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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유시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시민이라는 이름은 참 복잡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 그리고 그가 유명한 논객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그와 동시에 거론되던 이름은 진중권, 강준만, 김규항 등이다. 그들은 여전히 지금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치논객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지만, 정치적인 견해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무리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이름이 복잡해진 것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끼어든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에 그랬듯, 그리고 죽은 뒤에도 처절하리만큼 그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기가 전공한 경제학에 대한 지식은 이론적인 무기가 되었고, 날카로운 말과 편안한 글쓰기를 모두 겸비한 쉽지 않은 능력은 실천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는 많은 진보정치인들과 논객들에게, 좋은 상대이면서 넘기 힘든 벽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이나 『경제학카페』를 읽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 수만은 없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노무현을 옹호하거나(『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자신을 변명하는(『후불제 민주주의』) 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론적인 성격을 갖춘 책인데도 그러하다. 정치인 유시민의 견해를 빼고 일반적인 국가이론 입문서로서 읽으려 해도, 그의 인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그가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되었을까를 지속적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를 떨쳐내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쓴이를 의심하면서 글을 읽는 것은 논리학적으로 오류다. 나쁜 사람이 말을 했다고 그 말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떤 누군가가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고 책을 일단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1 : 포퍼의 그림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이후, 출판가에는 여러 분야의 철학·이론에 대한 입문서가 유행을 타고 있는 듯하다. 이후 샌델 자신의 책도 여러 권 발간되었고, 그에 대한 여러 측면의 반박도 출판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시민 또는 출판사가 이 책을 언제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혐의를 받기에는 충분하다. 심지어 제목부터 『…란 무엇인가』 이겠는가. 

  서술상의 분류와 특징도 샌델의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역사상 등장했던 여러 이념들을, 그 원형을 지니고 있는 학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입장을 살펴본다. 단순히 현대에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현실정치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집중해서 분석하기보다는, 그 원형을 살핌으로써 발전이나 왜곡의 상을 살피고 진정한 의미를 밝히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서술방법이다. 

  또한 상식적으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가장 앞에 와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샌델과 일치한다. 이론의 역사나 발전의 단계를 추적해보려고 한다면 응당 시대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국가주의 국가론’으로 가장 처음 제시한 홉스의 철학은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극복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천명하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가 생겨난 이유는 아무래도 현대의 국가나 공동체 이론에 있어서 고대의 목적론적 이론이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샌델을 통해 이같은 이론적 논쟁의 맥락이 널리 알려진 탓이 더 클 것이다. 그의 책에 드리운 샌델의 그림자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이 책이 빚지고 있는 학자는 샌델 뿐만이 아니다. 샌델이 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혼자 해보는 추측일 뿐이다. 오히려 그가 의지한 것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학자는 포퍼다. 목적론적 국가관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그는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라는 책을 거의 인용하다시피 한다. 이런 국가이론들의 실제 정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사회철학이 자유주의의 정수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포퍼의 이야기가 책의 여러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보니, 이 책에서 펼쳐지는 분석이나 견해가 그의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포퍼의 견해를 요약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수준에까지 다다른다. 

  목차를 중심으로 포퍼의 견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고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민주주의적인 목적론적 국가관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포퍼이며(4장), 혁명과 개량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실의 정치에서 가장 그럴듯한 지향점을 제공해주는 것이 포퍼의 점진적 개량이라는 사회공학(6장), 이것이 바로 진짜 진보정치이며(7장), 시장경제의 원리가 돌보아주지 못하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부분을 국가가 도맡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가장 올바른 절차를 철학적으로 제시해주는 사람 또한 포퍼이다(8장). 그래서 포퍼는 ‘진보자유주의자’이다. 

  포퍼의 견해가 잘 요약이 되어있는지는 둘째로 하더라도, 과연 그가 간추린 포퍼의 정치적 견해가 정말 그가 말한 것처럼 정치적인 변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이것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조금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유시민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기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다. 

  포퍼 식의 점진적 진보가 가능한 이유, 그리고 그가 그러한 정치이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반증이 가능해야 과학’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반증주의 과학철학이 깔려있다. 이 입장은 어떤 명제도 거짓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참이라고 가정된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다시 어떤 명제도 완전한 참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포퍼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참일 수 없지만,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세력이 하는 말 또한 참일 수 없다. 

