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말을 죽였을까 - 이시백 연작소설집
이시백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농촌에 대해 다룬 책은 참 많. 한국에서 소설이 시작된 그 시대에, 소설가는 농촌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농촌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던 무대였고, 따라서 글쟁이들은 공감을 얻기 위해서든 비판을 하기 위해서든 땅에 뿌리를 내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적 발전시기를 지난 이후, 사람들의 삶의 무대는 점점 도시로 옮아갔고, 글쟁이들 역시 흙 대신 아스팔트를 밟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도시의 생활, 도시의 감수성, 도시의 빛깔이 소설에 녹아들었다. 이런 경향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고, 도시에 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겉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반면 농촌은 도회의 부정적 분위기를 씻어낼 수 있는 곳으로 타자화되었다
. 순수함, 근대적이지 않음, 한적함, 복잡하지 않음, 사람에 치여 살지 않을 수 있는 곳하지만 결코 농촌은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시백의 누가 말을 죽였을까는 잘 보여준다. 지은이는 글에서, 전면적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맺은 관계와 대화를 통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라고 피력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노상 고민하는 것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골칫거리 삼는 사항들과 별로 다르지 않으며, 묘하게 겹친다. 게다가 도시가 주체가 되어 암묵적으로 타자화된 상황에 대한 수용과 거부에 대한 입장이 한 겹 더 덮어지면서, 등장인물(들 사이)의 갈등은 자신들의 주름 만큼이나 더욱 깊어간다.


   지은이는 이런 갈등구조가 등장한 원인을 대개는 외부에서 찾고 있다
. 면사무소 일로 대변되는 이런저런 국가정책,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비쳐지는 박정희 대통령 시기의 새마을 정책,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필연적으로 가져다줄 수 밖에 없는 금전숭배경향, 자신들의 개발방식에 세계를 끊임없이 편입시키려는 의도, 그 갈등 사이를 다시 돈을 매개로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 또한 사람들은 이런 외부적인 요인들이 토대로 삼는 생각을 똑같이 체화하고 있다. 땅을 지키는지 파는지 고민하다가도 단번에 돌아서는 사람, 단 한번도 나서서 무언가 해본적이 없는 사람들, 자식에게는 더 이상 이런 환경을 물려주기 싫다는 생각,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속으로는 떠날 궁리를 하는 사람들, 그것을 보면서 아니라고 말하지만 현실을 탓하며 입을 다물어버리는 사람.


