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정치사상 숙제> 

문 : 로크와 루소는 인간본성에 관한 상이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소유권의 기원, 가족의 성립, 언어의 사용, 이성과 감성의 기능, 자연법의 내용, 자유의 성격 등의 관점에서) 이 두 사람의 자연상태에 대한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자연상태를 제시하시오.

답 :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계약은 자연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자연상태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서 계약의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수많은 사회계약론자들은 각각의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계약의 내용을 설정한 뒤에 그것을 기준으로 당시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정당함과 부당함을 평가했다. 나아가서는 정책 뿐만 아니라 정부의 구조와 형태에 대해서까지 그 부당함을 제기하며, 어떤 형태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민주정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처한 이 두 상태의 구분이 명확한가 질문을 던져보면, 그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역사 속 인간들은 언제나 연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 변화의 어떤 지점을 구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임의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내포한다. 다시 말해,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삼는 사회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상태를 의도적으로 기획한다. 역사적으로 그런 상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특정한 사회계약론의 체계 속에서 그 자체의 모습을 크게 상실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연상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신들의 특정한 선이해를 그대로 투영하며, 자연상태에서 그 이해의 지평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학적 조사 뿐이다. 그나마도 인류학적 조사는 그 사람들의 삶의 단편 밖에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고전적인 삶의 양식을 유지하면서 사는 몇몇 집단을 통해 유추하는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로크에 비해 루소는 이러한 점을 조금 더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지만, 루소 역시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관념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자연상태를 조직하였다. 

  특히 루소의 이런 모습은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가부장적인 면모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간주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우연적인 사례가 많을 뿐이지 그것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발전해간다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게다가 루소가 가부장적인 모습이 등장한다고 간주했던 원시적인 단계에서는, 가부장적이지 않은 사회 또한 많다. 이것은 현재도 원시적인 단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인 조사 결과에서 드러난다. 이런 요소들은 상당히 우연적이다. 우연적인 것들의 종합을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이행하는 일반적인 진행과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가 나누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한 가치관을 자연적인 상태 혹은 필연적인 상태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와 반드시 맞물린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특정한 가치관에 의해 해석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 그에게 어떤 속성이 있다거나, 어떤 권리가 있다거나, 혹은 어떤 자격이 주어져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현재 세워진 규범들을 과거에 소급적용하는 오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가치관에 의해 해석되지 않는 인간이란 결국 물리적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으로 부르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상태이다. 이 때의 인간은 원숭이들과 별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움직임이란 물리적 상태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고, 철저하게 반응에 따른 결과로서만 움직인다. 같은 인간이라면 하나의 물리적 변화에는 거의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다소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여러 상이한 자극의 경험에 의해서(서있는 위치가 다르다든가, 아침에 우연히 1분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햇볕을 더 많이 쬐었거나 등) 생겨난다. 각각 인간의 행동의 차이란 이 자극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은 우연이 수도 없이 겹쳐서 비롯된, 일종의 경험과학이다. 유용한 무엇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이전에 수도없이 많은 실패가 반복된다. 설령 어떤 수단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발휘하거나 자신의 유용함에 따라 주변을 조직한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이 우연히 제공한 것에 반응하여 나타난다. 그것은 언제든지 잊혀질 수 있으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잊혀지게 마련이다. 

  루소는 이같은 인간의 원시적인 모습에 ‘완전성’과 ‘자유’를 투영하였다. 그리고 그는 경험과학에 의한 우연한 발견들을 마치 인간이 스스로 성취한 결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자유롭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면서도, 루소는 근본적으로 고대인들이 자유롭다고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자유를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원시적인 인간에게 이러한 본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 상태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해주는 것은, 다른 동물들의 삶이 모두 그러하듯이 환경이다.

  이것은 사회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원시상태의 인간에게 자연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사회상태의 인간에게는 사회환경이 영향을 끼친다. 이용할 수 있는 나무와 내게 도덕과 규범을 가르쳐주는 어른 사이에는 아무런 물리적인 위상의 차이가 없다. 단지 여러 요소들의 배열과 양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이것을 인간에게만 특수한 질적인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이거나 신화적인 작업에 불과하다.

  이런 인간들의 관계 사이에서는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홉스처럼 인간의 본성에 따라 분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분쟁조차도 우연적이다. 정말 생존에 필요한 동일한 대상을 다른 두 인간이 바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에게는 이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계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존하는 위협에 대항할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를 제외하면 아무런 축적도 생기지 않는다. 서로 돕는 것도 매우 우연한 경험이 수없이 축적된 결과이다. 모든 것은 경험, 그리고 경험과학이 결정한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생성되는 것은 계약에 의존하지 않는다. 분쟁은 모든 사회의 기초이다.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계급관계가 발생하려면, 수많은 우연한 분쟁의 승패가 축적되어야 한다. 그 분쟁의 승패가 상류층과 하층 계급을 결정한다. 법과 제도란 하층으로 머무르라는 이야기를 힘으로만 강요하던 것에서, 서류로 쓴 뒤에 서명하라고 힘으로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자화되었다고 해서 다른 형태의 세련된 제도설립 방법이 등장한다는 생각은, 법과 제도의 힘에 대한 매우 순진한 사고이다. 그런 면에서 계약으로 사회와 제도의 설립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허구에 가깝다. 로크는 이 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저 낙관적으로만 예측하고 있으며, 루소는 아무런 폭력적 분쟁 없이 계약이 설득에 의해 맺어진다고 예상하고 있다. 

  폭력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 모든 과정은 아무런 가치판단이 개입되어있지 않은 물리적인 변화과정으로 기술되어야한다. 단지 가치가 생겨나고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는 현재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폭력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것으로 기술할 수 없을 뿐이다. 물리적 상태의 변화는 그 자체로 매우 중립적이며, 아무런 가치도 포함하지 않는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인간의 물리적 상태가 변화하는 것도 사실은 어떤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우리가 ‘사회적이다.’ 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물리적 성질을 갖추고 있을 뿐, 그것이 자연상태에 비해 어떤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에게 현재 자유가 주어져있고, 소유권이 법적으로 보장되며, 사회를 조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통해 여러 사상가들은 인간을 자연 내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간주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왔다. 자연상태를 내세운 인간의 상태에 대한 가설들도 이런 맥락에 속한다. 인간만이 사회를 조직할 수 있으며, 사회를 조직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사회를 조직하는 데 투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믿고 살아가는 신념의 체계는,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형성된 것에 속한다. 그리고 그 우연은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에 의해 생긴 결과이며, 인간과는 무관하다. 자연상태에 대한 가설들은, 이와 같은 우연적인 결과들을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본성과 연관시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본성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은, 물리계에 속해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위에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킨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저 인간이 물질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뿐이다.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효과를 일으키는 능력을 다시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할 경우, 우리는 이론 속에서 서로 독립적인 실체를 조화시켜야 하는 이원론의 문제에 다시금 빠져들 것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이란 물질로서의 인간이며, 이것은 사회상태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물리적 상태의 변화는 연속적이며, 분절적이지 않기에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구분도 희미하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증명가능하고 가장 정확한 관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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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즈 2010-11-10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오면 님 과제 다 읽을 수 있구나

박효진 2010-11-16 00:56   좋아요 0 |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