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 스타를 부탁해
박성혜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1월
절판


그러나 시간이 좀점 지나면서, 좀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된 그들의 모습에는 조금 흥미로운 것들이 있었다. 그곳은 하나의 동물의 왕국이었다. 호랑이, 사자 같은 맹수들이 방송국과 여의도라는 정글에서 먹고 먹히는 서바이벌 경쟁 세계였다.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고, 피를 뚝뚝 흘려가며, 견제하고 방어하는 야성의 세계. 거친 남자들의 세계였다.

그들은 결코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지 못하지만, 동물적 직관과 직감이라는 본능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지식'이라는 간접경험을 통해 세상상이를 배운 것이 아닌, 거리에서 몸으로 직접 생채기를 내가며 부딪혀 체득한 산 경험을 한 덕분이다. 그래서일까. 양아치 같아 보이는 그들에게서 언뜻언뜻 순진할 만큼 지독한 오기와 근성이 느껴진 것은.

내가 방송국에서 목격한 광경은 단순한 쇼가 아닌 음반 한장, 가수 하나를 홍보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치열한 몸부림이자 생존경쟁이었던 셈이다. -40쪽

다시 전도연이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그 면회실 신에서 제 연기 정말 맘에 들어요?"
"아 당연하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감독이 이어서 대답하려는 순간, 전도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이 좋아해요? 그래요? 그럼 다 되는 건가요? 내가 좋지 않는데,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로 연기해버렸는데. 그건 어떡하고! 알아요. 감독님? 내 왼손이 연기를 안하고 놀고 있었어요. 내 왼손이!"
그러고는 코가 빨개져서 말간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었다.

전도연이 말하는 그 기가 막힌 이유인즉슨, 갑자기 없던 장면을 연기하려다 보니, 황정민과 맞잡은 전도연의 오른손은 절절하게 연기하고 있는데, 허공에 그저 떠 있는 왼손이 어찌할 바 몰라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너는 내 운명>을 본 300만명이 넘는 관객 중에 그 장면에서 전도연의 왼손 연기에 주목한 관객이 과연 있기나 할까?.....이렇게 누구보다도 프로페셔널한 여배우 전도연에게 나는 일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다시 배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엄격한 자기검열을 거쳐 매사에 끝까지 정확히 하는 습관을 조금씩 갖게 되었다. -67쪽

일반적으로 1년을 전속으로 활동하는 광고 모델에게는 한 광고당 평균 10여 차례의 노동행위가 발생한다. TV에서 보년 영상 광고 촬영이 3,4회,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매체를 위한 사친 촬영이 3,4회, 사인회와 기타 프로모션 활동이 3~4회 정도다. 개별광고의 특성과 모델의 수준에 따라서 회차나 촬영일수는 가변적이긴 하지만, 대체로 이 평균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노동시간 대비 보수로 주어지는 금전적 대가는 그들이 축복받은 노동자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연애인들이 꼭 그저 하루 몇 시간 슬ㅉ거 얼굴 비치고, 억소리 나는 돈을 한꺼번에 챙기는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전속 모델로 활동하는 광고가 1년에 8,9개 정도라고 가정하면, 그에 따른 광고 스케줄은 80회에서 90회를 웃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처럼 드라마나 영화 일정이 지나치게 '순발력 있게' 움직이는 제작 환경에서 고정 스케줄에 피해를 주지 않고, 이 광고 일정을 효과적으로 1년에 80~90일을 배치하는 과정은 해당 매니저에게 거의 초인적 기술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어쨋든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178쪽

나는 지금도 3년 차 이하의 후배 매니저에게는 매우 인색하고, 그들을 아직 매니저라고 여기기 않는 습성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고작 3년 만에 꺾여버리는 꿈은 아무리 봐도 내게는 진정한 꿈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단순히 화려해 보이는 직업에 대한 동경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개인적으로 입방정 떠는 매니저치고 잘되는 사람 못 봤다.

두번째는 오히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에 뛰어들어 기대감을 품게 하던 친구들이 오히려 이 세계에 먼저 실망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나보다 훨씬 더 큰 잠재성을 갖춘 그들을 보면서, 앞으로 그득 덕분에 우리의 직업적 위상이 더욱 높아지리라 희망을 품고 기대했다. 아끼던 동생들이 미안해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성급하게 애정을 주고 상처 받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직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내 직업이 좀 더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를 만들어야겠다는 들끓는 의지를 확인할 뿐이었다. -285쪽

누구나 인생의 성장 과정에서 희생과 책임의 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가정과 사회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회피하지 않고 맞닥뜨려 삶의 의지를 다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비로소 그들은 '어른'이 된다. -53쪽

하지만 다행히 내가 일치감치 깨달은 현실적인 자각 가운데 하나는 '사회'라는 세계에서는 누구든 자기 본위로만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처럼 자유롭게 사고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사회생활이란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호기심과 취미로 경험 삼아 해왔던 학창 시절의 과외활동과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직업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직업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방식과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면, 이 또한 내 이상을 만족시켜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일을 배워나가는 시작단계에서 알량한 자존심이나 회의적인 태도는 불필요한 소모적 감정이라고 여겨졌다. 그것은 매니저라는 직업이 향후에는 조력자인 동시에 조직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가능한 인내였는지도 모른다.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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