   지은이는
, 이런 개인과 정치-사회 요소들을 소설 곳곳에 두텁게 배치해놓았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온 적이 없는 50대 촌부들의 대화 속에서 이런 배경을 찾아낼 수 있고, 또 그런 배경 없이 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는 대화가 나오는 이유는, ‘체화라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멋대로 배치시켜 엉뚱한 인과를 만들어낸다. 분명 합리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것을 옳지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저 촌부들의 넋두리라고 함부로 웃어넘길 수도 없다. 여기에는 체화하며 얻어낸 직관 내지는 그를 통한 통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 학문적으로는 개인의 행동에 경제가 가장 깊은 이유로서 토대를 이루기는 하지만 결코 경제 하나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 알튀세르의 중층결정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문구의 연작소설 관촌수필이 다루고 있는 소재나 주제들과 맞닿은 점을 생각해보는 것이 한결 속이 편하다. 그리고 아주 일치하지는 않지만, 골프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부풀려서 찍으면 나올 것 같은, 류승완 감독이 만든 영화짝패를 떠올리며 글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성태의 소설 늑대, 제목에 걸맞게 늑대에 대한 상징과 비유로 가득 채워져있다. 그 상징은 각자 다른 성격의 인물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엔 명확하고 뚜렷하게 그 대상이나 함의가 드러나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인물을 통해 이야기가 이끌려나갈 때에는 전혀 다른 말로 늑대를 채운다. 이것이 중첩되는 면모를 해석하고,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 이 글을 읽는 가장 큰 재미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우선 이 소설의 배경인 몽골에 이미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늑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존에 영위하던 생계를 위협하는 어떤 세력, 하지만 그 앞에서 언제나 희생양을 만들 수 밖에 없으며 순응하도록 강제하는 폭력적인 성격. 촌장으로 불리는 사람에게 자본주의란 이런 모습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폭력적인 낯선 것과의 마주함 속에서, 특정한 삶의 형태를 강요당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이 모습은 촌장의 애매모호한 태도 뿐만이 아니라
, 늑대를 대한 승려의 태도에서도 다소 엿볼 수 있다. 승려는 이를 어떤 자연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듯한 말을 내뱉는다. 따라서, 수행자들은 이를 막을 수도 없고, 그러나 불행하고 옳지 않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는 가운데 제 위치를 찾지 못한 채 혼란스럽기만 한 것이다. 어쩌면, 고대적 사고관 내에서 지식인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을 종교인들이 이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늑대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는 자료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 늑대의 이런 지위는 화자가 서커스단장으로 바뀜에 따라 완전히 뒤바뀐다. 기존에 살고있떤 사람들에게 늑대는 경외 - 따라서 피할 수 없는 운명 정도로 간주되었다. 그에 비해 서커스단장에게는, 포획과 정복, 피랍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늑대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상징이 아닌, 더욱 철저한 자본주의적 개체에 희생되는 어떤 것 내지는 먹잇감 정도의 지위로 전락한다. 중립적 용어로는 미개척 시장 정도 될 것도 같다. 서커스단장이 늑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경제적-금전적인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 둘을 종합해볼 때
, 늑대는 결국 자본주의에 포섭당하기 전의 사회 그 자체이다. 이행에 있어서는 전통을 뒤흔드는 기제임과 동시에, 더욱 발달된 자본주의 앞에서는 끝내 신흥시장 정도의 위치로서만 자리매김할 수 밖에 없는 그 사회의 불안한 위치를 반영한다. 야생에서 먹이사슬의 위쪽에 있는 것으로서 어떤 우위를 유지한 채로 살아가다가, 먹이사슬을 규정하는 자연-사회의 체계가 변화함에 따라 쓸쓸하게 기존의 위치와 전통을 버리도록 강요당하는, ‘늑대로서의 국가에 관한 기술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는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 하나는 왜 검은 늑대는 죽었는가?’하는 점이다. 늑대 가운데도 가장 대표성이 강한 검은 늑대(아스팔트 색깔과 같다)는 모종의 경위를 거쳐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단순히 자본주의로 전환한 사회의 종말이라 보기엔, 그 깊이가 너무 얕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반례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둘째는
, 가장 마지막 사건의 화자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사회 변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쩌면 치정극으로 마무리되는 듯한 인상마저 남긴다. 내게는 이 부분이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고, 어떤 이야기인지 서사조차 읽을 수 없는 장소였다. 이 작가의 다른 글을 읽고 나서야 이 부분을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함도 감추기 힘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편혜영,맨홀」감상.>

 

   편혜영의 소설을 보며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는, 과학관과 정치조직이 이성을 앞세운 폭력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맨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지하실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하나는, 묘사의 폭력성과 불편함, 께름칙함 같은 것에서 박찬욱 감독의 잔혹극을 연상시켰다.(오히려 맨홀은 이런 면에서 그 표현수위가 덜한 것 같고, 이 단편이 실린 아오이가든에는 더욱 잔혹한 것들도 있었다.)


   「
맨홀이 구축한 세계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없다. 맨홀 위에서 세계를 통제하는 여러 가지 도구와 제도는 결코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부와 그 세계의 사람들. 아무런 의식 없이 과학의 이름으로 생물-나아가서 인간-을 가차없이 난도질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을 찾아갈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어떤 지위를 지니고, 얼마만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아마 없을 것이다.


   맨홀 밑 세계는
, 분명 맨홀 위 세계의 이면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면에서 맨홀은 이원적이다. 하지만 이 분리는 공간적이기만 할 뿐, 가치의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이 곳은 그야말로 야만, 문명 이전의 세계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그것마저도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요소는 쏙 빠진 채, 날것으로서 드러나는 비과학적 양태로서만 그려질 뿐이다


   이로써 레밍의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바가 드러난다
. 레밍은, 지하에 사는 모든 맨홀생활자들의 대표이다. 맨홀 아래 생활하며,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세계인식은 서식지이동을 위해 맨홀 위 세계에 올라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폭압적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죽음에 이르는 것 말고는 없다. 그래서 그 죽음은 고통스럽지 않으며, 모든 것을 벗어버리는 형태를 띄는 것이다.


