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전쟁은 가능한가? -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

<응용윤리학과 도덕적 딜레마 보고서, 트랙백해놓은 글을 수정, 보충한 것입니다.> 

① 평화주의에 대한 내용을 빼고 정의로운 전쟁 이론만 집중적으로 논의
② 기독교 전통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내용을 삭제
③ 비상사태윤리에 대한 내용을 추가

 

1. 들어가는 말 - 전쟁 비판으로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얼마전 일어난 리비아 내전은 국제 사회에 어려운 숙제를 하나 더 내주었다. 독재자 카다피에 대항한 민중들이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내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대개 시민군 측에 손을 들어주었고, 민주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내전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내전이 장기화될수록 개입의 강도는 약해지고 있으며, 국제질서를 선도하는 국가들은 개입 과정에서 입어야 할 손해를 다른 국가들에 떠넘기기에 바빠졌다. 카다피는 이 개입을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체제가 혁명을 통한 아주 정상적인 정부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설령 자신의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내부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며, 개입은 국가의 주권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 벌어지는 관제 시위나 친-카다피 세력의 소요를 볼 때 리비아 내부에도 이런 주장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상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리비아 내전에 대한 개입의 사례는, 사실 아주 최근의 단편적인 사례일 뿐이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쟁은 국제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때로는 개화와 문명의 이름으로, 다른 때에는 자본과 경제적 이득의 이름으로, 또는 도덕의 이름으로 자행될 때도 있었다. 전쟁이라는 과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으며, 따라서 전쟁은 우리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의 주변에 있다. 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그것이 역사에 기록될만한 규모의 사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일은, 만약 일어난다면, 여기에 얽힌 인간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한다. 전쟁은 결코 <람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일 수 없다. 전쟁에 직면한 개인은 불안하고 일관되지 못한 일상을 경험한다. 홉스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상태에서는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끊임없는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 위 문단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전쟁이 인간의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사태임이 틀림없다.

  전쟁이 철학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전시에는 법률이 침묵해야 한다’는 홉스주의나 마키아벨리주의 식의 무비판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해법은 사실상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만드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자기보존을 위해 힘을 길러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그 공동체를 일상적인 전쟁상태로 돌입시킨다. 이런 자각에서부터, 전쟁을 규범적으로 정의하고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모두 나쁜 것인가? 만약 좋은 전쟁과 나쁜 전쟁이 있다면, 이 둘을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전쟁에 대해 규범적으로 고려하는 사회이론가와 사회철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러한 고민에서부터 탄생한 결과물이다.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가릴 조건을 내세우고, 그것에 따라 현실에서 일어나는(또한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전쟁은 정당했거나 또는 정당하기 때문에 감행해도 되고(또는 감행해야 하고), 반대로 어떤 전쟁은 부당했거나 또는 부당하다.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환상적 평화주의와 무규범적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제시한다고 평가된다. 그러므로 이 이론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우리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점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상 일어났던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가름할 수 없다. 물론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이, 전쟁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입장이나 전쟁은 무조건 안된다는 무조건적 비폭력주의(반전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자는 반드시 사람들의 삶의 파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후자는 정당한 인도주의적 개입에 아무런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점은 바로 해석이다. 무엇이 정당한 전쟁인지, 혹은 부당한 전쟁인지는 관점에 따라 상당히 열려있다. 물론 이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기 위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는 하지만, 그 판단의 기준을 전인류적 도덕의식이라는 보편주의적 관점에 의지하고 있다. 도덕적 보편주의 자체가 많은 논의가 필요한 논쟁적 입장이라는 점에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논증 구조는 상당히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제시되었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인 구조와, 가장 최근에 이 이론을 정교하게 전개했다고 평가받는 Michael Walzer의 이론을 살펴보고 이와 같은 점들을 짚어볼 것이다.


2.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 구조

  전쟁을 전쟁 선포, 전투, 그리고 전후 처리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전쟁에 대한 도덕적 평가 역시 단계마다 각각 적용될 것이다. 즉, 전쟁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에 대한 평가, 전투 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평가, 그리고 종전 이후 수습조치에 대한 평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이 세 측면에서 모두 정당한 경우에만 어떤 전쟁은 정당하다. 이들 가운데 한 부분에서도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전쟁은 부당한 것이 된다. 전쟁 전체의 정당성을 얻지 못한 경우에는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거나 해서는 안될 전쟁으로 평가받으며, 전투 과정에서 정당성을 얻지 못하는 경우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수단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수단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시작된 이러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일반적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한 좋은 사례는 1983년 미국 천주교 사제회의에서 제시한 항목들이다.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한 여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고려하여 설정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나열해보면 ① 정당한 원인, ② 실재적 권위, ③ 상대적인 정의관, ④ 올바른 의도, ⑤ 최후의 수단, ⑥ 성공의 개연성, ⑦ 전쟁의 상응성, ⑧ 전투의 상응성, ⑨ 분별성이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할 경우 그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다.


  2.1. 왜 전쟁을 하는가? - 전쟁 개시의 정의(jus ad bellum)

  이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는 ‘어떤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다.’ 라고 선포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서,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① 전쟁은 분명하고 진정한 위험에 대처하는 행위일 경우에만 가능한데, 이 행위는 민간인 보호나 적절한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② 전쟁은 공동체 단위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③ 전쟁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이 무제한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여야 한다. ④ ①에서 언급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②에서 언급한 권위에 의해 기획, 전개될 수 있다. ⑤ 전쟁을 제외한 다른 수단을 생각할 수 없을만큼 충분히 다른 수단을 강구한 뒤여야 한다. ⑥ 전쟁을 먼저 선포하는 쪽에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게 예상되는 경우, 비이성적으로 무력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⑦ 전쟁을 일으켰을 때 생기는 비용이 전쟁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혜택(이익)보다 적거나 적어도 같아야한다.

