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중앙대학교 교지 『중앙문화』기고> 

 

베스트셀러?

  올해 5월, 서점에 책 한 권이 등장했다. 표지에는 ‘JUSTICE’라는 모양이 크게 박혀있다. 한글 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 글쓴이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라는데, 하버드 대학의 교수다. 이 책은 그가 ‘정의Justice’를 주제로 삼아 해마다 여는 강의의 강의록 혹은 강의초안이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학생들이 모여, 경제정책도 신기술도 아닌 정의에 대해 배우는 강의라고 한다. 목차에는 칸트니 아리스토텔레스니 하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과목에나 나올 것 같은 이름이 들어가있다. 

  이런 면모들을 조합해보았을 때, 이 책은 다른 인문학 책들이 그렇듯이 1000권이나 겨우 넘길까 말까 한 판매부수를 기록하는 게 정상이었다. 표지도 예쁘지 않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 대부분이 이름만 얼핏 아는 정도인 샌델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욱 낯선 이름일 것이다. 다루는 내용은 머리에서 잊어버렸던 수능 공부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못난 표지와 유명하지 않은 글쓴이와 지루한 내용의 3박자가 골고루 갖추어진, 다시 말해 망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한 마디로 말해 대박을 터뜨렸다. 출간 이후 급하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더니,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11월 초에는 50만부를 넘겼다. 지금 추세로는 스테디셀러 반열에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서는 예약이 밀려있는 경우가 보통이며, 학교 중앙도서관에도 무려 13권이나(!) 있다. 조금 더 과장을 섞자면, 2010년에 지하철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다음으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문제는 이 책이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퓨전무협이나 트렌디한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이라는 것이다. 

  무척 당혹스럽다. 비슷한 주제에 비슷한 명성을 가진 사람이 쓴 책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만큼 팔린 사례는 없다. 예를 들면, 존 롤즈John Rawls가 쓴 『정의론Theory of Justice』은 한국에서 얼마나 팔렸을까? 『실천이성비판』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또 어떤가?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자신의 희망사항을 덧씌우기도 한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정의를 갈망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나. 그리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이 사회의 병리를 점검할 수 있는 척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그 평가를 내린 자신이 사회를 공정하지 않다고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하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비슷한 주제에 비슷한 입장을 펼치는 다른 책들이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대통령이 휴가를 가면서 들고 갔다는 소문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식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말 정도다. 

  그러면 읽어보어야 한다. 이 책은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샌델은 왜 이렇게 글을 썼는가? 그리고 이 책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왜 베스트셀러일까?

  어떤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회적인 맥락을 짚어내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 책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도 틀린 방법은 아니다. 베스트셀러를 결정하는 데 사회 분위기와 책의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어야, 그 내용이 사회와 부합하여 판매부수라는 실제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정의란 무엇인가』는, 책 자체로도 매우 괜찮은 책이기 때문에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끊임없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누구나 부담없이 읽기가 편하다. 도덕과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으레 등장하는 괴상한 개념과 명제들이 이 책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샌델이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인용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대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례 속에 모두 담겨있다. 이 이야기들은 여러 쟁점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가 신중하게 선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 사례들이 매우 자극적이다. 그리고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부자의 부에 대해 국가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라는 말 대신 ‘미국 부자 1등 빌 게이츠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도 되는가?’를 사용한다.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을 죽여도 되는가?’,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슬픈가?’ 는 질문도 들어있다. 대개 샌델의 질문은, 일상에서 일어날 법한 밋밋한 사건들이 아닌, 생명이나 권리가 걸린 상황에 대해 선택을 강요한다. 마치 잘 짜여진 TV 쇼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셋째, 이 이야기들 때문에 샌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함의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어, 이것은 문제인데.’ 라고 읽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런 방식의 효과는 크다. 따라서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론들도, 샌델의 사례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곧바로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 자습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사례가 말해주는 사항을 글쓴이가 어느 정도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로 직접 정리해주기도 한다. 