   하지만
, 적어도, 세계 안에서 살아있는 동안은 철저하게 구조적인 폭압에 묶여있을 수 밖에 없다. 맨홀 내에서는 불안과 고통, 본능적 공포에 지배당하고, 맨홀 밖에서는 강압적 관료체계, 인간의 대상화(사물화?)에 방어 없이 노출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출구란 없다. 끝내 과학관을 빛처럼 바라보던 주인공 둘의 희망은 한낱 착각이나 환상이었음이 폭로된다. 이런 이원적인 세계관은 지하실과 지하실 밖의 세계를 나누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꼭 닮아있다.


   이를 표현하는 작가의 표현방식 또한 독특하다
. 맨홀에서는 양쪽 세계의 잔인함에 대해 그다지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마저도, 최대한 직접적이고 단정적이며 가장 강도가 높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그 수위가 간혹 위악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이다. ‘굳이 이런 표현을 써야만했을까?’ 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역겨움이 생겨날만한 면모가 가득한 것이다.


   게다가
, 이를 서술하는 태도가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맨홀을 포함한 다른 단편 모두가, 아주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있따. 참으로 인상적이다. 할 말만 하겠다, 굳이 자질구레하게 설명할 것 없다, 는 식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함을 능청스럽게 화면에 담아내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특히 복수 3부작인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한다.


   탈출구 없는 이 소설은 그래서 답답하기만하다
. 심지어는 스스로를 해부대상화, 박제화 시키는 아포리아는, 이런 답답함에 대한 가치판단마저도 유보해버린다. 이렇게 철저하게 답을 없애버리는 세계관은, 답을 없애는 그 과정의 고찰에 의해서 단순히 소설 맨홀, 나아가 작가 개개인의 세계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독특한 형상화임을 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감상.>


   박민규가 쓴 글은 언제나
근대적인 체계를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그 목표를 노리는 목적은,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기존 산문과 다른 과감한 줄띄우기, 화자가 모호한 대화, 판타지적 요소를 표현에 직접 도입하는 시도 등을 꼽을 수 있다. 반면 내용을 봤을 때는, 근대가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을 끈질기게 놓치지 않는다. 미국을 대표하는 가치관에 대한 반항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지구영웅전설을 비롯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그리고 카스테라에 실린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비롯한 단편 모두가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비정규직 상업고등학교 학생의 입을 빌려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그려낸다. 주인공을 선정하는 일부터, 지은이가 보여주려는 것을 대강 드러내준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해보았을 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인문계/비인문계로 그려지는 경계선에서 주변부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분에서도 약자에 속한다. 이런 설정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아무리 잘 꾸미더라도 결국 이 사회의 수많은 불합리 가운데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의 배경인 자본주의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은
, 그 상징 자체로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세계와 대비되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 보여줄 때보다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로 지구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세계가 그렇다. 이 상징은 글 전체를 통하여 지구/화성, 지구/금성, 지구/하와이 등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은 항상 화성/금성/하와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부러워하면서, 정작 자신은 비관하는 사람 그 자체일 뿐이다. 구체적인 불만을 뱉어내지 않는 것이다. 대신 이를 직접적인 불만이 아니라 계절에 대한 짜증, 불만족에서 나올 수 있는 동경 등으로 바꾸어 늘어놓는다.


   이 지구의 삶이 바로
산수. 인간의 산수란, 모든 가치와 사물이 화폐로 편입되는 자본주의의 정점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아니, 그 자체다. 아버지의 산수, 주인공의 산수, 어떤 이의 산수 모두 끝내 가치가 탈바꿈한 화폐의 더하기-빼기일 뿐이다. 그래서 수학까지 가는 삶도 별로 없으며, 산수에서 벗어나는 삶도 없다. 여기에 포섭된 주인공은 노동도, 가치도, 인간도, 게다가 가족마저도 시급으로 환산하는 웃을 수 없는 독백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푸시맨이라는 직업마저도, 산수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인 지하철 안으로 사람을 밀어넣는 존재로서 기능하며, 지붕 위에 붕 떠오른 모습은 일탈에 의한 사회적인 죽음에 다름아닌 상태다.