  전통적으로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 전체를 지배하는 정당성만 확보할 수 있는 이 부분에 대단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은 전문적인 전투원들이 수행하는 작업이며 이들은 전쟁 속에서 전투수단(무기)의 지위로 전락하기에, 전체적인 정당성만 얻을 수 있다면 개별적인 전투에서 벌어지는 비도덕적 행위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전투원들의 희생을 자발적으로 이끌어내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같은 명분이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Walzer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전쟁에 대해 처음 고민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신학자였던 그는 완전한 비폭력을 주장하는 당시의 다른 신학적 경향에 맞서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피력하려 했다. 그 방법으로서, 전쟁이 때로는 정당할 수도 있음을 옹호하기 위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개진했던 것이다. 또한 독실한 신자들이 교세 확장에 이바지하는 여러 전쟁에 참여할 것을 유도하기 위한 이론이기도 하였다.


  2.2.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 전쟁 수행의 정의(jus in bello)

  그러나 무기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가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각종 화학물질과 강력한 폭발력 등으로 더 이상 전투원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 대량살상무기(WMD)가 등장하였다. 또한 근대국가는 국민개병제를 핵심으로 삼으며, 국민 모두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데 동원되는 군산복합체적 면모를 점점 더 강하게 띄어갔다. 이른바 총력전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공동체 내에서 더 이상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쟁을 빨리 끝낸다거나 혹은 상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 또는 여러 이데올로기적인 명분 아래 비전투원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격, 그리고 이후 일어난 수많은 전쟁을 통해 드러난 양민학살, 인종청소 등의 사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위와 같은 변화에 발맞추어 전투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요청되었다.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표, 혹은 전쟁의 유일한 목적인 승리를 위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정당화된다는 믿음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병폐는 전쟁 전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전투 상황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야만 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⑧ 전투와 구체적인 작전을 실행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이 그에 따르는 손해보다 많거나 적어도 같아야 하고, ⑨ 무고한 사람 즉 비전투원이거나 명백하게 상대방의 전투 행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부가되며, 심각하게 고려되는 사항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고려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여지는 충분하다. 첫째, 만약 이 항목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전쟁에서 전투 내의 정당성은 거의 확보되지 못한다. 국민개병제가 기본인 근대적 공동체에서 누가 전투원이고 누가 비전투원인지 명확하게 나누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어제까지 민간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살아있고 국적을 가진 이상 언제든지 전투원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투원에게만 해를 끼치는 것이 정당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사실은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게 만드는 근거이다. 모든 전투원들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존중받는 개인이다. 전쟁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전쟁은 이러한 억지스러운 구분을 스스로 생산해내며 인간의 존엄성을 침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사실상 비전투원(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생명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둘째, 설령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투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작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전쟁에 참여하는 각 집단의 구성원의 문제에기도 하지만, 그들이 모두 사용하는 여러 시설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역적인 타격을 가한다든가 혹은 특정인물이나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상으로 작전을 펼칠 경우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작용한다. 피해를 최소화해야한다는 원칙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미리 계산한 피해는 언제나 실제 일어나는 피해의 정도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작전이 수행되고 난 뒤 발생한 피해는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지 더 이상 논의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셋째, 전투 수행 중에 발생하는 부정의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에 대항하는 집단의 전투원들이 속해있는 상황과 그들이 의도적으로 자행하는 비도덕적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도덕적 행위의 책임을 누가 질 수 있는가(또는 짊어져야 하는가)의 문제는 그 의도성과는 다르게 매우 불투명하다.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도덕적인 고려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하며, 도덕적 규범들을 위반하는 일도 그만큼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전쟁 중에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새로운 규범을 만든다면, 보편적인 도덕원칙에 입각하여 전쟁을 재단하려는 시도가 전쟁 중의 도덕과 비전쟁 상태의 도덕을 다르게 설정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2.3. 전후 처리 - 전쟁 이후의 정의(jus post bellum)