  넷째, 사실상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도덕에 대한 매우 다양한 입장을 효과적으로 단순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샌델은 윤리학사에 등장한 여러 입장을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칸트와 롤즈), 덕 이론(아리스토텔레스)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몇몇 특수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이 샌델의 모델에서 포착할 수 없는 입장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 책에서 쉽게,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완성된 형태로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장점들이 지금처럼 화제에 오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내용을 읽는 사람이 마주치는 사건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적용해보기 쉽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책과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도덕적인 문제에 직면해있으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 고민해야하는지 알아간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론적 수단을 제시해준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 모든 욕구를 채워주기에 아주 알맞은 형식으로 써진 책이다. 그리고 바로 샌델이 자기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위하기를 바랐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샌델의 위치?

  샌델이 이런 방식으로 책을 쓰게 된(혹은 강의를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학문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그가 책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샌델은 존 롤즈에 매우 반대한다. 이런 반대는 비단 롤즈와 샌델에게만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흔히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학문적 논쟁에서 롤즈는 자유주의 진영을, 샌델은 공동체주의 진영을 각각 대표하는 학자이다. 이 논쟁은 샌델이 1982년에 롤즈를 비판하는 책을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도 흥미롭지만, 그 큰 맥락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서술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샌델의 전략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샌델, 그리고 샌델과 함께 대표적인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Alesdaire MacIntyre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보여지는 입장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매우 가까워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샌델과 매킨타이어가 함께 강조하는 것은 바로 덕virtue이다(『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미덕으로 번역되어있는 것 같다). 이 덕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충실하게 지속적으로 사는 삶을 뜻한다. 인간은 영혼, 그리고 영혼에서도 이성이라는 특별한 부분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따라 지속적으로 삶을 꾸려나간다면 그 사람은 덕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은 삶의 목적인 행복한 삶eudaimonia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어떤 특별한 원리나, 모든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지침은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더 가깝다. 오히려, 그는 구체적인 상황마다 그에 맞는 행위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양식을 찾게 해주는 인간의 능력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실제 사건들과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어떤 행위가 가장 적합한지 알아내는 훈련이 요구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습관hexis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이렇게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실천적 지식phronesis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실제 벌어지는 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사건이 없는 한 도덕은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제목,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설정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전통에서는 정의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질문한다. 공리주의에서는 도덕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좋은 것’와 ‘싫은 것’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도덕적 문제들을 이 두 개념으로 환원시킨다. 자유주의에서는 ‘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며, 이와 별개로 ‘자유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여기에 기초하여 권리를 설정하고 그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법의 수립을 추진한다. 정의에 대한 질문은, 선과 정치가 오묘하게 닿아있는 영역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하고 적절한 기준을 제시하려고 했던 그 곳이다. 

  샌델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전략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재현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도덕에 대한 논의는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도덕적·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정치적 판단과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샌델이 여러 윤리적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전략은 자신의 입장에 충실히 따르는 일, 즉 구체적인 사례들을 계속 보여주며 여기에서 가장 적합한 선택 또는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윤리적인 입장에 부합하는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어쩔 수 없이 ‘도덕적 직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매우 위태롭다. 물론 다른 체계를 자기 내면에 담고 사는 사람들도 직관처럼 보이는 판단을 내리지만, 그것은 어떤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며, 추론하는 과정을 빠르게 하거나 생략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짜 직관에는 이런 판단의 체계나 기준이 없다. 당장 아리스토텔레스만 보아도, 샌델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행위하는 것이 이성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여기서 ‘적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듯, ‘적절하다’는 말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적절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떻게?
 

이데올로기?

