한 자본의 물결은 '투자자들이 어떤 사상에 사로잡혀 규율조차 잊어 버렸을 때 발생하는 과잉투기에 대한 교과서적 사례"였다.
-408쪽

마하티르의 완고함이 꼭 그의 오만한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IMF 프로그램의 효용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재무장관 안와르 이브라힘은 링깃 화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IMF가 추친하는 것과 비슷한 정책을 이미 적용해 본 적이 있다.

금리를 올리고 신용을 제한하며 금융권의 회계기준을 엄격하게 하는 것 말이다. 안와르는 심지어 마하티르가 그렇게 좋아하던 초대형 프로젝트들도 중단시켜 봤다.

그러나 1998년 초에 이르자 마하티르는 이런 정책들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믿게 됐다. 그는 이들의 '가상 IMF 프로그램'이라고 불렀다. 금리를 높이고 신용을 축소시켰더니 민간 분야가 거의 목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소비마저 줄면서 성장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하티르는 '이런 정책들의 정반합 결과를 지켜본 결과, 그렇지 않아도 외환위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은행과 기업들에 더 큰 고통만 주고 말았다'고 기록했다.

말레이시아 경제가 더 깊은 침체의 골로 빠지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412쪽

'1%라도 품질이 떨어지면 소비자에겐 100%의 재앙이 된다!!"

- 미국 캠던에 위치한 중국 가전회사 하이얼 공장의 노동자가 쓴 문구-5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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