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감상.>
박민규가 쓴 글은 언제나 ‘근대적인 체계’를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그 목표를 노리는 목적은,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기존 산문과 다른 과감한 줄띄우기, 화자가 모호한 대화, 판타지적 요소를 표현에 직접 도입하는 시도 등을 꼽을 수 있다. 반면 내용을 봤을 때는, 근대가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을 끈질기게 놓치지 않는다. 미국을 대표하는 가치관에 대한 반항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지구영웅전설』을 비롯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그리고 『카스테라』에 실린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비롯한 단편 모두가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비정규직 상업고등학교 학생의 입을 빌려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그려낸다. 주인공을 선정하는 일부터, 지은이가 보여주려는 것을 대강 드러내준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해보았을 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인문계/비인문계로 그려지는 경계선에서 주변부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분에서도 약자에 속한다. 이런 설정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아무리 잘 꾸미더라도 결국 이 사회의 수많은 불합리 가운데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의 배경인 자본주의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은, 그 상징 자체로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세계’와 대비되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 보여줄 때보다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로 ‘지구’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세계가 그렇다. 이 상징은 글 전체를 통하여 지구/화성, 지구/금성, 지구/하와이 등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은 항상 화성/금성/하와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부러워하면서, 정작 자신은 비관하는 사람 그 자체일 뿐이다. 구체적인 불만을 뱉어내지 않는 것이다. 대신 이를 직접적인 불만이 아니라 계절에 대한 짜증, 불만족에서 나올 수 있는 동경 등으로 바꾸어 늘어놓는다.
이 지구의 삶이 바로 ‘산수’다. 인간의 산수란, 모든 가치와 사물이 화폐로 편입되는 자본주의의 정점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아니, 그 자체다. 아버지의 산수, 주인공의 산수, 어떤 이의 산수 모두 끝내 가치가 탈바꿈한 화폐의 더하기-빼기일 뿐이다. 그래서 수학까지 가는 삶도 별로 없으며, 산수에서 벗어나는 삶도 없다. 여기에 포섭된 주인공은 노동도, 가치도, 인간도, 게다가 가족마저도 시급으로 환산하는 웃을 수 없는 독백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푸시맨이라는 직업마저도, 산수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인 지하철 안으로 사람을 밀어넣는 존재로서 기능하며, 지붕 위에 붕 떠오른 모습은 일탈에 의한 사회적인 죽음에 다름아닌 상태다.
이 관점을 견지했을 때, 세계는 비관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로 산수의 세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가? 어쩌면 인간은 본래 그런 산수적인 존재일까?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이것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립구도가 등장한다. 잘 살펴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어김없이 동요가 등장한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과자에 집착하는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강요를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산수로부터 해방된 삶의 단초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산수에 편입되기 전 아동의 모습, 즉 성인/유아 대립이다. 또한, 주인공이 아닌 존재에게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리고 산수하는 삶에 대한 거부가 아동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고려한다면, 인간은 분명 산수가 아닌 다른 삶을 바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한국 사회 속에서 자본주의를 체화하며 살고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그 삶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대립구도를 통해 압축해서 드러내고 있다. 물론 글 속에서 다른 사회가 가능한지, 어떻게 구현해야하는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기린을 아버지로 믿는, 또는 아버지가 기린으로 바뀌는 모습을 써보이며, 그것이 아직은 판타지에 가까운 상상의 영역임을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산수하는 삶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큰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