  위의 두 가지 밖에도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서 반드시 고려되는 고전적인 요소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상황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침탈당한 자기 영토에 대해 회복을 주장하며 침략국에 대해 반격을 가했을 때, 침략국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은 침탈당한 자기 영토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비용에 대한 보상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국가가 침략국을 상대로 그 이상의 영토와 보상을 요구하며 역으로 침략할 경우, 그 전쟁은 부당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위와 같은 고전적인 개념은 위기를 맞는데,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이전의 상황에 대해 명백한 변화를 의도하고 개입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경우, 전쟁을 선포한 국가는 패전국에 계속 주둔하며 다시는 이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승전국에게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가? 만약 그러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승전국은 이에 따라 특수한 형태의 정부, 대개는 민주주의적 정부를 패전국에 강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절차를 의도적으로 마련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을 군사적으로 억압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일종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가주권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 승전국의 도덕적 의무와 패전국의 국가주권이 상충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정당한지 명쾌한 답을 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무가 없다면, 애초에 그런 인도주의적 개입은 어떠한 명분도 지닐 수 없다. 개입은 좋은 상황을 만들겠다는 뜻의 개입이지, 단순히 나쁜 상황을 만들어내는 요소들만 제거하겠다는 의미의 개입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정도의 나쁜 상황들은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온 역사와 문화, 또는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입이 중단될 경우 상황이 개입 이전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는, 개입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모두 교정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훨씬 의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문제는, 그런 의무가 없을 경우 과연 아무런 소득 없는 개입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의무가 없다면, 승전국은 개입에 드는 비용을 상쇄할 만큼 이익을 회수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패전국의 혼란과 무질서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인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혼란과 무질서를 교정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패전국의 민주적 절차와 권위, 주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국제사회의 충분한 동의 또한 얻어야 한다. 패전국의 민주주의와 국제사회의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전후처리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인도주의적 개입을 통해서 이전에 발생한 비인간적, 비민주적 사례를 제거하는 것은 쉽게 성공할 수 있지만, 그 이후의 체제에 대한 책임의 문제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 내에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3. Michael Walzer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문제적인 이론이었다. 물론 그 이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조장, 방조하거나 또는 전쟁을 환상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찬양하며 여기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프로파간다로 사용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들어가는 말에서 기술했듯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오히려 무분별한 전쟁을 제한하기 위해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론이 그들이 의도한 전쟁에 대한 제한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나아갔거나 혹은 적어도 전쟁을 부당하다고 평가하고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론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의도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 기독교의 신학적인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 Walzer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는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재조명하였다. 또한 지난 한 세기 동안 있었던 전쟁을 스스로 세운 기준을 통해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뜨거운 현안에 직접 접근하는 대담함이 돋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사이에서 중도를 지켜나가는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지켜본 전쟁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에 대한 경험을 기술하는 일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비판적 작업의 토대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현실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전쟁 사례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현실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구체적인 전쟁들을 그 자체가 아닌 도덕적 시선에서 재해석하여 제시한다. 전쟁의 시작에서 종결까지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은 계속해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우선 전쟁의 선포부터가 도덕적인 결단이며, 이 결단을 내린 사람들은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다. 또한 전투는 행위의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결코 도덕적인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현실주의와 평화주의 모두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일반적 잣대를 들이밀어 그 참모습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쟁에서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결국 전쟁에 연관된 민간인,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에 대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다분하다. 반면 평화주의는 모든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명백한 악에 대해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무기력은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셋째, 그가 제시하는 ‘전쟁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도덕의 최소한’은 인간의 기본권, 즉 생명과 자유에 대한 수호이다. 전쟁을 타산의 문제나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전쟁을 하는 순간에도 언제나 이것만은 지켜야하고, 또 이것을 지키는 방향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수행하며, 또 종결시켜야한다.


3.1.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과 해석의 문제

  Walzer는 전통적으로 논의된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했던 천주교 사제회의의 항목들 가운데 정당한 원인에 집중해서 자신의 논증을 전개한다. 정당한 원인(cause), 즉 대의(Cause)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 비교적 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명분과 원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전쟁은 침략에 대한 저항인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침략이란 다름 아닌 자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사태를 말한다. 이런 사태는 인간 모두가 지켜야하는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임과 동시에 생명과 자유를 수호할 의무를 지니는 한 국가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국가 내 개인 간의 관계와 국제사회 내 국가 간의 관계를 유비하여 바람직한 국제사회의 모델을 제시한다. 즉, ① 각 개인들은 ② 시민으로서 생명과 자유(특히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를 ③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④ 자기 생명과 자유를 수호하고 그걸 다른 개인이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⑥ 기본권을 침해한 개인에게 국가가 심리적, 물리적 제약을 가하듯이, 국제관계에서도 ① 각 주권국가들이 ② 영토와 통치권리를 ③ 국제법을 통해 보장받으며 ④ 주권과 영토를 수호하고 그것을 다른 국가가 돕는 것이 정당화되며 ⑤ 이외에는 다른 전쟁이 정당화되지 않고 ⑥ 침략을 저지른 국가는 전범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제사회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델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일어나는 전쟁은 정당한데,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여기에 부합한다. ④ 의 원리에 따르면 인도주의적 개입도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전투 중의 도덕에 있어서 그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전쟁의 특성상 의도하지 않은 비전투원의 피해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부수적인 것이며, 그것을 직접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직접 의도하지 않았을 때에만, 그리고 그 의도가 매우 좋을 때에만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전후의 책임 있는 현지 복구를 통해 전쟁을 끝마쳐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Walzer의 위와 같은 입장은 꽤 엄밀해보이고 정식화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석의 문제는 그의 이론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전쟁 이론 일반이 갖는 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론들이 만들어주는 장치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 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가? 과연 어떤 것을 침략이라고 하고 어떤 수준이어야 그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일본은 다케시마를 일본의 영토로 해석하고 한국의 실질적 점유를 침탈로 간주한다. 반면에 한국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해석하고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무엇이 침략이고 무엇이 적정한 수준의 보상이 될 수 있을까? 그나마 이 부분은, 엄밀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직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당방위의 결과에 대해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타국에 무력을 통해 간섭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정당하며 또 어떤 경우에 부당할까? 어떤 국가가 부정의를 시정하지 못한다는 판정은 누가 해줄 수 있는가? 이 경계는 어느 전쟁에서나 상당히 모호하고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이 ‘해석의 문제’는 Walzer 스스로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정당화함으로써 자초한 면이 크다. Walzer는 9-11 테러에 비추어보았을 때 미국은 테러 주체인 알-카에다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점, 첨단무기기술을 통해 비전투원에 대한 살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전쟁의 대상이 알-카에다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 되었던 것일까? 아프가니스탄이 알-카에다에 호의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알-카에다가 미국에 테러를 가할 수 있을 만큼의 금전적,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또한 그는 알-카에다와의 연계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부당한 전쟁이라고 말함으로써, 해석의 주관성이 얼마나 자신의 이론에 깊게 개입할 수 있는지 스스로 보여주었다.

