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인 더 시티
신윤동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품절


불행히도 이 땅은 점점 반일 아니면 친일, 반미 아니면 친미로 나뉘고 있다. 회색지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제국주의도 싫고, 민족감정도 마뜩치 않은 나 같은 회색분자에게 작금의 사태는 뭔가 불편하다.

타오르는 애국심이 무쇠불위의 민족감정으로 포장된 또 다른 집단주의일까봐 불안하다. 차가운 논리 없는 뜨거운 감정은 불안한 미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강한 미국'에 맞설 대안은 '강한 대한민국'이 아니라 '평화로운 한국'이다. '침략하는 일본'에 맞설 대안은 '반격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평화로운 한국'이다.

청년들의 서늘한 애국심이 쿨한 대한민국을 만든다. 쌩뚱맞은 헛소리에는 냉정하게 생까자. 가소로운 헛짓은 가볍게 무시하자.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이, 애국심으로 충만한 사회는 위험하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시처럼,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34쪽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의 '근본'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목숨'도 앗아가는 깡패집단이다. 일상을 전쟁터로 만드는 폭력집단이다. 그들이 어떤 명분으로 미화하든지 간에 폭력은 폭력일 뿐이다. 김선일 씨의 무고한 죽음 앞에서, 다시 한 번 희망한다. '순교자'가 없는 세계, '애국자'도 없는 나라, 근본 없는 놈들의 세상을. 더 끈질기고, 더 지독하게 꿈꾼다. -43쪽

사실 대한민국 뉴스는 아주 정치적이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만큼 보여주지 않느냐로 드러난다. 브라운관 너머롤 공영방송이, 상업방송이 어떻게 진보정당을 왕따시켜왔는지 돌아보자. 여론조사 발표에서 제외하고, 토론 프로그램에서 배제하고. 물론 고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고의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고의가 아니라서 더 무섭다. 진보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의 무의식이 더 무섭다...

...그날 국회 의사봉은 절대반지 같았다. 사악한 무리들이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순간, 나 또한 경악하고 절망했다. 세상은 파멸로 치닫고, 악의 제국이 태어나는 줄 알았다. 정말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 절대반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의 <애국가>도 내 마음을 치지는 못했다. 그저 절대반지는 위험하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원정대가 필요하다. -58쪽

터져 나오는 불만을 수습하기 위해 교육부 장관은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수능 출제 개선위원회를 만들고, 시험 뒤 공식 이의제기 절차를 신설하겠다는 대안도 제시했다.

물론 근본적인 불만에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그것마저 인정한다면 '교단'이 깨어질지도 모르니까.

미완의 반란이지만, 그래도 의심을 가진 자, 많은 것을 얻지 않았는가. 점수를 얻고, 개선안을 얻지 않았는가. 의심은 반성을 부르고, 대안을 낳는다. 불신 천당, 광신 지옥-65쪽

30대 초반까지는 친구들 모두가 결혼하지 않았다. 불과 서너 해가 지나면서, 친구는 장가가고 후배는 시집갔다. 나이주의 그래프에 따라서 결혼 했으니 아이를 낳았다. 이제 아이도 보살펴야 하고, 장모님도 챙겨야 하고, 경조사도 신경써야 한다. 30대 중반의 미혼인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이다. 솔직히 처음엔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죄책감은 아니지만 박탈감은 느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끊임없이 무언가와 부대끼는 저들에게 뒤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나이로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나이의 주기에서 이탈하면 무언가 끊임없이 불편하고, 끝없이 자문하게 된다. 말도 못하는 아이와 '통화'하는 후배의 목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무언가에 정성을 기울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결국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쓸쓸해한다.

나는 30대 초반까지 나이주의의 잠재적 소수자였지만, 30대 준반에 비로소 현실적 소수자가 되었다. -75쪽

"남자끼린데 뭐 어때~."

남성 동성애자들이 서로에게 성적인 장난을 치면서 하는 농담이다. 이 농담에는 뼈가 있다. 남성과 남성, 동성과 동성 사이에는 '성적'희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한국의 성문화를 희롱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 말은 동성 간 성폭력이 벌어진 전후에 성폭력을 무마하는 말로 사용돼왔다.