  우리가 ‘직관’하여 어떤 행위를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어떤 학자들은 신념의 체계라고 부르며, 그것을 한 단어로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는 체계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우연히, 어떤 체계에서 연역할 수 있는 결론을 담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인 추론이나 엄밀하게 검토된 양식이 아니다. 거의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정하게 행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행위들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아까 위에서 잠깐 특수한 몇몇 예외들을 제외하면 샌델의 모델이 거의 모든 윤리학적 입장을 소개해주고 있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이데올로기’를 언급하는 주장들이 이 특수한 몇몇 예외들에 해당한다. 가장 멀게는 트라시마쿠스가 내뱉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라는 짧은 말에서부터, 최근에는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권력의 미시적 작동에 의해 사회 전체가 통제되고 있다고 폭로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같은 사람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만들어진 조건에 따라 아주 우연한 여러 가지 형태로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당위명제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에 편입되는 순간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편입되지 못한다면, 한 이데올로기의 깃발 아래 놓여있는 많은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력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편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실천을 강요할 권능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해도 사회로부터 배척당한다. 나와 너의 분리, 우리와 너네의 분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요소가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샌델의 한계점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샌델은 시장만능주의자들과 낙태찬성자들을 자유지상주의라는 한 범주에 묶었다. 하지만 실제 정치환경에서 이 둘을 동시에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의 시장만능주의자들, 즉 보수주의자들은 대개 기독교도적 정체성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낙태에 반대한다. 다시 말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명령하는 명제들의 묶음, 즉 어떤 특수한 이데올로기이다. 또한 낙태찬성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자유롭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낙태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여성의 몸을 취급하는 방식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맥락이 다른 이야기이다. 

  더욱이 샌델은 지속적으로 어떤 일관된 체계 안에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것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항상 같은 체계에서 연역될 수 있는 선택지를 뽑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가정을 바탕에 두고 논지를 전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런 일관성을 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담아놓은 당위적 명제들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죽더라도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아래에서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죽을 때 덜 슬픈 것이다. 사실 샌델의 판단과는 다르게, 도덕적 직관에 따른 판단은 일관된 도덕적 신념에 위배될 때가 훨씬 많다. 우리는 서로 모순된 행위를, 그것이 모순된 것인지 아닌지 판단을 유보한 채 일단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한다. 사회와 이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샌델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덕목은 모두 이데올로기에 속하거나,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것들이다. 우애, 애국심, 시민적 의무감, 가족애, 형제애 모두가 그렇다. 이런 개념들은,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우나 매우 위험하다. 이들은 인종탄압, 전쟁과 같은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또한 가족이든, 형제든, 국민이든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는 경우를 너무나도 자주 볼 수 있다. 그 이유도 정말 다양하다. 

  흔히 이런 경우에는 덕목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우리가 어떤 기제들에 묶여있는 것은 아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존재하던 덕목들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윤리학을 정립시켰고, 샌델도 그 뜻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윤리학의 진정한 의미가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라면, 우리가 굳이 그들을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 넓은 시각에서, 자신이 영위해온 삶의 양식에 대해 총체적으로 반성해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샌델의 설명과는 달리 칸트의 견해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칸트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매몰된 행위지침들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편적인 윤리적 체계에서 자유에 대해 설명하려 한 그의 견해에 비춰볼 때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는 시민윤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언제나 세계시민적인 관점, 인류 전체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또한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시민사회들이 통합을 거듭하여 결국에는 세계시민적인 윤리가 확립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런 예측은「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이라는, 그가 쓴 아주 유명한 논문에 등장한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시민적인 관점을 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는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하라.’ 라는 칸트의 공식과, 그 공식을 실제로 세계에 펼칠 수 있는 사회가 출현함으로써 성취된다. 물론 그도 이 과정이 대단히 길고 힘들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 게다가 이것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현상계(감성계)에서 포착할 수 없으며,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계(예지계,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지적 세계’로 번역되어있다.)를 향해 인간이 스스로 요청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의 윤리학은 진정한 도덕적 인간의 밑그림을 그려준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재의 덕목들을 윤리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들,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않는 공리주의적 생각,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의란 무엇인가』 다시 들여다보기

  샌델은 영국과 미국에서 논의된 윤리학의 전통만 다루고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될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이야기 중심의 책 구조는 책 내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만든다. 그 사례들이 충분히 사람들의 상상력을 들뜨게 할만한 일들이기에 그 효과는 몇 배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은, 윤리학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샌델이 설정한 모델을 핵심만 뽑아내어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은 이런 것들이다. 아주 재미있고 실용적인 윤리학 책이다. 

