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윤리학사』(로버트 L. 애링턴 씀,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에서 칸트 부분 요약. 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발표문.>

문 :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가? 이에 대한 칸트의 답변과 논증을 재구성해보고, 그 타당성을 평가해보라.

답 : 

  칸트는 행위가 도덕적인 영역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다른 목적이나 대상에 대한 고려가 그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해야겠다는 의지 자체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가언 명법과 정언 명법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다. 둘째, 그 행위의 동기를 보편화시키는 사고실험을 해보았을 때 아무런 모순도 이끌려 나와서는 안된다. 이는 그 내용이 실현되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검토해볼 수 있는 기준이다. 셋째는 인간을 수단과 목적으로 동시에 대우하라는 요청이 수반되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인간 또한 물리적인 세계 안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다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이러한 요청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위와 같은 세 가지 기준에서 인간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첫째, 거짓말은 정언 명법의 형식을 띄지 않고 가언 명법의 형식을 띈다. 즉, 거짓말은 구체적인 상황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둘째,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는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진실과 거짓말을 구별하는 기준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는 거짓말이 없는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는 모순에 빠져버리며,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셋째, 거짓말은 인간을 거짓말을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하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거짓말이 가언 명법의 형식을 띈다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와 인간을 비교하여 인간의 위치를 상대화시킨다. 

  거짓말 논증에서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도덕성을 이루는 기초라는 점에서 이 문제에서 역시 인간 스스로의 요청과 자각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 요청은 실천적인 요소로서 매 순간,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도덕과 비도덕을 나누는 모든 기준이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이 ‘요청’ 이라는 말의 의미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 즉 윤리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도덕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매우 벗어나 있다. 즉, ‘~이다.’와 ‘~해야 한다.’ 는 형식을 오가는 다른 기준(정식)들과는 달리, 요청은 언제나 ‘~해야 한다.’는 형식을 띈다. 다시 말해 ‘요청’에는 이성의 기능인 ‘판단’이 결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이성에 대한 반성만을 통해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진정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지 혹은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현대사회는 인간을 수단으로서만 대하라고 이념적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인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들은 스스로를 동물화하는 데, 즉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런 요청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잊어가는 듯이 보인다. 몸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에게 위장을 한다는 이유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는 거짓말이란 무의미한 단어이다. 이는 칸트 스스로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사태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이 ‘요청’을 도덕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 86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대정치사상 숙제> 

問 : 루소의 <사회계약론> 1권부터 4권까지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오늘날의 정치 현실 혹은 한국의 정치 상황과 가장 연관성이 큰 부분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몇권 몇장의 무슨 내용?), 이 부분에서 루소가 주장하고 있는 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논하시오.

答 :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문제는 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의 범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행정부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고, 그만큼 행정부에 소속되는 인원이 입법부나 사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또한 실제 구체적인 일을 처리하는 부서인 만큼 관련된 예산도 집중적으로 필요한 부서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행정부의 권한은 정부의 다른 구성요소들, 즉 입법부나 사법부에 비해 막강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금전적 이익을 매개로 행정부가 입법부와 사법부의 권한을 침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각 국가를 막론하고 벌어지고 있으며,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예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행정부의 예산이다. 입법부는 이 예산을 심의하는 데 입법부 구성원 개인의 관심사, 혹은 그 개인이 속해있는 정당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행정 관료들은 자신이 직접 입법권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익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입법부와 사법부를 움직여 행정부의 일반의지를 관철시킨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에, 행정부가 직접적으로 권한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익을 매개로 각 부서의 구성원들은 ‘알아서,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실제로 권한을 침범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도출한다. 게다가 독특하게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데, 입법부와 행정부를 같은 정당의 구성원으로 선출하려는 투표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선출이 되었을 경우, 일반의지보다는 각 부서의 의지 혹은 특정한 정당의 이익에 따른 의지의 표출이 더욱 교묘하고 용이하게 진행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루소는, 위와 같은 ‘행정의 지배’와 ‘금전의 지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 『사회계약론』에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결국 정부의 왜곡과 국가의 해체를 불러오기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루소가 행정부에 관해 어떻게 쓰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구성 ‘원리’를 설명한 루소의 계약 이론 이외에도, 이 원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는지 혹은 실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루소의 생각에도 주목해야 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한 부를 떼어 행정부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행정부를 일반의지를 단순히 집행하는 기구, 혹은 집행해야만 하는 기구로서 규정하고 있다(3부 1장). 그리고 집행기구의 구성원 숫자를 기준으로 민주정과 귀족정, 군주정을 나누고 이에 대해서 분석한다(3부 3장). 여기에서 루소는 민주정은 꿈과 같은 일이고(3부 3장),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그럴듯한 정부형태는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라고 주장한다(3부 4장). 또한 각 국가의 여건에 가장 적합한 정부의 형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인구를 꼽고 있으며(3부 2장), 행정부의 권력이 남용되는 형식적 모습과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루소가 귀족정에 대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선거를 통해서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행정부의 일원으로 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3부 4장).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부라면,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반영하거나 행정부의 일반의지에 따르는 결정을 하지 않고 언제나 국가의 일반의지를 따라 집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에 따르면 정부는 국가의 일반의지를 집행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그 본질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정부와 그 구성원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고 적합한 정부이며 그 구성원이다. 