이처럼 한국에서 동성 간 성폭력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성추행을 당하고도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었다.

동성 간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면, 존재하지도 않는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꼴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동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돼버리는 역설마저 존재한다.

설사 동성 간 성추행을 인정하는 문화 속에 있다 하더라도 남성 간 성추행의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백하기 어렵다. 피해자들의 상당수가 성폭력을 당한 고통에 남성성을 훼손당했다는 수치심까지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남자답지 못해서 당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혹시 내가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88쪽

물론 공적인 권력이 사적인 전횡을 뒷받침하는 구조도 문제다. 아직도 한국의 학교, 특히 지방의 사립학교에서 교장은 왕이다. 왕 같은 전권을 행사한다. 그래서 의혹이 있어도 교사나 학생이 문제 삼기 어렵다. 더구나 동성 간 성추행처럼 공공의 합의된 지지를 얻기 어려운 문제는 감히 제기조차 어렵다. 어렵게 용기를 내서 제기한다고 해도, 제도가 권력을 옹호한다. 문제가 된 교장도 성추행 의혹이 터져 나온 뒤에 버젓이 학교에 출근했다고 한다.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실에 따르면, 2003년 교장의 성추행 사건 1건은 정직 1일로 끝났다. 2004년의 3건 중 견책이 2명, 정직이 1명이었다. 한마디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성추행을 저지른 교장은 권력을 아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그가 성기를 만지고 나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게 했다고 증언했다. 성추행을 당한 사람에게 이중의 모욕감을 주어서 철저하게 무기력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게다가 그의 행위를 강제 추행이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성추행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권력이 작동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동성 간 성추행은 피해자를 이중의 고통으로 몰고 간다. 성추행을 당한 고통에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고통까지 더해지는 것이다(물론 이성 간 성추행을 당해도 말하기는 어렵다).

말하지 못하는 슬픔은 이제 끝나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좀 무감해지는 것이 차라리 피해자들의 말문을 열어주는 길인지도 모른다. 피해자들의 용기로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 더 좋아져야 한다. 지금쯤 한반도 곳곳에 자신의 손버릇, 말버릇, 입버릇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게다. "너 지금 떨고 있니?"-90쪽

나는 대마가 두렵다. 담배도 끊지 못하는 주제에 대마까지 피울 자신이 없다. 중독에 약한 나로서는 또 다른 중독이 그저 무서울 뿐이다. 아예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대마를 금지했으면 하는 마음도 굴뚝같다. 하지만 나는 피우지 않지만, 남들이 피우는 것까지 무조건 금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문제다. 이제 막 대마초를 피우지 않더라도, 대마초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열렸다.

대마를 허하라, 아니 대마를 생각하라. 그것이 '열린'사이회다. -98쪽

첫 번째 직장에서는 "나는 고립된 섬이야"라고 주문을 걸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밥벌이를 그만두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어쩌다, 아니 운좋게 <한겨레21>로 옮기게 됐다. <한겨레>니까 월급 반, 운동 반, 그렇게 은근한 자부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직을 하면서 월급이 줄었다. 직장을 옮기기 전, <한겨레>에 다니고 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먹고살 만큼은 주지?" 돌아보면, 소박한 질문이었다. 그때는 언제든 가난할 준비를 하지고 다짐했다. 역시나 우습지만, 그때는 5천원이 넘는 밥은 사먹지 말자는 원칙도 지켰다.

물론 이제는 먹고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1년에 두어 번 비행기도 타야하고, 철마다 예쁜 옷도 사야 한다. 심지어 길 가다 혼자서 분통을 터트린다. 직장생활 10년이면 이 정도는 모았어야 하는 것 아니야? 구체적인 액수까지 생각하다 그 구체적인 액수의 3분의 1밖에 없는 현실을 떠올리면서 분노가 치민다.

정말 이유없는 반항이요, 방향 없는 분노다. 겨우 10년만에, 나는 그렇게 치사한 중산층 아저씨가 됐다. -107쪽

동남아는 또 다른 깨달음도 안겨주었다. 나는 도저히 생태주의자가 될 수는 없겠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여행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부딪치게 되는 저개발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자연이 아름다워도 지저분한 화장실과 고장난 에어컨은 참을 수 없었다. 도시를 떠나겠다는 호기가 그저 치기 어린 '낭만'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됐다.