  이런 서술구조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샌델의 학문적 성향 때문이다. 구체적 사례 속에서 직접 실천함으로써 윤리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샌델은 자신의 윤리학 체계를 만들어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책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고, 앞에서 나왔던 여러 이론들을 반박할 수 있는 최고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적합성’이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적합한 행위를 함으로써 도덕적인 인간 즉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샌델도 여기에 동의하며 시민적 덕을 자기 윤리학의 중요한 자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샌델이 제시하는 덕목들은 특정한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좌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미국이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적, 사상적 전통에서 나온 (미국)시민적 덕목들은, 요즘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볼 때 그리 바람직하지만은 않아보인다. 물론 샌델은 그 덕목들이 발휘되고 있지 않거나 잘못 발휘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미국사회를 비판한다. 하지만 특정 집단의 가치들을 일반화하고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 한 권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학자들에게도, 샌델에게도 한계점은 분명 존재하게 마련이다. 샌델이 부정적으로 설명한 칸트가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답이 꼭 옳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이 뒤를 고민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이 책은 5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바로 ‘이 뒤’를 고민할 사람이 적어도 50만 명이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주 기쁜 일이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 윤리적 삶의 첫걸음을 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만 명 각자의 삶, 나아가서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더욱 진지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다는 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매우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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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단상
    from 효진이네 : 꼼꼼히 읽기 2018-02-17 07:01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 번째 읽는다. 학교를 다니며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불만에 가득 찬 리뷰를 교지에 투고했다.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막 나왔을 때 쯤이었으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새로 번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판형과 종이가 바뀐 정도 이외에 큰 차이는 못느끼겠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초판을 읽은지 오래 되기도 했고. 다시 번역이 되고도 30쇄나 더 찍을 만큼 많이 읽힌 책이고, 그에 대한
 
 
에브리온 2010-12-0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지적에 글을 보며 감탄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것을 비롯해서 이제까지의 서평 중에 가장 풍성하면서, 동시에 정확한 글인 듯 합니다. 즐겨찾기 등록하고 갑니다 !

박효진 2010-12-07 00:46   좋아요 0 | URL
엇... 감사합니다... ㅠ.ㅠ
이 글은 중앙대학교 교지인 중앙문화에 기고한 글입니다. 저는 중앙대학교 철학과 학생이고요. 교지에 다른 좋은 글도 많으니 시간 되시면 찾아서 읽어주세요 ㅎㅎㅎ

남규 2010-12-16 23: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은혜로운 바쿄진님..ㅜㅜㅜㅜ
 

<『서양윤리학사』(로버트 L. 애링턴 씀,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에서 칸트 부분 요약. 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발표문.>

문 :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가? 이에 대한 칸트의 답변과 논증을 재구성해보고, 그 타당성을 평가해보라.

답 : 

  칸트는 행위가 도덕적인 영역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다른 목적이나 대상에 대한 고려가 그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해야겠다는 의지 자체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가언 명법과 정언 명법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다. 둘째, 그 행위의 동기를 보편화시키는 사고실험을 해보았을 때 아무런 모순도 이끌려 나와서는 안된다. 이는 그 내용이 실현되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검토해볼 수 있는 기준이다. 셋째는 인간을 수단과 목적으로 동시에 대우하라는 요청이 수반되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인간 또한 물리적인 세계 안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다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이러한 요청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위와 같은 세 가지 기준에서 인간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첫째, 거짓말은 정언 명법의 형식을 띄지 않고 가언 명법의 형식을 띈다. 즉, 거짓말은 구체적인 상황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둘째,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는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진실과 거짓말을 구별하는 기준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는 거짓말이 없는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는 모순에 빠져버리며,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셋째, 거짓말은 인간을 거짓말을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하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거짓말이 가언 명법의 형식을 띈다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와 인간을 비교하여 인간의 위치를 상대화시킨다. 