3.2. 최고 비상사태의 도덕

  게다가 그는 이런 기준을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비상사태(supreme emergency)라는 예외를 가정하여 큰 논란을 빚는다. 그는 최고 비상상태를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굳건한 가치들과 우리의 집단적 생존이 절박한 위험에 처했을 때’, 즉 공동체 자체의 존폐의 위기에 빠진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위의 문장이 설명하고 있듯이, 그에게는 곧 공동체를 지탱하고 있는 도덕률의 붕괴가 눈 앞에 와있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이런 사태의 사례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국의 상황을 예로 든다. 역사적으로도 이미 평가가 끝났듯이, 나치즘은 누가 보아도 직관적으로 명백한 악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만한 집단이었다. 과연 그런 집단에 대해서까지 평화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실천적으로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질문이며, 따라서 그의 이러한 예외 주장은 강한 현실적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입장에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이론적인 결점이다. 물론 그 스스로도 이런 사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되며,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즉, 역사에서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도덕적 고려가 매우 적거나 있지 않아도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고 그에 따라 전쟁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입장과 어긋난다. 최고 비상사태에서의 정당화는 결과주의적 도덕 원칙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원칙과는 관련이 없는 상황에 대한 계산에 의해서 그 판단이 이끌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그의 논증은 그의 이론 체계 내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요소이다.

  둘째, 최고 비상사태와 공동체의 이익이 상충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최고 비상사태는 일상화되며, 그것은 전쟁의 공포가 언제나 시민들이 곁을 배회하는 상태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가정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사례이기도 하다. 바로 냉전이 그러하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외부의 적대적인 세력으로 가정한 뒤, 내부의 구성원들에게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민주주의 자체를 억누르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Walzer 또한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논의에서 이러한 상황이 ‘공포의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셋째, 누가 공동체의 최고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는지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대의민주주의적인 정치 구조에서 이것은 주권의 대리인에 의해서 선포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둘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권의 대리인의 이익과 최고 비상상황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주권의 대리인은 공동체 전체를 역시 최고 비상사태의 일상화로 몰고갈 수 있다. 이것은 테러리즘을 포함한 모든 전체주의, 공포주의적 정치체제의 일반적 특징이다. 물론 Walzer는 최고 비상사태를 매우 좁게 정의함으로써 이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의 논의 자체가 이론적으로는 매우 애매한 것 또한 사실이다.


4. 맺는 말 - 정의로운 전쟁의 부정의함

  역사 속에서 전쟁을 찬양하고 참여를 독려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전쟁은 그 어떤 다른 사건도 그만큼 참혹하고 잔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특별한 고찰이 요구되고, 이것을 억제할만한 이론적, 실천적 수단이 요청된다. 이런 성찰의 여러 결과들 가운데,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끔 도와주면서 동시에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론으로서 주목받았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은 이 이론이 대다수의 전쟁을 부당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쟁을 제한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이상에만 갇힌 평화주의와 인간을 동물 이하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은 선포, 수행, 종전 이후라는 세 가지로 구분되며, 각 부분에서 정당성을 획득했을 때 정의로운 전쟁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의 전통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Michael Walzer는 현대에 이 논의를 복각시키고 여러 전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힘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앞으로 수행할 전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줌으로써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는,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해석 앞에 열려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침략에 대한 반응인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내부적으로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채 어떤 전쟁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라는 것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거의 유일하지만 가장 큰 문제인데, 특정한 전쟁을 허용하는 것은 해석의 다양성과 맞물려 다양한 전쟁에 대한 허용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특히 Walzer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적인 일관성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내놓은 최고 비상사태에 대한 논증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으로 포장하여 그것을 최고 비상사태로 ‘해석’할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폭격수가 됐고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중략) 아무 생각 없이 서류철에다가 [다시는 안 돼.] 라고 끄적거리고는 나 스스로도 놀랐다. (중략)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이 있다는 다소 정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의 어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전쟁은 전혀 해결책이 아니라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특히, 평화를 옹호하는 시각은 인도주의적 개입에 이르러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리하여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실제로 그 이론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전쟁을 평가하는 데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당화하기에는 그 결과와 유산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또한 Walzer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언어들은 현실적 이익을 목표로 하는 전쟁들을 치장하는 데 동원되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큰 진보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의 의도하는 것처럼 전쟁 자체를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모두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요원해보인다.

* 참고문헌

철학연구회 엮음, 『정의로운 전쟁은 정당한가』, 서울 ; 철학과현실사, 2006.
Emmett Barcalow, 『현대사회와 윤리 - 이론과 쟁점』(김진경, 이남원, 정미경, 최성희 옮김), 서울 ; 박학사, 2009.
Howard Zinn, 『전쟁에 반대한다』(유강은 옮김), 서울 ; 이후, 2001.
Michael Walzer, 『전쟁과 정의』(유홍림 외 옮김), 고양 ; 인간사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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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빈 2015-05-25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전쟁과 정의가 완전히 반대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으나 어찌 보면 하나의 논제로 갈 수 밖에 없는 사회현상 중 하나입니다. 복잡다난한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결심할 때부터 정의를 고려해야 하며 현대전에 이르면 이제 이 정의가 곧 전쟁의 종결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성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와 관련된 독서내용이 있다면 계속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효진 2015-05-25 07:37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호호 2016-02-0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쟁의 정당성은 참 어려운 문제인거 같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박효진 2016-02-02 00:52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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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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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측면

  이 글의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환기시키기 위한 의문문이 아니다. 정말 인지자본주의가 무엇인가 물어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인지자본주의를 초기 자본주의,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산업자본주의에 이은 제3의 자본주의의 물결로서 정의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에서 등장하는 여러 사회현상들을 마르크스의 『자본』을 해석하여 분석하고 있으며, 그것이 각 사회현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적용해보고 있다. 