  물론 루소는 ‘선거에 의한 귀족정에서는 이러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는 식의 기술을 통해, 귀족정에 대한 어떤 묘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행정관의 상, 즉 ‘되어야 하는’ 행정관의 상을 보여주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는, 적어도 현실에서 행정관이 정말 저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저런 결정을 언제나 내리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루소가 행정부의 일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구체적인 사안에 접근하는지 분류해놓은 방식이다(3부 2장). 첫째는 행정관의 개별 이익, 일개 시민으로서 행정관이 가질 수 있는 행동의 동기다. 둘째는 행정부의 이익, 정부의 다른 부서나 시민과 별개로서 행동하는 동기인데, 이것은 행정부의 일반의지이다. 셋째는 국가 전체의 이익인데, 루소는 이를 진정한 일반의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지의 동기는 대개 금전적 이익을 통해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지면 심해지고 있지, 덜하지 않다. 루소는 이런 점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즉, 물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 즉 상업적인 이득은 ‘노예들이 쓰는 말’(3부 15장)이며, 만약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은 피하는 것이 옳다. 물질적인 이득을 매개로 하지 않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자질, 소양같은 것들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인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이런 사람 가운데서 행정부의 구성원이 될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상업적 이득을 경멸하는 듯한 루소의 말은, 어느 정도 과거지향적이고 복고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에도 이런 경향이 우려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할 수 있다면,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져 알게 모르게 혹은 자발적으로 금전적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복종하는 모습들에 대해 루소는 매우 좋은 충격을 안겨다주는 경고이며, 또한 귀감이 될 수 있는 충고를 해주고 있다고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간주할 수 있는 정치상의 문제는, ‘행정의 지배’와 ‘금전의 지배’가 복합되었을 때 나타나며, 이 둘은 상호간에 복잡한 효과를 일으키며 더욱 악화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경향이 가장 처음 나타나던 시기에 루소가 던져주는 위와 같은 충고들은, 우리가 현재 영위하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행태들에 대해 가장 원형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던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가 보았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사회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에 대한 해법이 후퇴적인 모습을 띈다고 하더라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모습과 그에 대한 경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대정치사상 숙제> 

문 : 로크와 루소는 인간본성에 관한 상이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소유권의 기원, 가족의 성립, 언어의 사용, 이성과 감성의 기능, 자연법의 내용, 자유의 성격 등의 관점에서) 이 두 사람의 자연상태에 대한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자연상태를 제시하시오.