  거짓말 논증에서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도덕성을 이루는 기초라는 점에서 이 문제에서 역시 인간 스스로의 요청과 자각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 요청은 실천적인 요소로서 매 순간,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도덕과 비도덕을 나누는 모든 기준이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이 ‘요청’ 이라는 말의 의미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 즉 윤리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도덕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매우 벗어나 있다. 즉, ‘~이다.’와 ‘~해야 한다.’ 는 형식을 오가는 다른 기준(정식)들과는 달리, 요청은 언제나 ‘~해야 한다.’는 형식을 띈다. 다시 말해 ‘요청’에는 이성의 기능인 ‘판단’이 결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이성에 대한 반성만을 통해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진정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지 혹은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현대사회는 인간을 수단으로서만 대하라고 이념적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인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들은 스스로를 동물화하는 데, 즉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런 요청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잊어가는 듯이 보인다. 몸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에게 위장을 한다는 이유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는 거짓말이란 무의미한 단어이다. 이는 칸트 스스로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사태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이 ‘요청’을 도덕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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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 86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근대정치사상 숙제> 

問 : 루소의 <사회계약론> 1권부터 4권까지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오늘날의 정치 현실 혹은 한국의 정치 상황과 가장 연관성이 큰 부분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몇권 몇장의 무슨 내용?), 이 부분에서 루소가 주장하고 있는 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논하시오.

答 :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문제는 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의 범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행정부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고, 그만큼 행정부에 소속되는 인원이 입법부나 사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또한 실제 구체적인 일을 처리하는 부서인 만큼 관련된 예산도 집중적으로 필요한 부서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행정부의 권한은 정부의 다른 구성요소들, 즉 입법부나 사법부에 비해 막강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금전적 이익을 매개로 행정부가 입법부와 사법부의 권한을 침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각 국가를 막론하고 벌어지고 있으며,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예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행정부의 예산이다. 입법부는 이 예산을 심의하는 데 입법부 구성원 개인의 관심사, 혹은 그 개인이 속해있는 정당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행정 관료들은 자신이 직접 입법권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익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입법부와 사법부를 움직여 행정부의 일반의지를 관철시킨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에, 행정부가 직접적으로 권한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익을 매개로 각 부서의 구성원들은 ‘알아서,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실제로 권한을 침범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도출한다. 게다가 독특하게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데, 입법부와 행정부를 같은 정당의 구성원으로 선출하려는 투표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선출이 되었을 경우, 일반의지보다는 각 부서의 의지 혹은 특정한 정당의 이익에 따른 의지의 표출이 더욱 교묘하고 용이하게 진행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루소는, 위와 같은 ‘행정의 지배’와 ‘금전의 지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 『사회계약론』에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결국 정부의 왜곡과 국가의 해체를 불러오기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루소가 행정부에 관해 어떻게 쓰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구성 ‘원리’를 설명한 루소의 계약 이론 이외에도, 이 원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는지 혹은 실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루소의 생각에도 주목해야 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한 부를 떼어 행정부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행정부를 일반의지를 단순히 집행하는 기구, 혹은 집행해야만 하는 기구로서 규정하고 있다(3부 1장). 그리고 집행기구의 구성원 숫자를 기준으로 민주정과 귀족정, 군주정을 나누고 이에 대해서 분석한다(3부 3장). 여기에서 루소는 민주정은 꿈과 같은 일이고(3부 3장),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그럴듯한 정부형태는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라고 주장한다(3부 4장). 또한 각 국가의 여건에 가장 적합한 정부의 형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인구를 꼽고 있으며(3부 2장), 행정부의 권력이 남용되는 형식적 모습과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루소가 귀족정에 대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선거를 통해서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행정부의 일원으로 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3부 4장).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부라면,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반영하거나 행정부의 일반의지에 따르는 결정을 하지 않고 언제나 국가의 일반의지를 따라 집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에 따르면 정부는 국가의 일반의지를 집행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그 본질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정부와 그 구성원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고 적합한 정부이며 그 구성원이다. 