  그가 현재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로서 규정하는 이론적 근거는 스피노자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 분석의 틀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잘 알려진 틀에 따라서 토대와 상부구조를 이원적으로 분리하고 그 각각에 대한 고찰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토대를 열심히 분석하고 상부구조의 여러 요소들을 토대로 환원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반대로 서구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독특한 흐름은 보통 상부구조가 어떻게 하부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기술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측면들은 동일한 실재의 다양한 양태들이다. 그 가운데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실재의 속성이 사유라는 것과 그 양태가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를 차용하면, 토대와 상부구조 역시 동일하게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두 측면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스피노자의 이런 이론적 측면은 마르크스주의에 두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자본주의는 이 세계(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개인)를 지배하면서 물질적인 생산의 측면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통제하고 지배하는 영역은 실재 그 자체인데,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정신의 영역, 즉 인지의 영역까지 지배한다. 저자는 인지의 영역을 매우 넓게 잡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길을 따라서, 그 정신적 활동은 역시 언제나 물질적 활동과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흔히 심리철학에서 인지라고 부르는 그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헤겔이 말하는 정신의 활동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통합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충분히 정신의 문제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는 연합전선이다.

  둘째 가능성은, 서비스 노동에 대한 분석이다. 굳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상품생산노동에서 용역생산노동으로 노동의 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여전히 세계의 중심은 자연에 노동을 투여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이론, 즉 노동가치설에 대한 부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전체에 대한 부정과도 같을 만큼 그것은 그 이론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듯 이것은 19세기적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스트포드주의를 분석하는 이론적인 틀로서는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은 여기에 대한 교정이다. 용역생산노동이 어디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 노동을 실재와 결합되어있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고찰함으로써 노동가치설을 버리지 않고도 서비스노동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이 더 이상 사용가치와 잉여가치를 더한 고전적 판매가격에 따라 결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노동 역시 노동시장이라는 영역이 새로 산출됨으로써 순전히 교환가치로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자연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용역생산노동에게 임금을 지급해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의 수요와 공급이 분명히 창출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수요가 있느냐가 그것이 노동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전술한대로 서비스노동이 임노동으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의미와, 동시에 노동시장 자체를 수요를 창출하는 자본(또는 자본가)이 결정하는 단계에 옴으로써 사회 전체가 자본(가)에게 더욱 충실하게 귀속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분명 이 책의 저자의 이러한 입장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분명 정신적 측면 - 이 책의 용어에 따르면 인지적 측면 - 에서 약점이 있었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그것은 수정주의일 수도 있고,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일수도 있으며, 저자의 입장과 비슷할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면을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새로 정의할 만큼 정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는가? 그것은 조금 의문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그 탄생에서부터, 아니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모든 경제체제는 언제나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정신적 측면들을 동반해서 사람들을 지배해왔다. 자본주의 경제는 그 시작에서부터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기제들이 그 체제를 잘 작동시킬 수 있도록 사람들을 여러 형태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막스 베버의 말처럼 종교적 윤리일 수도 있으며, 아담 스미스가 말한 자유 속에 자리잡히는 질서의 원리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고, 또 그 밖의 다른 것일 가능성도 상존한다. 이러한 국면은 자본주의가 전개되는 곳곳에 배여있는 것이지, 현재 국면에서 그것이 유독 독특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인지자본주의’라고 정의하는 개념은, 사실 어떤 특정한 국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자본주의 특유의 인지구조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드는 느낌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종의 이론적 짜깁기. 내가 각각의 이론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도 있거니와, 사실 스피노자와 바렐라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 것인지 대체 이 책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위에서 썼듯이, 그가 해석하는 바렐라의 인지 개념은 어떤 과학적 측면에 기반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철학적인 수준의 논의인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내게는 헤겔의 내음이 더욱 많이 느껴졌다. 또한 다양한 사회학적, 철학적 분석이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 아래 재배치가 되어있는데, 그 일관성을 잡아내기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대체 인지자본주의란 무엇입니까?’  

 

실천적 측면

  만약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내에서 우리가 인지적 측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면, 그것은 용역생산노동이라는 독특한 노동의 형식일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의 측면에서, 서비스 노동은 양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람들의 삶의 위치가 불안정해지고, 언제나 비정규직 이상의 삶을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기술했듯이, 철저하게 자본포섭적인 노동의 형식이기 때문에, 사회적 일자리 조절이 최대의 이윤을 목표로 삼는 자본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더 이상 고전적인 노동개념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가치창출이 가능한 영역으로서도 주목할 수 있다. 이 가치창출은 자본의 포섭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이러한 노동의 조건 하에 놓인 사람들을 다중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이 다중들은 이런 조건 아래서 각각이 혁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표면화되지 않으며, 가끔은 매우 산발적인 형태로 일어난다. 그 산발적인 형태가 곳곳에서 출현할 때, 그것이 바로 그 조건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형태까지 진행되었다는 징후이며 동시에 혁명의 전조이기도 하다. 그는 이 틀거리를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혁명적 시위나 운동들에 적용하여 고찰하고 있다. 그 핵심은, 사람들의 인지구조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모순 그 자체가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폭발을 이끌어내는 주체 개개인의 혁명적 능력에 대한 신뢰인 것 같다.

  이런 논의가 정말 옳은 해석인가 하는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정말 이런 이론구조를 따라간다면 혁명은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견한 토대에서부터 폭발하는 모순이 상부구조에 영향을 주어 만들어지는 혁명적 정국이라는 것은, 사실 그 모순의 폭발이 상부구조라고 부르는 인지의 영역에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경제 자체의 파괴적 징후는 곧 인지구조에서의 혁명의 징후이기도 하다는 어떤 희망적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적으로, 자본주의가 그만큼이나 만만한 체제이던가, 가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오히려, 저자의 입장은 그의 이론적 분석의 연역적 결론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희망을 투영한 어떤 미래상같다는 느낌을 더욱 많이 받았다. 그와 반대로 해석하자면, 물질구조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인지구조 또한 아주 강력하고 근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시 이를 수 있다. 또한 그 인지구조는 경제위기 자체를 자본의 순환에 따르는 단순한 국면으로 만들어버리거나, 혹은 월가와 미국의 부동산 업자들이 결탁하고 세계적으로 자본을 수집해 돈잔치를 벌인 정도에 불과한 사건으로 축소시킬 수도 있다. 또한 현재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이 되고 있기도 하다. 자본 자체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로 환원되거나 치환되거나 대체되고, 자본의 문제는 감추어진다. 사실 그것이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인지구조이기도 하다.