답 :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계약은 자연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자연상태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서 계약의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수많은 사회계약론자들은 각각의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계약의 내용을 설정한 뒤에 그것을 기준으로 당시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정당함과 부당함을 평가했다. 나아가서는 정책 뿐만 아니라 정부의 구조와 형태에 대해서까지 그 부당함을 제기하며, 어떤 형태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민주정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처한 이 두 상태의 구분이 명확한가 질문을 던져보면, 그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역사 속 인간들은 언제나 연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 변화의 어떤 지점을 구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임의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내포한다. 다시 말해,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삼는 사회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상태를 의도적으로 기획한다. 역사적으로 그런 상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특정한 사회계약론의 체계 속에서 그 자체의 모습을 크게 상실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연상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신들의 특정한 선이해를 그대로 투영하며, 자연상태에서 그 이해의 지평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학적 조사 뿐이다. 그나마도 인류학적 조사는 그 사람들의 삶의 단편 밖에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고전적인 삶의 양식을 유지하면서 사는 몇몇 집단을 통해 유추하는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로크에 비해 루소는 이러한 점을 조금 더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지만, 루소 역시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관념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자연상태를 조직하였다. 

  특히 루소의 이런 모습은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가부장적인 면모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간주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우연적인 사례가 많을 뿐이지 그것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발전해간다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게다가 루소가 가부장적인 모습이 등장한다고 간주했던 원시적인 단계에서는, 가부장적이지 않은 사회 또한 많다. 이것은 현재도 원시적인 단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인 조사 결과에서 드러난다. 이런 요소들은 상당히 우연적이다. 우연적인 것들의 종합을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이행하는 일반적인 진행과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가 나누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한 가치관을 자연적인 상태 혹은 필연적인 상태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와 반드시 맞물린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특정한 가치관에 의해 해석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 그에게 어떤 속성이 있다거나, 어떤 권리가 있다거나, 혹은 어떤 자격이 주어져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현재 세워진 규범들을 과거에 소급적용하는 오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가치관에 의해 해석되지 않는 인간이란 결국 물리적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으로 부르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상태이다. 이 때의 인간은 원숭이들과 별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움직임이란 물리적 상태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고, 철저하게 반응에 따른 결과로서만 움직인다. 같은 인간이라면 하나의 물리적 변화에는 거의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다소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여러 상이한 자극의 경험에 의해서(서있는 위치가 다르다든가, 아침에 우연히 1분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햇볕을 더 많이 쬐었거나 등) 생겨난다. 각각 인간의 행동의 차이란 이 자극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은 우연이 수도 없이 겹쳐서 비롯된, 일종의 경험과학이다. 유용한 무엇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이전에 수도없이 많은 실패가 반복된다. 설령 어떤 수단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발휘하거나 자신의 유용함에 따라 주변을 조직한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이 우연히 제공한 것에 반응하여 나타난다. 그것은 언제든지 잊혀질 수 있으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잊혀지게 마련이다. 

  루소는 이같은 인간의 원시적인 모습에 ‘완전성’과 ‘자유’를 투영하였다. 그리고 그는 경험과학에 의한 우연한 발견들을 마치 인간이 스스로 성취한 결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자유롭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면서도, 루소는 근본적으로 고대인들이 자유롭다고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자유를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원시적인 인간에게 이러한 본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 상태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해주는 것은, 다른 동물들의 삶이 모두 그러하듯이 환경이다.

  이것은 사회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원시상태의 인간에게 자연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사회상태의 인간에게는 사회환경이 영향을 끼친다. 이용할 수 있는 나무와 내게 도덕과 규범을 가르쳐주는 어른 사이에는 아무런 물리적인 위상의 차이가 없다. 단지 여러 요소들의 배열과 양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이것을 인간에게만 특수한 질적인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이거나 신화적인 작업에 불과하다.

