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좌절 -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
노무현 지음 / 학고재 / 2009년 9월
구판절판


세상이 많이 바뀐 것입니다. 다만 바뀌긴 바뀌었는데 이상하게 바뀌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남이 가진 것을 강탈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지금의 정부는 장물을 되돌려 줄 권한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과정에서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면서 힘이 빠져버리니까 기득권 가진 사람들, 특히 부당하게 기득권을 누리고 잇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억울한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 역사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정수재단 건만이 아니라 지난날 역상의 피해를 입었던 많은 사람들의 피해가 다 복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역사는 물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24쪽

'과거사 정리라는 것을 어디까지 해야 하나?' 하면서도 논리적으로 그 한계를 긋기가 어렵고 또 역사의 새로운 기준을 세워나가는데 필요한 만큼 '판단이라도 하고 넘어가자, 하다못해 이름표라도 갈아붙이자!' 하는 그런 것이 역사 정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저렇게 장물이 그냥 남아 있고 그 주인이 정권을 잡겠다고 하는 상황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이려니 무척 힘이 듭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우리가 이런 상황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높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역사 정리라는 것도 더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25쪽

3당 합당은 두가지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호남을 지역으로 고립시켰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것이 후에 가져온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지역구도가 완전히 돌이킬 수 없도록 고착화됐습니다. 어떻든 다시 회복시켜 보려고 노력을 했고, 지금까지 그 노력을 계속하고 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3당 합당은 큰 상처와 충격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3당 합당으로 인해 철새 정치의 수준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야심을 가진 한 사람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위해 개인적으로 이 당 저 당을 옮겨 다니는 수준이었는데 이제 차원이 달라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곳저곳 오락가락하는 것도 없어져야 할 잘못된 풍토인데, 이제는 정권을 놓고 자웅을 겨룰 정치지도자가 당을 넘어가 버렸으니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한두명의 기회주의자들이 정치판을 조금씩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전체가 통째로 기회주의 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후 정치인들의 행태가 실제로 그렇게 변했습니다. 자신의 소신이나 가치와는 거의 관계없이 당선이나 이익을 위해 아무런 원칙도 없이 보따리 싸들고 돌아다니게 된 것입다.-146쪽

지역주의와의 싸움과 기회주의자와의 싸움. 이것이 정치를 하는 동안 저에게 주어진 두 개의 큰 싸움입니다. 그래서 저는 '원칙과 통합'이라는 말을 계속하면서 대통령선거를 치른 것입니다. 저는 원칙에는 매우 까다롭게 매달리지만 통합을 위해서라면 다른 어떤 가치도 희생할 수 있는 정치를 해왔습니다. 3당 합당 당시 받은 충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분열주의와 기회주의를 극복하자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3당 합당이라는 것이 이름은 합당이지만, 그 내용은 국가적 분열이고 민주세력의 분열입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분열주의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미래에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저의 정치는 지금까지 '분열주의와의 투쟁' 또는 '기회주의와의 투쟁' 그 두 가지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습니다. -147쪽

김영삼 대통령의 '성공'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기회주의를 배척할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회적 노력이 소멸되어버렸습니다.

그전만 해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면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강한 영향력으로 반화합(反和合)이라는 대결적 정설르 통해 적대적 대결구도를 만들어놓고는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충동질하고 묶어서 쓸어갔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저항하기도 어렵고, 그렇게 해서 성공했기 때문에 이제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사회적으로 심판을 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정치풍토뿐만 아니라 사회풍토까지 크게 훼손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53쪽

공직사회가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지난날의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지난날의 습관, 문화의 잔재가 끈질기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관료주의의 잔재, 독재시대의 소위 '관존민비'와 비슷한 태도 등, 그런 문제점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공직자의 어두운 그늘은 지난날보다 많이 줄어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77쪽

남북 간의 평화, 통일 문제를 그냥 남북 간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동북아시아에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결은 400년 전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화 물결이 밀려오면서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 아주 긴박한 대결구도가 형성되어왔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냉전의 대치선으로 바뀌기는 했습니다만 동북아 지역에서의 역사적인 대결구도가 한반도 분단의 원인으로 작용했고, 지금도 그 대결적 질서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대결적 질서를 함께 풀어가지 않으면 남북 분단도 쉽게 극복할 수 없습니다......미국은 이미 동북아시아의 질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소위 동북아시아의 세력입니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의 평화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4대 강국이 서로 협력하는 질서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4강과 남북이 합의해야 동북아시아의 평화질서가 만들어지고 그래야 남북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로 다가서는 데 장애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219쪽

이라크 문제를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국의 요구를 모두 들어줘야 하는가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미국의 작전이 '세계 역사에서 볼 때 정당성이 있느냐?'에 대한 반론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아닌 사람은 이에 대한 어떤 견해를 지녀도 좋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한미 간에 반드시 필요한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한미동맹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222쪽

이라크 파병 문제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봐도 역사의 기록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대통령이 역상의 오류를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즉 스스로 역사의 오류로 남을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참으로 어렵고 무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23쪽

제가 여기까지(한미FTA)까지 이야기하면 진보진영에서는 '금융개방을 해서 외환위기를 당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방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개방의 준비 부실 탓입니다. 경제 전체의 핵심적인 시스템에 해당하는 금융개방 문제에 준비가 부실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준비 부실의 문제였지, 개방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232쪽

민주주의 역사를 보면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폭력적인 권력이나 공포정치와의 투쟁, 독재권력과의 직접적인 투쟁 단계입니다. 그 다음에는 공정한 법치주의의 단계를 거칩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대화와 타협, 소위 성숙한 민주주의 단계로 갑니다. 이 3단계를 우리 참여정부가 한번 시작해보자 했는데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낮은 수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포함해서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화와 타협이 되지 않는 획일적인 정치문화가 나타난 것은, 지난날 독재와 반독재와 같이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대결주의, 그리고 지역 간 대립구조 같은 요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대통령 권력과 여소야대라는 정치구조로 타협이 강제되지 못했고 자발적으로도 그런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260쪽

정치에서 진보와 보소의 노선 경쟁이 있어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복수정당제는 필수적인 제도입니다. 정당들은 서로 추구하는 가치를 달리하면서, 차별성 있는 가치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진보와 보수라는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정당이 경쟁하지만 실적적인 정책에서는 타협이 이루어져 비슷비슷한 정책으로 수렴됩니다.

하지만 두 정당은 각기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체성을 기반으로 우리의 미래 사회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어야 합니다.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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