  게다가 실제 그것이 어떤 모순을 사람들의 내부에서부터 폭발시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폭발은 양태의 측면 혹은 토대의 측면에서 다시 가로막혀 좌절하는 경우 또한 숱하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최근의 등록금 시위나 서남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의 민주주의 혁명 등에서 보려고 하는 듯 하지만……. 리비아는 여전히 내전중이고, 시위에 나가야할 많은 다른 학생들은 역시나 시위보다는 아르바이트를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중의 힘을 믿기보다는, 혁명적 지도자나 전위세력의 힘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욱 큰 효과를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짧은 내 생각이다. 

 

덧댐 : 자본론 분석에 대하여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론가들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술술 읽어내려가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기도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아직 자본론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고 입문서 정도만 뒤적거려본 정도로서는, 자본론을 상세하게 인용하면서 지대와 이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장에서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느낌만 들었고요. 

서평으로 적은 이 글은, 그래서 이 책의 내용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것, 아는 이론가들에 대해서만 서술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론적 학습의 수준을 더욱 높인 뒤에, 다시 도전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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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내용을 메일로도 보내드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박효진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유시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시민이라는 이름은 참 복잡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 그리고 그가 유명한 논객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그와 동시에 거론되던 이름은 진중권, 강준만, 김규항 등이다. 그들은 여전히 지금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치논객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지만, 정치적인 견해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무리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이름이 복잡해진 것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끼어든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에 그랬듯, 그리고 죽은 뒤에도 처절하리만큼 그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기가 전공한 경제학에 대한 지식은 이론적인 무기가 되었고, 날카로운 말과 편안한 글쓰기를 모두 겸비한 쉽지 않은 능력은 실천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는 많은 진보정치인들과 논객들에게, 좋은 상대이면서 넘기 힘든 벽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이나 『경제학카페』를 읽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 수만은 없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노무현을 옹호하거나(『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자신을 변명하는(『후불제 민주주의』) 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론적인 성격을 갖춘 책인데도 그러하다. 정치인 유시민의 견해를 빼고 일반적인 국가이론 입문서로서 읽으려 해도, 그의 인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그가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되었을까를 지속적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를 떨쳐내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쓴이를 의심하면서 글을 읽는 것은 논리학적으로 오류다. 나쁜 사람이 말을 했다고 그 말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떤 누군가가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고 책을 일단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1 : 포퍼의 그림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이후, 출판가에는 여러 분야의 철학·이론에 대한 입문서가 유행을 타고 있는 듯하다. 이후 샌델 자신의 책도 여러 권 발간되었고, 그에 대한 여러 측면의 반박도 출판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시민 또는 출판사가 이 책을 언제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혐의를 받기에는 충분하다. 심지어 제목부터 『…란 무엇인가』 이겠는가. 

  서술상의 분류와 특징도 샌델의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역사상 등장했던 여러 이념들을, 그 원형을 지니고 있는 학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입장을 살펴본다. 단순히 현대에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현실정치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집중해서 분석하기보다는, 그 원형을 살핌으로써 발전이나 왜곡의 상을 살피고 진정한 의미를 밝히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서술방법이다. 

  또한 상식적으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가장 앞에 와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샌델과 일치한다. 이론의 역사나 발전의 단계를 추적해보려고 한다면 응당 시대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국가주의 국가론’으로 가장 처음 제시한 홉스의 철학은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극복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천명하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가 생겨난 이유는 아무래도 현대의 국가나 공동체 이론에 있어서 고대의 목적론적 이론이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샌델을 통해 이같은 이론적 논쟁의 맥락이 널리 알려진 탓이 더 클 것이다. 그의 책에 드리운 샌델의 그림자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이 책이 빚지고 있는 학자는 샌델 뿐만이 아니다. 샌델이 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혼자 해보는 추측일 뿐이다. 오히려 그가 의지한 것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학자는 포퍼다. 목적론적 국가관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그는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라는 책을 거의 인용하다시피 한다. 이런 국가이론들의 실제 정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사회철학이 자유주의의 정수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포퍼의 이야기가 책의 여러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보니, 이 책에서 펼쳐지는 분석이나 견해가 그의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포퍼의 견해를 요약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수준에까지 다다른다. 

  목차를 중심으로 포퍼의 견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고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민주주의적인 목적론적 국가관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포퍼이며(4장), 혁명과 개량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실의 정치에서 가장 그럴듯한 지향점을 제공해주는 것이 포퍼의 점진적 개량이라는 사회공학(6장), 이것이 바로 진짜 진보정치이며(7장), 시장경제의 원리가 돌보아주지 못하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부분을 국가가 도맡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가장 올바른 절차를 철학적으로 제시해주는 사람 또한 포퍼이다(8장). 그래서 포퍼는 ‘진보자유주의자’이다. 

  포퍼의 견해가 잘 요약이 되어있는지는 둘째로 하더라도, 과연 그가 간추린 포퍼의 정치적 견해가 정말 그가 말한 것처럼 정치적인 변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이것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조금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유시민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기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다. 

  포퍼 식의 점진적 진보가 가능한 이유, 그리고 그가 그러한 정치이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반증이 가능해야 과학’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반증주의 과학철학이 깔려있다. 이 입장은 어떤 명제도 거짓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참이라고 가정된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다시 어떤 명제도 완전한 참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포퍼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참일 수 없지만,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세력이 하는 말 또한 참일 수 없다. 

