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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평점 :
전성태의 소설 「늑대」는, 제목에 걸맞게 ‘늑대’에 대한 상징과 비유로 가득 채워져있다. 그 상징은 각자 다른 성격의 인물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엔 명확하고 뚜렷하게 그 대상이나 함의가 드러나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인물을 통해 이야기가 이끌려나갈 때에는 전혀 다른 말로 늑대를 채운다. 이것이 중첩되는 면모를 해석하고,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 이 글을 읽는 가장 큰 재미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우선 이 소설의 배경인 몽골에 이미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늑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존에 영위하던 생계를 위협하는 어떤 세력, 하지만 그 앞에서 언제나 희생양을 만들 수 밖에 없으며 순응하도록 강제하는 폭력적인 성격. 촌장으로 불리는 사람에게 자본주의란 이런 모습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즉, ‘폭력적인 낯선 것’과의 마주함 속에서, 특정한 삶의 형태를 강요당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이 모습은 촌장의 애매모호한 태도 뿐만이 아니라, 늑대를 대한 승려의 태도에서도 다소 엿볼 수 있다. 승려는 이를 어떤 자연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듯한 말을 내뱉는다. 따라서, 수행자들은 이를 막을 수도 없고, 그러나 불행하고 옳지 않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는 가운데 제 위치를 찾지 못한 채 혼란스럽기만 한 것이다. 어쩌면, 고대적 사고관 내에서 지식인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을 종교인들이 이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회의 ‘늑대’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는 자료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늑대의 이런 지위는 화자가 서커스단장으로 바뀜에 따라 완전히 뒤바뀐다. 기존에 살고있떤 사람들에게 늑대는 경외 - 따라서 피할 수 없는 운명 정도로 간주되었다. 그에 비해 서커스단장에게는, 포획과 정복, 피랍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늑대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상징이 아닌, 더욱 철저한 자본주의적 개체에 희생되는 어떤 것 내지는 먹잇감 정도의 지위로 전락한다. 중립적 용어로는 미개척 시장 정도 될 것도 같다. 서커스단장이 늑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경제적-금전적인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 둘을 종합해볼 때, 늑대는 결국 자본주의에 포섭당하기 전의 사회 그 자체이다. 이행에 있어서는 전통을 뒤흔드는 기제임과 동시에, 더욱 발달된 자본주의 앞에서는 끝내 신흥시장 정도의 위치로서만 자리매김할 수 밖에 없는 그 사회의 불안한 위치를 반영한다. 야생에서 먹이사슬의 위쪽에 있는 것으로서 어떤 우위를 유지한 채로 살아가다가, 먹이사슬을 규정하는 자연-사회의 체계가 변화함에 따라 쓸쓸하게 기존의 위치와 전통을 버리도록 강요당하는, ‘늑대로서의 국가’에 관한 기술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는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하나는 ‘왜 검은 늑대는 죽었는가?’하는 점이다. 늑대 가운데도 가장 대표성이 강한 검은 늑대(아스팔트 색깔과 같다)는 모종의 경위를 거쳐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단순히 자본주의로 전환한 사회의 종말이라 보기엔, 그 깊이가 너무 얕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반례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둘째는, 가장 마지막 사건의 화자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사회 변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쩌면 치정극으로 마무리되는 듯한 인상마저 남긴다. 내게는 이 부분이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고, 어떤 이야기인지 서사조차 읽을 수 없는 장소였다. 이 작가의 다른 글을 읽고 나서야 이 부분을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함도 감추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