  진리의 힘을 쟁취할 수 없는 정치투쟁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가 잘 파악하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집권하고 있는 집단에 비해서, 진보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적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는 현실이 아니라 이성에 기댄다. 유시민은 진보가 이성을 사용한 점진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그 진보의 성취는 언제나 현실적 상황을 뛰어넘은 진리의 힘을 이용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그가 파악한 이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의 이성, 현실이 어떻다 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끄는 그 이성이다. 그래야만 이성을 통한 진보의 성취가 가능하다. 그가 논의를 많이 기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가 진보에 대해 열망하는 것은 오히려 칸트적 의미의 이성에 더 가까워 보인다. 보수주의의 원조인 버크나 그것이 철학적으로 가장 정치하게 표현된 흄의 실천철학에서만 보아도, 진리에 대한 회의는 언제나 보수주의의 무기이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는 될 수 없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2 : 진보자유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포퍼를 제외하고 난 그의 정치적 견해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그것이 진보자유주의로 개념화되어있다. 이 책의 전체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국가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국가관이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가져야하는 국가관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데, 나는 적어도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에 국한한 이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포퍼를 강조하는 등 그의 태도를 살펴보았을 때, 그는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법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절차를 대단히 중시한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에 부합하기도 하다. 자유주의 정치철학 또는 국가관의 핵심은 그가 포퍼에 대해 말할 때 은연중에 주장하듯이 ‘완전히 올바른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잘 설명하고 있듯이 자유주의 이론의 국가관, 즉 사회계약에 따르면, 세상엔 여러 가치들이 경쟁적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다리고 있으며,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은 이성에 의지한 합리적 토론을 거쳐 여러 가치들을 승인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구축한다. 어떤 가치가 실제로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회계약에 의해 승인된 것은 무엇이든 그 사회가 주목하는 가치가 된다. 또한 개인들의 자유는 여전히 가장 존중받아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에, 여전히 개인들은 그 주목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그 결과의 측면에서 롤즈의 사회철학과 비슷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해서 논하면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이론가인 롤즈를 전혀 언급하거나 인용하지 않은 것을 심히 의문스럽게 생각한다.) 출발선을 같게 하는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을 국가가 담당하고, 나머지를 시장경제가 담당하게 하며, 우연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측면을 최소화해야한다는 것은 이미 롤즈의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등에서 제시된 자유주의의 새로운 측면들이다. 

  그러나 유시민은 이 진보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국가관과 목적론적 국가관이 결합한 형태의 공동체이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그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윗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가 연대를 통해 최소한의 사회적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도덕적인 옮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목적론적 국가관의 측면이다. 그런데 이걸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보장하는 문제는 자유주의 국가관의 측면이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진보정치를 함축하려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해야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굳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 롤즈는 칸트의 비판철학의 개인중심적 측면을 받아들여 진보적인 정치적 실천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유시민의 입장에 선다면, 칸트의 실천철학이 목적론적 측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롤즈의 철학도 목적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고 옹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라도 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진보적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제학자인 한 인도의 아마티아 센이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권 이론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진보적인 철학자인 피터 싱어 또한, 자신의 독특한 진보적 정치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는 데 목적론적 국가관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적론과 철학적으로 정반대에 서있는 공리주의를 자신의 기초로 삼는다. 유시민이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란, 자유주의이거나 혹은 노직이나 하이에크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과는 구분되는 ‘그냥 자유주의’이지, 무언가 특별한 자유주의는 아니다. 

  더군다나, 합리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국가관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목적론적 국가관을 결합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한지 보여주는 어떠한 논증도 이 책에는 들어있지 않다. 이 두 국가관은, 본질적으로 옳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어떻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가, 그 가치를 이룰 수 있도록 공동체가 개인에게 간섭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등등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사이이다. 첫 번째 질문에 목적론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유주의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질문에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에 자유주의자는 절차 없이는 정당화 없다고 응수한다. 세 번째 질문에는 간섭해도 된다는 입장과 그것은 자유의 침해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유시민의 논증이란, 축약하자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수준이다. 이 두 국가관이 이토록 쉽게 조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면, 이 두 국가관(또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철학) 사이에서 벌어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나보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3 : 홉스의 문제

