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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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수십번 꿈이 바뀌는 다섯살짜리 딸아이가 가장 최근에 되고 싶은 것이 화가란다.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구해다준 색칠공부가 재미있었던지, 선으로만 이뤄진 흑백그림을 보면 무조건 크레파스를 들고 덤벼든다. 선을 넘어가기가 일쑤이긴 하지만, 그래도 벽지 등에 낙서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에 출력물을 꾸준히 배달하고 있다.

그런 딸아이 눈에는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은 아빠의 색칠공부 책으로 비춰졌나보다. 주말에 아무 생각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반색을 하며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아빠도 색칠공부해?'라는 엉뚱한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을 했더니, 아이 표정이 이상하다. '선으로만 이뤄진 좋은 색칠공부 책'을 아빠 혼자만 보는 것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아이에게 이 책은 색칠공부 책이 아니라고 열씸히 설명을 하긴 해봤지만, 아이는 그닥 알아듣는 모양새가 아니다.

아이 눈에서 최호철의 책을 본다면 분명 이건 어른을 위한 색칠공부 책일 것이다. 그건 아마도 글자보다 그림이 더 많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 일 것이다. 또한 그림체가 사진처럼 정교한 그림도 아니다. 일필휘지로 그려낸 크로키도 아니다. 또한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내거나, 기억에서 끄집어낸 결정적인 한 컷은 더더욱 아니다. 그건 바로 수십권의 스케치북에 담겨있는 스케치를 바탕으로 정교한 티테일을 짜맞추기를 통해 만들어낸 바로 우리네 생활 풍경이다. 어찌보면 사진보다도 더 정교하게 우리네 실제 생활들을 묘사하고 있는 그의 그림 속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기만 하다.

지붕과 지붕을 맞대고 있는 산동네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집집마다 고단한 머리를 눕혀야 하는 지친 가장들이 있을테고.....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삶을 꾸려나가는 강인한 생명력들이 군데 군데 숨어져있다. 코프레스 장 한켠에서 어질러진 대회장을 치우는 아줌마의 빗자루 쥔 손과 열심히 흔들리는 지하철 한쪽에서 목청 높여 물건을 판매하는 행상아저씨 앞에서 눈을 감고 조는 척하는 청년과 비탈길을 내려가는 마을버스 안에 모여있는 우리네 약자들(제목을 보고서야 무엇을 의미하는 그림인지 겨우 알아차렸다).

딸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더라면 그림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에만 눈길이 갔겠지만 한 생명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부모가 되고 나니, 주변부에 있는 고단한 삶을 사는 모든 이들도 나와 같은 무한 책임을 진 고단한 인생이라는 점 때문에 애처로운 눈길을 한번 더 주게 되더라(부모가 되어서야 쬐금 알게 되었을 뿐이다. 결혼해서 배운 소중한 깨달음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이것이다).

수십권의 스케치북을 통해 뽑아낸 우리네 일상들이 그의 손 끝에서 좀더 많은 기록들로 남겨져, 더 많은 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갈만한 곳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의 분발을 감히 요청해 본다.  

뱀발....아이에게는 색칠공부 부분만 복사해서 주는 걸로 타협을 봤다. 두고두고 보고푼 이 책에 딸아이의 솜씨를 남겨두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지만, 그래도 책을 깨끗하게 봐야 한다는 편협한 편견 때문에, 결국 복사하고 말았다. 그냥 쉽게 페이지 넘기고 싶은 분들에게 감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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