  이런 인간들의 관계 사이에서는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홉스처럼 인간의 본성에 따라 분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분쟁조차도 우연적이다. 정말 생존에 필요한 동일한 대상을 다른 두 인간이 바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에게는 이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계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존하는 위협에 대항할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를 제외하면 아무런 축적도 생기지 않는다. 서로 돕는 것도 매우 우연한 경험이 수없이 축적된 결과이다. 모든 것은 경험, 그리고 경험과학이 결정한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생성되는 것은 계약에 의존하지 않는다. 분쟁은 모든 사회의 기초이다.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계급관계가 발생하려면, 수많은 우연한 분쟁의 승패가 축적되어야 한다. 그 분쟁의 승패가 상류층과 하층 계급을 결정한다. 법과 제도란 하층으로 머무르라는 이야기를 힘으로만 강요하던 것에서, 서류로 쓴 뒤에 서명하라고 힘으로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자화되었다고 해서 다른 형태의 세련된 제도설립 방법이 등장한다는 생각은, 법과 제도의 힘에 대한 매우 순진한 사고이다. 그런 면에서 계약으로 사회와 제도의 설립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허구에 가깝다. 로크는 이 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저 낙관적으로만 예측하고 있으며, 루소는 아무런 폭력적 분쟁 없이 계약이 설득에 의해 맺어진다고 예상하고 있다. 

  폭력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 모든 과정은 아무런 가치판단이 개입되어있지 않은 물리적인 변화과정으로 기술되어야한다. 단지 가치가 생겨나고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는 현재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폭력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것으로 기술할 수 없을 뿐이다. 물리적 상태의 변화는 그 자체로 매우 중립적이며, 아무런 가치도 포함하지 않는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인간의 물리적 상태가 변화하는 것도 사실은 어떤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우리가 ‘사회적이다.’ 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물리적 성질을 갖추고 있을 뿐, 그것이 자연상태에 비해 어떤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에게 현재 자유가 주어져있고, 소유권이 법적으로 보장되며, 사회를 조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통해 여러 사상가들은 인간을 자연 내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간주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왔다. 자연상태를 내세운 인간의 상태에 대한 가설들도 이런 맥락에 속한다. 인간만이 사회를 조직할 수 있으며, 사회를 조직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사회를 조직하는 데 투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믿고 살아가는 신념의 체계는,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형성된 것에 속한다. 그리고 그 우연은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에 의해 생긴 결과이며, 인간과는 무관하다. 자연상태에 대한 가설들은, 이와 같은 우연적인 결과들을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본성과 연관시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본성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은, 물리계에 속해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위에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킨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저 인간이 물질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뿐이다.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효과를 일으키는 능력을 다시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할 경우, 우리는 이론 속에서 서로 독립적인 실체를 조화시켜야 하는 이원론의 문제에 다시금 빠져들 것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이란 물질로서의 인간이며, 이것은 사회상태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물리적 상태의 변화는 연속적이며, 분절적이지 않기에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구분도 희미하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증명가능하고 가장 정확한 관찰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쉴즈 2010-11-10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오면 님 과제 다 읽을 수 있구나

박효진 2010-11-16 00:56   좋아요 0 | URL
 

<『서양윤리학사』(로버트 L. 애링턴 씀,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에서 중세의 윤리학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 부분 요약. 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발표문.> 

문 : 신은 영원한 법칙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의욕할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생각에 대해서, 둔스 스코투스는 신이 영원의 법칙에 따라서 의욕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평가해보라. 

답 : 

  신과 영원의 법칙에 관한 아퀴나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인간에게 의무를 부여하는 근거로 계시와 이성 두 가지를 제시했다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계시는 인간에게 신으로부터 직접 전해져온 전언이다. 반대로 이성은 인간이 본성으로서 지니는 인간 자신의 능력이며,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다. 물론 이 이성은 신이 인간을 만들때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이라는 점에서 ‘피조물로서 구속’받지만, 그 이외에는 신에 대해 독립적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이 이 이성의 능력을 발휘해서 얻을 수 있는 법칙이 자연법이다. 물론 자연법의 기원에도 역시 신이 관여한다. 신은 자신의 마음 혹은 의지로부터 자연법을 도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신을 사랑하라.’ 를 포함한 여러 가지 도덕적인 형식을 가진 기본적인 명령들이다. 인간은 창조되는 순간 이 자연법 부여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성은 인간이 이 자연법을 발견해낼 수 있는 가능성 혹은 능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성을 발휘하기만 하여도 충분히 스스로 자연법을 발견해낼 수 있으며, 또한 이성을 통해 발견한 자연법에 따라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의지를 보유한다. 

