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중반에 나의 이상형은 백과사전 같은 남자였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자신의 무식함을 매일 발견하던 시절의 기준이었다. 지금은 백과사전을 책장에 꽂아두는 것으로 만족한다. 의존적 대상 선택의 기준을 가진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그 기준이 되는 결함 속에 영원히 매몰될 수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른 나이에 결혼하는 사람은 대체로 의존적 대상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에 비해 너무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애적 대상 선택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본다. 그런 이들은 유아기에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순조롭게 못해 그 사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 이들이다. 자기애적 대상 선택의 특징은 우선 자기 이미지와 닮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 타인을 사랑할 때도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사랑한다. 자기 이미지가 미화되고 부풀려져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도 실제보다 이상화시켜 흠모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은 상대방의 참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관계가 지속되면서 이상화된 이미지가 깨어지면 그 모든 잘못이 상대방에게 있는 듯한 실망감을 안게 되고, 사랑도 종말을 고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애적 사랑이 불행한 진짜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공감, 배려가 없다는 점이다. 상대방에게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하고, 자기 멋대로 사랑을 쏟아붓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견이나 감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자신이 쏟아붓는 사랑에 대해 상대가 즐거워하는지 부담스러워하는지, 심지어는 경멸하고 혐오하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랑의 보편적 사레는 짝사랑이고, 극단적이고 불행한 사례는 스토커의 사랑일 것이다. -34쪽
이제 나는 사람들이 탐욕스럽게 보이고 타인들이 나를 시기한다고 느껴질 때면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지나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의 소유물 중에서 무엇을 파괴하고 싶은가?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자시에게 물어본다. 내가 지금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남에게 보이는 관심을 반만 줄여도 생이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역시 게슈탈트의 말이다. 우리가 '남에게 보이는 관심'이란 대체로 방어의식이거나 시기심이거나 의존성이거나 투사의 감정 중 하나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140쪽
교회음악을 공부하는 여학생은 아버지가 목사라고 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성장기를 목사의 딸로 보내야 했던 어려움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엄격한 규율과 서로 빤히 하는 교회사회에서 항상 우등생, 모범생이 되기를 요구받은 성장기의 숨막힘에 대해 들려주었다. 유학 중에도 그는 한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거의 받지 않은 채 생활비며 방세를 아르바이트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의 청교도적 성장 배경과 몸에 밴 검소함을 염두에 두면 이탈리아 할머니들의 화장과 액세서리에 대해 천박하다고 말하는 배경 역시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165쪽
"나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한 사람의 사랑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처럼 가슴 아픈 구절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일에 지극한 만족감을 느낀다"는 뜻이고, 또한 "나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돌볼 줄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나아가 "내가 사랑을 느끼는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며, 그리하여 내 사랑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본 일이 없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른다"는 뜻과 닿아 있을 것이다. -198쪽
타인에게 과잉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사기치는 사람. 심리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사람은 후자이다. 그런 이들은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받고 싶은 보호와 관심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올 호의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호의를 베풀어놓고 상대가 그것에 대해 보답하는지를 지켜보는 무서운 속성이 있다고 한다. 오른손이 한 일에 대해 왼손이 보답받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동안 내가 베푼 친절에도 틀림없이 그런 속성이 있었을 것이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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