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편혜영,맨홀」감상.>

 

   편혜영의 소설을 보며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는, 과학관과 정치조직이 이성을 앞세운 폭력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맨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지하실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하나는, 묘사의 폭력성과 불편함, 께름칙함 같은 것에서 박찬욱 감독의 잔혹극을 연상시켰다.(오히려 맨홀은 이런 면에서 그 표현수위가 덜한 것 같고, 이 단편이 실린 아오이가든에는 더욱 잔혹한 것들도 있었다.)


   「
맨홀이 구축한 세계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없다. 맨홀 위에서 세계를 통제하는 여러 가지 도구와 제도는 결코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부와 그 세계의 사람들. 아무런 의식 없이 과학의 이름으로 생물-나아가서 인간-을 가차없이 난도질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을 찾아갈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어떤 지위를 지니고, 얼마만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아마 없을 것이다.


   맨홀 밑 세계는
, 분명 맨홀 위 세계의 이면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면에서 맨홀은 이원적이다. 하지만 이 분리는 공간적이기만 할 뿐, 가치의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이 곳은 그야말로 야만, 문명 이전의 세계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그것마저도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요소는 쏙 빠진 채, 날것으로서 드러나는 비과학적 양태로서만 그려질 뿐이다


   이로써 레밍의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바가 드러난다
. 레밍은, 지하에 사는 모든 맨홀생활자들의 대표이다. 맨홀 아래 생활하며,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세계인식은 서식지이동을 위해 맨홀 위 세계에 올라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폭압적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죽음에 이르는 것 말고는 없다. 그래서 그 죽음은 고통스럽지 않으며, 모든 것을 벗어버리는 형태를 띄는 것이다.


   하지만
, 적어도, 세계 안에서 살아있는 동안은 철저하게 구조적인 폭압에 묶여있을 수 밖에 없다. 맨홀 내에서는 불안과 고통, 본능적 공포에 지배당하고, 맨홀 밖에서는 강압적 관료체계, 인간의 대상화(사물화?)에 방어 없이 노출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출구란 없다. 끝내 과학관을 빛처럼 바라보던 주인공 둘의 희망은 한낱 착각이나 환상이었음이 폭로된다. 이런 이원적인 세계관은 지하실과 지하실 밖의 세계를 나누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꼭 닮아있다.


   이를 표현하는 작가의 표현방식 또한 독특하다
. 맨홀에서는 양쪽 세계의 잔인함에 대해 그다지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마저도, 최대한 직접적이고 단정적이며 가장 강도가 높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그 수위가 간혹 위악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이다. ‘굳이 이런 표현을 써야만했을까?’ 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역겨움이 생겨날만한 면모가 가득한 것이다.


   게다가
, 이를 서술하는 태도가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맨홀을 포함한 다른 단편 모두가, 아주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있따. 참으로 인상적이다. 할 말만 하겠다, 굳이 자질구레하게 설명할 것 없다, 는 식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함을 능청스럽게 화면에 담아내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특히 복수 3부작인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한다.


   탈출구 없는 이 소설은 그래서 답답하기만하다
. 심지어는 스스로를 해부대상화, 박제화 시키는 아포리아는, 이런 답답함에 대한 가치판단마저도 유보해버린다. 이렇게 철저하게 답을 없애버리는 세계관은, 답을 없애는 그 과정의 고찰에 의해서 단순히 소설 맨홀, 나아가 작가 개개인의 세계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독특한 형상화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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