  물론 루소는 ‘선거에 의한 귀족정에서는 이러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는 식의 기술을 통해, 귀족정에 대한 어떤 묘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행정관의 상, 즉 ‘되어야 하는’ 행정관의 상을 보여주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는, 적어도 현실에서 행정관이 정말 저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저런 결정을 언제나 내리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루소가 행정부의 일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구체적인 사안에 접근하는지 분류해놓은 방식이다(3부 2장). 첫째는 행정관의 개별 이익, 일개 시민으로서 행정관이 가질 수 있는 행동의 동기다. 둘째는 행정부의 이익, 정부의 다른 부서나 시민과 별개로서 행동하는 동기인데, 이것은 행정부의 일반의지이다. 셋째는 국가 전체의 이익인데, 루소는 이를 진정한 일반의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지의 동기는 대개 금전적 이익을 통해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지면 심해지고 있지, 덜하지 않다. 루소는 이런 점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즉, 물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 즉 상업적인 이득은 ‘노예들이 쓰는 말’(3부 15장)이며, 만약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은 피하는 것이 옳다. 물질적인 이득을 매개로 하지 않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자질, 소양같은 것들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인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이런 사람 가운데서 행정부의 구성원이 될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상업적 이득을 경멸하는 듯한 루소의 말은, 어느 정도 과거지향적이고 복고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에도 이런 경향이 우려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할 수 있다면,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져 알게 모르게 혹은 자발적으로 금전적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복종하는 모습들에 대해 루소는 매우 좋은 충격을 안겨다주는 경고이며, 또한 귀감이 될 수 있는 충고를 해주고 있다고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간주할 수 있는 정치상의 문제는, ‘행정의 지배’와 ‘금전의 지배’가 복합되었을 때 나타나며, 이 둘은 상호간에 복잡한 효과를 일으키며 더욱 악화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경향이 가장 처음 나타나던 시기에 루소가 던져주는 위와 같은 충고들은, 우리가 현재 영위하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행태들에 대해 가장 원형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던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가 보았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사회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에 대한 해법이 후퇴적인 모습을 띈다고 하더라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모습과 그에 대한 경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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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정치사상 숙제> 

문 : 로크와 루소는 인간본성에 관한 상이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소유권의 기원, 가족의 성립, 언어의 사용, 이성과 감성의 기능, 자연법의 내용, 자유의 성격 등의 관점에서) 이 두 사람의 자연상태에 대한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자연상태를 제시하시오.

답 :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계약은 자연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자연상태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서 계약의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수많은 사회계약론자들은 각각의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계약의 내용을 설정한 뒤에 그것을 기준으로 당시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정당함과 부당함을 평가했다. 나아가서는 정책 뿐만 아니라 정부의 구조와 형태에 대해서까지 그 부당함을 제기하며, 어떤 형태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민주정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처한 이 두 상태의 구분이 명확한가 질문을 던져보면, 그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역사 속 인간들은 언제나 연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 변화의 어떤 지점을 구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임의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내포한다. 다시 말해,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삼는 사회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상태를 의도적으로 기획한다. 역사적으로 그런 상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특정한 사회계약론의 체계 속에서 그 자체의 모습을 크게 상실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연상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신들의 특정한 선이해를 그대로 투영하며, 자연상태에서 그 이해의 지평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학적 조사 뿐이다. 그나마도 인류학적 조사는 그 사람들의 삶의 단편 밖에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고전적인 삶의 양식을 유지하면서 사는 몇몇 집단을 통해 유추하는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로크에 비해 루소는 이러한 점을 조금 더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지만, 루소 역시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관념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자연상태를 조직하였다. 

  특히 루소의 이런 모습은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가부장적인 면모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간주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우연적인 사례가 많을 뿐이지 그것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발전해간다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게다가 루소가 가부장적인 모습이 등장한다고 간주했던 원시적인 단계에서는, 가부장적이지 않은 사회 또한 많다. 이것은 현재도 원시적인 단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인 조사 결과에서 드러난다. 이런 요소들은 상당히 우연적이다. 우연적인 것들의 종합을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이행하는 일반적인 진행과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가 나누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한 가치관을 자연적인 상태 혹은 필연적인 상태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와 반드시 맞물린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특정한 가치관에 의해 해석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 그에게 어떤 속성이 있다거나, 어떤 권리가 있다거나, 혹은 어떤 자격이 주어져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현재 세워진 규범들을 과거에 소급적용하는 오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가치관에 의해 해석되지 않는 인간이란 결국 물리적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으로 부르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상태이다. 이 때의 인간은 원숭이들과 별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움직임이란 물리적 상태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고, 철저하게 반응에 따른 결과로서만 움직인다. 같은 인간이라면 하나의 물리적 변화에는 거의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다소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여러 상이한 자극의 경험에 의해서(서있는 위치가 다르다든가, 아침에 우연히 1분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햇볕을 더 많이 쬐었거나 등) 생겨난다. 각각 인간의 행동의 차이란 이 자극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은 우연이 수도 없이 겹쳐서 비롯된, 일종의 경험과학이다. 유용한 무엇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이전에 수도없이 많은 실패가 반복된다. 설령 어떤 수단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발휘하거나 자신의 유용함에 따라 주변을 조직한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이 우연히 제공한 것에 반응하여 나타난다. 그것은 언제든지 잊혀질 수 있으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잊혀지게 마련이다. 