나는 고작 시골을 동경하는 '시티 보이'였을 뿐이다. 도시를 사랑하고, 개발을 좋아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래서 경제성장이 꼭 행복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설교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차마 양심상 그럴 수 없었다. 한 달 봉급으로 20만 원을 받는 사람들에게 차마 '경제성장 해도 살기 고달프긴 마찬가지'라고 설득할 수는 없었다.

해보면 허무한 짓도 못하면 안달이 나기 때문이다. -167쪽

번잡한 길에서 이어폰을 꽂으면 아늑한 고립이 찾아오고, 비로소 개인이 됐다는 안도감이 밀려든다. 그렇게 엠피쓰리가 만드는 고립감을 나는 사랑한다. 엠피쓰리 덕분에 나의 머나먼 귀가는 때때로 아늑해졌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견뎌낸 날들도 있었다. 엠피쓰리 플레이어만 있으면 복잡한 지하철도 때로는 댄스 플로어로 변했고, 버스는 누군지 모를 절대자에게 경배하는 예배당으로 바뀌었다.

지하철에서 셰어 누님이 근엄하게 "Do you believe in love after love?" 라고 물으면 고개를 숙이면서 믿음을 고백했고, 카일리 언니가 "Your disco needs you~"라고 지엄하게 명령하면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살며서 엉덩이를 흔들었다. REM 오빠들이 "Losing my religion~"이라고 읊조릴 때 하마터면 버스에서 무릎 꿇고 '나도 그렇다'고 고백하며 울먹일 뻔했다. 이렇게 엠피쓰리 플레이어는 타임머신이었다....

...최근엔 이선희의 발라드와 들국화의 노래들을 들었다. 들국화는 시들했고, 이선희는 감미로왔다. 그토록 무시했던 이선희가 좋아지고 내 청춘의 들국화가 시들하다니, 내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반려자는 취향의 무상함도 가르친다.

친구는 친구도 소개했다. 평생 친해지기 힘들겠다고 단념했던 힙합음악도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완벽한 귀가란 먼저 심야의 좌석버스에 몸을 파묻고, 반드시 엠피쓰리를 들으며 돌아가는 길이다. 좌석버스의 좌석에 몸은 적당히 은폐 엄폐되고, 시야는 앞좌석에 비스듬히 가려지고, 옆좌석에는 아무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엠피쓰리에서는 익숙한 음악이 흐른다. 나는 아늑함에 취한다. 이대로 영원히 갔으면 좋겠다. -181쪽

나는 쇼핑이 끝나면 죄책감이 밀려드는 타입의 인간인데, 죄책감을 지우기 위한 뻔한 전략은 세일하는 물건을 사는 것이다. 최소한 30퍼센트 이상, 웬만하면 50퍼센트 이상, 이것이 나름의 원칙이다. 심지어는 방콕에서도 세일하는 물건 위주로 사는데, 세일 생활자의 비애도 겪는다. 싼 맛에 빠져 취향이 사라져버린다. 물건의 자태보다 세일의 폭에 눈이 멀어 생긴 결과다. 누군가의 훌륭한 옷차림을 보면, '흥 비싸게 샀겠지' 질투해버린다.

죄책감을 지우기 위한 또 다른 안간힘, 얼마를 썼느냐를 머릿속에서 떨쳐버리기 위해서 세일로 얼마를 절약했느냐(벌었느냐)를 계산한다. 그래도 남는 죄책감을 위해 어쭙잖은 정치 논리도 동원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슬로건, "소비로 제3세계 인민을 돕는다-189쪽

" 뒤집으면 저개발국가의 저물가를 마음껏 착취하겠다는 말씀이다.

나의 소비생활에서 잊기 힘든 아픈 추억이 있다. 어언 두 해전, 인구 7천만의 사회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의 최대 도시인 호치민 공항의 면세점이 그토록 초라해서 도무지 살 만한 물건이 없을 때였다. 심지어 면세점에서 피폐한 인민의 소비생활을 보았다고 '오버'하면서 가슴 아파했다.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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