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의 성장 과정에서 희생과 책임의 의무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가정과 사회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회피하지 않고 맞닥뜨려 삶의 의지를 다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비로소 그들은 '어른'이 된다. -53쪽
어머니는 내게 여느 어머니들처럼 공부하라 잔소리하는 대신, 장기와 바둑, 독서하는 습관을 가르치셨다. 여자도 기본적인 남자들의 오락 거리를 배워두어야 훗날 남자들 뒤에 앉아서 구경이나 하는 신세를 면하고 동등하게 즐길 수 있고, 지식과 상식이 풍부한 여자는 남자들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충실히 받든 덕분에(?) 나는 이후, 화투와 카드, 체스, 보드게임을 등을 모두 섭렵, 잡기의 여왕으로 불리기 손색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54쪽
처음에는 주변인, 그리고 배우의 꿈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오디션과 미팅 결과, 이는 캐스팅 여부를 떠나 자신의 캐릭터를 타자에게 평가받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그 결과를 수정,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반응들.
가령 연기력 배양을 위해 극단에 단원으로 들어갔을 경우, 트레이닝 과정에서 선배 연기자나 연출자의 조언들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두 훌륭한 검증 과정이라 할 수 있다. -93쪽
먼저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특별한 답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해줄 말이 없다.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말하는 것. 준비한 답안지를 달달 외우듯이 거창하게 화려한 수식어를 남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길게 말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장황하게 소설을 쓰듯이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만 지루하다.
다만 추상적으로 답할 때는 말의 어감을 살려서 '엣지'있게, 느낌은 풍부하나 결코 길지 않게 이야기하는 편이 좋고, 구체적인 배우상을 말할 때는 활동을 희망하는 매체의 성격과 그 매체를 선택한 이유, 본인의 고유 캐릭터와의 연관성 등을 적당한 비유와 핵심 용어들을 활용해 논리적으로 대답하는 것이 좋다.
이 질문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 고유의 인성, 캐릭터가 잘 드러나도록 답변하는 것이다. '감자'인지 '고구마'인지 본인의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한다. -94쪽
'최고의 작품 세 가지'에 관한 질문은 그 사람의 순발력과 취향을 가늠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셋'이란 숫자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는데, 착하게도 질문자의 말에 지나치게 순응하여 꼭 '셋'을 채워 대답하려 애쓰는 가상함을 보이는 친구들이 있다. 머리 좋은 친구들은 절대 '셋'에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라도 제대로 된 답을 내는데 신경 쓴다.
......질문자와 질문에 현혹되어 정답없는 물음에 이유없이 끌려다녀서는 안된다. 그러다 보면 내 캐릭터를 온전히 표현하기는 커녕 '의도하지 않던 말'들이 튀어나오거나, 말이 끊기거나 막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말잇기'에만 연연해 허둥대다가 끝나버릴 수 있다. 모르는 것과 특별한 의견이 없는 것에 창피해하지 말고, 아는 것과 자신이 평소 생각하는 것만 분명히 이야기해도 그 미팅은 절반의 성공이다. -95쪽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본 인상깊은 작품'에 관한 질문이다....질문을 유심히 들어보면, 최근과 인상깊은 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최근'이란 말 그대로 길어야 1,2년 안팎 정도를 용인하는 낱말이며, '인상깊다'는 것은 전 질문인 '최고의 작품'과는 다른 의미인, '무엇인가 기억에 남을 거리를 제공한'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질문은 답변자의 유행감각과 시청각적 훈련과 지속적인 노력 여부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작품을 많이 접하는 것 자체가 배우에게는 공부이자 간접 훈련이다. -96쪽
배우 지망생이 처음 매니지먼트 회사 관계자와 만날 때나 드라마와 영화, 광고 등 각종 캐스팅 관련 미팅을 할 경우, 나는 이 3분의 느낌으로 모든 것이 좌우된다고 믿는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그들의 장점을 발견하기에 관계자들은 언제나 몹시 바쁘고, 언제나 아주 많은 연애인 지망생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본인들이 숙련된 직관으로 3분 안에 대충 그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유명 스타들이 초기에 수많은 오디션과 미팅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까닭도 어쩌면 당시의 그들 역시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준비가 미진한 검증 단계였거나, 3분 안에 자신의 오라를 발휘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7쪽
개인적으로 미팅의 관건은 눈빛과 표정, 말투라고 생각한다. 앞에 앉은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고, 평소 좋아하는 3,4년차 선배에게 하듯 공손하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가끔은 잔잔한 웃음도 짓고, 팔과 다리도 그들의 의지대로 자연스레 놓아두고서, 하지만 눈동자는 불필요하게 여기저기 헤매지 말고 상대를 정중하지만 똑바로 마주 보면서 말이다. ....... 좋아하는 무언가를 보았을 때, 호기심과 즐거움이 가득하지만, 그 기대감을 애써 살짝 누르고 신중해졌을 때의 바로 그 살아 있는, 반짝이는 열정이 어른거리는 그런 종류의 눈빛이다.
말의 억양과 발음, 어감이 주는 뉘앙스도 사람을 집중시키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평이한 말 중간에 디테일한 악센트를 주어 표현의 집중과 이완을 꾀할 수 있으며, 자신감 있는 호전적인 말투 사이에 골몰하는 듯한 뉘앙스의 어감으로 다채로운 감성을 살려낼 수도 있다. -98쪽
그리고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 뽑아주시면 아주 열심히 하겠다는 말은 이제 빼주는 것이 좋겠다.
......자기에게 할당된 시간을 충분히 자신의 분위기로, 끌려가지 말고 끌고 가겠다는 의지로 최선을 다한 뒤 깔끔히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하고 명랑하게 퇴장하는 것이 보기 좋다. -99쪽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법이라고 한다. 신인 배우들과 배우 지망생들은 누구나 오디션과 미팅에서 캐스팅의 영광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미팅의 요령과 기술은 분명 중요한 하나의 참고요소다.
하지만 근본은 바로 나란 사람이 지향하는 인생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분명히 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며 하나둘씩 실천적으로 경험하면서 얻는 깨우침과 성찰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될 때,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은 솔직하고 담대한 나'의 모습을 자신감 있게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야말로 나의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모습이자, 최상의 미팅의 기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112쪽
하지만 다행히 내가 일치감치 깨달은 현실적인 자각 가운데 하나는 '사회'라는 세계에서는 누구든 자기 본위로만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처럼 자유롭게 사고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사회생활이란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호기심과 취미로 경험 삼아 해왔던 학창 시절의 과외활동과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직업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직업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방식과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면, 이 또한 내 이상을 만족시켜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경우에는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일을 배워나가는 시작단계에서 알량한 자존심이나 회의적인 태도는 불필요한 소모적 감정이라고 여겨졌다. 그것은 매니저라는 직업이 향후에는 조력자인 동시에 조직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가능한 인내였는지도 모른다.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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