   이 관점을 견지했을 때
, 세계는 비관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로 산수의 세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가? 어쩌면 인간은 본래 그런 산수적인 존재일까?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이것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립구도가 등장한다. 잘 살펴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어김없이 동요가 등장한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과자에 집착하는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강요를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산수로부터 해방된 삶의 단초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산수에 편입되기 전 아동의 모습, 즉 성인/유아 대립이다. 또한, 주인공이 아닌 존재에게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리고 산수하는 삶에 대한 거부가 아동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고려한다면, 인간은 분명 산수가 아닌 다른 삶을 바란다고 볼 수 있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한국 사회 속에서 자본주의를 체화하며 살고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그 삶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대립구도를 통해 압축해서 드러내고 있다. 물론 글 속에서 다른 사회가 가능한지, 어떻게 구현해야하는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기린을 아버지로 믿는, 또는 아버지가 기린으로 바뀌는 모습을 써보이며, 그것이 아직은 판타지에 가까운 상상의 영역임을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산수하는 삶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큰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김애란,「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감상평>

 

   김애란이 쓰는 글은, 서사나 설정 자체보다는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번뜩이는 재치에 무게가 실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것들 사이의 수사법으로 독자에게 독특한 느낌을 주는 데 매우 능하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 직관적인 연관이 숨어있다. 다시 말해, 지은이는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해보고, 그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 심상과 끝 심상만 덩그러니 제시하는 것이다(김애란의 다른 단편인 종이 물고기는 이런 기법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 자신에 대한 자전적인 단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연관을 찾는 과정에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김애란 글 읽기의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김애란 특유의 소설 기법과, 아이들이 한번쯤 궁금해하는 탄생의 과정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소재가 결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대답하기에 난감한 상황과 이에 대한 (김애란식) 비유와 포장을 덧씌워 새로운 느낌, 전에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발상으로 소재의 일상적 식상함을 보기좋게 극복해낸다.


   성인이면 누구나 알 듯
, 아이는 성관계를 통해 의미있는 개체로서 세계에 등장한다. 성관계-그리고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성애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은 이 소설 안에서도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직접 서술되지는 않으며, 폭죽과 비누방울이라는 비유를 한번 쓴 채로 그려진다. 그래서 성애행위를 그리면서도 선정적이지 않고, 더러 유아적인 느낌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기에서 발사돼 하늘에서 방사되는(그것도 그 많은 폭죽 가운데서도 방사되는 형태의) 폭죽, 키스와 함께 등장하는 비누방울, 그리고 그 두 가지 비유가 등장하는 황당한 과정들. 사실 이런 설명은 우리가 흔히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손 잡고 잤더니 생겼다.’, ‘배꼽에서 나왔다.’ 같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그 모양이든 질감에 있어서든, 가만히 생각해볼 때 성인이 알고 있는 모습과 직관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해명은 거짓말인 동시에 진실이다
. 아버지에게 그마만한 문학적 감수성이 있다는 것이 약간 놀랍긴 하지만, 어쨌든 적나라한 면들은 피하면서, 훌륭하게 탄생과정에 대해 설명한 셈이 되었다. 아들 역시 그런 아버지의 설명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거대한 문학적 비유를 부드럽게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순간 잠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가 건네는 이야기를 들으며
, 아들은 점점 자신의 근원과 의미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어쩌면, 아버지를 거부하려던 시기에 겪은 필연적인 성장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복어 알에 대한 비유에서 방사된 폭죽(그러니까 이를테면 정자들)으로, 그리고 다시 폭죽에서 비롯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인식과 아버지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는 이 소설 전체의 뼈대는, 유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인간의 정신적 발전과 많이 닮아있다. 역시나 이 전환의 중요한 계기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성애행위(관계)에 대한 간접적 체험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 이 모든 과정이 김애란 특유의 수사를 통해 재미있고 유아적으로 묻어난다. 또한 조금은 과장되고 뜬금없지만 유쾌한 백과사전식 위트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글을 더욱 읽기 좋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얼핏 선정적인 제목만큼이나, 성관계에 대해 이렇게 유치하게 재미있게 쓰기도, 힘들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