  스코투스의 아퀴나스 비판은 바로 아퀴나스가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성을 발휘해 자신의 삶을 도덕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것에 집중되어있다. 이성을 통해 발견한 자연법은 인간이 어떤 삶을 살면 좋은지에 대해 지침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당위적 힘을 가지지 못한다. 오직 신만이 자연법이 포함하는 명제들을 명령으로 바꾸고, 그것을 선하다고 판정하고 인간이 그렇게 하도록 할 수 있다. 따라서 스코투스에게 도덕, 선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는 인간 혹은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이 아니라 신이다. 신은 자신의 의지로 도덕을 창조한다.

  두 철학자가 보여주는 이런 입장차이는 신과 도덕법칙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아퀴나스의 입장에서는 도덕법칙이 적어도 신과 지위가 동등하거나 또는 둘을 서로 같은 존재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스코투스는 명확하게 신을 도덕법칙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이는 인간의 지위와 능력에 대한 관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아퀴나스에게 인간은 도덕법칙 전부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스코투스가 바라보는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도덕법칙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완전하다’는 신의 정의와 그로부터 연역되는 신의 속성, 즉 모든 것을 알고 어떠한 것도 할 수 있고 도덕적으로 완전히 선하다는 것에는 스코투스의 견해가 더 정합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퀴나스의 경우에는 도덕법칙이 피조물로서의 지위 때문에 신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사실상 그 자체로 다른 존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성을 지닌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지위 그리고 신의 속성이 언제나 도덕법칙을 향한 개입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므로 도덕법칙의 독립성과 모순을 일으킨다.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스코투스는 이러한 아퀴나스의 맹점을 짚어냈다. 다시 말해 도덕법칙이 실재하는지 의문시하며, 그것을 신의 의지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아퀴나스의 이론적 시도를 비판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바이어던 1 -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41
토마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대정치사상 숙제> 

문 : 홉스는 주권자(리바이어던)의 권위와 판단에 따르는 것이 자연상태보다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홉스는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며, 홉스의 주장을 평가하시오. 

답 :  

  홉스가 말하는 평화와 안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상태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세 가지 측면에서 자연상태를 추론해낸다. 첫째는 인간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그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을 이성(reason)과 정념(passion)을 지닌 존재로 상정하고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게 이성이란 계산하는 능력이다. 정념이란 계산하는 능력 이외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마음의 여러 상태를 뜻한다. 정념은 선호하는 것 또는 혐오하는 것을 결정해주며, 이 두 가지가 각각 도덕적인 선(good)과 악(evil)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둘째는 자연권(right of nature)이다. 자연권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이다. 자연권에 대한 홉스의 정의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뜻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liberty), 즉 그 자신의 판단과 이성에 따라 가장 적합한 조치라고 생각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이다. 여기에 따르면 인간에게 허용되는 행동의 범위에는 제한이 없다. 강제력을 발휘하는 법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치공동체(commonwealth)에서 규범적으로 강조되는 도덕률 또한 없는 상태인 것이다. 

  셋째는 인간은 결코 혼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타인(들)은 자신과 똑같이 이성과 정념을 지닌 존재들이며, 능력에도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 즉 소유하려는 것이 자신과 겹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분쟁을 벌여야한다. 또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자신에게 피해를 입힐 지 알 수 없으므로 항상 경계하거나 상대의 존재를 먼저 제거해버려야 한다. 이런 분쟁을 벌여야하는 대상은 인간 전체이며, 모든 인간이 이런 행동방식을 취해야한다. 이것이 바로 홉스의 논의에서 논리적 기초가 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자연상태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인간을 이완된 상태로 이끌어줄 수 없기에 인간의 본성과 어긋난다. 인간에게는 편안하게 지내고자 하는 욕구 또한 있기 때문인데, 이는 정념이 아닌 이성의 명령에 따라 나오는 명령이다. 이것이 자연법(natural law)이다. 이런 이완된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개개인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자연권을 똑같이 양도한다는 전제 아래 자신의 자연권을 특정한 대표자 즉 리바이어던에게 양도하는데, 이것이 사회계약이다. 이 계약을 통해 사람들은 사회상태, 시민사회(civil society)로 진입한다.