  루소는 이같은 인간의 원시적인 모습에 ‘완전성’과 ‘자유’를 투영하였다. 그리고 그는 경험과학에 의한 우연한 발견들을 마치 인간이 스스로 성취한 결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자유롭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면서도, 루소는 근본적으로 고대인들이 자유롭다고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자유를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원시적인 인간에게 이러한 본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 상태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해주는 것은, 다른 동물들의 삶이 모두 그러하듯이 환경이다.

  이것은 사회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원시상태의 인간에게 자연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사회상태의 인간에게는 사회환경이 영향을 끼친다. 이용할 수 있는 나무와 내게 도덕과 규범을 가르쳐주는 어른 사이에는 아무런 물리적인 위상의 차이가 없다. 단지 여러 요소들의 배열과 양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이것을 인간에게만 특수한 질적인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이거나 신화적인 작업에 불과하다.

  이런 인간들의 관계 사이에서는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홉스처럼 인간의 본성에 따라 분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분쟁조차도 우연적이다. 정말 생존에 필요한 동일한 대상을 다른 두 인간이 바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에게는 이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계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존하는 위협에 대항할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를 제외하면 아무런 축적도 생기지 않는다. 서로 돕는 것도 매우 우연한 경험이 수없이 축적된 결과이다. 모든 것은 경험, 그리고 경험과학이 결정한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생성되는 것은 계약에 의존하지 않는다. 분쟁은 모든 사회의 기초이다.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계급관계가 발생하려면, 수많은 우연한 분쟁의 승패가 축적되어야 한다. 그 분쟁의 승패가 상류층과 하층 계급을 결정한다. 법과 제도란 하층으로 머무르라는 이야기를 힘으로만 강요하던 것에서, 서류로 쓴 뒤에 서명하라고 힘으로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자화되었다고 해서 다른 형태의 세련된 제도설립 방법이 등장한다는 생각은, 법과 제도의 힘에 대한 매우 순진한 사고이다. 그런 면에서 계약으로 사회와 제도의 설립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허구에 가깝다. 로크는 이 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저 낙관적으로만 예측하고 있으며, 루소는 아무런 폭력적 분쟁 없이 계약이 설득에 의해 맺어진다고 예상하고 있다. 

  폭력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 모든 과정은 아무런 가치판단이 개입되어있지 않은 물리적인 변화과정으로 기술되어야한다. 단지 가치가 생겨나고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는 현재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폭력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것으로 기술할 수 없을 뿐이다. 물리적 상태의 변화는 그 자체로 매우 중립적이며, 아무런 가치도 포함하지 않는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인간의 물리적 상태가 변화하는 것도 사실은 어떤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우리가 ‘사회적이다.’ 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물리적 성질을 갖추고 있을 뿐, 그것이 자연상태에 비해 어떤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에게 현재 자유가 주어져있고, 소유권이 법적으로 보장되며, 사회를 조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통해 여러 사상가들은 인간을 자연 내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간주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왔다. 자연상태를 내세운 인간의 상태에 대한 가설들도 이런 맥락에 속한다. 인간만이 사회를 조직할 수 있으며, 사회를 조직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사회를 조직하는 데 투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믿고 살아가는 신념의 체계는,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형성된 것에 속한다. 그리고 그 우연은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에 의해 생긴 결과이며, 인간과는 무관하다. 자연상태에 대한 가설들은, 이와 같은 우연적인 결과들을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본성과 연관시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본성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은, 물리계에 속해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위에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킨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저 인간이 물질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뿐이다.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효과를 일으키는 능력을 다시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할 경우, 우리는 이론 속에서 서로 독립적인 실체를 조화시켜야 하는 이원론의 문제에 다시금 빠져들 것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이란 물질로서의 인간이며, 이것은 사회상태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물리적 상태의 변화는 연속적이며, 분절적이지 않기에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구분도 희미하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증명가능하고 가장 정확한 관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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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즈 2010-11-10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오면 님 과제 다 읽을 수 있구나