  또한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홉스는 국가주의 국가론을 정당화하는 이론가에 들어가고 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홉스는 국가의 힘을 대단히 강조하긴 하지만 정치철학의 전통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에 편입시키는 것이 더 올바르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요소를 확립하고 이론적으로 전개한 사람이 바로 홉스이기 때문이다. 핵심요소란 다름아닌 보편주권론과 사회계약설이다. 보편주권론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부터 주권이 나온다는 이론이며, 사회계약설은 이 주권자들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계약에 의해 국가(공동체)와 정부가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홉스는 국가주의자라기보다는, 계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국가의 폭력독점을 극단적으로 정당화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선조쯤 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로크와 밀, 그리고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그 이론적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가 군주제를 선호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이미 국가가 실행하려는 것은 계약에 의해 동의받은 내용이므로 되도록 빨리 해야한다. 그런데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견이 분산되어 실행이 더뎌지므로, 그 의지가 단일한 군주제가 실행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군주제란 현대의 위계적 관료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군주제이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가 자유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귀족정을 옹호하는 루소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정부의 형태를 논하는 중에 귀족정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귀족정이란 선출 귀족정을 이야기하며, 이것을 현대언어로 번역하자면 대의민주주의쯤 된다. 정치사상사적 맥락을 놓치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며, 그가 무엇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범하게 되는 실수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폭력독점과 그 힘의 범위를 가장 넓게 설정한 이론가라는 점에서 국가를 중시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싶었던 유시민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정치철학의 전통 자체를 부정하는 분류방법은 쉽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라든가,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서 발견되는 공동체 우선적인 철학에 더욱 부합하는 것 같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을 마무리지으면서, 정치가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서 책을 다시 읽어나가기로 해보겠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도 아닌, 정치인이 정치이론에 대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백미는 책의 가장 끝에 있는 맺음말이다. 애초에 내가 시도했던 ‘정치인 색깔 빼고 보기’라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유시민은 스스로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같은 사람들은 허탈해질 수 밖에 없다. 아,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실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 이 책을 읽어보자면, 국가이론과 상관없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합당하려고 열심히 기를 쓰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의 절대악과 같이 묘사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행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경멸로 가득하다. 포퍼의 점진적 이론에 대해 무게를 싣는 이유는, 그것을 다름아닌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동일시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한나라당-민주당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 사이에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역사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는 어떤가. 독일 사민당이 현재까지 존속하는 것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승리했다는 증거라고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이러한 변명의 정점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들먹이며 절대악 한나라당을 몰아내야한다는 가장 마지막 장이다. 베버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것이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개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시민의 설명에 의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설정한 이상을 향해 실천하는 동기를 가장 우선에 두는 시각이며 책임윤리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윤리관이라는 것이다. 운동과는 다르게 정치인은 책임윤리에 따라 정치를 해야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자체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설계된 제도라는 그의 입장과 결합하여, 그 정치제도의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 연합정치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최악을 피하는 ‘예측 가능한 결과’에 입각한 책임윤리에도 부합한다. 

  유시민이 저술한 이론서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이 아주 쉽게 술술 읽힌다는 것은 매우 좋은 점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거나, 그런 입장을 반영하여 정치철학의 역사를 제멋대로 재구성하는데 쓰인다면 그것은 ‘목적론적’으로 온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현들이 답변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렇게 변명이 급했을까.

 

덧댐 1 : 이 글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인 ‘진보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 아이디어는 아는 친구이자 이글루스 유명 블로거인 Socio의 글(http://www.facebook.com/socio1818/posts/168970979827554)에서 빌어왔음을 밝힌다.

덧댐 2 : 노무현은 생전에 이순신에 감정이입을 하더니 유시민은 유수의 이론가들에 감정이입을 한다. 물론 그 감정이입은 왜곡과 아전인수를 곁들인 것들이다. 어쩜 둘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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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정치학도 모르고 유시민의 책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자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국가론 입문서가 아니라 한 정치인이 자신의 국가관과 정치 윤리관을 밝힌 책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형식적으로 기존의 정치이론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런 비평을 하신 것이라 여깁니다만, 저자가 현실 정치인인 이러한 저서의 경우는 학문적 차원의 잣대보다는 저자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지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저자가 제시했던 제목은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였는데, 출판사에서 수정을 요구했다고 어디선가 지나치며 읽은 것 같아서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박효진 2011-06-28 00:30   좋아요 0 | URL
이 글의 끝에서 짧게 줄였습니다만, 이 책을 정치적 입장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볼 경우, 그와 입장이 같지 않은 저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그 학자들의 입장에 대한 분석과 연구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한대로 이론분석에서부터 삐끗하고 있으니, 정당화의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글에서는 격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만, 대체 포퍼의 책을 읽은 것인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의 책을 읽은 것인지도 의심스럽고요. 물론 열심히 운동하던 대학교 시절에 다 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