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대학원 생활은 내게 큰 교훈을 안겨다 주었다. 공부 또한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었고, 내가 ‘성적을 잘 받는 학생이었을 뿐 ‘공부에 재능이 있는‘ 학생은 아니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서건 직장에서건 우리 사회에서는 일단 학부를 졸업하면 일정한 책임과의무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와 함께 내가 ‘직장생활‘에 대해 크나큰 착각과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수입이 없이 벌어놓은 것만으로 1년간 생활하다 보니 내가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물질적 풍요 없이 지식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 만큼 고고한 인간이 절대 아니었다. 내가 회사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전적으로 내 오만함 때문이었다.
나는 업무 자체는 진지하게 대했지만, ‘밥벌이‘라는 회사 생활의 본질에는 진지하지 못했다. 회사는 능력을 인정받고, 칭찬 받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직장이란 돈벌이를 위해 다니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돈을 받는 이상 나는 그곳의 룰에따라 움직일 의무가 있었다. 조직의 녹을 먹고 있는 사원인 내가 조직의 부속품처럼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이상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인간이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해졌다. - P168
누구나 한 번쯤은 이카로스처럼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자신이 결국은 범속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추락을 겪은 다음에야 온다. 브뤼헐의 작품에서처럼 하늘을 날던 대단한 존재였던 내가 땅 위로 떨어지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에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야.
휴직했던 해의 가을, 일본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에서 열렸던 <벨기에 왕립 미술관전>에서 도판으로만 보아왔던 이 그림[브뤼헐-이카로스의 추락]을 실제로 보았다. 그림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몰락했다고 느꼈지만그렇게 생각했던 건 나였을 뿐 그 누구도 내 인생의 부침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모두가 자신의 일에 골몰한 채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동안 나 혼자 다리를 바둥대며 침몰하느라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을 뿐이라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사는 게 쉬워졌다. 이듬해 나는미련 없이 복직했고, 더이상 안달복달하며 살지 않았다. 칭찬에도, 비난에도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내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주어졌다는사실에 감사했다. 아무도 내게 기대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더니 심간이 편해졌다. 마침내 나는 ‘우등생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것이다. -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