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 박완서 묵상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6년 12월
구판절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믿는 이조차도, 아기가 장차 예수님을 닮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남의 아기를 보고 너 앞으로 예수님처럼 살아라, 하면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남의 아기는 몰라도 내 아기만은 예수님처럼 살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기 예수의 천진성이 꽃피기 전에 잘라버리려고 작심을 합니다. 얻어맞는 아이가 될까 봐 먼저 때리길 부추기고, 행여 말석에 앉는 아이가 될까 봐 양보보다는 쟁취를 가르치고, 박해받는 이들 편에 설까봐 남을 박해하는 걸 용기라고 말해주고, 옳은 일을 위해 고뇌하게될까 봐 이익을 위해 한눈팔지 않고 돌진하기를 응원합니다.
모든 아기들은 태어날 때 아기 예수를 닮게 태어났건만 예수님을 닮은 어른은 참으로 드뭅니다. 있을 리가 없지요. 우리가 용의주도하게 죽였으니까요.

- 우리 안에 공존하는 동방박사와 헤로데 중에서 --15쪽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한 마음도 될 것 같군요. 또 보물이 가득 찬 창고를 가진 부자는 한시도 마음이 놓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튼튼한 자물쇠를 채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심복으로 창고지기를 삼고 나니 한시름 놓은 것 같아 생전 처음 여행으 떠납니다. 그러나 창고로부터 몸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창고한테 얽매이게 될 것입니다. 믿기로 한 창고지기가 못 미더워지면서, 내 재산은 내가 지켜야지 이 세상에 누굴 믿나 싶어 다시 집으로 옵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창고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마음이 가난한 이는 자유인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진실로 열린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유인이라면 하늘나라를 상으로 받을 만하군요.

- 이의 없습니다 중에서 --25쪽

그렇다면 주님, 빛이 되는 것도 사양하겠습니다. 그 대신 제 언행이 주님의 빛을 기리며, 부지런히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금력이나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안 되는 것만도 저로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헤아려주소서.

- 차라리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중에서 - -28쪽

나는 악마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나는 안다. 악마가 나처럼 생겼으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주님을 떠보는데 선수니까.

- 주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중에서 - -37쪽

적어도 주일마다 교회에 거르지 않고 나갔으니까 나야 큰 재난을 당하지 않겠지. 하고 바라거나 수입의 일정액을 꼬박꼬박 현금했으니 언제고 몇 곱으로 받을 날이 있겠거니, 은근히 기다리는 평범한 사람의 가장 소박한 믿음도 실은 신자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제품의 쓸모가 소문난 대로인가 아닌가 시험해보려는 소비자의 마음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요.

- 최초의 크리스트 세일즘맨 중에서 - -48쪽

그러나 순서 따져서 무엇하랴. 이제 그들의 운명은 나무에 속하지 않고 땅에 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를 쓰고 겨우내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한바탕의 봄바람에 어이없이 무너져내린 주책없는 잎새들에게 움트는 새싹은 원수 같았을지도 모른다.

-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중에서 - -64쪽

어떤 인터뷰 기사에서였다고 기억하는데, 그분(장기려 박사)은 자신의 의술로 재산을 형성할 생각은 추호도 없이 오로지 가진 것 없는 소외된 이들을 위해 바친 까닭을 자기가 여기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능력껏 도우면 북에 남은 가족들도 가장 없이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여러 막막하고 어려운 고비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중에서 - -83쪽

어떻게든지 고쳐주고 싶어 무슨 짓이든지 다할 것은 물론입니다. 만일 꼭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가는 의사나 약이 있다면 전 재산이나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가 있을 텐데 그까짓 개쯤 못 될 것도 없다는 걸 알 것 같습니다. 개보다 못한 구더기라도 되고 말고요. 그러나 꼭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는 의사한테 한해서입니다. 요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늘 그러하셨듯이 여인의 딸도 주님의 권능으로가 아니라 에미의 믿음으로 고치게 하고 싶으셨던 거로군요.

- 에미의 마음 중에서 - -106쪽

포도원 일꾼이라면 물론 말발이나 글발로 먹고 살 수 있는 지식인은 아니었을 테고, 요즘의 기능직하고도 달라 몸 힘 하나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막노동꾼이었을 것이다. 한 데나리온도 새벽부터 일을 나온 근면한 일꾼과 인색하지 않은 주인이 합의한 액수니까 식구들과 그날의 일용할 양식을 해결할 만한 가치는 되었을 테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저임금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 주님의 잣대 중에서 --120쪽

환경오염이 심각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떠드는 건 누군가를 깨우쳐주기 위해선데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행동을 안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티끌 모아 태산은 재물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쓰레기 더미가 아무리 어마어마해도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한 움쿰이 만든 것이다.

- 말과 행동 중에서 --123쪽

사흘이 멀다 하고 갈아들이는 파출부 중에서도 가장 일 못하는 파출부가 걸린 날이었다. 겨우 시간만 채우고 너도 틀렸다, 싶어 소정의 수고비나 주어 보내려는데 이 파출부가 현관에서 미적미적 가지를 않았다. 뭐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제 또 올까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매달리듯 절박하여 차마 그만 오란 소리를 못했다. 두 번, 세 번 오는 날이 거듭돼도 일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일을 못하면서 파출부로 나선 게 뻔뻔스럽다 싶으면서도 그만두란 말을 할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만 것은 그 파출부 한 사람의 어깨에 병든 남편과 어린 자식들의 밥줄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 나의 팔자 좋은 친구는 벌써 몇 년째 그 파출부를 단골로 쓰면서 이제는 칭찬이 자자하다. 그 파출부가 그동안 일을 잘하게돼서가 아니다. 여전히 일을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해야 할 일을 여기저기 안 흘려놓은 데가 없다. 그게 그렇게 좋다는 것이다. 내 친구는 그 일 못하는 파출부에 의해 처음으로 자기가 이 집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다는 것이다.

- 내 친구 이야기 중에서 --126쪽

주님은 뜨거운 사람만 부르시는 게 아니라 차가운 사람도 부르신다는 것을, 똑똑하고 말귀 알아듣는 사람만 부르시는 게 아니라 미욱하고 아둔한 사람도 부르신다는 것을, 다만 부르시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 부르시는 방법 중에서 - -169쪽

주님,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빈방에 인색해지다 보니 우리 마음속에서까지 남에게 내줄 빈방이 없어지는 거 있죠. 마음속에도 빈방이야 많죠. 빈방이 많아 이렇게 매일매일 허전하고 허망한 줄 알면서도 남에게 내줄 빈방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춥고 시리고 고달플 때 식구나 친구나 이웃의 마음에 있는 빈방에 들어가 쉬며 위안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남을 위해 내가 내줄 빈방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빈방이라면 잠긴 방과 무엇이 다르리까.

- 빈방 중에서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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