박효진 2010-11-16 00:56   좋아요 0 | URL
 

<『서양윤리학사』(로버트 L. 애링턴 씀,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에서 중세의 윤리학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 부분 요약. 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발표문.> 

문 : 신은 영원한 법칙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의욕할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생각에 대해서, 둔스 스코투스는 신이 영원의 법칙에 따라서 의욕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평가해보라. 

답 : 

  신과 영원의 법칙에 관한 아퀴나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인간에게 의무를 부여하는 근거로 계시와 이성 두 가지를 제시했다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계시는 인간에게 신으로부터 직접 전해져온 전언이다. 반대로 이성은 인간이 본성으로서 지니는 인간 자신의 능력이며,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다. 물론 이 이성은 신이 인간을 만들때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이라는 점에서 ‘피조물로서 구속’받지만, 그 이외에는 신에 대해 독립적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이 이 이성의 능력을 발휘해서 얻을 수 있는 법칙이 자연법이다. 물론 자연법의 기원에도 역시 신이 관여한다. 신은 자신의 마음 혹은 의지로부터 자연법을 도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신을 사랑하라.’ 를 포함한 여러 가지 도덕적인 형식을 가진 기본적인 명령들이다. 인간은 창조되는 순간 이 자연법 부여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성은 인간이 이 자연법을 발견해낼 수 있는 가능성 혹은 능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성을 발휘하기만 하여도 충분히 스스로 자연법을 발견해낼 수 있으며, 또한 이성을 통해 발견한 자연법에 따라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의지를 보유한다. 

  스코투스의 아퀴나스 비판은 바로 아퀴나스가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성을 발휘해 자신의 삶을 도덕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것에 집중되어있다. 이성을 통해 발견한 자연법은 인간이 어떤 삶을 살면 좋은지에 대해 지침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당위적 힘을 가지지 못한다. 오직 신만이 자연법이 포함하는 명제들을 명령으로 바꾸고, 그것을 선하다고 판정하고 인간이 그렇게 하도록 할 수 있다. 따라서 스코투스에게 도덕, 선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는 인간 혹은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이 아니라 신이다. 신은 자신의 의지로 도덕을 창조한다.

  두 철학자가 보여주는 이런 입장차이는 신과 도덕법칙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아퀴나스의 입장에서는 도덕법칙이 적어도 신과 지위가 동등하거나 또는 둘을 서로 같은 존재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스코투스는 명확하게 신을 도덕법칙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이는 인간의 지위와 능력에 대한 관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아퀴나스에게 인간은 도덕법칙 전부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스코투스가 바라보는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도덕법칙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완전하다’는 신의 정의와 그로부터 연역되는 신의 속성, 즉 모든 것을 알고 어떠한 것도 할 수 있고 도덕적으로 완전히 선하다는 것에는 스코투스의 견해가 더 정합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퀴나스의 경우에는 도덕법칙이 피조물로서의 지위 때문에 신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사실상 그 자체로 다른 존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성을 지닌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지위 그리고 신의 속성이 언제나 도덕법칙을 향한 개입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므로 도덕법칙의 독립성과 모순을 일으킨다.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스코투스는 이러한 아퀴나스의 맹점을 짚어냈다. 다시 말해 도덕법칙이 실재하는지 의문시하며, 그것을 신의 의지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아퀴나스의 이론적 시도를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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