  따라서 홉스에게 사회상태란 자연상태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자연상태는 전쟁, 혼란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으며, 사회상태는 이런 요소들이 제거된 상태이다. 이론적으로는 하고 싶은 것을 실행에 옮길 권리가 모두 양도되었으므로, 사람들은 타인에게 마음대로 행동을 취할 수 없다. 또한 실천적으로는,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 하더라도 그 사회에서 리바이어던은 유일하게 자연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이런 피해를 입히는 체계가 규범 혹은 법률이다. 리바이어던은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인 동시에 그 사회를 규정하는 도덕적 규범 혹은 실정법적 법률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이성에 따라 피해와 이익을 계산해보았을 때 자신에게 올 피해가 더 크기 때문에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되고, 이것으로서 사회 전체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을 홉스는 평화 혹은 안전한 상태라고 보았다. 그에게 자연상태란 분쟁이 극에 달한 상태이며, 따라서 위와 같은 논리적 구조에서는 어떤 사회상태도 자연상태보다 더 분쟁이 심할 수 없으며, 안정을 보장받지 못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홉스는 자연상태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평화와 안정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홉스에 따르면 사회상태는 위와 같이 자연상태와 날카롭게 나누어진다. 그러나 리바이어던의 출현이 ‘실제로’ 그가 말하는 사회상태의 평화와 안전을 향한 이행을 보장해주는지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경험적으로도 ‘여행갈 때는 무장하고, 여러 사람과 같이 가려고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문단속을 한다. (중략) 집안 아이들과 하인들을 어떻게 여기기에 금고 문을 잠가두는 것’이 확인되는데, 그가 예로 들어보인 이 모든 사례들은 리바이어던 - 규범과 법률을 지닌 정부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관찰된 것들이다. 자연상태 자체가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례를 보여주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가 자연상태로서 지적한 사례들이 모두 엄연히 리바이어던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한다. 

  또한 리바이어던이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물리적 강제에 국한된다. 계약의 내용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지만, 이 계약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물리적 압력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추어볼 때, 리바이어던의 출현은 상대방의 권리나 심리적 동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연권에 입각해 행사하는 물리적 힘(능력)을 그와 똑같은 힘 또는 더 큰 힘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리바이어던은 그의 힘이 현실적으로 가해질 때에 출현할 뿐, 그 이외에는 공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순간은 모든 개인에게 자연권에 의해 보장되는 심리적 동기가 다시 출현하는 시간으로서, 논리적으로 자연상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리바이어던의 영향력은 연속적이지 못하고 분절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리바이어던의 존재론적 위상은 심각할 정도로 애매하다. 우선 그것은 정치공동체를 대표하고 그 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 타자이다. 홉스에 따르면 대표자는 독립된 인격을 지니며, 리바이어던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에게서 권리를 양도받은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정치공동체 내부의 존재이기도 하다. 홉스는 ‘자기 자신과 맺은 계약이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의 판단과 집행을 거부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리바이어던은 모순적이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가 어떻게 정치공동체를 규합하고, 단일화시킬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결정적으로, 리바이어던을 둘러싼 모든 개념들은 비어있다. 리바이어던 자체도 인공적인 인격인데, 규범과 법률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유명적 정의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이 실제로 어떤 내용인지는, 즉 정의(justice)와 불의(injustice)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사회상태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기준 - 평화와 안전이라는 말도 결국 리바이어던이 내리는 규정에 따라 그 의미가 유동적이다. 그러므로 리바이어던의 권위와 판단에 따르는 것이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주장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실제 어떤 모습일지 평가할 수 있는 메타적 기준은, 적어도 홉스의 체계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