  진리의 힘을 쟁취할 수 없는 정치투쟁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가 잘 파악하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집권하고 있는 집단에 비해서, 진보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적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는 현실이 아니라 이성에 기댄다. 유시민은 진보가 이성을 사용한 점진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그 진보의 성취는 언제나 현실적 상황을 뛰어넘은 진리의 힘을 이용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그가 파악한 이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의 이성, 현실이 어떻다 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끄는 그 이성이다. 그래야만 이성을 통한 진보의 성취가 가능하다. 그가 논의를 많이 기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가 진보에 대해 열망하는 것은 오히려 칸트적 의미의 이성에 더 가까워 보인다. 보수주의의 원조인 버크나 그것이 철학적으로 가장 정치하게 표현된 흄의 실천철학에서만 보아도, 진리에 대한 회의는 언제나 보수주의의 무기이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는 될 수 없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2 : 진보자유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포퍼를 제외하고 난 그의 정치적 견해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그것이 진보자유주의로 개념화되어있다. 이 책의 전체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국가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국가관이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가져야하는 국가관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데, 나는 적어도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에 국한한 이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포퍼를 강조하는 등 그의 태도를 살펴보았을 때, 그는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법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절차를 대단히 중시한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에 부합하기도 하다. 자유주의 정치철학 또는 국가관의 핵심은 그가 포퍼에 대해 말할 때 은연중에 주장하듯이 ‘완전히 올바른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잘 설명하고 있듯이 자유주의 이론의 국가관, 즉 사회계약에 따르면, 세상엔 여러 가치들이 경쟁적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다리고 있으며,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은 이성에 의지한 합리적 토론을 거쳐 여러 가치들을 승인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구축한다. 어떤 가치가 실제로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회계약에 의해 승인된 것은 무엇이든 그 사회가 주목하는 가치가 된다. 또한 개인들의 자유는 여전히 가장 존중받아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에, 여전히 개인들은 그 주목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그 결과의 측면에서 롤즈의 사회철학과 비슷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해서 논하면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이론가인 롤즈를 전혀 언급하거나 인용하지 않은 것을 심히 의문스럽게 생각한다.) 출발선을 같게 하는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을 국가가 담당하고, 나머지를 시장경제가 담당하게 하며, 우연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측면을 최소화해야한다는 것은 이미 롤즈의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등에서 제시된 자유주의의 새로운 측면들이다. 

  그러나 유시민은 이 진보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국가관과 목적론적 국가관이 결합한 형태의 공동체이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그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윗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가 연대를 통해 최소한의 사회적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도덕적인 옮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목적론적 국가관의 측면이다. 그런데 이걸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보장하는 문제는 자유주의 국가관의 측면이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진보정치를 함축하려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해야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굳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 롤즈는 칸트의 비판철학의 개인중심적 측면을 받아들여 진보적인 정치적 실천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유시민의 입장에 선다면, 칸트의 실천철학이 목적론적 측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롤즈의 철학도 목적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고 옹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라도 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진보적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제학자인 한 인도의 아마티아 센이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권 이론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진보적인 철학자인 피터 싱어 또한, 자신의 독특한 진보적 정치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는 데 목적론적 국가관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적론과 철학적으로 정반대에 서있는 공리주의를 자신의 기초로 삼는다. 유시민이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란, 자유주의이거나 혹은 노직이나 하이에크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과는 구분되는 ‘그냥 자유주의’이지, 무언가 특별한 자유주의는 아니다. 

  더군다나, 합리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국가관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목적론적 국가관을 결합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한지 보여주는 어떠한 논증도 이 책에는 들어있지 않다. 이 두 국가관은, 본질적으로 옳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어떻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가, 그 가치를 이룰 수 있도록 공동체가 개인에게 간섭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등등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사이이다. 첫 번째 질문에 목적론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유주의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질문에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에 자유주의자는 절차 없이는 정당화 없다고 응수한다. 세 번째 질문에는 간섭해도 된다는 입장과 그것은 자유의 침해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유시민의 논증이란, 축약하자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수준이다. 이 두 국가관이 이토록 쉽게 조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면, 이 두 국가관(또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철학) 사이에서 벌어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나보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3 : 홉스의 문제

  또한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홉스는 국가주의 국가론을 정당화하는 이론가에 들어가고 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홉스는 국가의 힘을 대단히 강조하긴 하지만 정치철학의 전통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에 편입시키는 것이 더 올바르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요소를 확립하고 이론적으로 전개한 사람이 바로 홉스이기 때문이다. 핵심요소란 다름아닌 보편주권론과 사회계약설이다. 보편주권론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부터 주권이 나온다는 이론이며, 사회계약설은 이 주권자들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계약에 의해 국가(공동체)와 정부가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홉스는 국가주의자라기보다는, 계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국가의 폭력독점을 극단적으로 정당화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선조쯤 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로크와 밀, 그리고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그 이론적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가 군주제를 선호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이미 국가가 실행하려는 것은 계약에 의해 동의받은 내용이므로 되도록 빨리 해야한다. 그런데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견이 분산되어 실행이 더뎌지므로, 그 의지가 단일한 군주제가 실행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군주제란 현대의 위계적 관료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군주제이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가 자유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귀족정을 옹호하는 루소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정부의 형태를 논하는 중에 귀족정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귀족정이란 선출 귀족정을 이야기하며, 이것을 현대언어로 번역하자면 대의민주주의쯤 된다. 정치사상사적 맥락을 놓치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며, 그가 무엇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범하게 되는 실수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폭력독점과 그 힘의 범위를 가장 넓게 설정한 이론가라는 점에서 국가를 중시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싶었던 유시민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정치철학의 전통 자체를 부정하는 분류방법은 쉽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라든가,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서 발견되는 공동체 우선적인 철학에 더욱 부합하는 것 같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을 마무리지으면서, 정치가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서 책을 다시 읽어나가기로 해보겠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도 아닌, 정치인이 정치이론에 대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백미는 책의 가장 끝에 있는 맺음말이다. 애초에 내가 시도했던 ‘정치인 색깔 빼고 보기’라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유시민은 스스로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같은 사람들은 허탈해질 수 밖에 없다. 아,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실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 이 책을 읽어보자면, 국가이론과 상관없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합당하려고 열심히 기를 쓰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의 절대악과 같이 묘사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행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경멸로 가득하다. 포퍼의 점진적 이론에 대해 무게를 싣는 이유는, 그것을 다름아닌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동일시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한나라당-민주당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 사이에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역사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는 어떤가. 독일 사민당이 현재까지 존속하는 것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승리했다는 증거라고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이러한 변명의 정점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들먹이며 절대악 한나라당을 몰아내야한다는 가장 마지막 장이다. 베버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것이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개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시민의 설명에 의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설정한 이상을 향해 실천하는 동기를 가장 우선에 두는 시각이며 책임윤리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윤리관이라는 것이다. 운동과는 다르게 정치인은 책임윤리에 따라 정치를 해야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자체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설계된 제도라는 그의 입장과 결합하여, 그 정치제도의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 연합정치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최악을 피하는 ‘예측 가능한 결과’에 입각한 책임윤리에도 부합한다. 

