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요괴전 - 넓게 생각하고 좁게 살기 생태경제학 시리즈 1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9월
절판


생태계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인간들의 세계로 밀려 나올 수 밖에 없었던, <모노노케 히메>의 '재앙신'은 사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 존재다. 도심으로 밀려 나온 말벌 떼, 남해안을 덮쳤던 파리 떼와 겨울에도 죽지 않는 다년생 모기들, 혹은 더 잦은 주기로 아프리카에 밀려드는 메뚜기 떼 들은 생태교란 때문에 서식지를 잃고 요괴처럼 변한 존재들이다.

서울에 사는 어린이들 중에, 지방 중소도시에서 최근 자주 출몰하는 말벌 떼 이야기를 듣고선 자기는 무서워서 시골에서 못 살겠다고 하는 친구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말벌들이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까지 와서 집을 짓는 일은 그들이 살던 숲이 없어졌으므로 말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래도 말벌들이 찾아오는 곳은 아직 생태적으로 살 만한 곳이다. 어디 서울 한복판 아파트 숲에 말벌들이 집을 짓던가?

사실 자신들은 더 못한 곳에서 살면서, 생태적으로 그나마 건전한 곳을 '무섭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일본 청소년들에 비해 감성적으로 메마른 것 같다.
-122쪽

이러한 도시 생태요괴들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도시, 특히 대도시 중에 대도시인 서울의 생태요괴는 겨울이면 시청 앞에 만들어지는 스케이트장에서 가끔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서울에서 미세먼지를 비롯한 대기오염 농도가 가장 높은 공간으로, 스케이트를 타는 어린이들은 밝은 대낮에도 그들을 느낄 수 있다. 밤에만 홛동하는 흡혈귀와 좀비와 달리, 도시의 생태요괴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으며, 특히 낮은 곳과 밝은 곳에서 힘을 발휘한다.

겨울에 시청 앞 스케이트장에서 일주일 동안 스케이트를 타면, 지방에 사는 어린이들의 폐에 1년 동안 흡착되는 정도의 미세먼지가 달라붙는다. 이렇게 낮에도 버젓이 활동하는 도시의 생태요괴들을 오래 만나면 아토피, 폐렴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병에서부터 암처럼 조금 더 심각한 병을 앓게 된다.....이런 도시의 요괴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살까? 대개의 경우는 인간의 건강을 먹고산다고 할 수 있다.
-123쪽

때때로 한이 맺힌 존재들이 도시에서 요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건 좀 많이 무섭다.

내가 들어본 중에 가장 무서운 생태요괴는 '청계천 귀신'이다. 청계천은 원래 마른 하천, 어려운 말로 '건천(乾川)'이었는데, 박정희 시절 도시화 과정에서 뚜껑이 덮인 이른바 복개하천이 되었다.

그리고 40여 년 만에 그 뚜껑이 열렸는데, 그 자리를 다시 콘크리트로 메운 뒤 그 위로 모터로 끌어온 한강물을 흘려보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원래의 청계천은? 지금의 청계천 밑에 깔린 파이프를 통해 폐수들과 함께 흘러가는, 그야말로 허접한 도시 폐수 신세가 되었다.
-125쪽

다만 내가 생태경제학자로서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딱 한 한지만 꼽자면, '콤팩트 시티(compact city)'라는 것은 한국, 특히 서울에서는 생태적 의미에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콤팩트 시티란 간단하게 말해서, 더 높은 빌딩을 지어 사람들을 거기 들어가 살게 하는 대신 녹지를 더 늘린 도시를 가리킨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도시에서 높은 건물을 짓는 이유는 이런 멀쩡하고 합리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높은 빌딩이 있는 도시에 살면 기분 좋다는 단순한 이유, '랜드마크'라는 말로 통용되는 건물이 들어서면 땅값이 높아지는 것 같은 매우 복잡한 이유들 때문이다. 그런 높은 빌딩에 '친환경'이라는 포장을 씌워진 용어가 바로 '콤팩트 시티'라고 보면 된다. -128쪽

두번째 가설(사교육이 이렇게 쎄진 것을 설명하는)은, 더 슬프다. 경제학자를 비롯해 한국의 의사결정권자이자 상류층인 자녀들이 이미 외국으로 유학 간 상황이어서 한국의 십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그들 중에 한국에서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기 때문에 가끔 반례에 부딪히지만, 대체로 일관성을 갖고 있는 설명이긴 하다.

(지난 대선 때,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정동영 후보가 자녀의 해외 유학에 대해 묻자 그가 했던 '자녀의 선택권'이라는 해명은, 여러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뜨 그런 이들 중엔 자녀를 '특목고'에 보내는 경우가 많고, 그들과 정치적으로 반대편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대안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국 학계와 정치 엘리트의 자녀들이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요컨대 말만 좋아 공교육이지, 상층부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이미 외국으로 가 있거나 특목고로 빠져나간 상태여서 나머지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삶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두번째 가설의 내용이다.
-196쪽

한국 엘리트들이 기획하고 있는 변화는 경악할 만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학벌 시스템은 18세, 즉 고3 때 치르는 단 한번의 시험으로 인생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한국의 부자 엘리트들은 어느 순간, 가난한 학생들이 부자 부모를 둔 학생들을 경쟁에서 이기는 빈도수가 너무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은 한국의 공교육이 어느 정도는 버티고 잇기 때문에, 아무리 고액 과외와 특목고를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부자들의 2세가 가난한 집 2세게에 밀리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 빈도가 점점 줄고들고는 있지만, 한국의 교육은 어느 정도 기회의 균등, 즉 형평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경쟁을 13세로 낮추려고 하는 것이 부자 엄마들이 기획하고 있는 변화로, 아직 개인으로서 독립된 사유의 틀을 갖추기 전에 인생이 결정되게 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한 '국제중' 도입의 전말이다.
-197쪽

학교와 학원에서 실제로 가르치는 것은 '돈이 세상의 최고다'와 '친구를 죽여라'라는 단 두 가지다. 이 두문장을 묶으면, '지면 죽는다'가 된다.

.......

운이 좋은 경우는 3년, 운이 없는 경우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8년 동안 이 거대한 오케스트라에서 '악기'가 되어 철저하게 로봇상태로 길러지고, 그 결과 남는 것은 소비에 대한 욕망뿐이다. 극도로 통제된 이 공간에 인격, 협동 같은 고상한 단어는 발을 붙일 수도 없다. OECD 국가들이 대체로 강조하는 나눔이나 베풂 같은 미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기간에 한국 십대들에게 주입되는 단 한가지 코드는 '대학에 들어가면 해방이다'라는 문장이다.

물론, 이런 잔인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엄마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대학에 들어가면 해방된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다. 그들의 기다림 뒤에는 철저하게 영혼이 사라진 로봇의 삶, 그리고 완벽한 개발요괴를 만들어내는 무한 욕망이 다가올 뿐이다.

대학에서는 '스펙 5종 세트'가 기다리고 있고, 그다음엔 세계 최고의 반생태적 경제와 토목과 건설이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있는 '토건형 사회'가 기다리고 있다. -200쪽

한국의 시민단체를 경제 영역이라는 틀에서 보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 정도로 추정되며, 전체 고용율의 5% 정도가 지역복지 활동을 포함해 활동가들이 담당하는 경제 영역에 해당한다.

중앙형 단체가 됐든, 중앙과 전혀 상관없이 지역에서 움직이는 분산형 조직인 풀뿌리 조직이 됐든, 이 비중이 30% 정도 되는 순간이 한국이 실절적으로 선직국이 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국민경제의 생태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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