  유시민이 저술한 이론서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이 아주 쉽게 술술 읽힌다는 것은 매우 좋은 점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거나, 그런 입장을 반영하여 정치철학의 역사를 제멋대로 재구성하는데 쓰인다면 그것은 ‘목적론적’으로 온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현들이 답변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렇게 변명이 급했을까.

 

덧댐 1 : 이 글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인 ‘진보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 아이디어는 아는 친구이자 이글루스 유명 블로거인 Socio의 글(http://www.facebook.com/socio1818/posts/168970979827554)에서 빌어왔음을 밝힌다.

덧댐 2 : 노무현은 생전에 이순신에 감정이입을 하더니 유시민은 유수의 이론가들에 감정이입을 한다. 물론 그 감정이입은 왜곡과 아전인수를 곁들인 것들이다. 어쩜 둘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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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정치학도 모르고 유시민의 책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자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국가론 입문서가 아니라 한 정치인이 자신의 국가관과 정치 윤리관을 밝힌 책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형식적으로 기존의 정치이론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런 비평을 하신 것이라 여깁니다만, 저자가 현실 정치인인 이러한 저서의 경우는 학문적 차원의 잣대보다는 저자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지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저자가 제시했던 제목은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였는데, 출판사에서 수정을 요구했다고 어디선가 지나치며 읽은 것 같아서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박효진 2011-06-28 00:30   좋아요 0 | URL
이 글의 끝에서 짧게 줄였습니다만, 이 책을 정치적 입장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볼 경우, 그와 입장이 같지 않은 저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그 학자들의 입장에 대한 분석과 연구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한대로 이론분석에서부터 삐끗하고 있으니, 정당화의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글에서는 격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만, 대체 포퍼의 책을 읽은 것인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의 책을 읽은 것인지도 의심스럽고요. 물론 열심히 운동하던 대학교 시절에 다 뗐겠지만...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이번달에는 유난히 재미있게 읽어볼만한 철학자 평전이 많이 나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평전 종류의 책들은, 사상 입문과 더불어서 그들의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수도 있는 게 장점이죠.  

1. 스피노자 

  근대를 뛰어넘는 근대의 방법론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인 스피노자에 대한 책입니다. 사상에 대한 입문을 할 수 있는 책은 더러 있지만(사실 별로 없지만) 삶에 대한 이마만큼 두께의 생애에 대한 책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방식으로 스피노자를 자신의 철학에 차용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충분히 좋은 시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생애를 음미하며 그 자체로 즐겨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또는, 비슷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2. 데리다 평전 

  다음은 수많은 오해에 둘러싸인 데리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를 어떻게 한 마디로 설명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집에 『데리다』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자막도 없는데다가 영어와 프랑스어가 난무하는(...) 영상이라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여튼 그의 삶은 그의 혁명적인 사상 만큼이나 뜨거웠다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죠. 알제리 이민자 출신 아웃사이더로서 68혁명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참여에도 활발하였고요. 

 

 

 

3.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다음은 스토아 학파의 대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그는 사상사적으로 탁월한 저서를 남긴 것과 동시에, 로마 제국시대 최고의 전성기라는 5현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기도 합니다. 인문학 안에서도, 역사학에서는 그의 정치, 경제적 치세에 대해 연구하는 데 치중하고, 철학에서는 그가 스토아 학파의 사상적 전개에 남긴 업적에 대해서만 연구하게 마련이죠. 아무래도 종합적인 연구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모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4. 미국 예외론의 대안을 찾아서 

  미국에 대한 연구서는 여럿 있지만, 목차나 내용, 분량에 있어서 참 충실한 책은 오랜만이기에 추천목록에 올립니다. 정치, 사회사적인 맥락에서 미국을 연구하는 것은, 여러모로 쉬운 일은 아니지요. 한국에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일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시각이 매우 대립적으로 형성되어있기 때문일텐데요. 그 시각에 깊이를 더하는 책이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네요. 

 

 

 

5. 불안의 시대 

  단적으로 말해,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는 불안을 먹고 자라는 경제, 사회적 경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불안'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키워드입니다. 『불안의 시대』는 그 불안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는지 분석하는 책입니다. 사람들의 불안은 경제체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인데, 그에 대한 어떤 분석을 제공해주는 책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보수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고, 미국의 제국적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하버드 대학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추천사가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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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탄생- 진화론, 비교생물학 등으로 살펴 본 아버지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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